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안 석정문학관, 매창테마관, 적벽강과 적벽강 후박나무 군락지, 채석강, 곰소젓갈, 슬지네 제빵
길 위의 인문학이란 주제로 찾은 부안이다.
신석정의 문학세계를 엿보고, 부안의 기생 매창을 찾아보는 것이 주된 목적이고 덤으로 적벽강, 채석강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석정문학관과 매창테마관은 부안읍내에 위치한다. 적벽강과 수성당, 후박나무 군락지는 서로 인접해 있어 서로 연계하여 둘러보면 된다.
곰소 젓갈단지에서 멀지않은 곳에 슬지네빵집이 있다. 아무리 지역민과 함께한다해도 가격면에 싸지않은 이 집에 열광하는 건 여행의 트랜드와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2022. 4. 23.)
석정문학관 - 매창테마관 - 적병강, 수성당, 후박나무군락 - 채석강 - 곰소젓갈 - 슬지네제빵
▷탐방후에
▣ 석정문학관
부안읍내에 위치한 석정문학관에 왔다.
같이한 일행들과 기념으로,
석정의 좌우명, 지재고 산유수.
신석정은 1907년 부안군 동도면(현 부안읍) 동중리에서 출생, 1974년 전주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별세했다.
선생은 그저 목가적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일제강점기에 창씨 개명까지 거부하고 검열과 회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시를 저술했다. 이후 4.19와 5.16때도 독재에 저항하면서 강한 생애를 살았다.
광복 후에도 신석정은 고향을 떠니지 않고, 시창작과 교육으로 일관했다. 6.25사변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55년 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석정의 시작 활동은 1924년 4월19일 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촛불>에서는 하늘, 어머니, 먼 나라로 표상되는 동경의 나라를 향한 희구를 천진스러운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집에는 대표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47년 두 번째 시집인 <슬픈 목가>에서는 어머니라는 상징어에 기댄 유아적. 퇴영적 자아의 모습은 줄어들고 성숙한 현실의 눈으로 돌아온다,
이상향에 대한 천진난만한 시인의 희구는 상실감으로 바뀌고, 내적 체험의 결여로 인한 공허감이 나타난다.
그 후 <빙하.1956>. <산의 서곡.1967>에 이르면서 삶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역사 의식이 드러나면서 문학적 아름다움은 감소한다. 그러나 마지막 시집인 <대바람 소리.1970>에서 다시 초기 서정시의 세계로 복귀하고 있다. 신석정은 노장의 철학과 도연명의 <귀거래사>.<도화원기>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의 숲 시인인 소로우를 좋아했으며, 한용운에게서 문학 수업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반속적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신석정의 시는 암울한 시대상황속에서 비참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로써 초월적이고 본원적인 실제에 대한 강한 희구가 나타난다. 이러한 희구는 전원적, 자연친화직 이상향에 대한 시적 열망으로 그려진다.
2층으로 올라가면 작은 도서관이 있고,
김종원님이 기증한 골동품(도자기류) 전시실이 있다.
선사시대 토기에서 부터 다양하다.
옥상도 둘러본다.
옥상에서의 조망이다.
앞쪽에 한옥이 있다.
석정문학관 앞쪽에 신석정 고택이 있다.
이 집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큰 맥을 이은 신석정이 살던 곳이다. 1930년대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이끌던 신석정(1907~1974)은 부안 동중리에서 태어나 1952년 전주로 이사 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청구원으로 불리는 이 집의 정원은 측백나무로 울타리가 둘려있고, 그 안에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산수유. 철쭉. 시누대. 등나무 등이 심겨져 있다. 신석정의 목가적인 전원시집인 <촟불>.<슬픈목가>등은 바로 이곳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고운 심장
신석정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줄기 가는
어느 난류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 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래도
서러울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디대로
억만년이야 갈리라구 ....
조선일보 1939. 3.
40분여 석정문학관과 주변을 둘러보고 매창공원으로 이동한다.
▣ 매창공원
역시 부안읍내에 위치한 매창공원으로 이동했다.
이곳엔 매창공원과 매창 테마관, 부안 문화원이 같이 있다.
부사의 탑
변산 의상봉의 진표스님이 수도한 부사의방과 관련이 있나 했는데 한자를 비교해보니 아니다.
