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운주산, 운주산성, 고산사, 조치원 봉산동 향나무, 세종 호수공원
세종시에 가 볼만한 곳이 어떤 곳이 있을까?
인터넷 상에서 세종시 가볼만한 곳을 검색하니 세종시내에 세종호수공원, 세종중앙공원, 국립세종수목원이 서로 인접해 있고, 대통령기록관, 세종청사 옥상정원, 일명 이응교라고 불리는 세종보행교가 검색된다. 외곽으로 영평사(세종시 서쪽), 금강수목원(1,500원), 뒤웅박고을과 식물원 들꽃세상(세종시 북부,천안쪽 가까이), 조치원 핑크뮬리(신안리 244-13), 봉산동 향나무, 연기향토박물관, 어서각(시내 북쪽 가장자리, 꽃무릇), 매죽헌 사우(신탄진 쪽), 세종리 은행나무, 베어트리 파크(전의면,성인 12천원)이 있고, 운주산성과 운주산, 고복자연휴양림, 오봉산 맨발등산로 등 걷기좋은 길이 있고, 비암사, 세종 부강리 고택, 우주측지관측센타, 밀마루 전망대 등이 나온다.
오늘은 운주산과 운주산성을 탐방하고 오후 시간에 세종수목원을 둘러보는 코스를 잡았는데 월요일이어서 세종수목원이 휴관이다. 따라서 조치원 봉산동 향나무와 세종 호수공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아본다.
▷가는 길
▷탐방코스
고산사 주차장 - 고산사- 운주산성 남문(운주산공원) - 산성내 임도- 동문지 - 운주산 정상 - 서쪽 성곽길 - 남문 - 임도 - 고산사 주차장 ( 중식시간 제외 천천히 2시간 30분 소요, / 2024. 3. 11.)
조치원 봉산리 향나무 - 세종시 호수공원.
안내도상 광장(우물) 조금 상부에서 동문지로 이어지는 길 있음(거리 30~40m정도로 가까움)
▷탐방후에
세종시 전동면 미곡리에 운주산 들머리가 있다. 도로변을 벗어나면 바로 제법 크기의 공영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운주산 둘레길을 걷고자 한다면 이곳에 주차하면 되겠다.
우리 일행은 고산사 주차장에 주차한다. 아래 입구의 주차장에서 약 1km 거리의 고산사 입구에 위치하며 도로는 중앙선 없는 1차로로 차량 교행에 주의를 요한다. 대형차량 진입은 어렵다..
오늘이 월요일이어서 대체로 주차장은 한산한 편이다.
주차장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고산사 일주문이 보인다.
임도를 따르면 바로 앞쪽에 계곡이 있다.
운주산성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계곡으로 쬐끔 상부 우측편에 고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좌측편에 제법 큰 산행안내도와 운주산성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가 있으나 초행이라면 고산사로 오르는 것이 절 구경을 할 수 있으므로 더 낫다. 양쪽 길은 고산사 윗쪽에서 서로 만난다.
계곡 아랫쪽으로는 수로를 내어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고, 데크로 산책로를 만들었으나 조금 엉성해 보인다. 아랫쪽 마을로 연결되는 길인가 보다.
주변을 둘러보고 고산사로 오른다.
운주산성은 말한다.
장충열 시, 이무성이 쓰고 그리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빛과 어둠의 역사
백제의 사직 허망하게 무너질 때
먹구름도 망국의 한을 핏물로 뿌렸으리라.
우아하고 섬세한 예술로 선진문화 꽃 피워
해외까지 문명을 보급했던 백제
지키려다 산회된 넑들은 기억의 땅에서
스스로 진혼이 되었다.
운주산성을 휘감는 바람속엔
미쳐 다스리지 못한 편린들
군사들의 결의에 찬 함성이 묻어 흐른다.
지상을 물들이고도 남을 찬란했던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계절은 자연향을 사르며 의자대왕과
백제부흥대군의 극락왕생을 빌고 있다.
지워지지 않은 발발굽소리
이끼 낀 천상의 발자국은
다하지 못한 뜻을 앙가슴에 품으라고
소나무의 녹빛 심으로 정신을 깨운다.
여름이면 피수골엔
백제인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고
유난히 붉은 산꽃들 피어 그 넔을 달래고 있다.
산성의 돌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시간과 시간을 꿰매고 있다.
