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청 금서면 특리 / 지석묘군, 의병장 민용호가옥, 근대 한옥 민재호 가옥, 청금정, 금계정, 강구폭포, 금석정
산청문화원 발행 <산청지명고>에 "특골은 와우(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특이란 글자를 따서 특골이라 하였다". 산청 문화관광 해설사로 있는 민영인님은 여기서 특은 특별할 특자라기 보다는 소(수컷) 특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쉬웁겠다고 한다. 마을 뒷편 화계로 넘어가는 고개를 틉치재라고 부르는데 이는 특치(특치)로 송아지가 마을을 돌아보는 형국이다. "일설에는 약 600년 전에 먼저 천금대마을이 생기고 그 마을에서 낮은 골이 들녘으로 해서 빠져 나갔으므로 특골이라 하였다"고 나와있다. '낮은 골이 들녘으로해서 빠져나가는 것'과 '특'자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특'자가 들어가는 마을 이름은 흔치 않은 것 같다.
특리마을 앞 경호강변에는지석묘군이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특리천을 따라 근대한옥, 청금정, 금계정, 강구폭포와 금석정이 있으며, 맨 상부에 산청의 대표적 공원이라 할 수 있는 동의보감촌이 있다. 학문과 인물에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동의보감촌과 연계하여 찾아 봄 직 하다.
2022. 5. 9일 특리 소재 청금정에서 강한선생의 후손들과 지방 유림이 함께 유제에 참석했다. 지난날 지역학 연구차 이 곳을 답사한 적이 있지만 이번 기회에 특리 경호강변의 지석묘군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2~3km 상부에 위치한 동의보감촌 사이에 있는 유적, 경승지 등을 정리해 본다.
▷ 가는 길
동의보감촌에서 특리마을을 지나 남강(경호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을 특리천이라 한다.
인터넷에서 과거의 기록을 찾다보니 이 특리천을 과거엔 금탄이라고도 불렀는 것 같다.
▷ 탐방코스 (2022. 5. 9과 2022. 5. 12.)
특리 지석묘군 - 의병장 민용호 생가 - 근대한옥 민재호 가옥 - 청금정 - 금계정 - 강구폭포 - 금석정
▷ 탐방후에
▣ 특리 지석묘군 (경남도 기념물 제163호)
금서면 특리 사평마을 상부 도로를 따라 특리마을로 이어가는 곳에 관리되는 듯? 방치된 듯? 지석묘 군이 있다,
주소는 금서면 특리 395번지 일원이다.
일반인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이곳에 지석묘가 있는 줄도 모를 곳이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정자와 지석묘군을 알리는 조그만 안내표지판이 있으며 주변엔 현 10여기의 지석묘를 볼 수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곧 부르며, 그 가운데 특히 그 규모가 크거나 부장품이 풍부한 것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네 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무덤 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무덤 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 지면에 받침돌 없이 큰돌(윗돌)만을 바로 놓은 형상 등 3종류로 보인다. 이들의 공통적 요소는 거대한 자연암석을 윗돌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탁자형으로 생긴 형식은 북방식, 기반형으로 생긴 형식은 남방식으로 분류하였으나 고인돌에 대한 조사연구가 확대되면서 남방식 북방식이 서로 혼재되어 이들 분류는 비현실적이라는게 일반적 조류인것 같다.
이곳의 고인돌 유적은 경호강변을 따라 자리 잡고 있는 특리 사평마을의 논밭과 농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곳에는 고인돌의 덮개돌(상석) 35가 모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주위에는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조각도 발견되었다, 경호강변의 충적 지형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고인돌 유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주거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도 남아있다.
경상남도 내륙지방에서 발견된 고인돌 유적으로는 드물게 대규모 유적이라는 점에서 이 지석묘군은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지 안내문 및 기타 자료에 의함 >
▣ 의병장 민용호 생가
특리마을을 관통하는 특리천에는 마을내 3곳의 조그만 다리가 있다.
맨 아랫쪽(주변에 마을 주차장, 물레방아, 정미소 등이 있음) 다리를 건너자 바로 좌측 하천변으로 난 도로를 따라 쬐끔(몇 십미터)오르다가, 우측 골목으로 접어들면 의병장 민용호 생가가 있다.
