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창녕 남지 개비리길

정헌의 티스토리 2024. 5. 1. 22:47

■ 창녕 남지 개비리길

 

남지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창나루마을, 창진마을)에서 영아지마을 창아지 나루터까지 이르는 낙동강가를 따라 조성된 길이다. 일부 벼랑길이 있으나 아주 험한 벼랑은 이니다. 옛날 떨어져 있는 새끼 개에게 젖을 주기위해 어미개가 매일 다니던 길로 개와 벼랑(비리)가 합하여 개비리길이 되었다고 한다. 주변은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 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개비리길 탐방은 마분봉을 지나는 등산로와 개비리길을 연결하여 탐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는 길

 

 

 

▷탐방안내도

 

과거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개비리 길을 먼저 걷고 마분산을 거쳐 되돌아 왔는데, 오늘은 마분산 등산로를 먼저 걷고 개비리 길을 따라 되돌아와 남지 철교까지 걸을 것이다.

 

 

 

▷탐방코스

현위치 - 마분산 - 창나루 - 개비리길 - 남지철교. (2024. 4. 25.)

 

 

▷탐방후에

창나루마을에서 출발한다.

대형버스가 진입할 수 있던가 의심이 들기도 하였는데 충분히 접근 가능한 곳이다.

직진하여 강변을 따르면 개비리길이 시작되지만 오늘은 마분산쪽 능선을 먼저 오르기로 한다.

 

 

 

 

 

들머리

 

 

 

 

 

초반 제법의 경사를 보이지만 그 길이는 길지 않다.

 

 

 

 

 

이내 주 능선으로 오르게 된다.

 

 

 

 

 

마분산(馬墳山)과 창나리(倉津)

남지 개비리길을 따라가면 용산리 첫 마을인 창나리가 나오는데 倉이 있던 나루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창진(倉津)이라 적는다. 이 마을의 뒷산은 창진산 또는 마분산이라 불린다. 창나리 마을 유래는 신라 때 산 앞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강 건너 백제와 국경을 이룸으로 이곳 마을에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뜻으로 창나리(倉津)마을로 지금까지 불러지고 있으며, 산 이름도 창진산으로 바뀌었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천강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의 죽은 말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하여 '말무덤산(馬墳山/ 봉분 분)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창나리 마을 앞의 독산(獨山)에는 가야시대부터 가야진명소(伽倻津冥所/어두울 명)가 있었으며, 명소의 용단(龍壇)에는 조선시대 후반까지 조정에서 봄, 가을로 향촉과 제물을 영산 현감에게 보내여 국경을 지키다 순직한 병사의 명복을 빌거나 우순풍조(雨順風調 / 바람 불고 비오는 것이 때와 분량이 알맞음)의 용왕제와 가뭄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낙동강 용왕대제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근데 마분봉 등산로 입구에 10호 이내의 조그만 마을이 창진마을인지는 모르겠다.

 

 

 

 

 

 

 

 

 

 

 

 

팔각정

 

곽재우 장군와 토성과 말무덤

임진왜란(1592) 때에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은 의병을 일으켜 마분산에 토성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왜적을 맞아 신출귀몰하게 싸워 백전백승하였다.

이 토성은 작은 규모이나 정상에 공간을 두어 강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으며 산을 힘들게 올라온 적과의 육탄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정상 안쪽에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430여년의 풍상에 토성은 허물어져 겨우 흔적만 남겨두고 있다.

 

곽재우 의병장은 왜장 하시바가 강변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열세인 의병이 전면 전투로는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말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여 벌떼의 공격을 받은 적군의 혼란을 틈타 기습 공격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적탄에 맞아 자신의 말이 사살되자 그 공을 높이는 뜻으로 토성안의 의병 무덤 뒤에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하여 이 산 이름이 창진산에서 말무덤산(마분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덤의 둘레가 25m, 높이가 5m로 기록과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세월의 풍파와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져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현지 안내문에서>

 

 

 

 

 

위 팔각정에서 바라본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이다.

