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의 산

영천 화랑설화마을. 돌 할매공원. 정몽주 생가. 임고서원. 선원마을. 임고강변공원.

정헌의 티스토리 2024. 4. 1. 12:50

■영천 화랑설화마을. 돌할매공원. 정몽주생가. 임고서원, 선원마을 임고강변공원.

 

영천지역을 구석구석 둘러 볼려면 크게 4권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영천시내를 중심으로 마현산 공원 주변이다. 전투메모리얼파크, 영천향교, 영천민속관, 한의마을, 강계정사, 호수종택, 이태전 유허비 등이 서로 인근에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되겠다. 영천강변 체육공원 주변도 산책하기 좋을 것 같다. 시내 서남쪽 근거리에 화랑설화마을이 조성되어 있고, 최무선 과학관도 그리 멀지 않다.

두번째로 영천시 동남쪽에 도계서원,  만불사. 돌할매 권역을 들 수 있다. 만불사는 황동와불열반상과 여러 납골묘를 볼 수 있고,  도계서원엔 노계 박인로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돌할매 공원의 몽돌은 왜 할매이름이 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세번째  영천 동북쪽으로 정몽주생가. 임고서원, 도천서원, 자양서원, 선원마을, 운주산승마자연휴양림, 임고강변공원, 영천호 주변 벚꽃 백리길, 보현산 천문대, 보현호 짚라인과 출렁다리.  자천리  오리장림도 있다. 거리가 어중간하지만 별별미술마을도 영천 9경에 포함되어 있다.

네번째로는 영천 서북쪽 팔공산권역으로 은해사와 주변 암자,  치산관광지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중 아래의 코스대로 둘러보았으며, 굵은 글씨는 영천9경이다.

 

 

 

▷가는길

 

 

 

▷탐방코스

영천 화랑설화마을 - 돌 할매공원 - 중식 - 정몽주 생가  - 임고서원 - 선원마을 - 임고강변공원. 

영천호(십리벚꽃, } - 보현산 (천문대. 천수누림길) - (별빛테마마을 - 자천리 오리정 숲 - 별별미술마을)은 영천 보현산 편에 기록. 

 

 

▷탐방후에 

 

▣화랑설화마을

 

 

영천시 금호읍 황정리 금호강변에 화랑설화마을을 조성하였다.

 

휴관일은 1월 1일, 설, 추석명절,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그 다음 일)도 있으니 참고해야겠고,

입장료. 주차료 등은 없으나, 주제관 내에 4D 돔 영상관, 우주체험관, 키드 존, 국궁체험장 등의 시설을 이용할 경우 각각 요금을 부담해야 한다. 주로 아동용이므로 어른의 경우 이곳 저곳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화랑

 

 

 

 

 

 

 

 

 

 

 

 

 

 

 

 

 

 

 

 

시설은 크게 보아 주제관(둥근 원형의 건물)을 중심에 두고 앞쪽에 분수공원으로 꾸몄다.

주변엔 낭비성 전투와 김유신의 설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낭비성 전투는 629년 신라가 낭비성(충북 청주)에서 고구려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신라는 낭비성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공격했지만 연거푸 지고 말았다. 그러자 김유신이 말을 타고 홀로 전투에 뛰어들었고 적장의 목을 베어왔다. 아군의 사기가 올라 5천여명의 고구려 군사를 물리치고 낭비성을 차지한다. 낭비성 전투의 승리는 김유신을 위대한 신라 영웅으로 떠오르도록 하였고 이후 삼국통일의 발판이 되었다.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설화마을재현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의 설화를 마을로 꾸몄다.

김유신이 영웅탄생을 알리는 태몽, 삼국통일의 꿈을 키우며, 팔공산 중암암에 들어가 신비함 힘을 얻고, 바위를  깨는 수련 등 설화를 바탕으로 꾸몄다.  

 

 

 

 

 

 

화랑정원으로 왔다.

유리온실이면 더 운치가 있을텐데 비닐하우스다.

 

 

 

 

 

 

주제관 앞으로 왔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주제관 내에는 화랑우주체험관, 4D 돔 영상관, 키드존 등이 있으며, 여타의 공간은 뭔지 모르겠다.