백제의 부흥을 위해 혹한과 굶주림에도 온몸을 던진
호국정신은 대대로 이어갈 민족의 유전자다.
한반도의 중심 허리를 둘러친 거대한 운주산성.
기상과 불굴의 의지는 고산의 위대한 정기다
잠들 수 없는 짙푸른 염원은 현실의 빛깔로
옷깃 하늘거리며 살아 오른다.
21세기는 거대한 붓을 들어 운주산의 하늘가에
백제인의 자존심 일필휘지로 써내린다.
백제는 살아 있다고,
부흥의 빛 산성의 정상 백제얼 탑에서 부터
오색칯으로 선명히 피어 오른다.
간절한 기운으로 물들어 있는 산성은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한다.
꺾이지 않을 기상, 대륙의 정신, 그 전성기
운주산성을 따라 길게 길게 이어지리라.
구름도 발걸음 멈추고 손 내밀어 맞아주는 곳
고요속에 오롯이 살아있는 숨결은
온고이지신의 지혜로운 발걸음 멈추지 않는다.
운주산성은 말한다,
주류성의 부활로 당당히 일어설
내일 또 내일
어둠이 깊으면 밤하늘에 별이 켜지듯이
눈부신 신비의 나래로 비상하리라
백제여 !
아래 주차장에서 2분여면 고산사에 도착한다.
공덕비
운주산의 옛 지명은 고산이다. 고산 정상에는 커다란 산성이 있고, 삼국시대 백제산성으로 周留城이라고도 부른다. 주류성은 백제 의자왕이 나당군에 항복한 후 이에 굴복하지 않고 3년여 동안 백제 부흥전쟁을 치른 곳으로 이 지역은 백제군들의 백제정신이 깃든 곳이다. 백제 부흥군의 넑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도량을 짓고 조석으로 분향하며 극락왕생하시기를 기도한다. 1997년 창건한 운주산 고산사는 2015년 석가탄신일을 맞아 백제극락보전을 중창함으로써 일단의 불사를 마쳤다. 이에 동참한 신도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2015.10. 24
고산사 창건주 如山 崔秉植, 주지 正大 崔正大 合掌
벡제루
백제삼천범종(무자년 2008년) 음 9월13일 시납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의자왕은 왕비와 왕자를 비롯한 일만이천 명의 유민과 함께 당나라 장안 땅으로 끌려갔다. 의자왕은 나라를 잃은 분노와 슬픔 때문에 중국 낙양에서 병사하였고, 당나라 조정은 북망산에 후히 장사지내 줬으나 지금 왕릉은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한편, 나라를 빼앗긴 백제 사람들은 주류성에 모여 나라를 되찾기 위한 부흥전쟁을 벌여 3년 여의 오랜 시간동안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나 끝내 내분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곳 운주산 고산사에 타국만리에서 쓸쓸히 승하한 의자왕과 주류성에서 백제를 재건하려다 장렬히 산화한 백제 부흥군의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백제삼천범종을 조성하여 아미타 부처님께 시납하였다.
백제루 범종을 처음 타종했더니 미곡리 마을의 송아지 9마리가 절을 찾아와 마당을 배회하가 내렸갔다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삼천당
운주산(고산)의 백제부흥전쟁에서 산화한 삼천 백제부흥군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그들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강당이다. 다양한 강의와 공연등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사진상 우측으로 살짝 보이는 건물이 도침당이다.
백제부흥군의 대장군이었던 도침대사는 지금의 세종시 지역에서 거병하여 부여와 공주 지역의 나당군을 공격하여 출중한 전과를 올렸다. 영군장군이라 불린 도침대사는 불가에 몸담은 스님으로서 도침대사를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도침당을 건립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참고로 고산사와 연기군수님이 너무 운주산성을 주류성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 인터넷 나무위키 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살펴보았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략하자 의자왕은 사비성(현 부여)에서 도망 나와 웅진성(현 공주)으로 옮겼으나 웅진성의 방령이자 성주가 쿠테타를 일으켜 의자왕을 체포하고 웅진성이 투항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백제멸망 후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 및 백제도호부를 설치하게 된다.
이에 의자왕의 종제 귀실(가문 이름임, 처음에는 부여씨였다함) 복신과 승려 도침은 백제의 잔존세력을 규합하고 왜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모셔와 왕으로 추대하여 당나라(신라는 초반 당군을 적극 도와주었으나 당초와의 약조를 깨고 도호부 설치 등으로 직접 통치하려 하자 소극적으로 나가다가 백제부흥운동 막판에 가서야 연합하여 백강전투를 치러고 본거지 임존성 함락전을 펼친다고 보면 될 듯) 와 맞서 싸웠다.