 

 

 

 

 

 

 

 

 

 

 

 

 

 

 

 

 

 

 

 

 

 

 

 

 

 

6남매 나무

다섯 주간(株幹)의 소나무 중앙에 산벚꽃씨가 떨어저 싹을 내어 소나무 5개 주간 사이를 통하여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려 소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기에 6남매 나무라 이름붙였다. 산벚나무는 4월에 연분홍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는 없으며, '버찌'라는 열매를 맺는데 5~6월에 검은 빛으로 익으며 먹기도 한다. 마분산에는 산벚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것은 삼형제 소나무로 이름붙였다.

 

 

 

 

 

 

 

 

 

 

 

 

창나루 주차장에서 1.5km지점이다.

마분산 정상 갈림길이 있다.

우측으로 양아지 주차장 1.7km,  양아지 전망대 1.48km로 표시되어 있다.

좌측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우측의 양아지 가는 길과 연결되지 않는것 같다.

양쪽길 가운데로 난 조금 사람들이 적게 다닌 길을 따라 봉우리로 오른다.

 

 

 

 

 

 

말무덤산 정상인 이곳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아 곽재우 의병장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이름없는 의병들이 합장되어 있는 거대한 무덤이다.

'무덤의 둘레가 20m, 높이 5m로 내부에 석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부는 돌을 쌓아 둘렸다. 커다란 봉분을 지어 자손만대에 그들의 용맹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에 전한다.

4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고 전면에는 개인 무덤이 조성되어 크게 훼손되어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마분산 정상의 의병무덤으로 이야기 되는 곳인가 보다.

개인의 묘지가 있다.

 

 

 

 

 

위 묘지가 있는 봉우리가 마분산 정상인가 싶다

준,희 님의 화왕지맥 179.9m표식과, 마분산이란 표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다.

 

 

 

 

 

마분산 주 능선은 높지는 않지만 여러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한다.

 

 

 

 

 

목동의 이름 새긴 돌

 

 

 

 

 

흙속에 묻혀 얼굴만 내민 자연석 바위에 지금도 선명하게 <정규환, 황준순, 정호성>, <진종규> < 황선도. 신전. 나무심으 사태막자,  黃東淳> <安在奎 1965.7.17, 정양호> <1970.8.2 오삼태> 등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당시 민둥산이었던  마분산에 소를 방목하면서 무료한 사간을 달래기 위해 6.25 전쟁의 상흔인 포탄 파편과 철갑탄 탄두를 이곳 주변에서 주워 글자를 돌에 새겼다고 한다. <나무심어 사태막자>는 글은 민둥산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숫한 목동들의 소망을 실은 낙동강변 창나루에 달빛 푸르게 흐른다.  6.25전쟁 이후 미군의 유해 수습으로 불발탄과 파편 등을 수차례 수거해서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치산녹화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변했으나 치열했던 전장과 민둥산을 입증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창나루 주차장에서 1.4km 지점이다.

도초산 1.7km 갈림길이 있다.

영아지쉼터는 1km 남았다.

 

 

 

 

 

 

 

 

 

 

 

 

전설의 마분송

 

마분산 주변에는 주간(株幹)이 여러개로 분주하여 자라는 소나무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마분산에 자생하는 다간(多幹)소나무를 마분송이라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장이 마분산의 나무에 의병의 옷을 입혀 허수아비로 만들어 의병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전술로 왜적을 물리쳤듯이, 마분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의병의 무덤주위의 소나무들도 임진왜란을 맞아 우리강산 우리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름없는 의병들의 무덤을 수호하고자 주간을 여러개로 분주하여 우거진 숲으로 위풍을 당당히하여 함부로 침입자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안내문에서>

 

 

 

 

 

임도를 만난다.

좌측 탐방로를 따른다.

이 탐방로는 중간에 임도를 한번(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한번 더 만남) 만나고 나중 결국 이 임도와 만나 팔각정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탐방로는 걷기 좋다.

 

 

 

 

 

 

 

 

 

 

 

 

임도와 중간에서 만난다.

(이후 몇 십미터 진행하면 다시 한번 더 임도를 만남)

 

 

 

 

 

탐방로를 따른다.

 

 

 

 

 

이곳에서 임도와 다시 만나 이후 다음 팔각정까지 임도를 따라 내려가게 되어 있다.