 

화랑배움터(키드존) : 만4세~12세 이하의 어린이, 개인 4천원,

4D 돔 영상관 : 일반 3천, 청소년 2.5천, 어린이 2천원,

신화랑우추체험관 : 일반 3천, 청소년 2.5천원, 어린이 2천원

(대상자에 따라 전액 또는 50% 감면 있다)

 

 

 

 

 

 

4D 돔 영상관

현대적인 추세에 맞춰 공상과학 만화에나  나옴직한 비행체와 화랑과의 다툼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것 같다.

 

 

 

 

 

 

주제관 밖으로 나오니 또다른 건물이 있다.

저곳은 카페

 

 

 

 

 

 

오늘 일정이 빠듯한데 비가 오다니.........

다행이 20~30분 내리다 그쳤다.

 

 

 

 

 

 

화랑설화마을은 어린 자녀와 동행하면 더욱 좋을 곳이다.

 

 

 

 

 

▣ 돌할매공원

 

 

돌할매 공원으로 왔다.

내비에 돌할매 공원으로 검색하면 된다.

돌할매 마을이란 입구가 그럴듯하여 이곳이 돌할매공원인가? 했는데 아니다.

 

 

 

 

 

 

이웃하여 돌할매 공원이 있다.

특별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고 입구 몇 대의 주차 공간이 있다.

 

 

 

 

 

 

돌할매 가는 곳

저곳 정자안쪽에 돌 할매가 안치되어 있다.

 

 

 

 

 

 

 

 

 

 

 

 

 

돌 할머니는 수백년 전부터 마을의 당산 神 돌로 주민들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마을의 대소사나 각 가정의 길융화복을 질문하여 기도하고 소원을 다져보는 신비의 돌이다.

신분(주소, 성명, 나이)을 밝히고 아무 생각없이 돌 할매들 들어 돌이 들리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음력 6.15일을 돌 할머니의 생일날로 모시고 있다.

 

 

 

 

 

 

돌 할매라기에  사람모양의 돌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생겼다.

무게가 10kg이라 한다. 아무 생각없이 들다보면 무게가 있어 쉽게 들리지 않지만 작정하고 들면 누구나 들 수 있다.

 

 

 

 

 

 

돌 할매 앞쪽엔 소 공원으로 꾸미고 12지신상의 느낌이 나는 동물상을 설치했다.

 

 

 

 

 

 

가운데 돌할매을 들고 있는 할머니상이 있고,

 

 

 

 

 

 

둘레로 동물상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이것은 사자 가족,

 

 

 

 

 

 

돌할매공원 앞족엔 돌할매 식당 겸 매점이 한 곳 있다.

칼국수 등 간단한 면 종류인것 같다.

 

 

 

 

 

▣ 송원정 중식

 

 

돌할매 공원에서 임고서원을 목적지로 내비에 입력을 하니 영천시내쪽이 아닌 고경면 소재지를 지나는 길로 안내한다.

임고면 소재지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중간 고경면 소재지 인근 이 식당에 주차된 차량이 많다.

맛집이려나? 하고 들렀다.

 

 

 

 

 

 

소품의 수석이 가득하고, 화분과 몇 골동품으로 실내를 장식한 나름 운치있는 집이다.

 

 

 

 

 

 

상호에 제주 은갈치 전문점으로 씌여 있어 갈치조림을 시켰다.

가격도 있는 만큼 통통한 갈치에 정성을 다해 조리했다. 

갈치조림의 맛도 있다.

 

 

 

 

 

▣포은 생가

 

 

임고면으로 들어서 임고서원으로 가는 반대쪽 근거리에 포은생가 이정표가 있다.

은근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이기에 먼저 둘러보고 간다.

 

 

 

 

 

 

입구 솟을대문으로 들어서기 전 여러 시비가 있다.