처음엔 본거지를 임존성(현 예산 봉수산)으로 했으나 이후 주류성으로 옮겼다. 후에 잠시 피성(현 김제)로 옮겼다가 주류성으로 다시 옮겼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역은 초반 주로 사비성 인근을 중심으로 한 금강 서부 지역 일대였다. 이에 부흥운동이 점차 커지면서 신라쪽 국경 인근 지역이나 전북 일대도 부흥군에 호응하게 된다.
백제부흥군은 초반 약 10일만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는 기염을 토하는 한편 왜국과 힘을 합쳐 웅진도독부의 아성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포위하여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어버리고 당나라 군대가 철수를 고려하기까지 했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에 백제도호부는 설치된지 1년도 못되어 없어지고 웅진도독부만 남게 된다. 한편 고구려도 660년 말부터 뇌음신 장군을 지휘관으로 해서 신라 북쪽 한강유역을 줄기차게 공격해(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백제땅에 신라군 정예가 쏠려있는 상황에서 후방을 견제해 주어 백제부흥군에게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모든 백제 유민이 힘을 합치지는 못해 충상. 상영. 자간 등은 신라군에, 의자왕의 맏이들이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은 웅진도독부 소속으로 들어가 부흥군과 싸웠으며, 당나라 증원군도 파견된다. 또한 661년 고구려와 당나라간 전쟁이 벌어지자 고구려도 백제를 지원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다 왕족 복신은 도침을 살해하고(도침의 이름이 자기보다 앞에 거론되는데 대한 권력 투쟁) 후 부여풍이 복신을 다시 살해(부여 풍은 왜군의 원군을 더 많이 끌어들일려고 했고, 복신 입장에선 왜군의 군세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영향력이 떨어지므로 반대, 부여풍이 백제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일본 천황에게 책봉받는 형식으로 진행) 하는 등 내분으로 와해(백제는 변방지역 특히 대전 일원을 신라에게 빼았기고 충남에서도 적지않은 성이 당군이나 신라에 항복, 신라군의 전라북도 동부 및 경남 서부인 거열성 등 함락시킴, 복신이 풍왕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풍왕이 복신을 처형 됨)된다.
풍왕은 왜국의 구원군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백강전투(동진강 하구)에서 수적 우세에도 대패하게 되고 부여 풍은 고구려로 망명,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주류성이 663년 9월 함락되고, 664년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3년만에 백제부흥운동은 소멸하게 된다. 664년 3월 사비산성에서 백제부흥군 잔당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웅진도독부 부여풍에게 진압당함으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끝나게 되며, 백제의 수도권은 당나라의 지배를 받는 옹진도독 부여융이 다스리고, 그외 백제 외곽의 각 지방은 신라군이 차지한 상태가 된다. 남은 백제의 잔존세력은 왜국이나 고구려로 도주하거나 신라나 당나라의 괴뢰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에 붙어 나당전쟁에서 서로 싸우게 된다.
현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으며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려진 곳은 없다.이곳 운주산성도 동문지와 서문지를 발굴했으나 통일신라 또는 통일신라와 고려 와편 등이 발굴되어 백제의 유물은 별로 나온게 없어 백제의 성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고 한다.
충남 서천의 설리정(환산) 또는 건지산성, 청양 정산, 부안 우금산성, 홍성 학성산성(장곡산성), 세종 전의면의 당산성, 전북 정읍의 두승산성 등이 주류성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으나 현 정설로 확립된 곳은 없다한다.
요사일것 같다.
고산선원
백제극락보전
여래각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이 불상은 옛날 장인이 오직 망치와 정으로 조각한 석불이라한다.
통일신라시대 석불이라는 말도 있고, 조선말 또는 20세기 초기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다한다.
표정에 묘한 미소가 흐른다.
고산사(高山寺)
운주산 중턱에 위치한 고산사는 운주산의 옛 이름인 고산에서 유래하였다.