아무런 이정표도 없어 초행자라면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주소는 금서면 특리 1033-2번지
이 집엔 현재 민영한씨가 살고 있으며, 직계 후손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 1895년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군대해산, 1910년 경술국치 등 일련의 과정들이 일어난다.
이중 1895년엔 을미사변과 그해 11월 단발령이 공포된다. 단발령의 강제 실행은 국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고 유림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 을미년 10월에서 이듬해 5월 사이에 전국에서 봉기(을미의병)하였다.
이 을미의병 운동에 크게 활약하여 위명(威名)을 떨친 이가 민용호장군이다. 그는 비록 강원도를 비롯한 외지에서 투쟁하였으나 그의 생애 대부분은 산청에서 보냈다.
민용호는 고종 6년(1869,乙巳) 오부면 오록리에서 민치겸의 5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관향은 여흥, 호는 복재(復齋)였다. 아버지 민치겸은 고려말 예조판서 농은 민안부의 후손으로 가세는 넉넉치 못했으나 아들 용호를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고, 일족인 민치완, 민치량 형제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다.
그러나 민용호가 17세 되던 해에 부친이 전염병으로 급서하게 되자 가세가 기울어져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그는 한 동안 집안을 큰 동생 성호에게 일임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금서면 오봉산으로 들어가 화전민 생활을 한 적도 있다.
민용호는 산청에서 20세 전후 장년이 될 때 까지 민치량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이며,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을 민치량을 통해 이어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민용호가 을미의병을 일으켰을때 노사학파(全羅道)의 이 위정척사 사상은 대일항쟁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민용호가 25세 무렵 서울로 올라가 다음해(1895) 여주의 민병성 서재에 기거하게 된다. 여기에는 당대 대문벌이요 외척 민씨의 일족인 민치우(민비 명성왕후와 13촌 간)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일 거라고 한다. 민병성은 민치우의 재증손에 해당되며, 어떤 연유로 민치우의 양자가 되었는지에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해(1985) 10월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뒤이어 11월1 5일 단발령이 공포되어 강제로 실행되었다, 이것은 개화. 일본문화를 강요하여 우리의 유교적 전통문화를 파괴하려는 시책으로 받아들여져 전국적인 항일기운이 고조되고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의병활동의 근거지로 강원도 즉 대관령 너머 관동지방을 택하였다. 그것은 왜적과 대항할 병력과 무장을 고려할 때 전략적으로 산악지대가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용호는 을미의병의 강릉 의병장으로 위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가 여주를 출발할 때의 의병수는 알 수 없으나 1896년 1월 원주로 들어가 상당수 의병을 모았다. 그리고 창평, 진부 등지를 거쳐 민용호의 창의군은 1월 31일 동해안의 요충인 강릉을 점령하고 관동구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그후 7개월간(1896년 1월~7월) 태백산맥을 주축으로 한 동해안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동안 있었던 가장큰 작전인 원산 공격에서 실패하고 강릉으로 돌아와 삼척, 횡성 등지의 의병을 모아 고성 양양 등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민용호는 군사적 통솔력은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강원도에 있어서 학문적 유대나 경제적 재지기반을 가지지 못해 궁핍한 농민들로 부터 비난과 등돌림을 받았다.
1896년 3월 이후 고종의 해방칙유가 내려지고 京軍의 의병토벌이 계속되었으며 국왕의 해산령에 대항할 논리와 명분도 박약하였으므로 7월경에는 대부분 해산되고 말았다. 민용호의 창의군도 산악지대를 따라 황해도 곡산, 문산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나 경군(京軍)과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자기도 총상을 입었다. 민용호는 함경도 평안도로 북상하여 1896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통화현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민용호의 9개월여에 걸친 의병활동은 끝을 맺게 된다.