 

洪武丁巳 奉事日本作(홍무 정사 봉사일본 작 / 홍무 정사년에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지은 시

 

平生南與北(평생남여북)  평생 동안 남과 북에 분주하지만

心事轉蹉跎 (심사전차타 /넘어질 차, 헛디딜 타)  마음먹은 일은 자꾸만 빗나가도다. 

故國海西岸(고국해서안) 고국은 바다 서편 언덕에 있고,  

孤舟天一涯 (고주천일애/물가 애) 외로은 배는 하늘 이쪽에 있네

梅窓春色早 (매창춘색조) 매화 핀 창가에는 봄빛 이르고

板屋雨聲多 (판옥우성다) 판자집에 빗소리 요란하구나

獨坐消長日 (독좌소장일 / 꺼질 소) 홀로 앉아 긴 해를 보내나니

那堪苦憶家 (나감고억가/ 견딜 감, 생각할 억) 집  생각의 괴로움 견디기 어려워라.

 

 

 

 

 

 

솟을대문(성임문)

좌측에  충의 단성을  새긴 바위와 우측에 포은선생의 동상이 있다.

 

좌측 충의 단성(忠義 丹誠)을 새긴 바위는 정몽주 선생의 24대 종손 래정(래정)씨가  생가 중창 기념으로 중국 태항산에서 생산되는 홍보석(紅寶石)을 수입하여 기증한 것이다. 태항산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애국지사들께서 구국활동을 하던 곳으로서 래정씨의 선친인 철수(철수)씨 또한 이곳에서 조국 광복때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에서 항일독립 운동을 펼쳐오셨다. 래정씨는 선친께서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항일운동에 전념하던 곳을 차마 잊을 수 없어 비록 작은 돌이나마 가져다 조상이 탄생하신 옛집 뜰 앞에 심어 두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은 고려말 문신으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난초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린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초명은 몽란(夢蘭)으로 지었다가, 어릴때 어머니가 꿈에 흑룡을 만나 몽룡(夢龒)으로 고쳤다. 관례를 치를 즈음에 아버지 꿈에 중국 주나라의 성현 주공이 나타났으므로 아명을 버리고 몽주(夢周)로 고쳤으미 이로 인하여 생가의 대문을 성임문(聖臨門)이라 정하였다. 호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여진족과 왜구의 토벌에 참여하였고, 사신으로 중국 명나라와 일본에 여러차례 다녀왔다.

선생은 제도 개혁과 풍속 교화를 통해 예의를 진작하였고, 개성에 오부학당(오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학진흥에 힘썼다. 시문과 서화에도 능통하였으니 충절이 깃든 단심가(丹心歌)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조 작품이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있다. 또한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려의 은전이 내려져 효자리 비가 세워지니 인근에 남아있다.

선생은 고려 왕조를 위해 절의를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순절하였으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祖宗으로 추숭받고 있다.

 

<현지 안내표지석에서>

 

 

 

 

 

 

생가는 정면에 안채, 우측엔 사랑채, 좌측 건물엔 광과 디딜방아간 있는 부엌채로 머슴방이 있다. 머슴방은 대체로 안채와는 떨어져 있는데 이곳엔 너무 가까이 위치한다.

 

솟을대문(聖臨門)을 들어서면 좌측편에 <간신에서 절의지사로>의 안내문이 있다.

'간신'의 사전적 의미는 '간사한 신하'인데 조선 건국을 반대했다고 조준이 간신이라 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다른 연유에서 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간신 표현이 거슬려 안내문의 내용을 요약해 본다.

 

조선 태조 원년에 좌시중 조준은 포은 선생을 간신이라 표현한 글을 올렸고, 정도전은 '고려국사'를 편찬하면서 포은선생을 깎아내렸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권근은 상소문을 통해 포은 선생이 고려에 대한 절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으니 큰 절개를 포상해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이에 대광보국승록대부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관 춘추관사 악양부원군에 증직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후대 세종은 정몽주의 인물됨이 순정하고 성실하여 충신의 대열에 기록함이 옳다고 하였고, 문종은 정몽주의 증손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후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포은선생과 길재의 사당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고, 온 조정이 모두 정몽주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바람직하다고 하니 마침내 중종 12년(1517) 포은 선생을 최치원의 다음 자리에 종사하였다.

