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수도암, 용추폭포, 청암사
국립김천치유의 숲과 주변 아름다움 숲길을 연계하여 4시간 20분여 걷고나니 오후 3시 40분쯤 되었다.
이곳 수도리 주변은 세번이나 다녀간 곳이지만 온김에 수도암과 용추폭포, 청암사를 차례로 둘러보기로 한다.
수도암은 수도마을 뒷편 수도산 중턱에 위치한다. 차량으로 절 앞까지 진입할 수 있으며 암자라기에는 규모가 크다. 대적광전과 약광전의 석불좌상, 3층 석탑 등의 볼거리가 있다.
용추폭포는 수도마을 앞 도로변 계곡에 위치한다. 한강선생의 무흘구곡 중 9곡으로 주변에 소형 주차장이 있고 출렁다리와 데크로드를 만들어 둘러보기 편하게 하였다. 또한 인현왕후길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청암사는 통일신라 시대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가 머물렀던 인연으로 많이 알려진 절이다. 인현왕후 민씨는 1667년 5월 생으로,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계비다, 1681년 숙종 7년애 왕비가 되었으며, 1689년(숙종15년)에 페비되었다가 1694년(숙종 20년)에 복위되었다. 1700년(숙종 26년) 3월 발병한 괴질로 투병하다가 1701년 음 8월에 사망하니 왕비 나이 34세였다
▷가는 길
수도암 - 용추폭포 - 청암사 (2023. 9. 2.)
▷탐방후에
▣ 수도암
수도암 바로 아래 주차장이다.
수도암 경내로 들어와 입구라 할 수 있는 봉황루를 본다.
우측으로 관음전이 있고, 관음전 우측 뒷쪽 계곡 건너편에 나한전이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 관음전, 약사전 등등 건물은 내부가 서로 하나로 통하여 있는데 이곳 관음전은 외견상 칸칸이 방으로 되어있는 느낌이다. 몇 번 수도암을 다녀 간 적이 있지만 관음전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은 없어 잘 모르겠다.
주 불전인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가파르다.
사진상에 보이진 않치만 좌측으로 완만히 오르는 도로도 있다.
첫번째 계단 구간을 오르면,
아랫쪽 관음전과 윗쪽 주불전인 대적광전 중간 지대이다.
저쪽으로 수도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아랫쪽으로 관음전이 내려다 보인다.
두번째 대적광전으로 오른는 계단.
수도암은 청암사와 함께 도선국사가 쌍계사(당시 면소재지에 있었던 절로 현재는 소실되고 없음)의 소속 암자로 창건한 이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희해 전소되었다가 1900년 포응화상이 건물을 중수하였고,
1969년 이래 법전화상이 건물을 중수하고 선원을 개설하는 등 많은 불사를 이룩하였다.
<다음백과에서>
현재 본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 약광전(藥光殿)이 약간의 거리를 두로 나란히 있다.
대적광전 본존불로 모셔진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보물 제296호/ 현지 안내문에 제 몇 호 표시는 삭제했다)
수도암 삼층석탑(보물 제297호)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쪽에 두기가 있는데 어느 것이 동탑이고 어느것이 서탑인가?
동서남북 방향으로 동서를 구분하기도 애매(남.북에 가까움)하고, 현지 안내문을 보면 더 헷갈린다.
대적광전 앞쪽이 동탑인가? 싶기도 하지만 방향으로 보면 서탑 같기도 하다.
높이는 동탑 3.76m, 서탑 4.25m으로 서탑이 조금 높다.
동탑은 단층 기단으로 면석에는 큼직한 눈 모양이 새겨져 있다.(육안으로 보기엔 뭐가 새겨져 있는지 잘 모르겠다. 특히 눈 모양은 못본것 같다.)
1층 몸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형태로 모서리 기둥을 표현하고, 각면의 모서리 기둥에는 5cm 정도의 길피로 감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조각된 연꽃대좌 위에 여래좌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안내문에서>
요사?