만주로 망명했던 민용호는 청나라 관헌들과 다각적으로 접촉하면서 무기원조를 요청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97년 8월 고종의 소환조칙을 받은 민용호는 귀국하여 한말 관료의 길을 걷게된다. 그해 하반기 상상사(商常社)의 장재(掌財)를 시작으로 희릉(禧陵) 참봉 등을 거쳐 광무7년(1903) 12월에 비서원의 秘書承(옛 承旨)이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비서원이 폐지되는 1903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의병시절 입은 총상으로 고생하며 수의(守義)생활을 보내다가 1922년 향년 55세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제433호)를 추서하였으며 이듬해 그의 고향마을(산청읍 弁亭里)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산청향토사 /오규환 저.에서 발췌>
아랫채(사랑채)
안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으며, 전문적인 보수를 하지않아 많이 낡았다.
이 집 주인은 은근 문화재로 지정관리 되기를 바라는(순수히 개인 생각으로 고가로 매입 등?) 눈치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둘러보는데 대해 어쩜 귀찮아 할 런지도 모르겠다.
▣ 특리 근대 한옥 민재호 가옥 (국가등록문화제 제148호)
민재호 가옥 역시 초행자는 찾기가 어렵다.
특리마을내 3곳의 다리 중, 가운데 다리를 건너 맞은편 골목으로 조금 진행하면 된다.
주소는 금서면 특리 1031-1번지.
이 집은 반2층으로 어느정도 높이가 있어 입구에서 대충 가늠이 가능하다.
어느 개인 주택?의 대문간을 지나,
이내 또 다른 대문을 들머서면 있다.
입구에 이 집을 소개하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이 한옥은 평안북도 정주군수를 지낸 민재호가 1930년대에 지은 2층 주택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이다.
앞뒤로 온전한 크기의 방들을 두줄로 배열한 겹집이라는 점과 앞쪽에는 생활하는 공간을 두고 뒷쪽에는 생활용품이나 가재도구 등을 보관하는 공간을 둔 것이 돋보인다.2층은 주로 여름철 마루에 평상을 두고 시, 글씨를 쓰거나 낮잠을 자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2층 외벽에는 채광과 환기를 위해 들어서 여는, 가로로 긴 창을 달아 놓았는데 창살 짜임이 일본식 창과 비슷하다.
이 집은 주거 생활이 더욱 편리할 수 있도록 방을 크게 잡고 천장은 높여 실내가 밝고 개방적인 점, 안방과 건넌방(안방에서 대청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방) 주변으로 여러 기능을 가진 방을 둔 점, 2층을 넓은 마루로 구성한 점 등이 특징이다.
산청 특리 근대 한옥은 우리나라 전통 한옥에 일본식 주택 양식을 섞어지은 건물로 주택의 규모나 층수 제한이 약해진 당시의 주택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현지 안내문에서>
앞 문을 열면 내부를 쬐끔 볼 수 있다.
민재호는 산청 민씨문중 농은공의 후손인 졸수공파로 부친은 치관이며, 백부가 산청의 노사학파인 치완, 치량이다. 치완. 치량의 종숙은 민재남으로 장성의 노사 기정진과 왕래하며 노사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그는 1858년에 자신의 제자인 김현옥과 종질인 민치완, 민치량을 기정진에게 보내 수학하게 했다. 이후 1863년 봄 민치완은 상경하여 흥선 대원군의 처소인 운현의 송정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또한 대원군을 보필하며 글씨 쓰는 직책을 맡았는데 대원군을 온종일 모시면서 발등에 종기가 나고 버선이 찢어져도 물러가라고 말
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정도로 근신하여 대원군이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1865년 문효전 참봉에 제수되었고, 1866년에는 의금부도사, 의영봉사를 역임했으며 동생인 민치량도 사헌부집의을 지냈다.
민치완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지정진에게 외세 침략의 방비책을 제시한 병인소를 올리도록 권유하였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여 유림들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1871년 서원철폐령에 항의하며 친분 있는 유림들에게 편지를 보내 서원철폐을 막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 민영인 선생의 글에서>
아랫채?
욕실과 창고 등이다.
▣ 청금정
차량으로 오를 경우 특리마을에서 계곡을 좌측에 두고 농로를 따라 오르거나(먼 거리가 아니어서 도보로 올라도 됨), 계곡을 우측에 두고 농로를 따라 도보로 오르면(차량은 통행 어려움) 청금정이 있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금서면 특리 979번지.
특리의 밀집된 본 마을의 맨 상부에서 100~200m정도 거리이다.
