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 금성관, 나주목사 내아, 나주향교, 영산포홍어, 도래마을, 산림자원연구소.
지역 어르신들의 기로연 나들이로 나주로 선정했다.
그래서 오전 일정으로 나주 시내 금성관, 관아, 향교 주변을 둘러보고 영산포로 이동하여 중식후 나주 도래마을과 산림자원 연구원을 둘러보는 일정을 잡았다.
나주 시내엔 조선시대 객사인 금성관과 나주목 문화관, 내아, 곰탕거리가 서로 이웃해 있고, 도보로 5~10분여 거리에 나주 읍성의 서성문인 영금문이 복원되어 있고, 이내 나주향교가 있다. 이 구역은 금성관 주차장에 주차후 도보로 함께 둘러보면 된다. 향교로 가는 길에 노송과 잘 단장된 길거리를 둘러보는 것도 볼거리가 된다.
이 외에 광주학생동립운동 진원지인 나주역사에 구나주경찰서, 일제시대 쇠고기 통조림 공장이었던 구 화남산업 등이 있고, 나주 동문밖 근거리에 석당간이 있다. 나주 시청 들머리에 완사천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잠시 둘러봐도 의미가 있겠다.
영산포에도 황포돛대선착장과 영산포등대, 구일본인지주가옥, 영산포풍물시장도 둘러봄직 하겠으나 일정상 둘러보지 못했다.
도래마을과 산림자원 연구소는 약 1km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이 둘러보면 된다.
▷가는 길
▷탐방코스 (2022. 11. 26.)
나주 금성관, 나주목사 내아, 나주향교 - 영산포홍어 중식 - 도래마을 -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
▷탐방후에
▣ 나주 객사 금성관, 정수루, 나주목 문화관, 내아 금학헌
나주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이다.
망화루 편액을 달고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외삼문이 있다.
외삼문과 금성관 사이에 금성관 내삼문터(지)가 있다.
금성관 앞쪽의 가로로 길게 표시된 직사각형 구역에는 금성관 객사 가장 안쪽에 있던 출입문인 내삼문이 있던 터로 세 칸 규모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금성관 / 보물 제 2037호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다.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 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었던 곳이다. 특히 정청(나주목은 금성관)에서 전패(왕의 초상을 대신하여 봉안한 목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궁이 멀어서 임금을 뵙지 못할 때 멀리서 궁을 바라보고 행하는 유교 의식)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즉 사신을 접대하고(대빈객), 왕정의 위덕을 펴서(선성덕),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엄관부) 곳이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4.12~1489 재임)가 망화루(정문의 누각)와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김개 목사가 1617년 4월 21일 중수하고 1775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가 1963년 보수를 거쳐 1976년 전부 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 정비 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 서익헌을 복원(2004~
2008)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현지 안내문에서>
나주목 객사 금성관 동익헌/ 벽오헌
나주목 객사의 동쪽에 있는 건물로 관찰사가 나주목에 왔을 때 집무처로 사용하였으며, 품계가 정3품 이상의 관리가 묵었던 곳이다. 조선초 이행 관찰사가 벽도동 나무가 근처에 있어 벽오현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금성관 뒷편에 수령 65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금성관 객사를 시계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돌아 앞쪽으로 나와 우물터로 왔다.
금성관 전경
사마교비
사마교비는 조선시대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강등되었을 당시 정지호(1650.12.25~1653.1)현감이 사마교를 보수한 내력을 기록하여 1651년(효종2)에 세운 것이다.
서내동 25-3번지 일대를 '사매기'라 부르는 유래를 살펴보면 1011년(고려 현종 2) 거란의 침입을 받아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가다 제2대왕 혜종의 고향인 나주에 와서 10여일을 머물렀다. 이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이후로 이 다리를 사마교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비는 원래 서내동 25-2번지에 있었는데 1968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규모는 높이 100cm, 너비 37.5cm이다.
비에는 원래 앞면과 뒷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되어 마모가 싶해 지금은 뒷면 일부 글씨만 확인할 수 있다.
금성토평비
비는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는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때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세운 것이다. 원래는 나주목 관아 아문인 정수루 앞에 세웠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겨다가 1976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 비문 내용을 보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까지 농민군이 들어오는 과정과 수성군을 이끈 민종렬 목사(1893.11.20~1895 재임)를 중심으로 한 수성군의 방어계획과 나주성 전투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유일하게 철비 1기도 있다,
비석군.
객사 금성관을 둘러보았다.