이곳 운주산 정상을 중심으로 둘레 약3.1km에 이르는 고대 산성이 남아있다. 운주산성(고산산성)으로 불리는 이 산성은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의 공산성 보다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에 백제 부흥운동의 사령부였던 주류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실제로 운주산성 정상에 세워진 '백제의 얼'탑 뒷편에는 고산(운주산성)이 백제부흥전쟁을 수행하였던 백제 주류성의 주성'아라고 새겨져 있다.(이 탑은 현대에 세운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운주산성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미곡리 골짜기를 '피숫골'이라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운주산성 기슭에 삼천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삼천굴'이 있었다. 이곳에 숨었던 백제부흥군들이 발각되면서 나당군은 굴에 연기를 피워 밖으로 나오는 부흥군들을 차례로 도륙하니 골짜기가 핏물로 넘쳤다. 이런 사연으로 피숫골 짜기가 되었으나 아직 삼천굴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30여 년 전부터 백제부흥군의 억울한 죽음과 안타까운 충정을 위혼하기 위해 운주산성과 피숫골 일대에서 '백제부흥군 고산대제'가 시작되었고, 1997년 백제부흥군과 백제의자왕을 추모하는 고산사를 창건하여 백제의자왕 위혼비를 세웠다.
고산사에서는 해마대 백제 주류성이 함락된 음력 9월 8일경 백제고산데제를 지내는 한편 조석으로 백제의자왕과 삼천부흥대군의 영령을 위혼하고 기리기 위해 범종을 울리고 향을 사른다. 고산사는 찬란했던 백제 문화를 계승 발전하고, 후손들이 그 복을 받도록 발원하고 기도하는 도량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측면에서 바라본 백제극락보전.
산신각.
고산사를 둘러보고 윗쪽으로 나서면 계곡 좌측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난다.
이내 돌계단길이 시작된다.
이런 길은 그의 성문지까지 계속된다.
고도를 높여간다.
저만큼,
보수한 성곽의 일부가 무너졌다.
위 성곽 붕괴로 인해 금줄을 쳐 놓았다.
출입금지.
참 성의 없다.
동쪽 성곽으로 오르는 길도 금줄로 막아놓았다.
어리!
이곳까지 승용차가 올라왔다.
이곳 (서)문지 이정표.
고산사에서 오르는 길, 이곳에서 운주산 정상으로 좌.우 성곽길과 성안 임도를 안내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고산사에서 이곳까지 0.7km, 천천히 올라도 20분이면 충분하다.
운주산 정상까지 1.0km를 알리고 있다.
이곳 (서)문지에서 동문지 성곽길은 제법 급하게 봉우리쪽으로 올라야 한다.
긴 거리가 아니므로 천천히 오르면 되지만, 들머리 성곽 일부 붕괴로 인해 출입을 금하고 있고, 경사도 있어 성안으로 난 길을 따라 운주산 정상으로 갈 것이다.
성안으로 들어선다.
이곳 주변에서 좌우로 보이는 성곽이 보수된 것이다. 성곽의 높이가 제법이 아니어서 큰 위용은 없다.
서두의 안내도를 보면 이곳을 그냥 문지로 표시하였다. 어찌보면 성의 남쪽(남남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안내도에 남. 동. 북문지 표시가 있는것으로 보아 서문지로 표시함이 옳을 것 같다.
성안쪽에서 바라본 (서)문지
성안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운주산 정상에 오르고 서쪽으로 난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중 저곳이 된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방지의 연못이 있고,
앞쪽엔 정자가 있다.
넘문쪽 가장 낮은쪽 성안으로 운주산공원 표지석을 세웠으며 공원 자체는 수수하다.
(서)문지에서 바로 도로를 따라도 되고, 방형의 연지 뒷편으로도 길이 있어 어느쪽으로 올라도 조금 상부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운주산성은 항상 구름이 머문다 하여 이름 지어진 해발 460m의 운주산 정상을 기점으로 서쪽. 남쪽 3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눈 포곡삭(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전동면 3개 마을과 전의면 2개 마을에 위치한 대단히 큰 성으로 길이가 약 3.1km인 외성과 543m인 내성이 있다.
외성과 내성은 모두 돌로 쌓았으며, 산성 내부의 평지와 구릉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백제시대 토기 조각과 고려.조선 시대의 자기 조각, 백제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안내도를 보면 우물표시가 있는데 이 인근이지 싶다.
특별히 우물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더 이상 차량진입은 금지.
운주산 정상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30~40m거리의 능선에 철제펜스가 보인다.
동문지다. 이곳으로 넓은 길로 이어져 있다.