이 청금정은 조선 성종때 강한(진주 강씨, 휘는 한, 1454~ ?) 선생이 연산군의 화를 예견하고 이곳 산청으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며 소요한 곳이다. 선생의 본관은 진주(진양), 자는 종지?(종우?), 호는 금재이며, 함양박씨와 결혼하였다. 현 직계 후손은 주로 함양에 거주하며, 진주강씨 추원재는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 12번지에 위치한다.
추원재의 가계를 보면 진주강씨 박사공 1세 계용, 2세 급사공 인문, 3세 어사공 사첨, 4세 진원부원군 창귀, 5세 문경공 군보, 6세 공목공 시, 7세 통계공 회중, 8세 참판공 강안복, 9세 군위공 강이경, 10세 금재공 강한이다.
금재공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11세 참봉공 강신우와 강근우 이며며, 12세는 강신우의 아들로 습독관 강규, 강규의 아들은 둘인데 13세 목사 강위노와 감정 강위수다. 강위노의 아들은 14세 교리 강인위, 강위수의 아들은 강협과 강부이다.
<어느 인터넷 자료에서 발췌>
1648년 예종이 즉위한 그해 부친 강이경은 군위현감으로 제수된 상태였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유자광의 모략에 의해 남이 장군이 화를 입을때 연루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남이와 함께 계를 만들고 활쏘기를 하였다고 하여 죽임을 당했다. 강이경의 아내는 노비로 내쳐젔으나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성종이 즉위하자 노비에서 풀어주고 신분은 복원시켰으니 모두 함양으로 유배를 보냈다.
(다음 블로그 Win690님의 자료에 따르면 군위현감으로 재위하다 남이장군과 더불어 화를 입어 강보에 싸인 아들 강한을 데리고 함양으로 유배왔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강한은 예모가 뛰어나고 필법이 정묘하여 글씨를 잘 썼다. 열여섯 살 때 이웃 사람이 상소문을 적어달라고 해서 대필을 했는데, 성종이 그 글씨를 보고 감탄하여 글쓴이를 보고 싶어 가마를 보내 불러서는 지필을 하사하고 중국 사신을 접빈하는 역할(포의로서 사신 접반사에 종사)을 맡기기도 했다.
성종24년(1493)에 정희황후(세조의 비)가 자신의 친척이 된다는 것과 벼슬길에 나갈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대간들의 반대로 미뤄지다가 연산군1년(1495)에야 금고(조선시대에 죄가 있거나 신분상의 문제로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것)가 풀렸다. 이듬해 43세의(연산군 2년, 1496) 나이로 병진증광사마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하여 관리가 되어 지례, 고산 현감을 지냈다.
중종 13년(1518) 1월에 사헌부 감찰, 3월에 군자감 주부 판결사를 지냈다.
*) 8대 예종 - 9대 성종 - 10대 연산군 - 11대 중종 - 12대 인종 - 13대 명종
위 성종때 포의 사신 접반사에 종사한 것과 위 내용의 성종때 벼슬길 열어달라고 요청하여 연산군 때 풀렸다고 했는데 시기상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래 사진의 캡션을 보면 연산군때 특리로 귀향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중종 때에 벼슬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도 잘 이해가 않된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에 모친상까지 겹쳐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 동쪽 산음현 필봉 아래(특리)에 청금정을 짓고 은거하며 서재를 금재라 이름짓고 가야금과 글쓰기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문하에서 확계 정옥련, 수헌 권오복, 호음 정사룡 등이 배출되었고, 모재 김안국과 교우하였으며 모재는 강한을 일러 강고산이라 했고 이후 사람들은 그를 강고산이라 칭했다. (고산 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 청금정에 김안국 차운시가 걸려있다.) 함양 구천서원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동몽수지>가 있다.
청금정 편액,
청금정 내력을 담은 비석이 특이한 모습으로 있다.
맨 마지막 글자를 보면 김모재의 시로 되어 있다.
두류산색음창리 두류산 풍경을 창 안에서 읊으니
명옥탄성취침간 명옥탄 물소리가 베개 사이로 스며드네
자유임고오세월 숲우거진 물가에서 세월을 즐기니 (언덕 고, 즐길 오)
갱무혼몽도진환 속세에 대한 마음은 꿈에도 다시 없으리 (고칠경/다시갱, 경기고을 환)
.........................
