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보성 득량역 추억의 거리, 강골마을 월화정.이정래고택.이진래고택.이금재가옥 , (초암정원, 윤제림)

정헌의 티스토리 2022. 11. 20. 12:09

■ 보성 득량역 추억의 거리, 강골마을 월화정.이정래고택. 이진래고택. 이금재가옥, (초암정원, 윤제림)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 이상현. 시공사>에 강골마을 이용욱가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강골마을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해 보니 월화정 등 볼거리가 있고, 인근 초암정원도 있다. 득량역 추억의 거리, 강골마을, 초암정원, 비니거파크, 윤제림을 넣으니 하루 코스가 되겠다. 

강골마을의 이용욱 가옥은 이진래 고택을 말하는 것 같은데 두 양반이 어떤 관계인지 잘 모르겠다, 비니거파크는 현미흑초를 담그는 곳으로 진열된 2,000여 장독이 볼거리라 하나 위치를 시원스레 알려주는 곳이 없다. 겨우 방향을 가늠잡아 진입하려니 진입로 입구에 길 없음 안내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외부인은 오지말라는 소리인 줄 알고 가지 않았다.

초암정원과 윤제림은 사진 분량이 많아 별도로 소개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득량역 추억의 거리와 강골마을만 다루기로 한다,

 

 

 

 

▷가는 길

 

 

 

 

 

 

▷탐방코스

보성 득량역 추억의 거리 - 강골마을 월화정. 이정래고택, 이진래고택.이금재가옥 - (초암정원 - 중식 -  비니거파크 - 윤제림)    /   2022. 11. 13.

 

 

 

 

▷탐방후에

 

    ▣득량역 추억의 거리

 

득량면사무소에서 출발하면 편하다.

면사무소라는 주차 공간이 있어 이곳에 주차하면 되기 때문이다.

 

 

 

 

 

득량면사무소 한켠에 마천석교비가 있다.

 

이 비는 옛 나루터 마천(득량면 해평리 일원)에 1674년(현종15) 7월에 완공한 돌다리의 건립을 기념한 비석으로 현재는 석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석교 건립은 보성 개흥사 계수스님에 의해 주도되었다. 비석의 오른쪽 부분에는 건립과정, 왼쪽 부분에는 건립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또한 건립 연대, 건립 주체, 건립 배경과 과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유례가 드문 17세기 교량 관련 기록유산이다.

마천석교비는 오봉산 득량천 해평교 옆에서 두 동강이 난 채 발견되었으며, 득량면사무소로 옮겨 비를 접합하고 세워 보존하고 있다.

<현지 비문에서>

 

 

 

 

득량역 추억의 거리는 득량면사무소에서 득량역을 지나 농협까지 약 200m 도로를 근대풍으로 리모델링 했다.

50년 된 추억다방, 이발관, 초등학교, 롤라장, 구멍가게, 역전만화방 등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70~80년대 차량인 포니, 스텔라, 코란도등도 함께 보고 추억할 수 있다.

 

 

 

 

 

그래도 그렇지, 면소재지의 중심도로가 이렇게 한산할 줄은 미쳐 몰랐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전시용으로 바뀌어 있다.

 

 

 

 

 

 

 

 

 

 

 

 

포니승용차

넘버까지 달고 있다.

 

 

 

 

 

말 그대로 추억의 거리다.

 

 

 

 

 

행운다방은 실제 영업을 하고 있다.

쌍화차가 유명한가 보다.(쌍화차 6,000원, 다방커피 3,000원, 아메리카노 3,000원)

 

 

 

 

 

인쇄소도 있고

 

 

 

 

 

왕대포 집도 있다.

역시 빈집인것 같다.

 

 

 

 

 

 

 

 

 

 

 

 

 

득량역 앞쪽에 동명슈퍼가 있다.

 

득량이라는 지명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대치하던 중 아군의 식량이 떨어져 이 지역에서 식량을 조달하여, 얻을 득자와 양식 량자를 인용한데서 유래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득량역 주변의 간판과 벽화들이 설치되어 SNS에서 크게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한다.

 

 

 

 

 

 

득량역이다.

