■ 고창 문학기행 / 서정주 문학관, 선운사, 무장읍성, 고인돌공원, 고창읍성
문학기행으로 고창 서정주 문학관을 찾아본다.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소박한 문학관으로 만들었다.
선운사 꽃무릇은 지금부터 약 1주일간이 한창이겠고, 무장읍성은 일부 성곽 보수공사가 진행 중에 있으며 성안을 한바퀴 둘러본다.
고인돌 유적은 운곡습지와 연계하면 좋은데 오늘 일정 상 고인돌 박물관과 공원만 살짝 둘러본다.
고창읍성은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아야 제대로 둘러봤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은 시간적 여유가 적어 반쪽만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서정주문학관 - 선운사 - 무장읍성 - 고인돌 공원 - 고창읍성 (2021. 8. 11.)
▷ 탐방후에
▣ 서정주 시 문학관
서정주시문학관을 찾아본다.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문학관으로 꾸몄다,
서정주(1915~2000)는 고창에서 출생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 방랑을 하다가 고승 박한영 문학에 입신했다. 서울 대한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중앙 불교전문학교에서 수업했다. 1941년 동대문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 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당의 시 세계
미당(未堂)이란 호는 '덜 되어 부족하다'는 뜻.
그는 '영원히 소년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초기시 : 서구적 감수성의 세계. 본능적. 개인적. 내향적. 부정적인 세계관
중기시 : 전통적인 세계,신화적. 관념적. 형이상학정. 초월적인 세계관
후기시 : 삶의 일상성을 반영, 이성적. 사회적. 외형적. 긍정적 세계관.
초기에는 서구적인 세계를 지향하다가 뒤에 동양 혹은 전통적인 세계로 귀환. 초기시에 보였던 원죄의식. 허무주의 등이 후기 동양 정신을 통해 극복.
미당의 서재를 재현한 모습이다.
작은 방 한칸은 미당의 친일문학으로 꾸몄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친일문학을 발표했는데 주로 시. 소설. 잡문.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시의 시야기 - 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 / 매일신보 1942
친일문학지 <국민문학> <국민시가>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살 된 벗 에게(1943)
항공일에(1943)
최제부의 군속 지망 / 단편소설 1943
헌시 (1943)
오장 마쓰오 송가 (1944) 등 11편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태평양전쟁을 성전(성전)으로 미화하면서 학병지원 권유, 징병의 필요성과 의미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서정주의 친일작품은 특히 1943년에 많이 발표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같은 해에 최재서와 함께 일본 종군기자로서 사병의 군복을 입고 취재를 다닌 것이 작용했다.
해방후에는 우익측이 결성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
미당은 문학의 세계에서만 친일이지 사람은 친일이 아니라 한다.
묘한 말이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고, 1950뇬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가 급조되어 실무책임을 맡았다.
미당은 구상과 함께 일선선 부대에 나가 신문편집, 시낭송. 얀설 등을 했다. 1950년 헌국전쟁 때 한강 도강에 성공하여 조지훈. 이한직 등과 함께 피난을 갔으나 전쟁의 상흔으로 조현증이 나타나 병원에 요양했다. 정신병 증세는 그의 시세계를 새롭게 확장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전망대까지는 5층?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리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전망대에서 서쪽편으로 보면 저만큼 초옥 두채가 보인다.
서정주 선생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역시 전망대에서 바라본 문학관 앞쪽의 풍경이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가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서정주 생가.
1942년 부친 서광한이 별세한 후, 친척이 거주.관리하면서 지붕을 스레트로 개조하였다.
1970년경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 되었다가 2001년 8월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 선운산도립공원 / 선운사
영광 불갑산 자락의 불갑사와 용천사 주변 꽃무릇이 유명하지만
이곳 선운사 꽃무릇도 많이 알려져 있다.
들머리,
천년기념물 제367호로 지정된 송악도 둘러보고,
주 도로를 따라 오른다.
선운사 꽃무릇은 사방 곳곳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지만 밀집도에 있어서 불갑사 꽃무릇만 못하다.
현재(2020. 9. 11일)의 개화상태는 하천변으로는 활짝 피었지만 그 외 지역은 이제 피기시작한다.
9월 15일에서 추석전 까지가 만개를 보이겠다.
선운사 입장료는 일반 4,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1,000원.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도로변에는 대체로 꽃무릇이 솟아나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만세루가 위치한다.
보물로 지정된 만세루는 대웅보전 앞에 세워진 누각으로 예불과 설법 및 법회를 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一자 집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 누각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기록에 따르면 이 누각은 조선 광해군 12년(1620) 2층 이상의 대양루로 지어졌으나, 1751년 불타서 영조 28년(1752)에 단층인 만세루를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현재의 누각은 일반적인 누각 모습이 아닌 평면이 넓고 높이가 낮은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단순한 구조에 웅장한 모습이지만, 뼈대를 이룬 나무들 가운데에는 다듬지 않거나 기둥
위아래에 다른 것을 이어 사용한 것도 있다. 특히 마룻보 가운데 하나는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그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서 자연미를 살렸다. 이처럼 만세루는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과 이를 극복한 장인들의 슬기로운 건축 솜씨가 돋보인다.