청금정 주련에도 이 시가 걸려있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정확히 모르겠다.
청금정기
산음현 서쪽 10리쯤에 강고산이 있으니 특이하도다. 산의 이름이여! 두류산 기슭이 구불구불 동쪽으로 내달려 필봉을 이루었으니 맑고 수려하며 아름답고 고운, 어진 사람이 즐길만 한 곳이다. 성종조에 이름이 한인 강선생은 벼슬이 고산졸이니 연산군의 화를 미리 알고 이 가운데 은거하여 행의하면서 금탄위에 모옥을 지어 그 재실 이름을 금재라 했다. 모재 김선생이 그 때 본도를 다스렸는데 선생을 찾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공은 나의 벗이 아니라 나의 선생이다."라고 하면서 필봉의 이름을 고쳐 강고산이라 하였다.
시경에 말하기를 "고산은 첨양한다."고 하였으니 선생이 벼슬한 고을 이름을 취하여 첨앙하는 뜻을 붙인 것인가. 이제 선생의 시대가 400년이 지났는데도 행인들이 지점하면서 묻지 않아도 고산 강선생을 알고 있다. 대개 산은 천지로 더불어 서로 그 시작과 끝을 함께하나 선생의 덕 또한 산과 더불어 시작과 끝을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산의 청풍명월과 창송녹죽은 선생이 소영하며 노닐던 여운이 아님이 없으니 구지에 소연의 집을 짓는 것이 때늦은 감이 있다고 하겠다. 강군 방희 신민들이 나를 찾아와 이를 기록하라 하니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며 고하여 말하기를 당간 강군은이란 노래가 있어 지금까지 전송되니 장차 이 정자에서 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선생의 주손 석두가 족인 진형 신화와 더불어 마음의 힘을 다했으니 이로써 강씨들의 집안 일이라 하겠는가. 일을 주관한 이는 이에 노진사 태현 정학사 연시 민사문 상호이다. 내 이르건대 공역을 맡은 것은 강씨지만 성취한 것은 일로 사림의 덕분이라 하겠다.
상량문
이 외에도 후손 강건영이 지은 운이 걸려있다.
청금정 좌측 뒷편의 금재 강선생 유허비
오늘 강선생 후손들이 지역 유림을 초청하여 간소한 유제를 지냈다.
집례는 함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소장으로 계시는 강민구님이 하셨다.
혹 선생과 관련 문의사항이 있다면 010-2833-7034 / mildhot2005@hanmail.net.
산청 유림 6명 포함 후손 30여명이 참석했다.
청금정 아랫쪽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명옥탄이라 했다.
계곡 가운데 큼직한 바위에 명옥탄 글자가 선명하다.
명옥탄은 모재 김안국(1478~1543)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1517) 이곳에 은거해 있던 금재를 방문하고 시를 지었는데 그기에 나오는 말이다.
청금정을 뒤로 하고 금계정으로 간다.
금계정은 청금정에서 계곡 상부쪽 약 100m 거리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청금정에서도 그 위치를 건너다 볼 수 있다. 하지만 계곡을 건너는 것이 어려워 도로를 따라 마을로 돌아서 올라야 한다.
▣ 금계정
특리 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금계정으로 왔다.
주소는 금서면 특리 1221.
승용차등 소형차량은 이곳 마당까지 진입 가능하다.
금계정
몇 그루 노송 운치있게 자리하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금계정
금계정 편액,
금계정기
한문으로 적혀 있으며, 내용은?
정자 좌측 뒷편에 2기의 광산김공유적비가 있다.
인터넷상에서 금계정과 김기언 선생의 기록을 검색해 보면 나오는게 없다. 그래서 비문(한글과 한자가 섞여있다)을 옮겨본다.
공의 휘는 기언이니 고휘는 상옥이오 조휘는 제택이오 증조휘는 진철이오 조조휘는 만형(영,옥)이라 광산김씨니 신라왕자 공휘 흥관이 시조이시다.