마치 기차가 오가는 듯 방송을 하고 있어 진짜 열차가 다니나?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득량역은 1930년 경전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개시한 보통역이다. 지역주민의 감소로 점차 이용객이 줄어들면서 역이 폐쇄될 위기를 겪었지만 2011년 문화관광체육관광부가 주관한 문화디자인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역 앞 추억거리와 함께 역사가 문화역으로 꾸며지면서 득량역은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지역 문화공간의 중심이 되었다. 옛  문방구, 다방과 사진관, 이발관이 조성된 추억거리 사이로 목조 슬레이트 단층역사로 전형적인 시골 역사였던 옛 득량역의 모습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겨났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합실

 

 

 

 

 

풍금이 있고,

 

 

 

 

 

운임 요금표도 있다.

 

 

 

 

 

철로로 나서본다,

상행선이다.

 

 

 

 

 

하행선쪽,

 

 

 

 

 

 

 

 

 

 

 

 

이순신운주당.

 

 

 

 

 

역사 한켠에 노거수라고 할 것 까지는 없으나 싱싱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득량역 주변을 둘러보고 역사를 나선다.

 

 

 

 

 

별이 빛나는 밤

 

 

 

 

 

득량의 량자에서 양이를 탄생시켰나?

 

 

 

 

 

 

 

 

 

 

 

 

득량농협에서 추억의 거리는 끝난다.

관광객의 입장에선 거리가 좀 짧다.

 

 

 

 

 

되돌아 간다.

추억의 거리를 둘러보는데 35분쯤 소요하였다.

 

 

 

 

 

▣ 강골마을 / 열화정,

 

강골마을에 왔다.

주차 공간이 마땅찮다.

이정래고택 앞 도로변에 주차했으나 주차장은 아니다.

먼저 열화정으로 간다.

 

 

 

 

 

열화정으로 가는 길에 꽃구경하고 가라는 집이 있어 잠시 둘러본다.

 

 

 

 

 

 

 

 

 

 

 

 

썩 ~ 

화려하거나, 다양하거나, 많거나 하지는 않다.

 

 

 

 

 

되돌아 나와 열화정으로 향한다,

 

 

 

 

 

열화정은 마을 뒷편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일섭문이든가?

 

 

 

 

 

열화정(국가민속문화재 제162호 / 기쁠 열, 말씀 화자를 쓴다.)

 

이 정자는 조선 헌종11년(1845)에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열화란 '기쁘게 이야기한다'는 뜻인데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것으로 일가친척들 간의 우애와 화목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곳에서 이진만의 손자 이방회는 당대의 석학 이건창 등과 학문을 논하였다고 전하며, 한말의 의병으로 유명한 이관회, 이양래, 이웅래 등을 배출한 곳이다. 정자 맞은편의 산에 만휴정을 지어 전원의 정취를 즐겨다 하나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정자의 형식은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ㄱ'자형의 누마루 집이다. 집의 구성은 가로칸 가운데  2칸에 방이 아래. 위로 있고, 세로칸은 누마루가 있다. 방의 앞 뒤에도 누마루가 있으며, 아랫방 뒤는 골방이고 방아랫쪽에는 불을 지피기 위한 공간이 있다. 마을 앞에는 아담한 문과 연못이, 정원에는 나무들이 주변의 숲과 어울려 있는 전통적인 조경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열화정을 둘러보고 이정래 고택쪽으로 같은 길을 따라 되돌아 간다.

 

 

 

 

 

마을 가운데쯤 일련의 대단한 한옥이 몇 집 모여있다.

첫번째 만나는 집이 이정래 고택(국가민속문화제 제157호)을 만난다.

 

 

 

 

 

 

광채의 뒤편인 셈이다.

탈곡기, 풍무, 지게 등등이 가지런히 정리하여 두었다,

 

 

 

 

 

주인이 살고 있는 집이어서 대문간에서 기웃거리니 마침 주인장이 나온다.

집을 둘러보러 왔다고 하니 어디서 왔는지 묻고, 부엌을 지나 뒤로 돌아가 보라고 한다,

전라도 사람치고 묵뚝뚝한 듯, 말 수가 적으면서도 충분한 배려를 해 준다.

