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남원 몽심재, 시립김병종미술관

정헌의 티스토리 2023. 1. 18. 23:29

■남원 몽심재, 시립김병종미술관

 

남원시내에 가볼만 한 곳으로 광한루원과 예촌이 서로 이웃해 있고,  요천 건너편 춘향테마파크 주변에 향토박물관. 시립 김병종 미술관과 미안커피숍. 항공우주천문대, 함파우 소리체험관 등이 근거리에 있다. 

남원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수지면에 몽심재가 있다. 조선후기 전북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형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가옥으로, '이상현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 소개되어 있어 찾아본다.이웃하여 죽산박씨 종가집과 사당, 이웃한 또다른 가정집이 있어 닮은 듯 다른 한옥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오후 시간엔 남원에서 중식후 시립 김병종 미술관과 예촌 일부를 둘러보았다. 

 

 

▷가는 길

    내비에 남원 몽심재로 검색하여 찾아가면 되겠다.

 

 

 

▷탐방코스

남원 몽심재 - 중식 - 김병종미술관 - (남원예촌)   / 2023. 1. 18.

 

 

▷탐방후에

 

▣남원 몽심재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의 저자 이상현님은 몽심재 찾기를 난감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먼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내비에 남원몽심재를 입력하면 바로 집앞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주차장은 넓찍하여 주차에 어려움은 없다.

 

 

 

 

 

 

주차장 바로 앞에 몽심재 솟을 대문이 있다.

사진상 앞쪽 좌측에 하마석, 우측편에는 몽심재 안내문과 주요민속자료 제149호 남원 몽심재 표지석이 보인다.

 

 

 

 

 

 

대문을 들어서면 살짝 오르막이다.

 

남원 몽심재 고택은 연당 박동식(1753~1830 / 박문수의 16대손)이 지었다고 한다.

고택의 뒤에는 산이, 앞에는 낮은 구릉이 있다. 여러 채의 건물이 산자락의 경사면을 따라 앞뒤로 높이를 다르게 하여 담장 안에 세워져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마당의 끝 부분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랑채을 지었다. 사랑채 옆의 중문채를 지나면 안채가 있다. 안채도 아래 공간을 외양간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받침을 높게하여 지었다. 건물들이 높이 솟아 있음에도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멋과 그윽한 정취를 자아낼 만큼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이 고택은 원형이 대체로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호남지역 양반가의 전형적 주거 양식을 알 수 있다.

이 고택은 특이하게도 사랑채에 팔각기둥을 사용하였고 아랫사람이 거주하는 문간채 동쪽에 대청을 한 칸 들였다. 이 대청은 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공간이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우측으로 이내 상당한 바위가 있다. 어떤분은 이를 호석(虎石)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호석의 문간채 쪽에 존심대(存心臺),청와(淸窩)? 靖窩(정와)? 각자가 있다,

청와는 직역하면 맑은 집으로 그리하여 군자가 사는 집일 것으로 이야기를.....저자 이상현님은 설명하고 있으나, 어떤 분은 정와(靖窩/ 편안할 정, 움집 와)로 표시한다. 

현장에서는 잘 몰랐는데 사진으로 보니 정와가 맞는것 같다.

 

 

 

 

 

 

사랑채 마당에서 바라본 대문채와 바위

대문채의 오른쪽 방은 마루를 깔았고, 좌측엔 2개의 방과 요요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석의 위치 가늠을 위해 올려본다,

 

 

 

 

 

 

존심대, 청와 (정와)각자외 3군데 더 각자가 있다.

대문간채에 붙어있는  정자를 요요정이라 하고(현판은 없다), 앞쪽에 사각의 연못이 있다.

 

 

 

 

 

 

主壹岩(주일암)이라 하는데 일 자를 저렇게도 쓰나보다.

 

 

 

 

 

 

靡他基適(미타기적/ 쓰러질 미 또는 갈 마, 다를 타, 터 기, 맞을 적)

이곳 저곳 인터넷상에서 검색해 보지만 무슨 뜻인지........