대적광전 앞쪽의 이 비석은?
대충 눈으로 보았을때 글자 판독이 어렵다.
약광전
약광전 석불좌상 (보물 제 307호 / 몇 호 표시는 없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고, 좁은 이마의 중앙에 커다란 백호가 박혀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풍만한 모습으로, 눈과 코는 가늘고 짧으며, 입술은 두툼하게 표현되어 온화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고, 목에는 세줄의 삼도가 나타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
약광전 앞쪽의 탑이다.
안내문안의 설명을 보고 동.서의 탑을 구별헤 볼려 해도 어느것인지 모르겠다.
서탑은 이중 기단으로 중석 각 면에 모서리 기둥, 안기둥 1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 지붕돌이 층마다 1매씩이며, 1층 몸돌에만 연꽃대좌 위에 여래좌상 1구을 돋을 새김 하였다.
두 탑의 형식이 서로 다르고, 법당과는 가까우나 탑 사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쌍탑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안내문에서>
약광전 앞 모서리에서 전경을 담아본다.
약광전 앞쪽 계단을 따라 중간층으로 내려왔다
수도산 등산내 입구이다.
저곳 다리를 건너서 나한전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관음전으로 내려왔다.
관음전 앞을 지나 나한전으로 왔다.
나한전
나한님의 신통력으로 여러가지 영험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동.하안거를 실시하는데 수도를 하려는 스님들의 경쟁이 치열하다고 안내한다.
대충 수도암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 무흘제9곡 용추
무흘구곡 제9곡 용추
九曲回頭更喟然 (구곡회두경위연) 구곡이라 머리 돌려 다시 탄식하노니 (한숨 위)
我心非爲好山川 (아심비위호산천) 이내 마음 산천만 좋아함이 아니로세
源頭自有難言妙 (원두자유난언묘) 샘의 근원에는 절로 형언 못할 묘리가 있어
捨此何須問別天 (사차하수문별천) 이를 버려두고 어찌 별천지를 찾으리.
출렁다리
출렁다리는 이곳 용추폭포 윗쪽과 아랫쪽으로 제법 내려간 인현왕후길이 계곡으로 내려서는 곳에도 있다.
두 출렁다리 사이는 데크로드로 연결(인현왕후길의 일부) 되이었다.
출렁다리를 건넌다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계속 상부
하부.
보이는 곳은 용추폭포 상부이다
데크로드는 폭포 전망대로 연결된다
폭포 전망대에서 바라본 용추
용추폭포를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청암사
청암사 입구 주차장
청암사와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으나 몇 백미터로 먼 거리는 아니다.
청암사 가는 길.
들머리 도로변 가장자리 바닥 아트막한 바위에 청암사원 표시가 있다
반대편엔 나무아미타불이 음각되어 있다.
청암사 계곡은 맑고 청정하다
출입하여 쉬기에는 썩 좋아보이지는 않으며, 또한 출입을 금하는 곳이도 한다.
이내 일주문이다.
불영산 청암사로 편액되어 있다. 불영산은 수도산의 옛 이름이다.
숲길을 따라 간다.
천왕문 입구
좌측 대운당비각, 우측 회당비각이 나란히 세웠다.
두분다 청암사를 중건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 분들아다.
천왕문
사천왕상은 목각이 아니라 불화로 대신했다.
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넌다.
철제 난간이 아닌 주변의 바위와 각자 등과 어울리는 다리였으면 더 좋겠다.
우비천(牛鼻泉)
청암사 변주의 산세가 소가 왼쪽으로 누워있는 형세라고 한다. 그 중 소의 코에 해당하는 곳에 우비천이 있다.
소의 코는 늘 촉촉하며, 이곳에 물이 마르지 않으면 이 일대(청암사와 증산면)가 재물이 들어온다(부자가 된다)고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코샘 또는 돈샘이라고도 불리며 스님들이 이 앞을 지날때 부채로 코를 막고 지나갔다고 한다.