 

 

 

 

 

 

안채

가운데 대청마루, 맨 좌측 칸이 부엌이다.

 

 

 

 

 

 

안채의 대청마루엔 광풍제월당 현판이 큼지막하다.

 

 

 

 

 

 

부엌도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안채의 좌측편엔 우물과 장독대.

 

 

 

 

 

 

우측의 건물은 사랑채다.

 

 

 

 

 

 

존양당(存養堂)

맹자가 제시한 도덕 수양에 관한 명제인 존심양성(存心養性)에서 취하여 존양당이라 명명하였다.  이곳은 선생께서 남기신 충효예의 정신을 널리 계승하는 인성교육의 도량이며 체험장이기도 하다.

 

 

 

 

 

 

부엌채.

광. 디딜방아가 양쪽에 있고 머슴방이 가운데 있다.

머슴방이 안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제대로 고증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안채 우측편으로 살짝 떨어져 사당(영정각) 배치했다.

 

 

 

 

 

 

영정각

 

 

 

 

 

 

포은 정몽주선생의 일대기가 사랑채 뒷편에 있다.

 

선생 1세(1337) : 12월22일 영천군 우항리에서 아버지 정운관과 어머니 영천이씨 사이에서 출생, 몽란이라 이름 짓다. 9세에 몽룡으로, 관례를 치루고 이름을 몽주로 고쳐짓다.

선생 19세(1355) : 정월에 아버지를 여의고 시묘를 하다.

선생 24세(1360) : 지공거 김득배가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하다.

선생 26세(1362) : 3월에 예문검열을 제수받아 처음 관직에 나아가다. 이때 김용의 모략으로 상주에서 죽임을 당한 김득배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다.

선생 27새(1363) : 8월에 종사관으로 동북면도지휘사인 한방신(韓方信)을 따라 화주에서 여진을 정벌하다.

선생 29세(1365) : 정월에 어미니를 여의고 시묘를 하다.

선생 31세(1367) : 상을 마친 후 전공정랑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얼마 뒤에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를 제수받다.

선생 36세(1372) : 3월에 서장관으로 홍사범을 따라 명나라에 가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지만 천만다행으로 살아나다. 다음해 7월 귀국하여 명나라 황제의 명을 선포하다.

선생 39세(1375) :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 것을 상소하여 언양으로 귀향가다.

선생 44세(1380) : 3월에 판도판서를 제수받다. 가을에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 가서 왜구를 격파하고 돌아오다.

선생 48세(1384) : 7월에 정당문학이 되고 명나라 태조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가다.

선생 51세(1387) : 6월에 하륜, 이숭인 등과 건의하여 호복을 폐지하고 중국 제도에 따라 관복을 정하다. 12월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

선생 52세(1388) : 1월에 요동이 이르렀으나 받아들이자 않아 돌아오다.  7월에 문하찬성사 지서연사를 제수받다.

선생 53세(1389) : 부모의 상에 대한 시묘살이가 조정에 알려저 선생이 태어나신 우창리를 효자리라 이름하고 비석을 세워 이를 기념하다.

선생 56세(1392) : 2월에 신정률(新定律)을 지어 바치다. 4월 4일 절의를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다.

 

하늘의 별이 되어 만고의 충의지사가 되다.

태종1년(1401)에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다.

세종14년(1432)에 삼강행실도의 충신전에 실리다.

중종 12년(15517)에 문묘에 종사되다

명종 9년(1554)에 영천에 세운 임고서원이 사액되다.

 

 

 

 

 

 

정몽주 생가를 둘러보고 인근에 그럴듯한 건물 두 곳이 있어 둘러본다.

 

방지의 연못 윗쪽(앞쪽)에 담으로 둘러쳐진 정자같은 건물인데 누구의 건물인지 모르겠다.

이웃하여 우석 방동로 회장 공적비가 있다.  우석회장은 도로확장, 경지정리등 지역주민 삶을 복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고서사(愚皐書社)

 

우고서사는 조선 성종조 문신인 박영손 선생을 제향하는 곳으로 묘우는 상청사, 강당은 창은당, 동재는 분우헌, 서재는 입나요이며 경내에 선생의 정자인 청풍당과 사호청풍당박선생유허비가 있다.