<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대웅보전(보물 제 290호)의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보물 17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앉아있는 삼불로, 비로자나불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이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는 부처이고, 아미타불은 괴로움이 없는 안락하며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이다.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나무기둥을 세워 윤곽을 바로잡고 흙을 바르고 천을 덧씌운 뒤에 금박을 입힌 소조불상이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는데, 선운사는 대웅보전임에도 불구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이 특징이다.
영산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기리고 그 행적을 보여 주는 전각이다.
선운사 영산전은 본래는 키가 1장 6척(약4.8m)이 되는 장육존상을 모셔 장육전이라 하였으나, 건물이 기우는 등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1821년경부터는 영산전이라 하고 향나무를 조각한 3개의 불상을 봉안하였다.
영산전과 대웅보전 뒷편에 동백나무 숲을 볼 수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조선 성종때인 15C에 행호선사가 산불에서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하였다고 한다. 3,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규모는 16,500㎥이다.
선운사를 둘러보고 천왕문을 나서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우측 탐방로를 따라 오른 후 나중 좌측 탐방로로 내려 올 것이다.
이곳 탐방로 주변에도 꽃무릇이 식재되어 있다.
오늘 탐방은 상부 다리목까지.
이곳 저곳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시간이 되면 낙조대까지 탐방을 권하고 싶은 곳이다.
선운사 입구의 석부공원으로 되돌아 왔다.
선운사 내에서의 중식시간 포함 약 2시간 30분여 소요되었다.
▣ 무장읍성
고창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이 성은 1991년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잇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km, 넓이는 43,847평이다.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성밖 해자는 나무를 심어 표시만 해 두었다.
성의 남문인 진무루.
진무루에서 바라본 객사.
좌측편 연못.
무장 객사
송사지관(松沙之館) 현판을 달고 있는 무장객사는 조선시대 때 무장에 내려 온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본관에 걸린 궐(闕)자를 새긴 나무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지방 관리들은 여기에 경의를 표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도 이곳에 모여 축하의식을 행하였다.
조선 선조 14년(1581)애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본관과 좌익헌, 우익헌, 그리고 몇 개의 출입문이 있다.
본관은 돌을 쌓고 그 위에 세운 것으로 계단에 새긴 호랑이, 구름 등의 조각이 운치가 있으며 좌우 건물의 지붕이 본관보다 낮은 점은격을 낮추기 위해서이다.
< 현지 안내문에서>
여러 송덕비
각처에 흩어 있는 것을 여기 한데 모아 놓았다.
무장객사 좌측 뒷편 근거리에 동헌이 있다.
동헌 뒷편 툇마루도 조금 특이하다.
사창지
사창은 백성들로부터 걷은 세금을 관리하는 일종의 창고이며, 전쟁 중에는 군량미를 보관하는 중요한 군사요충 시설이다.
무장읍성 사창터는 2015년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건축물 기초유구를 중심으로 2017년 지금의 형태로 정비되었다.
사창의 외벽은 전쟁 중 불화살 등 화공에 대비하여 돌과 흙으로 쌓아 만든 화방벽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본 건물을 사창으로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사창의 규모는 정면 14칸, 측면 3칸, 총 650㎥로 추정되며 이는 국내 최대규모이다.
무장읍성 연못.
무장읍성을 한바퀴 둘러보고 진무루에 올라 잠시 쉬었다 간다.
▣ 고창 고인돌 유적
고창 고인돌 공원으로 왔다.
주차료, 공원 입장료는 없지만 고인돌 박물관 입장료는 3,000원, 고창사랑상품권 2,000원을 되돌려 줌으로 실제로는 1,000원인 셈이다.
고인돌 박물관
3층으로 이루어진 내부엔 크게 볼것은 없다.
선사시대 유적을 재현했다.
죽림선사마을을 둘러보고 맞은편 고인돌 유적지 너머로 운곡습지가 있다.
운곡습지는 운곡저수지 상부가 수십년간 폐쇄됨으로 인해 생긴 자연습지로 데크시설을 정비하여 걷기좋은 길이 되었다.
운곡습지 생태길은 이곳만 하루 일정을 잡아도 된다.
▣ 고창읍성
고창읍내 위치한 읍성으로 왔다.
읍성 관람료 역시 어른 3,000원에 고창사랑상품권 2,000원을 되돌여 줌으로 실제로는 1,000원인 셈이다.
고창읍성을 제대로 둘러볼려면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고,
성 내부의 몇 건물들을 찾아보면 된다.
성곽길은 빠르면 30분, 천천히 진행해도 50분 정도면 된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여 성 내부로 들어서 반쪽만 둘러보는 것으로 한다.
고창읍성은 본 블로그에서 과거 소개한 바가 있어 몇 사진으로 대신한다.
대충 한바퀴 둘러본다.
읍성 정문앞의 신재효 생가.
판소리 박물관 또한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되고, 머지않은 인근에 장터, 미술관 등도 잠시 시간을 내어 둘러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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