누대 조정을 거침에 문적이 반반하니 가히 고증할만 하고 이씨조에 들어와서 휘 국광은 의정부좌의정이시며 광산부원군이요 그 현손휘공휘는 원종훈이니 관통정대부 파주목사며 분파조니 공의 8세조이시다. 그 형은 황광공휘 계?휘요 질(조카)은 사계선생 휘 장생이시다. 공이 나실적부터 품질이 특이하고 부모를 받들매 감지공양을 집이 가난하다고 조금도 게을히 않이하고 부모 상을 당함에 려막사리 3년을 하니 피눈물이 송백을 적시고 성효로 범을 길들게 하였으며 초종으로부터 대상담제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으니 비록 학식이 해박한 사람이라도 이보다 더하지 못했으리라. 형제간에 우애함이 독실하더니 그 아우가 호질에 걸였을 제 자기살을 베어먹여 병을 낫게 하였으니 이웃 사람들이 윤리를 손상했다 하여 흉을 보는지라 공이 왈 부모님이 너무 걱정하심으로 그렇게 했노라 하더라, 병인년 난리에 단을 모아 마음속으로 요기를 쓸어내기를 기도하였고 국상을 당함에 수월간소복소찬(반)을 행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은 모두 효제충삼강을 몸소 행한일들인지라 관에서 상으로 우육을 내리고 도에 상계하는 문자를 올렸으나 끝내 포양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당시의 속상?이 폐단이 많고 와전됨이 잇달아 탁월한 행식과 특이한 명성이 다같이 인멸되였는지라 애석할 뿐이로다. 몰세하신지 60여년이 됨에 아들 4형제중 재춘과 재선과 재동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계자인 재업은 천령(함양)으로 이주를 갓드니 어느날 나를 찾아와 공의 행장과 제현의 서술한 문자를 내어 보이니 탈락된 것이
많아 족히 상고 할 수 없고 오직 물제노공광복의 기록한 문자중에 왈병이?의 성품은 누가 없으리오마는 하향벽지애서 생장한 사람으로서 양심에 따라 행동함을 윤리에 맞게 하였으니 엇지 생질의 수미함이 아니겼는가하고 나의 백부 회정공(민재남) 말씀에 효우는 사람의 항성이로되 그 천성을 온전히 하는자 극히 드물거늘 기언이만은 능히 사람된 도리를 다하였으며 매우 기특하다 하였으니 몇 가지만 보아도 족히 후세에 증거될 만 한지라 이제 나에게 비음기를 부탁하는 것은 일찍부터 보고 느낀이가 나보다 나흔 사람이 없기에 부탁한 것 일게다. 공의 호를 금계라하였음은 그가 사는 곳의 지명을 따라 사람들이 일커른 이름이리라. 이제 그 설단한 곳에 비석을 세운이는 재업이니라
통훈대부전행사헌부집의여강 민치호 찬
<비문의 내용이나 일부 한자의 경우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어 오타가 있을 수 있다>
비석 뒷편의 또 다른 비석,
역시 광산김공유적비.
측면에서 바라본 금계정
금계정 앞쪽의 계곡.
각도를 달리하여 바라본 금계정이다.
금계정에서 강구폭포로 이어지는 계곡은 도보로 거슬러 오르는 것이 불가하다.
▣ 강구폭포
강구폭포를 아랫쪽에서 윗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도로변에서 약초농원으로 내려간다,
동의보감촌의 후문이라 할 수 있는 보감문 아랫쪽에 위치한 금석정에서 내려가면서 둘러 보아도 된다.
위치는 금석정 아랫쪽 약 100~200m 구간의 와폭이다.
약초농원으로 내려섯다.
약초농원은 넓은 면적은 아니나 나름 정원을 꾸몄다.
정원을 둘러보고 폭포쪽 계곡을 거슬러 오르기로 한다.
특리마을에서 보이는 왕산을 마을 사람들은 강고산이라 불렀고, 좌측에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는 문필봉 또는 필봉산이라 했다.
문산와폭에서 문산은 문필봉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고강동천은 높은 산등성이란 뜻이므로 산 아래 경치 좋은 곳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금재 강한(1454~ ?)은 특리마을에 살았는데 그가 예전에 고산 현감을 지냈다 하여 금재가 살고 있는 곳의 높은 산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금재 강한유허비)
또한 구형왕과 관련 있는 광고산이라는 설이 있다.