선생의 호는 영안재, 본관은 밀양으로 세종 4년(1422) 경산현 내매리에서 태어나 세조6년(1460) 별시 문과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내직으로 홍문과교리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풍천군수가 되어 선정을 펼쳤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앞쪽 비석이 있으나 주변 경관이 더 좋다.

 

 

 

 

 

 

대문이 닫혀있어 이만큼에서 되돌아 간다.

 

 

 

 

▣ 임고서원

 

 

좌측부터 구 서원, 현재의 서원, 공영 주차장, 포은 유물관, 충효관, 포은 연수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러볼 곳의 방향

 

 

 

 

 

 

먼저 임고서원으로 간다.

 

 

 

 

 

 

현판은 영광루(永光樓)

 

 

 

 

 

 

임고서원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 부래산에 창건하여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현위치에 중건, 재사액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 여헌 장현광 선생을 배향하고 정조11년(1787)에는 지봉 황보인 선생을 추향하였고,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5년에 복원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 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외교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지조로 추앙되었고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3은의 한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니 공양왕 4년(1392)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조선태종 원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문충의 시호가 내려졌다.

<현지 안내문에서>

 

 

 

 

 

 

여러 편액들

 

 

 

 

 

 

동재

 

 

 

 

 

 

서재

 

 

 

 

 

 

영광루

 

 

 

 

 

 

비각

 

 

 

 

 

 

 

 

 

 

 

 

 

통정대부 공조참의로 추증된 최선매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

 

최선매(1554~1626)의 자는 의수, 호는 긍화이며, 부래산 아래에 살던 포은 선생의 원우(院宇,옛 임고서원) 유생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원이 소실될 위기에 있을 때, 선생의 영정과 위판을 받들어 기룡산 석굴(성혈)속에 피안시켰으며, 난리가 평정된 후에 서원을 중건하여 다시 안치한 공을 인정 받아 유림의 상소로 고종 신묘년(1891)에 공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사림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기적비를 서원의 영당앞에 세우니 봉한이 글을 쓰고, 포은 선생의 방손인 정희규가 비문을 지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서원을 둘러보고 은행나무 앞쪽으로  나와 서원 전경을 본다.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一百番)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잇으랴.

 

백로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마라

성낸 까미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淸江)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은행나무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었던 때부터 심겨 있던 나무이다.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을 때 함께 옮겨 심었다고 한다. 현재 나이는 약500년 정도이며, 나이에 비해 건강한 노거수이다.

뒷 편의 건물은 구 임고서원이다.

 

 

 

 

 

 

포은선생 숭모 기념비

 

 

 

 

 

임고파출소 뒷편이자 임고서월을 앞에서 바라보았을때 좌측편이다.

전망대 가는 들머리이자 포은 단심로의 들머리이나 날머리이다.

초반 제법 경사를 보이나 길이는 길지 않다.

 

 

 

 

 

 

3코스의 경우 7.5km로 가볍게 등산할 수 있겠다.

조옹대를 들머리로 해도 되겠지만 역으로 산행하는 것도 좋을것 같다.

 

 

 

 

 

 

은행나무 앞쪽에 선죽교를 재현해 놓았다.

 

 

 

 

 

 

선죽교(사진 우측 뒷편)는 현 북한의 개성에 있는 돌다리로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갔다가 돌아올 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의 붉은 반점은 정몽주의 피 얼룩이라 전한다.

 

 

 

 

 

 

서원과  은행나무, 임고 파출소 뒷편의 전망대 들머리, 선죽교 등을 둘러보고 입구로 나왔다.

 

 

 

 

 

 

동방이학지조 송탑비

동방이학지조 송탑비의 전면 글씨는 퇴계 선생의 유묵 중에 집자를 하였으며, 후면에 조선시대 어제어리 시를 각자하였다.

 

숙종대왕(1661~1720) 조선 제1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674~1720년이다.