 

 

 

 

 

이정래 고택은 오봉산을 마주하여 남향으로 자리 잡은 옛 가옥이다. 안채는 1900년 전후에, 맞은편 광채는 19세기에, 나머지는 모두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이 안채는 'ㄷ'자형으로 날개가 뒤로 덧달아져 있다.서쪽부터 부엌, 큰방, 대청2칸과 끝에 작은 방이 있다. 앞쪽에는 모두 툇마루를 깔았으나 부엌앞은 토광을, 동남쪽에는 책광을 만들었다. 대청과 마루 사이에는 문이 있으며, 작은방의 위.아랫방 사이에도 문이 있다.

 

안채 맞은편에 있는 곳간채는 일자형 집으로 낮은 곳에 지었으며, 특히 야트막하게 지어져 안채의 좋은 전망을 방해하지 않도록 고려했다. 서쪽 칸은 토광이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문간채는 가운데에 문을 두고 북쪽에 마구간을, 남쪽에는 문간방을 설치했다.

 

안마당의 정원은 비록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뒤뜰과 사랑방 동쪽의 후원, 굴뚝의 모습 등에서 아담한 남도주택의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광채,

 

 

 

 

 

부엌을 지나,

주인장이 이야기 하는 안채 뒷편으로 들어가 본다.

 

 

 

 

 

 

장독대가 있고.

 

 

 

 

 

안채의 측면에 아담한 툇마루가 있다.

 

 

 

 

 

툇마루는 안방?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방향을 약간 달리하여 바라본 안채 옆면의 툇마루.

가스통이 있는 쪽 부엌문을 통하여 들어온 샘이다. 윈만해선 부엌을 통과하여 안채 뒷편으로 들어가 보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텐데 주인장이 이 안채의 측면과 뒷면애 대한 애착이 많은가 보다. 

툇마루에 앉으면 장독대와 마주한다.

 

 

 

 

 

뒷쪽으로 돌아가 본다,

 

 

 

 

 

뒷쪽에도 툇마루가 있다.

 

 

 

 

 

뒷쪽은 언덕과 담장으로 폐쇄되어 아늑하다고 할까?

누군가에도 방해 받지 않은 나만의 공간이라 생각을 해 본다.

 

 

 

 

 

이래서 주인장이 안채 뒤편으로 들어가 보라고 했구나.

 

 

 

 

 

유자?  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주인장께서 수장고을 구경시켜 주겠다 한다.

담장밖 별채를 지어 대대로 사용해 온 여러 생활용품들이 빼곡히 보관하고 있다.

수장고의 물건은 사진촬영을 하지 않았다.

 

 

 

 

 

이정래 고택을 둘러보고 다음 집으로 간다.

배려해준 주인장게 감사하다.

 

 

 

 

 

마을 앞에 인공의 연못이 있다.

 

 

 

 

 

전주쪽으로 직진해 본다.

우측은 이정래 고택이고, 좌측은 이진래 고택이다.

 

 

 

 

 

우물에서 길은 끝난다.

 

 

 

 

 

 

 

 

 

 

 

 

현 음용으로는 부적합 할 듯.

 

 

 

 

 

되돌아 연못 쪽으로 나와,

 

 

 

 

 

이진래 고택(국가민속문화제 제159호)으로 왔다.

대문이 닫혀있어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

 

 

 

 

 

대문 틈으로 사랑채를 본다.

 

 

 

 

 

 

기웃 기웃 담 너머로 카메라를 올려 몇 장 촬영해 본다.

좌측의 건물이 중문채, 우측 건물이 사랑채이다.

 

 

 

 

 

이용욱은 누구인가?

이진만 - 이oo - 이방희 - 이oo - 이진래로 이어지는데.....

 

 

 

 

 

역시 각도를 달리해 바라본 중문채와 사랑채이다.

 

이 집은 강골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앙에 위치하는데, 조선 헌종 1년(1835)애 이진만이 지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은 원래 초가로 지었으나 낡고 허물어져  이진만의 손자인 이방회가 기와집으로 개축하였고, 솟을대문도 원래 3칸이었던 것을 이방회의 손자 이진래가 5칸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이 집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 사당. 연지, 정자가 규모있게 구성되어 이 지방 사대부 가문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웅요한 민속자료이다.