정수루(정수루)
이 누각은 나주목 관아문으로 1603년(선조36)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동계 우복룡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여지도서>를 보면, 민백남 목사가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름도 영수루로 적혀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구조나 양식 등으로 보아 19세기에 크게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을 지나면 나주목 관아인 동헌인 외동헌(제금헌)과 내동헌(금학헌)이 있었다. 지금은 내동헌인 목사내아만 남아 있다. 정수루 주변에는 목사를 보좌하던 향리들의 집무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나주목의 궁실인 나주객사 금성관과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 등의 관아 건물이 배치되었다.
한편 정수루 큰북은 학봉 김성일(1583.8.12~1586.10 재임)이 나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설치한 것이 인연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학봉 김성일은 나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나주가 매우 번화한 고을이라 민정이 막힐까 두려워하여 북 하나를 내 걸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을 내리기를 "만약 원통한 일을 하소연하고 싶은 자는 반드시 와서 이 북을 치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의견이 있으면 반드시 전달해 일이 막히는 법이 없어 위 아래가 서로 화합하니 온 고을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해온다. 지금의 북은 2003년 나주시가 제작하여 설치한 것이다. 학봉 김성일은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인덕지(현재의 5일장에 있던 연못으로 나주목의 동사정)를 정비하고 경현서원을 청건하기도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나주목 문화관
나주목문화관과 관아 사이의 골목이다.
목사 내아 금학헌
금학헌의 벼락맞은 팽나무 이야기
목사내아 금학헌에는 오백년 세월동안 묵묵히 이곳을 지켜주는 벼락맞은 팽나무가 있습니다. 어느 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던 밤 이 팽나무는 벼락을 맞고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금학헌의 팽나무는 뿌리깊은 나무의 강한 생명력으로 기적처람 살아나 여전히 목사 내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원래 벼락 맞은 나무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큰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령스런 기운을 지니고 있습니다.
쉿! 당산에게만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자식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출세하고 싶은데 세상이 당신을 몰라 줄 때, 목사내아 금학헌 팽나무에게 마음껏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으십시요, 오백년 동안 말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주었던 생명력 강한 팽나무는 받드시 당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가슴 깊이 경청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현명한 방법을 가만 가만 당신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이곳에 오면 꼭 오백년 된 벼락 맞은 팽나무를 만나십시오. 금성산의 맑은 기운이 뻗어 내린 아름다운 한옥-목사내아 금학헌의 팽나무가 선사하는 영험한 체험을 당신 스스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지금은 한옥체험장으로 운영 되는 것 같다.
▣ 나주 향교 가는 길 / 노송, 골목길, 나주읍성 서성문 영금문, 나주향교
이로당 백송
나무둘레 : 2m
소 재 지 : 나주시 서내동 48번지
본 해송은 400여년 전 조선시대부터 나주목의 관아터로 사용된 주사청이 위치한 집무실 정원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로 오랜 기간 동안 모진 풍파를 헤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직립성인 나무가 마치 용이 누워있는 와용의 형태로 자라 그 형태가 기묘하고 영험함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지역 주민들로보터 무병장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성수로 전해오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서성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꽃다비>
꽃차 전문점
나주의 명자 전통쌀엿 정금애 조청 엿집
쌀다방 카페
한모두모 두부집
카페 '향교길'
서성문으로 왔다.
바깥 쪽에서 바라본 서성문,
음식점 '향교길목'
나주 향교에 왔다.
나주 향교 들어가는 길은 정문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측문으로 이어진다.
입구의 비석군
나주향교 운영 관리와 관련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여 놓은 비들이다.
특히 맨 우측의 충복사 유허비는 정유재란 때 향교 노비의 우두머리(수복) 김애남이 위패를 안전하게 보호한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측문인 영난문으로 들어서면 명륜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동재 건물이다.
유생들이 공부하교 유숙하던 곳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
다른 향교의 기숙사 건물보다 규묘가 훨씬 크고 출입문의 일반적인 동,서재의 위치와 달리 밖을 보도록 하였다.
향교는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지방에 설립한 국가 교육기관이다.