절의천추고(節義千秋高) : 절의가 천추에 높으니

평생아경중(平生我敬重) : 평생에 내가 존중하도다

열조누포숭(列朝屢褒崇, 기릴 포) : 열조께서 여러번 포숭하였거니와

사림숙부용(士林孰不聳 / 솟을 용) 사림의 누구인들 높이지 않으리오

 

영조(1694~1776) 제 21대왕, 재위기간은 1725~1776

도덕정충긍만고(道德精忠亘萬古 / 걸칠 긍 :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치니

태산고절포은공(泰山高節圃隱公) : 태산같은 고절의 포은공일세

 

고종황제(1852~1919), 조선제26대 왕 재위1863~1907

위충대절광우주(危忠大節光宇宙): 높은 충성 큰 절의가 우주에 빛나니

오도동방뢰유공(五道東方賴有公/의지할 뢰) : 동방의 오도는 공에게 힘 입었네

 

 

 

 

 

 

조옹대와 용연.

 

 

 

 

 

 

조옹대와 용연

 

포은선생은 호수의 물고기를 보며 연비어약(鳶飛魚躍/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논다/시경) 말씀하셨으며, 여헌 선생은 임고서원 상량문에서 '조옹이라는 臺가 시냇가에 있는 것은 아마도 은거하신 초지(初志)일 것이라'라고 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은 포은 선생께서 낚시를 즐겼다하여 조옹대라 부르고, 또 선생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용이라 하여 조룡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는데 이번에 복원을 하고 울진 금강송 아래 자라던 토종 잉어를 분양받아 '금강'이라 이름 지은 뜻은 포은 선생의 시 <湖中觀漁/호중관어>의 "모든 것이 팔팔한 고기와 같네 / 物物眞成潑潑魚"에서 찾으리라.

<현지 안내문에서>

 

 

 

 

 

조옹대.

이런 절벽이 북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과거 하천이 아니었나 싶다.

 

 

 

 

 

 

조옹대에 오른다.

 

 

 

 

 

 

무괴정(無愧亭/허수아비 괴, 클 괴)

 

 

 

 

 

 

조옹대에서 바라본 임고서원 전경

 

 

 

 

 

 

약간 방향을 틀어 유물전시관, 충효관, 주차장 등

 

 

 

 

 

 

언제 단심로를 걸으려 와야겠다.

 

 

 

 

 

 

임고면은 상당한 평야를 가지고 있어 생활이 윤택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포은 유물관을 둘러본다.

 

 

 

 

 

 

유물전시관은 ㄷ자형 건물이다.

 

 

 

 

 

 

제1전시실은 포은관

 

 

 

 

 

 

성리학의 보급과실천에 힘쓴 포은

고려 말의 이색은 "정몽주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시원하며 탁월한 데가 있어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며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추대할만하다."고 높이 칭찬하였다. 조선 선조대의 고봉 기대승은 포은 선생에 대해 "고려 말기에 정몽주는 충효의 큰 절의가 있었고, 정주의 학문을 배워 동방이학의 조종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포은의 생애는 포은생가에서 약술하였다.

 

 

 

 

 

 

 

 

 

 

 

 

 

 

제2전시실은 임고관.

 

 

 

 

 

 

임고서원의 주요 유적, 임고서원의 과거와 현재

 

 

 

 

 

 

이곳은 충효관

숙박시설의 방이 많다.

 

 

 

 

 

 

포은 연수관

 

 

 

 

 

 

포은연수관 앞쪽의 단심정

숙소용도이다.

 

 

 

 

 

 

계현재(啓賢齋)

 

 

 

 

▣ 선원마을

 

 

선원마을은 특이하다. 

우선 개인주택으로서는 대지 면적이 보기드물 정도로 넓다. 건물 또한 보통이 아니다.

내비에 선원마을을 입력하고 마을 입구에 주차하고 돌아보면 된다. 특별히 주차장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입구 약간의 공터가 있다.

 

 

 

 

 

 

자호천 권역으로 표시되어 있고, 이정표 또한 있으나 초행이라면 방향 가늠이 쉽지않다.