청송약수터 0.5km, 성곽을 따라 운주산 정상 0.4km이정표가 있다.
이쪽 성곽도 보수한 듯.
산성의 높이를 볼 때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교하면 담 정도의 높이다.
안내도를 보면 동문지와 (서)문지 사이에 남문지 표시가 있으나 언듯 보기에는 산봉우리여서 남문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 동문지에서 청송약수터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아주 선명하지는 않다.
성곽 안으로 난 길을 따라 운주산 정상으로 살짝 고도를 높인다.
살짝 살짝 고도를 높여가나 크게 힘든곳은 아니다.
(서)문지 주변 다시 복원한 성곽외에는 다 무너져 내렸고 성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곳은 토성으로 이어졌는지 석축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도 있다.
운주산 정상 직전에 이정표.
고산사에서 1.6km, 청송약수터 0.8km, 뒤웅박고을 2.2km, 전동면사무소 5.4km, 성곽순환로, 등산로 등등 표시되어 있다.
주변엔 제법 넓은 공터를 보이고 있다.
살짝 고도를 높여 정상으로 오르면,
정상 언저리이다.
백제의 얼 상징탑
이 탑은 백제 부흥군의 호국 충혼이 서려 있는 운주산의 정상에 위치하며 독립 기념관과 마주 보며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전통을 이어 받아 서로 화합하는 평화로운 터전위에 온유하고 순박한 인정을 가꾸며 충의롭게 살아온 충효의 고장 연기에서 충청인의 위상을 재 정립하여 진취적 기상을 드높이고 예지에 빛나는 미래 문화의 원동력으로 삼아 민족통일의 염원을 이룩하고자 건립하였다.
삼층 기단과 삼각 모형은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의 정립을 의미하며 삼층 기단 위의 조형물은 백제 산성과 찬란했던 삼국 문화를 의미한다.
북 모형은 구국 항쟁의 투혼을 상징하며 아울러 삼면 중앙 방패 모습의 입체석은 호국 의지와 진취적 기상을 표현한다.
삼각 탑신은 웅비하는 충남인의 기상과 국가 수호의 방패로서 자주 통일을 염원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현지 기록비에서>
옛 왕릉같은 정상에는,
들머리 고산사 주차장에서 약 1시간쯤 소요되어 운주산 정상에 오른다.
고산사와 (남)문지 주변에서의 충분한 휴식을 포함한 시간이다.
고유문 표지석이 있다.
무슨 고유문?
망경산쪽으로 이어지는 조망이 좋다.
건립기
여기 운주산성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백제성으로 삼국사기에 고사성(古沙城)으로 傳하고 동국여지승람에선 고산산성(古山山城)으로 전한다.
460m고지에 둘레 3.2km가 넘는 거대한 이 산성은 정북에 직산의 위례성을 보고 정남에 계룡산의 천왕봉을 보며 웅진왕도 시대에는국방의 제일선을 담당하고 국말에는 구국항쟁의 기지로시 이름높은 연기 주류성(周留城)의 주성이었다.
그러나 1,300년의 세월은 흘러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도 무성한 잡초속에 묻혀서 알 길 없으니 애석히 여겨 풀을 베고 길울 다듬어 옛 모습을 드러내고 돌을 깍아 탑을 세운다.
충의롭고 슬기롭던 백제의 얼을 상징하며 그 뜻을 오늘에 되살려 영원토록 후세에 전하여 빛내기 위함이다.
1990.11.29
연기군수
도지사가 세웠으면 이곳을 주류성으로 단정하여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군수님이여서 이곳을 주류성의 주성으로 표현하였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주류성의 위치는 학자들간의 논란이 많은 곳으로 앞에서 언급했다.
이곳 백제의 얼 탑 주변에서 50분여 중식시간을 갖는다.
중식 후 서쪽 성곽길을 따라 내려간다.
성벽은 무너져 잔재만 남아있다.
왜 철제 펜스를 둘렀을까?
혹시 이곳이 북문지?
특별히 주변과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산비탈 경사가 심한곳엔 성벽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도 많아 보인다.
사람다닌 흔적이 많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간혹 지형상 직진이 아닐까? 싶을 수 있지만 길을 따르는 것이 옳다.
정상에서 30분여 내려서면 (서)문지에 도착한다.
(서)문지를 나선다.
산행 거리가 짧기도 하고, 시간적 여유도 있어 이번엔 임도를 따라 고산사로 내려가기로 한다.