나주향교는 고려 성종6년(987) 8월 전국 12목에 향교가 들어설 때 세워졌다. 고려시대 나주향교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 태조 7년(1398)에 다시 지을 때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시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창건이후 여러차례 중수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 중기 건축양식으로 추정되는 대성전의 건축양식에서도 창건 이후의 중건. 중수 사실을 알 수 있다. 헌종 5년(1839)과 고종1년(1873)에 크게 고쳤으며 근래까지 여러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 성종11년(1480)에는 교생 10인이 동시에 과거(과거 생진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어 당시 나주향교 교수로 있던 오한 박성건(1408~1487)이 금성별곡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는 향교의 수복 김애남이 위패를 등에 지고 금성산으로 피했다가 다시 안전하게 모신 공으로 정려가 내려져 사후에는 충복사(1920년대 없어짐)를 지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는 충복사유허비만 있다.
나주향교 건물 배치는 서울의 문묘와 같은 형식인 전묘후학(앞쪽에 제사공간, 뒤쪽에 학습공간)으로 특이하다. 현재 향교 안에는 보물 제394호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사마재 등 부속건물이 있다.
오늘날 나주 향교는 전교를 중심으로 향교의 유지관리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 계승과 미풍양속 창달에 힘쓰고 있으며 매년 2월, 8월 상정일에는 석전대제를 모시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명륜당
앞쪽 마당의 벽돌 구조물은 유생들의 조회와 관련된 것이라 한다.
또한 명륜당이 뒷편에 위치하고 대성전이 앞쪽에 있어(전묘후학) 일반적인 다른 향교의 전학후묘와 다르다.
이는 평지에 위치하여 사당인 대성전을 앞에 두어 신위에 대한 존엄성을 부각시키는 형태라고 한다.
서재
일반적으로 동재. 서재의 방문은 명륜당 앞 마당쪽으로 향하는데 이곳에는 반대쪽으로 내었다.
대성전 / 보물 제394호
향교의 중심건물로 공자를 중심으로 한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건물의 크기나 모양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성전 중에 으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유교건축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성전 벽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말과 임진왜란 이후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 대성전을 참조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은행나무,
잘 생기지는 않았다.
나주향교 서편 인근에 39-17 마중이란 카페가 있다.
명륜당과 대성선은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수령 500년의 비자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영산포홍어
중식은 영산포홍어집이다.
대표전화 061 - 337 - 5000
예약 06 1- 337 - 0020
단체손님으로 3층에 식단을 차렸다.
▣ 나주 도래마을
나주 도래마을 연혁은 마을 입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과거 식산과 연계하여 산림자연연구소와 이곳을 찾았을때 나름 기록하여 두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마을 입구의 양벽정, 마을 뒷편 산중턱에 자리잡은 계은정, 계은고택(홍기응가옥), 홍기창 가옥, 도래마을 옛집이 서로 이웃하여 있고,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뼈대의 노출이 많아 집을 어떻게 짜 맞추었는지 궁금한 사람은 홍기헌가옥을 찾아볼 만 하다.
도래마을은 마을 뒷산인 감태봉에서 내려온 물이 셋으로 나뉘어 내천자 형태로 마을을 통과하여 도천이란 한자어가 생기고 우리말로 바뀌면서 도래(도내)가 되었다한다.
마을 입구의 사각 정자.
풍산홍씨는 조선 단종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화가 미칠것을 대비하여 나주로 옮겨온 후 도래마을의 강화 최씨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지금의 풍산홍씨 동성마을을 이루었다.
풍산홍씨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벽초 홍명희(임꺽정을 씀)가 있으며 그의 조부 홍승목이 이곳 도래마을 출신이라 한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양벽정은 나중 나오면서 둘러볼 것이다.
나주 계은고택(홍기응가옥)
과거 이곳 도래마을을 찾았을때 대문이 닫혀있어 둘러보지 못한 집이어서 오늘은 문화관광 해설사와 동행해서 둘러볼 수 있을려나 했는데 오늘도 문이 닫혀있다.
나주 계은고택은 풍산 홍씨가 모여사는 도래마을의 종가집이다.
도래마을은 조선 중종대에 풍산홍씨 홍한의가 조광조와 사마시(소과) 동기 합격자라는 이유로 기묘사화의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 풍산 홍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계은고택 가옥은 안채 상량문에 "임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종 29년(1892)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서쪽으로 향한 직선 축에 맞추어 깊숙한 안쪽에 안채, 가운데에 'ㄱ'자 형태의 사랑채, 안쪽에 솟을대문을 갖춘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향은 남향이다. 전체적으로 남쪽 지방 양반 주택의 전형적인 공간 구성이 나타난다.