 

1.도곡요(송고헌고택) 150m  / 대문이 닫혀있어 입구만 보았다.

2.학파정(밀양고택) 130m     / 솟을대문이 열려있으며 주인이 살지않는 집으로 둘러볼 수 있다

 

3.송원재 150m  / 송원재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함계정사 뒷쪽에 있는 것 같기도 하나 요(락)국선원원인것 같기도 하다.(요국선원엔 송정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4.함계정사 80m  / 들머리 언덕 위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5.연정, 연종고택 (정용준 가옥) 500m

6.연정, 동연정 300m     /  연정과 연정고택은 이웃해 있다,

 

이 이정표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입구(공터변)의 이정표에는경괴제 330m, 지호천 산책로 표시가 있다.

 

 

 

 

 

 

먼저  앞쪽에 보이는 범상치 않은 건물쪽으로 간다.

들머리 나무 두 그루가 연리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함계정사

옆에 개인주택이 있고 마침 주인장이 있길래 선원마을을 둘러보러 왔다하니 함계정을 안내한다.

마을을 어떻게 둘러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입구에 주차하고 마을을 둘러볼 방향을  대충 가늠케 해 준다.

 

 

 

 

 

 

함계정사(함계정사) / 임고면 선원리  203-2번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 선생의 현손인 정석달(1660~1720) 선생이 숙종 28년(1702)에 학문을 강학하기 위해 정자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소재(小齋)를 지은 것이 안락재이다.

그 후 정조 3년(1779) 선생의 손자 일찬(1724 ~1797)공이 중건하여 함계정사라 하였다. 선생의 호는 함계, 본관은 오천, 갈암 이현일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을 탐구하여 인품과 덕망이 높았으며, 병와 이형상 선생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일생을 보낸 성리학자로 가례혹문 등 문집이 남아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도곡요(송 고헌고택)  / 임고면 선원리 202번지

함계정사 들머리 이정표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땔감용 장작(나무)가 많이 쌓여있는 집으로 대문이 닫혀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도곡요를 약간 방향을 달리하여 바라본 모습이다.

 

 

 

 

 

 

도곡요 앞 도로를 따르면 이내 폐허가 된 것 같은 범상찮은 건물이 보인다.

지번은 선원리 187번지

 

 

 

 

 

학파정(밀양고택)

 

살짝 대문채로 들어서니 문이 활짝 열려있다.

솟을대문채의 달아낸 부분은 많이 낡아 흉물스럽다.

 

 

 

 

 

 

 

대문안으로 들어서니 빈집으로 남아있다.

별다른 안내표지판이 없어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이 집이 밀양고택이지 싶다.

 

 

 

 

 

 

학파정(학파정)

우측으로 상당한 건물이 관리되지 않은채 방치되어 있다. 수풀이 무성하여 접근하기도 어렵다.

 

이 마을 뒷편으로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펼친 부채끝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토담이 있다. 상태로 보아 비교적 근년에 쌓은 듯 하나 집과 집의 경계가 아닌 능선과 마을의 경계를 두른점이 특이하다.

이곳 마을 이름 선원의 유래는 조선 인조 때에 벼슬에서 물러나 입향한 정호례라는 선비가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한다.

 

 

 

 

 

 

선원리 191번지

 

위 두 집을 외관으로 둘러보고 되돌아 나와 우측 마을안길을 따라 진행하면 이런 집이 있다.

넓은 잔디 마당엔 몇 조각품을 배치하였고, 건물을 다듬고 칠하여 깨끗하고 운치있게 관리하고 있다.

한켠엔 조그만 토담집 같은 집도 있다.(사진 좌측의 황토색 반조각 보이는 건물)

사유지로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가 있어 이쯤에서 바라만 보고 간다.

 

 

 

 

 

 

위 가옥앞을 지나면 이내 갈림길이 있다.

좌측 길은 야트막한 동네뒷편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다. 담장 산책로를 보러 이 길을 따라 본다.

마을 개인 주택의 토담은 일부 정비하였으나 건물 자체는 상당히 낡았다.  따라서 어수선한듯 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다.