 

 

 

 

 

자전거 하이킹 가족

잔뜩 짐을 싣은 아빠와 아들, 엄마와 아들 각각 자전거를 타고, 걷고 오른다. 스파이더맨 복장으로 한층 멋을 낸 어린이가 앞 자전거에 매달려  씩씩하게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임도를 따라 영아지쉼터 팔각정으로 왔다.

이후 임도는 영아지 앞산(0.3km), 임도 입구 0.77km으로 간다. 이 임도는 일명 낙동강 자전거 길이기도 하다.

탐방로를 따라 영아지 전망대(0.21km)로 간다.

(이정표 있음)

 

 

 

 

 

 

 

 

 

 

 

 

 

오늘 세번째 만나는 정자로 영아지 전망대로 표시되어 있다.

이웃해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안내문이 있다.

이곳에서 약 40분에 걸쳐 점심시간을 갖는다.

 

 

 

 

 

지그,

 

 

 

 

 

재그로 내려간다.

중간 데크 계단 갈림길에서 데크길을 따르면 아래 영아지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가게 되고,

 

 

 

 

 사면으로 난 탐방로를 따르면 비렁길 입구로 내려온다.

양아지 주차장과 데크길 들머리 등을 확인해 보고자 잠시 주변 발품을 판다.

 

 

 

 

 

저만큼 영아지 전망대로 오르는 데크길이 있고,

사진상 보이진 않지만 화장실이 잘 지어져 있다.

주차장 크기는 이정도.

 

 

 

 

 

주변을 둘러보고,

 

 

 

 

 

되돌아 개비리길로 간다,

 

 

 

 

 

 

 

 

 

 

 

 

 

 

 

 

 

 

 

 

 

 

 

 

 

 

 

 

 

 

 

 

 

 

 

 

 

 

 

 

 

 

 

 

 

 

 

 

 

 

 

 

 

 

야생화쉼터

 

 

 

 

 

야생화 쉼터의 전망대.

 

 

 

 

 

 

 

 

 

 

 

 

죽림쉼터

 

 

 

 

 

영험있는 팽나무 연리목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 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하늘에선 날개 붙은 두 마리 새가되고, 땅에서는 가지 붙은 두 그루 나무가 되기를 소원하는 [당 헌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백거이의 장한가에 나오는 구절]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 같은 巨木이다  연리목은 척박한 암반 위에 자라다 보니 왜소하나 오래된 나무로 수령이 100년의 나이테를 만들었다.

인근하여 회락재(匯洛齋 /물돌회) 유허지가 있다.

 

 

 

 

 

이곳 죽림은 규모가 제법크다.

잠시 쉬어 갈 겸 대나무밭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가면 된다.

진행방향에서 우측(강변쪽)으로 진입하면 강변에 아래 사진의 팔각정이 있다. 

 

 

 

 

 

죽림쉼터는 여양진씨 묘사 재실인 회락재 앞의 묘전토지로서 땅이 걸고 기름진 옥토였다. 남지읍에서 의령.합천군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 회락재를 지나서 가는 개비리길이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신작로(新作路)가 생겨 개비리길은 방치되었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하늘을 가리는 대나무 숲으로 변모하였다. 그후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 남지개비리길이 널리 알려지면서 풍상에 침식되어 귀곡산장으로 변한 회락재는 철거하고, 봉두난발(蓬頭亂髮/ 쑥봉)로 자란 대나무 숲을 2015년도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조성사업이 시행되고,  2018년 초순부터 죽립쉼터를 왕대 숲가꾸기와 덧칠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의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맹랑하고 당돌한 놈과 천재

 

공자와 황택이란 아이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가는 길에서 7~8세 정도 되는 아이가 성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수레가 가까이 가도 아이는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자는 수레가 지나가도록 길 좀 비켜달라고 청했다. 쭈그리고 앉아 성 쌓기 놀이를 계속하던 아이가 한 말. “수레가 성을 비켜야 하나요?, 성이 수레를 비켜야 하나요?” 참 당돌한 말이다.