 

 

 

 

 

 

千蒼崖(천창애 / 푸를 창,  언덕 애)

 

 

 

 

 

 

존심대 바위 위에는 양? 모양의 돌이 있고, 우측으로 넓은 마당을 이루고 있다.

 

 

 

 

 

 

호랑이?  양?

 

 

 

 

 

 

사랑채.

기단이 상당히 높다.

지형이 경사가 있어서일 것이다.

 

 

 

 

 

 

사랑채의 기둥은 팔각이다.

흔치 않은 기둥이다.

예부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생각해 왔고, 그래서 하늘과 가까운 지붕에는 둥근 서까래를 썼고, 땅에 속한 기단과 초석에는 네모난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도 저도 아닌 팔각은 하늘과 땅을 잇는 모양으로 제단에나 어울리고 살림집에 팔각을 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그래서인지 세상 너머 신선을 그리는 도가적인 분위기가 집 전체에 흐른다고 하지만 글쎄 모르겠다.

 

 

 

 

 

 

몽심재 현판이 달려있는 벽면의 두개의 주련에

隔洞柳眠元亮夢(격동류면원랑몽)  마음을 등지고 잠든 수양버들은 도연명(원랑)을 꿈꾸는 듯하고

登山薇土伯夷心(등산미토백이심)  산속의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듯하다.  /장미미, 고비미

 

몽심이란 당호는 이 시구의 맨 끝 몽, 심 두자가 합쳐진 것이라 한다,

 

 

 

 

 

 

 

 

 

 

 

 

 

다른 쪽에서 바라본 사랑채.

 

 

 

 

 

 

사랑채에 붙어 있는 중문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선다.

 

 

 

 

 

 

안채는 앞에서 바라보았을때 ㄷ자 형이고,

앞쪽에 석지가 놓여있다.

 

 

 

 

 

 

 

 

 

 

 

 

 

 

 

 

 

 

 

 

 

석지, 글자 그대로 돌 연못이다. 연꽃 하나쯤 피울 수도 있겠다.

어떤분은 돌확이라 한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 장소로 청결유지를 위한 배려라 한다.

또 어떤분은 학독이라 한다. 돌로 만든 절구로 보리나 들깨 등의 껍질을 벗길떼 사용한다고 한다. 이 경우는 부엌 입구쯤이나 놓아야 마땅하지 마당 한 가운데 놓지는 않을 것 같다.

 

 

 

 

 

 

안채 마루에서 바라본 석지?.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수평을 이루고 있지 않아 석지보다는 수평에 시선이 많이 간다.

 

 

 

 

 

 

사랑채 뒷편의 아궁이.

 

 

 

 

 

안채의 측면이다.

이곳에 부엌과 마루가 있다. 그러고 보니 부엌의 위치가 애매하다,

부엌의 위치는 온돌방 난방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으나 뒷쪽에 부엌이 있는 경우는 흔치않다.

 

 

 

 

 

 

이곳은 안채 뒷면,

 

 

 

 

 

 

장독대와 텃밭이 있다.

 

 

 

 

 

 

안채와 주변을 둘러보고 중문채를 나선다.

앞마당의 빗물은 이곳 중문앞 수로를 거쳐 연못으로 흘러들게 하였다.

 

 

 

 

 

 

문간채에 붙어 있는 정자(요요정)와 바위, 사진에 보이진 않지만 좌측에  연못이 있다.

현지의 안내문에 보이는 정자(대청)를 일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의 공간이라고 표현하였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대청과 연못, 앞쪽의 커다란 바위와 한켠의 평평한 바위등 일꾼들만을 위한 배려라고 보기엔 과하다 싶다.

 

 

 

 

 

 

몇 명 정도는 둘러앉아 차 한잔 할 수 있겠다,

 

 

 

 

 

 

대청(요요정) 앞의 연못,

 

 

 

 

 

 

건물주 박동식이 연꽃을 심어 즐겼다하여 연당(연당)이라고도 불리며 연당은 박동식의 호가 되었다.