나무 아미타불.
주변의 바위엔 온통 개인의 이름이 주로 새겨져 있다.
남명선생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에 대해 아래와 같이 혹평을 하였지만, 이곳 바위 구석구석 새겨진 이름이 있으므로 인해 밋밋한 바위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사람 이름 말고 뜻있는 글자가 있다면 해석을 부탁하고 싶다.
바위에 새긴 각자와 관련한 남명 선생의 기록을 언급해 본다.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 년 동안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 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 두예(두예)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 두예는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자신의 공적을 새긴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현산 꼭대기에 세우고, 다른 하나는 만산 기슭의 못 속에 가라앉혀 두었다. 그러나 두예는 정작 <춘추좌씨전>의 주석서인 <좌씨경전집해>를 지은 업적으로 후대에 이름을 님기게 되었다.
주변 이곳 저곳 바위 빈 곳이 없다.
청암다실
나를 만나는 멈춤
대웅전으로 건너가기 직전에 종각이 있다.
북, 운판, 목어도 같이 있다.
어느 비석의 받침돌이었을까?
거북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 북은 원형이 제맘대로 생겼다.
범종루에서 바라본 건너편,
극락교를 건너 대웅전으로 간다.
먼저 보리수 나무를 만난다,
청암사는 신리 제 47대 헌안왕3년(859)에 도선국사께서 창건하였으며, 이조 인조 년25년(1647)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허정화상, 환우대사 등이 중창하였다. 그 후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에 있던 쌍계사의 산내 암자로 있다가 1904년 당시 주지로 있던 대운스님이 3~4년에 걸쳐 현재의 일부 건물을 완성하였다. 이 때 현재의 김천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최송설당(1855~1939)이 많은 사재를 시주하였다.
그동안 수차례의 화재로 자세한 사적은 알 수 없으나 사적비, 회당비, 대운당비 등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조 영조대 정혜스님께서 주석하고 강의를 하셨으며, 근대에는 강고봉스님, 고산스님, 우룡스님, 강백스님들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현재까지 강원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진영각
현재의 청암사는 지형스님의 도제 양성을 위한 원력으로 1987년 청암사 승가대학을 설립하여 진영각, 육화료를 보수하고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중현당과 선영당을 신축한 가운데 10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청정도량이다
산내 암자로는 도선국사가 창건한 수도암과 유안 비구니스님이 창건한 백련암이 있다.
대웅전 앞 마당에 다층 석탑이 있다.
다층석탑
조선후기 탑으로 1912년 성주의 어느 논바닥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놓고 탑신을 올렸는데 원래는 5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륜부 장식이 일부 남아있다. 현재 높이는 4.21m이다.
대웅전 앞쪽의 누각.
대웅전,
대웅전 내부
육화료의 대웅전 쪽,
육화료
요사채쪽이다.
출입금지.
대웅전을 둘러보고 찻집 멈춤앞으로 되돌아 나와 극락전으로 간다.
극락전.
외부인 출입금지 표시가 있어 대문에서만 바라본다.
인현왕후가 이곳 청암사에 거거했을때 주로 이 주변이었나 보다. 극락전 옆에 보광전이 있고, 보광전 앞에 함원전이 있다.
극락전과 이웃하여 보광전이 있다.
인현왕후가 조선 숙종15년(1689)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되자 원당(願堂)으로 건립된 청암사 보광전이다. 그 후 폐전되었다가 고종 광무 9년(1905) 대운과 응운 두 승려가 새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42개의 손을 지닌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면서 양쪽 측면으로 산신, 독성, 신상탱화를 모신 복합적 용도를 지닌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전통수법으로 지어진 건축물로서 다포양식과 익공양식이 절충된 것을 볼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함원전
용추폭포 주변에 <인현왕후어제등록>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어제란 임금 또는 왕후가 친히 지은 글을 말하며 등록의 등자는 베낄 등, 록은 녹록자를 쓴다,
인현왕후어제등록은 조선 제18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1667~1701)가 기사환국(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사건)으로 페서인이 되어 청암사에 3년간 은거 중에 갑술옥사(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꾀하던 서인을 제거햐여다 도리어 화를 입은 사건)로 다시 왕후로 복위하면서 청암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 어제이다. 현재 원본은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仁顯王后御製(인현왕후께서 지으시다)
世間有七重(세간유칠중) /새상에는 일곱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三寶及父母君善智識(삼보급부모군선지식) / 삼보와 부모님, 임금님, 선지식입니다..