공자는 아이를 똑똑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이름은 황택, 나이는 여덟 살이라 했다. 다시 공자가 물었다. “너, 바둑을 좋아하느냐?” 꼬마 황택이 “군주가 바둑을 좋아하면 신하가 한가롭고, 선비가 바둑을 좋아하면 학문을 닦지 않고, 농사꾼이 바둑을 좋아하면 농사일을 못 합니다. 그런데 어찌 바둑을 좋아하겠습니까?”하고 반문하였다. 놀란 공자가 몇 가지 더 물어도 되겠느냐? 고 양해를 구한 뒤 “자식을 못 낳는 아비는 누구냐” 하니 “허수아비”라 대답, “연기가 나지 않는 불은?”하고 물으니, “반딧불”, 다시 “고기가 없는 물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눈물”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하여 공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 맹랑한 아이였다.

벌떡 일어선 황택이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겨울에 소나무 잎이 왜 푸릅니까?” 공자 “소나무가 속이 꽉 차서 그런가?.” 자신 없이 대답하자 황택은 “대나무는 속이 비었는데 왜 푸릅니까?”하고 되물었다. 공자가 말이 막혀 사소한 것 말고 큰 것을 물어보라고 했더니, “하늘에 별이 모두 몇 개입니까?” 공자 “그건 너무 크구나.” 그러면 “땅 위의 사람은 모두 몇 명입니까?” 공자 “그것도 너무 크구나.” “눈 위의 눈썹은 몇 개입니까?” 대답하지 못한 공자는 아이가 참 똑똑하다고 생각하여 잠시 제자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수레에 올라 그냥 가던 길을 갔다. 천재불용(天才不用)이라. 머리는 좋으나 덕이 부족하여 성공할 수 없을 것을 간파했음이다. 그 후 ‘황택’이란 이름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황택의 천재성은 8살에서 끝이 난 셈이다.

황택이 천재였을까? 아주 맹랑한 놈, 당돌한 놈인 것만은 틀림없다. ‘맹랑하다’라는 말은 ‘생각과는 달리 이치에 맞지 않고 매우 허망하다’라는 뜻도 있고, ‘깜찍하고 당돌하다’라는 뜻도 있다. 얄밉도록 맹랑한 아이다. 지나칠 만큼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다. 허술하게 볼 수 없는 아이다. ‘당돌(唐突)하다’라는 말은 ‘조금도 꺼리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야무지고 굳세다, 행동으로 당황하게 하다’는 뜻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윗사람을 어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을 야무지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고 쓰는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내는 아이를 ‘신동’ 혹은 ‘영재’라 부른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탁월한 업적을 만드는 사람을 ‘천재’라고 일컫는다. 우리나라에도 천재가 많이 나오고 있다. 수학이나 물리 같은 영역에서도 세계올림피아드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재가 있었다. 예체능 분야에서도 세계를 놀라게 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세간의 부러움을 샀던 영재들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어린 나이로 NASA에 입성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산 사람도 있다. 재능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휘둘려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학교 폭력에 휘말려 천재성을 잃는 수도 있다. 균형 잡힌 인성 발현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다. 천재를 맹랑하고 당돌한 놈으로 만들지 말자. 덕을 갖추어 인류에 크게 이바지하는 천재로 기르자.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

 

 

 

 

 

동천교

이름의 유래는 하늘동네, 신성한 곳, 신선이 사는 곳의 의미를 가진 이곳 회락동천(匯洛洞天/물돌회, 물이름락).

낙동강 강가에 강물이 급류를 이루면서 오랜 세월속에 만들어 놓은 모래둔치에 잘 자란 대나무 숲.