 

대문간채는 5칸으로 중앙의 1칸은 문간으로 솟을대문이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여러개 있어 문객들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바같마당을 지나면 안채로 향하는 중문채가 있고 3칸의 광으로 되어있다.

 

사랑채는 남도식 구성으로 서쪽부터 부엌, 사랑방. 사랑윗방. 대청의 순으로 놓여있다. 부엌과 사랑윗방 뒷쪽에는 툇마루가 있고, 사랑방부터 대청까지 앞쪽에도 툇마루가 있다. 부엌의 윗쪽에는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안채는 동쪽 끝에 부엌이 있어 장독대와는 멀지만 사랑채, 아래채와는 가깝게 있어서 편리한 점이 많다. 부엌 옆에 큰방. 대청. 작은방이 있으며, 큰방부터 작은방 앞까지는 툇마루가 깔려있다. 작은방은 옆쪽에 출입문을 달아서 별도의 공간으로 꾸몄다,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채은 안채의 오른쪽 약간 높은 곳에 있다. 안채와 사당채는 같은 마당의 연속임에도 느낌을 달리하는데, 마당과 건물 그리고 담장이 이루는 바닥 높이가 달라서 보는 방향에 따라 마당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보성 이준회 고택(국가민속문화제 제160호)

입구 표시석에 이시래 가옥이라 적혀있다.

이 집 또한 대문이 닫혀있어 둘러 볼 수 없다.

 

 

 

 

 

이준회 고택은 이진래 고택의 서쪽에 자리한 옛 가옥이다. 오른쪽 기와집이 이진래 가옥의 일부이다.

근데 저 동그란 반원형의 장독대?는? 문의 위치를 보아 이집 소유인가 보다.

 

 

 

 

 

대문간 옆에 사랑채?가 있어 현 도로와 접하고 있고,

 

 

 

 

 

옆에 집안으로 통하는 작은 샛문이 있다.

 

 

 

 

 

이 집의 특징은 초가이다.

안채도 초가로 되어 있다.

 

 

 

 

 

집 주위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그윽한 느낌을 준다. 문간채 상량문의 기록에 따르면 1891년에 지어졌고, 안채의 동쪽 아랫방은 그 후 늘려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집이다.

 

안채는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이 일자형으로 배치되는 전형적인 남도 방식의 4칸이었는데, 아래쪽에 1칸을 덧달아서 지금은 5칸 집이 되었다. 특히 안채 서쪽에 담을 쌓아서 뒤곁의 휴식공간을 보호하는 방법은 오래된 기법이다. 사랑채 역시 4칸 집으로서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식 평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쪽 담장을 따라 들어가면 조그만 초가 대문이 나타나고 대나무숲 가운데 아담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마당 서쪽에는 행랑채가 있고, 사랑채 뒤에 안채가 있으며, 안마당의 서쪽에 곳간채가 있다. 동쪽에는 보성 이진래 고댁의 곳간채가 등지고 있어서 장독대만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초가집으로 서쪽부터 툇마루가 있고 그 옆의 앞쪽에는 작은방, 뒤쪽에는 뒷방이 있다. 옆에는 대청, 큰방이 있는데 방 뒤쪽 아래에는 아궁이, 위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대청과 큰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맨 끝에는 나중에 지은 방이 위.아래로 있다.

 

사랑채는 방을 가운데 두고 대청을 끝에 두는 남도식으로 되어있다. 서쪽부터 부엌, 사랑아랫방. 윗방. 대청이 있다. 부엌 앞에는 부엌방이 있고, 대청은 개방되어 있다.

곳간채는 건물이 우람하고 커서 안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남쪽부터 3칸은 곳간이고 맨 위칸은 마루를 깔았다. 마루는 아마도 대청기능을 지녔던 듯하다.

 

대문간은 초가지붕으로 근래에 바깥에 화장실을 덧붙여서 'ㄱ'자형으로 되었다, 서쪽에는 대문간이 있으며, 동쪽에는 화장실이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 앞에 있으며 북쪽에 부엌, 큰방, 작은방이 있다. 중앙에 있는 들마루와 솟을대문이 대나무로 되어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상 강골마을을 둘러보았다.

이웃한 초암마을에 초암정원이 있어 차량으로 이동하였으며 다음 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