이 임도는 고산사로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0.7km) 보다는 몇 배 더 멀다.
운주산 둘레길을 만난다.
이제부턴 운주산 둘레길 임도를 따라 고산사로 내려가게 된다.
현 위치.
안내도를 보면 고산사 주차장과 운주산 공영주차장 중간쯤에 청송약수터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이정표에는 운주산 둘레길이라는 표시는 아닌 것 같이 기억된다. 다른 이정표나 갈림길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 길이 청송약수터로 가는 둘레길일것 같다.
일부 구 지도를 보면 이 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아랫쪽 도로로 이어지는 것 같아 사족을 단다.
(남)문지에서 약 35분여,
고산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운주산 산행을 마무리 한다.
11시 15분에 이곳에 도착하여 지금시간이 오후 2시 30분, 점심시간 약 50분과 기타 충분한 휴식시간 포함하여 3시간 15분여 소요된 셈이다.
▣연기 봉산동 향나무 / 천년기념물
내비에 <봉산동 향나무>로 검색하면 된다.
지번으로는 조치원읍 봉산리 128번지이다.
좁은 마을 안길을 따르면 소형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참 묘하게 자랐다.
봉산동 향나무는 44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봉산동 향나무는 용이 몸을 비튼 모양이며, 많은 가지들이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강화최씨 가문의 최중룡이 아버지가 죽자 후손들에게 효성을 보여주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 3.2m, 가슴높이 둘레 2.8m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향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면 마을이 평화롭고, 병이 들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어 잘 보호하고 있다.
향나무의 향은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한다고 하여 오래 전부터 서원이나 향교와 같이 제사를 모시는 곳에 심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밑둥치를 살펴본다.
대단하다.
주변엔 연못을 만들고,
주변엔 옛 집터를 정비했다.
윗쪽 강회최씨 종가 사당터(1552~1951)
강회최씨 15세손 휘 완 성균생원공은 조선시대 중종시 한양(서울)에서 조치원 봉산리 이곳애 낙향하여 거주하였다. 그의 아들 16세손 통정대부 최중용 형조참의공은 아버지가 별세하자 건너편산 마근터 상봉에 산소를 모시었고, 행랑채 우측에 사당을 자었고 사당 아랫쪽에 향나무를 심었다. 그 후손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조상의 시제를 지내 오다가 1950년 6.25전쟁시 관리하지 않아 사당이 낡아 1951년 철거하였다.
<비문에서>
강화최씨 종가 안채 터(1552~2014)
안채 : 조선 후기 살림집에서 여성들의 중심 건물을 안채, 남성들의 중심건물을 사랑채로 크게 대변하여 불렀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한쪽에 큰방을 두고 시어머니가 기거하며 반대편에 작은 방을 두고 며느리가 기거한다.
이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물인 안채는 주로 침전 기능을 하는 것이지만 여성들의 일상생활과 가사일, 취미생활 등이 모두 안채에서 이루어졌디.
<안내표지석에서>
행랑채 : 행랑은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을 뜻하므로 행랑채는 행랑방이 시설된 집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대문을 중심으로 마구간, 하인들이 기거하는방, 광 등으로 되어 있고 주택의 경계선에 따라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행랑채는 주택은 물론 조선시대의 궁전이나 관아 건축에도 일반적으로 지어졌으며, 주로 심부름 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거나 각종 창고로 이용되었다. 행랑채의 구조는 3랑집으로 된 목조가구식으로 가장 간단한 것이며 한 방의 크기는 1칸 또는 2칸 정도가 보통이다.
<현지 표지석에서>
조치원 봉산리 향나무를 둘러보고 세종호수공원으로 향한다.
▣세종호수공원
제1주차장은 세종호수공원의 남쪽(남서쪽)에 위치한 주차장이다.
당초 계획은 운주산 탐방후 세종 수목원을 돌아볼 계획이었는데 오늘이 월요일이어서 휴관일이다.
그래서 잠시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간다.
이럴땐 좀 미만하다.
사람 소리를 듣고 많은 잉어들이 모여드는데 줄 것이 없다.
이곳 호수공원은 근년에 반바퀴 걸어본 곳이다.
반바퀴 정도 돌아보면 30분 정도면 되는데 갈 길이 멀고 일부 저녁때 일이 있어 살짝 위치함 확인하고 귀가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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