옛부터 "죽립칠현과 같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여 만든 동천교, 이미 금천교를 건너면서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오셨다면 하늘에 있는 동네 즉, 신선과 선녀가 사는 신성한 이곳으로 접어드는 동천교 다리입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여양진씨 감나무 시집보내기

단오 날에 대추나무와 감나무는 암꽃만 피기 때문에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어주는(껍질을 벗기거나, 철사 줄로 감아 주는 것) 감나무 시집보내기를 하면 감나무가 위기의식을 느껴서 생존본능에 열매를 많이 단다는 우리 조상님들이 지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이곳 여양진씨 집 앞뜰에 심어져 있는 나무는 7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그 자리를 지키며 지금까지 <감나무 시집보내기>를 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저만큼 금천교

 

 

 

 

 

 

 

 

 

 

 

 

 

 

 

 

 

 

 

 

 

 

 

 

 

 

 

 

 

 

 

 

 

 

 

 

 

 

 

 

 

 

 

 

 

 

 

 

 

 

 

 

 

 

관직에 등관(登官)시킨 층층나무

천지신명께서 점지해 주신 층층나무에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여 아들이 관직에 입문하여 고을 원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다.

 

 

 

 

 

옥관자(玉貫子)바위

옥관자를 사전에 찾아보니 <조선시대, 옥을 재료로 하여 밍간의 당줄을 꿰게 만들어 달던 작은 고리>로 나온다.

이웃해 옥관자 바위 안내문에  땅속에 묻혀 있던 바위를 들어 내어보니 영험한 기운의 느낌이 나고, 주변 옹달샘에는 서광이 비치면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인근 산세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자욱한 운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매일같이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거 기도드렸다 한다.

 

 

 

 

 

개인 농장이 있어 이곳까지 차량이 통행한다.

 

 

 

 

 

 

 

 

 

 

 

 

 

 

 

 

 

 

 

플라타너스 나무

 

 

 

 

 

홍의장군 붉은 돌 신발

홍의 곽재우 장군은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외가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22일 만에 현고수에 북을 매달아 북을 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이후 첫 승전보를 기음강(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 남지읍 용산리 창나루)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의령. 창녕. 합천. 함안. 달성 일원에서 연승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래서 왜구들이 붉은 색만 보면 두려워하여 도망갔다고 한다.

어느날 망우당 선생께서 외가에 출타를 갔다가 왜구가 기음강변에 출몰했다는 통문에 급하게 기음강을  건너면서 붉은색 한쪽 신발은 낙동강물에 떠내려가고 한쪽 신발은 남지 창나루쪽 강변에 놓이게 되었다. 창나루 주민들이 붉은 신을 잘 보존해 왔으나 일제강점기 왜놈에게 빼앗겨 낙동강에 던져지고 말았다. 후 창나루 주민들이 마분산 말무덤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날 꿈에 홍의장군이 나타나 잃어버리지 않을  "붉은색 돌 신을 줄 터이니 보존을 잘 해서 더 이상 왜침이 없길 바란다" 하셨다. 망우당 선생께서 말씀하신 곳을 가보니 실제로 붉은 색을 띈 신모양의 돌이 기음강 주변 땅속에서 발견되어  창나루 주민들이 감사의 고유제를 지내고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스토리텔링이 좀 심한 듯 싶다.

 

 

 

 

 

 

 

 

 

 

 

 

 

 

 

 

 

 

 

현재 시간이 오후 2시.

오전 10시 30분경  이곳을 출발하여 마분산을 거쳐 영아지 나룻터,  개비리 길을  따라 이곳으로 되돌아 왔으니 점심시간  약40분을 제외하면  2시간 50분여(중간 중간 쉬어가면 천천히 걸은 시간이다.) 소요되었다.

오후 시간적 여유가 많다.

그래서 이곳에서 수변공원을 따라 남지철교까지 약 3km거리를 걷기로 한다.

 

 

 

 

 

 

 

 

 

 

 

 

 

 

 

 

 

 

 

 

 

 

 

 

 

 

 

 

 

 

 

 

 

걍변이 넓다.

 

 

 

 

 

 

 

 

 

 

 

 

유채꽃은 다 졌다.

 

 

 

 

 

창나루에서 중간 중간 쉬어가면 남지철교까지 오는데 1시간 20분여 소요되었다.

약 3km 거리인데 중간 너무 많이 쉬었나?

 

현재 시간이 오후 3시 40분이 가까워 온다.

여러해 전이지만 도천면 소재지 도천진짜순대집이 생각나 전화를 해 본다.  지금 브레이크 타임이란다.

 5시 이후에 오란다.

간혹 들러던 진주 횟집으로 와 뒷플이를 하고 귀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