안채는 일(-)자형이며 6칸 전후의 머리 툇집으로 뒤로 반 칸 또는 한 칸을 덧붙여 달았다. 또한 2개의 대청마루가 있으며 울 사이를 벽으로 나누어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한 것은 전남 지방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평면 구성이다. 사랑채도 6칸 전후의 머리툇집이며, 전체적으로 별당식으로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정원에도 전통적인 조경방식이 잘 나타난다. 행랑 마당 사이의 담장에는 수키와를 마주 엎어 구멍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은 사랑마루에서 대문에 들어서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계근고택의 대문
대문 양면에 가로로 돌출된 나무가 덧대여 있어 이를 밟고(사다리삼아)대문을 넘어 갈 수 있다.
흉년에 이 대문을 넘어와 양식을 가져갈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이 경우 대문을 넘어야 하므로 많은 양의 양식을 가져가지 못하고 약 1말 정도 가져갈 수 있었다한다,
홍기창가옥으로 왔다.
사랑채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 잔디밭으로 정원이 되어 있고,
당시 토기와는 이렇게 한켠에 나란히 쌓아 두었다.
현 대문
과게엔 중문이었지 싶다.
서기당 홍기창 가옥.
숙박문의 010-4602-2983
010-3011-7971
일제시대에 지은 집으로 두리기둥을 썼다.
옛 담장
안채의 맨 오른쪽 방은 사랑채 역할을 한다.
따라서 대청마루에 문을 달았다.
당일은 집안 식구들이 모여 김장을 하고 있는 듯 하였다.
홍기창 가옥과 접하고 있는 집으로 <산에는 꽃이피네>라는 상호로 펜션으로 이용하는 듯 싶다.
정원이 정갈해 보이나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계은고택 앞쪽의 도래마을 옛집으로 왔다.
도래마을 옛집은 공간 이용에 따라 칸살이를 자유롭게 배열하는 19세기 후반의 한옥 특징이 반영된 집으로 1936년에 지어진 한옥이다. 2006년 10월 시민들의 후원과 참여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전하는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후원기금으로 집을 매입히고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안채와 문간채의 부서진 기와와 낡은 목재를 새로 바꾸고, 슬레이트로 바뀐 대문채 지붕을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였다. 나주 소반과 전라도 지역의 목가구, 살림살이를 갖추어 집을 꾸몄다.
안채 뒷편
별당채는 현재 생활을 반영한 현대식 한옥이다. 전통 방식으로 집을 짓고, 내부 구조와 편의시설은 현대식으로 하였다. 한옥의 의미와 기능을 새롭게 소개하면서 근대 한옥인 안채와 함께 시간 흐름에 따른 한옥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2009냔 3월에 일반에 개방하고 시민들이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옥숙박체험과 다양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과 전통문화 헤험 행사가 열린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사랑채 툇마루가 넓다.
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양벽정을 둘러본다.
풍산홍씨 양벽정 문중 소유이다.
양벽정은 1587년(선조20) 현 위치로 부터 10여리 떨어진 화포(현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 2구 복구마을 앞)에 홍장(1515~1593)이 창건한 정자이다.
홍장은 선공감역 및 성균사업 등을 지냈으며, 이곳에서 양산보, 정철, 최시망 등 댕대 명현들과 교류하였다.
퇴락한 후 후손 홍찬희 등에 의해 현 위치에 1946년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1948년에 완공하였다. 이때 문 앞에 연지를 만들고 이층 누각대문을 세웠다.19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홍인식, 홍준희 등 홍장의 후손15명의 시가 전해진다.
양벽정은 근대 건축의 단면을 충힐히 보여주며 검소하고 질박한 정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49년부터 마을민들의 합동 세배 장소로, 1974년부터 '도래의 날'행사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양벽정
출렁거릴 양, 푸를 벽자를 쓴다.
양벽정을 둘러보고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로 이동한다.
▣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
도래마을과는 가까운 곳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뒷편 식산 등산과 연계하면 좋다.
입장료, 주차료 등은 없으며 제법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어 이곳 저곳 산책하기 좋다,
중앙의 메타세쿼이아 길
지금이 11월 말(26일)인데 국화꽃이 탐스럽다.
오늘은 시간상 잠시 둘러보는 것으로 한다.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를 둘러보고 귀가를 서두른다.
추황이라는 품종의 배를 구입하였다. 일본으로 수출도 많이 한다하며 맛이 좋다고 관광해설사의 권유에 의해서다.
몇 개식 소포장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해본다.
산청에 도착하여 약초 식당에서 저녁 식사후 귀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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