<부사의방>의 <부사의>는 세간의 생각으론 헤아릴 수 없는 것이란 뜻이란다.
이화우
이매창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현 매창공원 일원은 공동묘지였다 한다.
매창은 묘는 인근 어느 곳에서 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한다.
매창은 조선 선조 6년(1573)에 부안현의 아전이 이탕종의 딸로 태어났으며 자는 천향, 이름은 계화, 계생, 또는 향금이라고도 하였다. 계화, 계생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계유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그녀는 부안지방의 유명한 기생으로 시조와 한시에 능하였고 춤과 거문고 솜씨도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는 매창은 시조화 한시 58수를 남겼고 작품으로는 매창집이 전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매창묘를 찾아서
정비석
공동묘지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매창의 무덤 앞에서, 나는 머리를 수그려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무덤 속의 매창의 백골은 이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움을 품고 죽어간 지 3백 60여년 후인 이 날에 60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길을 멀다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나의 귀에는 그대의 아름다운 거문고 가락이 들려오는 것만 같고, 눈을 감고 명복을 비는 나의 망막에는 그대의 아리따운 자태가 아련히 떠올라 보이는 것만 같아서 애모의 정이 새삼스러이 솟아 오르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 가.
세월은 흘러도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남는 법,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고 길어서 서어움에 같겨 한 수씩 갈긴 그대의 넋풀이 시들이 오늘 날에는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어수대
이매창
천년 옛절에 임은 간데 없고
어수대 빜터만 남아 있고나
지난 일 물어볼 사람도 없이
바람에 학이나 불러볼꺼나.
매창을 생각하며
유희경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너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뿌릴제 애가 끊겨라.
매창테마관
현판엔 매창화우상억재(매창화우상억재/매화매, 창창, 꽃화, 비우, 서로상, 생각할 억, 제계할 또는 집 재)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매창의 이름과 시조에서 단어를 취해 만든 말이라고 한다.
구수한 입담으로 매창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해설을 해 주셨다.
매창은 인물? 외모가 출중하다는 기록은 없다한다.
그래서 수수한 모습이다.
이전의 딸 조선의 기생이 되다
계생의 자는 쳔향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어 불렀다. 부안현 아전이던 이탕종의 딸이다.
매창의 아버지는 관청에 소속된 하급 관리 아전이었다. 향리는 기피 역종으로 아버지가 향리에 복무했으면, 자식 역시 향역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칠반공천, 즉 기생. 나인. 이족. 역졸. 뇌령. 관노비. 유죄도망자를 관청에 소속된 일곱의 천인으로 보았다. 당시 기생은 하나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아전의 딸이 기생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아전의 딸로 태어난 매창이 만약 기생이 되지 않았다면 다른 아전이나 농사꾼에게 시집가서 이름없이 살다 갔을 것이다. 반면 기생이 되었기 때문에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예인으로서 삶을 살 수 있었다.
매창과 만난 명사들
권필(1569~1612)
매창을 여자친구라고 하다.
권필은 광해군의 처남들을 풍자하는 궁류시를 지었다가 역모죄에 얽혀 매맞아 죽은 기백이 있는 시인이다. 권필이 부안에서 매창에게 지어준 <중천형여반>에는 매창을 여반, 즉 여자친구라고 표현해 존중한 느낌을 주었다,
선자부합재풍진 / 선녀같은자태가 풍진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독포요금원모춘 / 홀로 거문고 껴언고 늦은봄을 원망하네
현도단시장역단 / 줄이 끊어지면 애도 끈헝지니
세간난득상음인 / 세상에 소리 알아주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네
한준겸(1557~1627)
지은 시가 객사 벽에 걸리다.
한준겸이 1602년 전라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한준겸의 문집 <유천유고> 칠언절구에 매창에게 지어준 시 <증가기매생>이 실려있다.
심광세
매창과 시를 주고받다
이귀
매창의 정인이 되다,
유희경과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
유희경(1545~1636), 천민의 신분으로 시인이 되다.
유희경은 서울 대묘동에서 태어났다. 천민 신분(장례를 전문으로 치러는)이었지만 예법을 배운사람으로 시를 지으며 사람답게 살기를 바랐다. 또한 매창과는 가장 많은 시를 주고 받은 사람이었다. 신분의 벽에 막혀 과거에 응시할 수는 없었지만 상갓집에 불려다니는 틈틈이 시를 지었다. 사대부 시인들과도 어울리며 시인으로서 이름이 나 있었다.