三寶爲出離之宗(삼보위출리지종) / 삼보는 미혹한 세상을 벗어나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게하고
父母爲養命之宗(부모위양명지종) / 부모님은 생명을 기르고,
君爲保身之宗(군위보신지종) / 임금님은 몸을 보존케 하며
善知識爲導迷之宗(선지식위도미지종)/ 선지식은 미혹함에 빠진 중생들을 이끌어 줍니다.
自子還本以來我孤閒尊者(자자환본이래아고한존자) / 내가 본가에 돌아온 이래로 우리 고한존자께서
盡忠竭力道合佛心( 진충갈력도합불심)/ 충정과 기력을 다하여 불도와 불심이 합일하니
朗覺月於盡滿使我迅返正(랑각월어진만사아신반정) / 밝고 큰 부처님의 공덕이 속세에 가특 차 나를 바른 자리로 돌려
位不沈欲坑 (위불침욕갱) / 구렁에 빠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致有今日非師之功耶(치유어일비사지공야)/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스님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非多劫之佛力安能如是耶(비다겁지불력안능여시야) / 오랜 세월 동안의 불력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었겠습니까!
今聞我還位懇禱倍前不分晝夜 (금문아환위간도배전불분주야) / 오늘에야 내가 환위된 후에도 밤낮없이 전보다 與雲師師爲我盡賣衣鉢(여운사적사위아진매의발 / 더불어 운스님과 적스님께서는 나를 위해 옷과 발우를 모두 팔아서
重刱靈刹新建祝閣(중창영찰신건축각)/ 영험한 사찰을 중창하시어 축각을 새로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師之爲我用心我之爲師(사지위아용심아지위사) / 스님께서 나를 위해 마음 쓰시고 내가 스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感恩非人所述哉(감은비인소술재) / 다른 사람이 말할 바가 아닙니다
故爲師等替送釵盞鞋三種之信(고위사등체송채잔혜삼종지신) / 따라서 스님들을 위하여 비녀외 잔, 신 3가지 신표를 대신 보내오니
恒爲三寶之禮祝閣改額(항위삼보지예축각개액) / 늘 삼보의 예를 행할 수 있도록 축각의 현판을
爲含元殿永爲祝리之所(위함원전영위축리지소) / 함원전으로 고쳐서 길이 복을 비는 장소로 삼았으면 합니다.
隨喜略助爲究竟之正因(수희략조위구경지정인) /불보살님들의 좋은 일을 함께 기뻐하고 노력하는 것이 깨달음의 원인으로
所謂直心菩提者也( 소위직심보제자야)/ 이른바 본성(진리)을 찾아 깨달음을 구하고자 함을
於是付囑本宮 永垂後嗣云(어시부촉본궁 영수후사운) / 본궁(저의 잠저)에 부축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하고자 합니다.
乙亥五月日 /을해년 오월 어느날
星山 佛靈山 / 성산 불령산(지금의 수도산) 보냄
인현왕후 경행길 표시가 있다.
경행길은 개방하지 않은 듯,
길 또한 있어도 묵어있을 듯.
보광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부도탑이 있다.
온김에 백련암을 둘러보러 간다.
백련암
수도산 등산로 입구가 전보다 깔끔해진 것 같다.
우회하여 백련암으로 가는 셈이 되었다.
백련암
고양이 3대?
백련암을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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