손성모 선생의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옛날 가락국 왕실에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귀한 보석 두 개가 전해 내려왔는데 그 중 한 개를 <광고>라고 불렀다. 가락국 구형왕이 신라군의 침략에 밀려 산청군 금서면 특리에 위치한 이름 모를 산 중턱에서 하룻밤 야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새벽녘 별빛 아래 흔들리는 억새풀을 적군의 깃발로 착각하고 갑작스레 피신을 하다거 그 와중에 귀한 보석 두 개 중 광고라는 이름을 가진 보석 한 개를 잃어버렸다.
훗날 구형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온 산을 샅샅이 뒤져 광고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석 찾는 것을 단념하는 대신 이 산의 이름을 광고라 부르게 되었다.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
특별히 길은 없지만 계곡을 따라 충분히 다닐 수 있다.
저만큼 금석정이 보인다.
▣ 금석정
왕산과 필봉산 사이에서 발원하는 조그만 하천이 동의보감촌을 관통하여 특리마을을 지나 경호강(남강)에 합류한다.
산청군에서 이 하천 상류인 동의보감촌 내 구간에 무릉계곡이라 새로이 이름을 붙이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곳에 출렁다리를 놓았다. 또한 이 하천은 동의보감촌 후문이라 할 수 있는 <보감문> 옆을 지나 내려오면서 금석정 옆 조그만 폭포와 아래로 와폭인 강구폭포를 이루고 특리마을을 관통하여 경호강(남강)에 합류된다.
보감문 앞 도로 바로 아랫쪽 계곡에 금석정이 있다.
행정구역상 위치는 금서면 특리 산70-1번지.
금석정은 특리마을에 살던 민재규(1819~1885)가 이곳의 경치를 좋아해 자신의 호를 딴 작은 모정(짚이나 새로 지붕을 얹은 정자)을 짓고, 여러 벗들과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현재는 기둥의 상당부분이 돌기둥으로 교체되었고,
정자의 바닥도 시멘트로 만들어 옛 정자의 운치는 반감되었다.
금석정 편액
정자 바로 뒤에는 금석민공유허비와 비의 기초석인 바위에 선생의 호를 새긴 금석 각자가 있다.
금석 민공 유허비
유허비문 내용은 한자로 적혀있으며, 사진으로 확대해 보나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으나 와폭 옆 암벽에 <고강동천 문산와폭/ 고강동천 문산와폭> 건너편에 세진동(세진동/ 먼지와 피로를 씻어내다) 의 글씨를 손수새겼다고 적혀있다 한다.
(이 각자는 찾지 못했다)
정자 아랫쪽 바위에 농폭(농폭)이 각자되어 있다.
농폭의 농자는 귀머거리 농자이다.
폭포의 이름을 소리가 들리지 않은 폭포의 뜻이라 했을까?
이 지역 문화관광 해설사로 있는 민영인씨는 민재규의 중시조인 민안부 선생의 호가 농은(농隱/ 농사 농)으로 '농사지으며 은둔한다'와 자손들에게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경계하라고 가르쳤다는 일화를 생각해 보면 조상의 뜻을 따라 세상일에 귀를 막고 조용히 지내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또한 민재규의 형인 민재남이 쓴 <부차운감영/부차운감영>에 있는 "선인의 가르침을 감읍하고 받들어서, 돌밭을 일구며 가난을 견뎌내네 (읍수선인훈, 석전가공빈/읍수선인훈, 석전가공빈)라는 구절을 보면 농폭의 의미가 이와 같으리라는 것이 더 확실해 진다라고 설명한다.
금석정 바로 윗쪽은 동의보감촌 후문이 있는 곳이다.
도로쪽으로 올라서면 바로 동의보감촌의 후문이라 할 수 있는 보감문이 있다.
동의보감촌의 산청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기바위, 여러 산책로, 박물관, 자연휴양림, 출렁다리, 식당등등 공원으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동의보감을 찾으면서 시간이 되면 이곳 또한 둘러보기를 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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