매창과 유희경, 서로 서로 마음을 잇다.
매창집에 유희경의 이름이 나오진 않지만, 매창이 그에게 지어주었다고 짐작되는 시가 있다.
바로 <자상>이다. 남학명의 <행록>에는 유희경이 "이대 비로소 파계하고, 서로 풍류로 즐겼다"고 해씅니 그 상대가 유희경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시어 중에 '양대'라는 단어제서 그 이유가 확실해진다. 매창의 시에서 우우지락의 무대인 양대를 찾는 모습은 오직 이 시에서만 나타나는데,
이는 유희경이 지어준 시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임진왜란에 종군하며 연락이 끊어지다.
유희경과 매창 드디어 만나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치다.
허균
매창과 처음만나 술 마시며 시를 주고 받다.
매창집
매창 테마관 인근의 매창공원
1시간여 매창공원과 테마관을 둘러보고 적벽강으로 향한다,
▣ 적벽강, 수성당, 후박나무 군락지
변산마실길 3코스는 고사포 해수욕장의 좌측 끝에 위치한 성천항에서 격포항 까지의 구간이다.
이 구간 중 적벽강 구간은 썰물시 해안을 따라 수성당으로 이어갈 수 있다.
이곳은 변산 격포리 124-4 해넘이 펜션이 있는 곳이다.
때마침 물때가 적당하여 해안코스를 따라 적벽강, 수성당, 후박나무 군락지를 같이 둘러보는 것으로 한다,
해안으로 내려선다.
약간의 모래가 있어 해수욕장으로 우겨도 되겠다.
우측 해안이다.
좌측 해안을 따라 간다.
특별히 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면이 평탄하여 걷는데 별 지장은 없다.
앞쪽 절벽 주변이 적병강이다.
뒤쪽 해안으로 돌출된 지역은 군에서 출입을 통제한다.
적벽
적벽강 중간,
깨끗한 자갈이 깔린 곳에서 충무김밥, 김밥과 과일 등으로 중식시간을 갖는다.
저곳 유채밭 너머에 수성당이 있다.
수승당 주차장 앞쪽의 해안이다.
적벽강을 지나 수성당 주차장으로 올라 주변 해안을 본다,
적벽강 주차장.
시계 반대방향으로 수성당으로 향한다.
때마침 유채꽃이 절정이다.
먼저 수성당 포토존으로 왔다,
수성당 가는 길
수성당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해안,
뒷편에서 바라본 수성당
수성당은 딸 여덟자매을 낳아 일곱딸을 팔도에 한명씩 나누어 주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바다를 다스렸다는 개양할머니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올리고 풍어와 무사고를 빌었다고 하며, 수성당 주변에서 선사시대 이래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을 발견된 점으로 보아 죽막동 제사우적지임을 확인된 곳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수성당을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중간 저만큼 격포해수욕장을 가늠해 본다.
우측으로 보이는 저곳이 후박나무 군락지.
후박나무 군락지.
천년기념물 1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단한 규모는 아니아 한바도에서 후박나무가 분포하는 가장 북쪽 지역이기 때문에 식물분포학적 가치를 인정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주 도로 또는 격포해수욕장 방향으로 갈 수 있는데 왜인지 차단시켰다.
▣ 채석강
격포해수욕장 주차장으로 왔다.
여름철엔 모르겠지만 주차료를 징수하지는 않는다,
격포해수욕장
채석강을 둘러보러 간다.
저곳은 격포항 방파제,
되돌아 간다.
40분여 적벽강을 둘러보는 것으로 한다.
▣ 곰소항 젓갈단지
곰소항 젓갈단지에 왔다.
황해건어물 집이다.
이곳은 오늘 버스기사님이 추천하는 집이다.
젓갈단지 뒷편 해안으로 나가 바다를 본다.
▣ 슬지네제빵소
슬지네 제빵.
빵집과 까페를 겸하는 곳으로 관광객이 많다.
빵집 내부의 한쪽 면,
앉아 쉴 수 있도록 설계했다.
까페.
빵과 라떼? 3,000원 + 7,000원
빵가게 앞(내륙쪽?)은 염전이다.
염전을 슬쩍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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