 

 

 

 

 

 

담장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이 담장은 함계정사 인근까지(도곡요 뒷편) 조성되어 있다.

 

 

 

 

 

 

송원재

위 언덕에 오르면 자연스레 요?국선원(樂國仙源)으로 이어진다. 위치는 선원리 161번지

 

 

 

 

 

 

깅아지 한마리가 짓어대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있는 집인것 같다.

이집 역시 너르다.

 

 

 

 

 

송정(松亭) 편액이 걸려있다.

그래서 이정표의 송원재가 아닌가 추정해 보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위 락(요)국선원에서 앞쪽에  고 건물이 가늠된다.

 

 

 

 

 

 

이 대문으로 들어서면 건너편으로 이어진다.

 

 

 

 

 

 

연정 (蓮亭) /선원리 130번지

 

뒤에 보이는 건물이 연정고택이다.

이 건물은 연정고택(본채)와 50여m 떨어진 냇가의 정자 형식으로 건축 직후 옆의 연못에서 저절로 연꽃이 피어나 연정(蓮亭)이라고 편액하였다고 하는 초익공(初翼工) 집이다.

 

 

 

 

 

 

위 연정의 뒷편인 셈이다.

 

 

 

 

 

 

연정고택  / 선원리 131번지

 

 

 

 

 

 

연정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택은 정용준씨의 8대조가 조선 영조 원년(1725)에 건축한 것으로 본채와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일자형으로 합쳐있고,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의 방주(方柱)와 납도리로 결구(結構)한 3량가구(三樑架構/들보 량, 시렁 가, 얽을 구)의 소로수장 물익공 (勿翼工)집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ㅁ자형 집으로 삼면으로 작은 문이 있으며 문이 닫혀있을 경우 집안으로 들어갈 틈이 없다.

 

 

 

 

 

 

연정과  연정고택을 둘러보고 마을길을 따라 내려간다.

 

 

 

 

 

 

갈림길 삼거리에서 저쪽 집 상부쪽이 시선이 가는 한옥이 있다.

 

 

 

 

 

괴헌고택 / 선원리 126번지

 

 

집 앞을 청소하고 있는 젊은이가 있어 집을 둘러보고자 한다고 하니 쾌히 허락한다.

 

 

 

 

 

 

이 한옥 옆에 양옥의 건물이 있어 주인은 이곳에 거처한다.

 

 

 

 

 

 

귀헌고택을 둘러보고 마을 앞으로 나오니 연못과 정자가 있다.

 

 

 

 

 

 

이정표상의 주요 건물은 그의 둘러본 셈인데 귀가 후 마을을 다시 살펴보니 경괴제만 남았다(둘러보지 않았다)

위성지도로 검토해 보니 신원리 90번지와 94번지 둘 중에 하나일 것 같다.  이 정자 앞쪽(강가쪽) 인근에서 가는 길이 있으며 거리는 가깝다. 

강변 산책길을 따라 주차해둔 마을 입구로 가면서 선원마을 일정을 마친다.

 

 

 

 

 

▣ 임고강변공원

 

 

임고강변공원의 벚꽃이 유명하다하여 잠시 둘러본다.

 

 

 

 

 

 

웬 별 볼것 없는 공원에 차량이 이렇게 많지 싶었는데 캠핑을 즐기기 위해 나온 차량이다.

주차장도 그의 만차지만 도로변에 주차해야 야영장과 거리가 쬐끔이라도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로변에는 벚나무를 가로수로 식재하였으며  꽃이 만개할려면 1주일쯤 있어야 만개할 것 같고,

강변은 잔디밭, 광장. 소형 운동장 정도이나 무로료 개방하는 캠핑장으로 인해 아주 인기있는 곳이 되었다

 

 

 

 

 

 

 

 

 

 

 

 

 

 

 

 

 

 

 

 

 

 

 

 

 

 

강변 경관도 수려하다.

 

 

 

 

 

 

임고강변공원을 둘러보고 보현산으로 향한다.

내비에 보현산 천문대를 입력하니 영천호 상부를 거쳐 보현산 방향으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