연못 가운데 놓인 징검다리가 독특해 보이며, 연못 끝 큰 돌에는 정축(渟滀/물괼 정, 쌓을 축), 임리(臨履/임할 임, 신 리)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한다.

 

 

 

 

 

 

연못과 요요정을 둘러보고 대문을 나선다.

 

 

 

 

 

 

앞에서 바라보았을때 몽심재 우측에 죽산박씨 종가집이 있다.

 

죽산박씨가 이곳 수지면 호곡리로 들어온 시기는 대략18세기 초다. 이들은 고려말 조선을 반대하고 숨어든 두문동 72현 중 한명인 박문수의 후손이다.

죽산박씨가 남원애 들어온 것은 박문수의 손자인 박자량 때다, 한성판윤으로 있던 박자량은 이방원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내려왔다가 처가(남원양씨)가 있던 지금의 남원 수지면 초리에 눌러앉았다.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현재의 호곡리로 집단 이주하여 죽산박씨 씨족마을을 만들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다.

건물 모양은 몽심재 사랑채와 같지 않지만 기단 등 큰 이미지는 비슷하다.

 

 

 

 

 

 

사랑채 뒤로 올라가면 안채가 있다.

 

이 저택은 박문수(朴門壽)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온 집이다.

박문수는 고려말 충신으로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삼로(三老)로 불리었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가족들을 이곳 호곡리로 내려보냈다. 그후 그의 후손들은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 동북쪽에는 박문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ㄷ>자형 안채는 조선 헌종 7년(1841)에 지었으며, 사랑채는 18세기 말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역시 몽심재와 비슷한 느낌이나 같지는 않다.

 

 

 

 

 

 

부엌쪽 문이다.

 

 

 

 

 

 

종가집 우측 뒷편에 사당이 있다.

 

 

 

 

 

 

충현공 부조묘

송암 박선생 충현공 휘 문수 부조묘 즉 박문수의 불천위(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가 모셔져 있다.

 

 

 

 

 

 

비교적 근년에 신축한 건물로 벽회등이 깨끗하고 선명하다.

 

 

 

 

 

사당앞 샛문이 있어 들어가 본다,

 

 

 

 

 

 

이 집도 보통 이상의 집이다.

 

 

 

 

 

 

이곳 저곳 둘러보다 후에  주인을 만나 양해를 구했다.

 

 

 

 

 

 

이집 또한 앞채 앞쪽에 사랑채가 있다.

 

 

 

 

 

 

관리상태가 조금 부실하지만 체목으로 보아 잘 지은 집이다.

 

 

 

 

 

 

이집 주인장 오래 전부터 정원을 관리해 왔나보다.

 

 

 

 

 

 

인위적으로 만들었지만 여러 연리지를 볼 수 있다.

 

 

 

 

▣ 시립 김병종 미술관

 

 

시립 김병종 미술관으로 왔다.

 

 

 

 

 

 

미안커피

 

 

 

 

 

 

전시관에는 바보예수전이 열리고 있다.

입장료, 주차료 등은 없다.

 

 

 

 

 

 

 

 

 

 

 

 

 

 

 

 

 

 

 

 

 

내부의 구조를 조금 변형시켰다.

 

 

 

 

 

 

대형의 그람이다.

 

 

 

 

 

 

2층으로 오르면 제2, 3갤러리가 있다.

 

 

 

 

 

 

 

 

 

 

 

 

 

개화유수

 

 

 

 

 

 

 

 

 

 

 

 

 

 

 

 

 

 

 

 

 

 

 

 

 

 

 

 

 

 

 

 

 

 

제3갤러리

 

 

 

 

 

 

 

 

 

 

 

 

 

 

 

 

 

 

 

 

 

 

 

 

 

 

 

 

 

 

 

 

 

 

제3갤러리를 둘러보고,

 

 

 

 

 

 

커피숍으로 내려와 잠시 쉬었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