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운주사, 조광조 유배지, 양참사댁,학재고택, 학포선생부조묘, 세계거석테마파크와
화순 운주사는 여러해 전 조선일보에서 화순과 관련, 신비롭고 새로운 시각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어 올려본다.
[아래 글은 여러해 전 조선일보에서 "신비의 땅 화순"이란 제목 박종인 기자님이 작성하신 기사임을 밝혀 둡니다 ]
# 미스터리 1. 운주사
천불천탑을 하룻밤 만에 쌓은 절이라는 전설이 있다. 창건부터 폐사까지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는 운주사 이야기다. 서산(西山) 언덕에 있는 와불(臥佛) 한 쌍은 그 전설에 신비감을 더한다. 그 어느 고고학자도 근원을 명쾌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 운주사가 불교 유적이 아니라 도교 유적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화순군과 함께 화순 일대 역사 유적을 연구하는 한국레저경영 연구소 최석호 박사는 "운주사는 불교 사찰이 아니라 도교 사원이었다" 고 주장한다. 주된 내용은 이렇다.
"불상·보살상은 지위와 진리를 상징하는 손가락 동작(수인·手印)이 있다. 경전을 모르는 중생들이 깨달음을 직접 익힐수 있도록 하는 표현이다. 운주사에 있는 석상들은 하나같이 손을 소매 속으로 감추고 있다. 수인은 감춰지면 무의미하다. 운주사 석상들은 불상이 아니라 사원의 무인상이다." 실제로 보면 운주사 석상들은 옛 무덤 앞 문·무신상처럼 길게 늘어뜨린 소매 속으로 손을 감추고 있다.
석탑들도 전통 양식과 다르다. 서산 초입에 있는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정설이다. 탑들의 배치 또한 북두칠성 일곱 별과 유사하다. 그꼭대기에 와불이 있다. 최석호 박사는 "탑들에 새겨진 기하학 문양 또한 천문학적인 상징이고 와불 또한 불상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도교 무사상" 이라며 "여러 증거를 보면 운주사는 13세기 도교 사원을 건설 중이던 이 지방 호족들을 경계해 무신 정권이 공사를 중단시킨 미완의 사원"이라고 했다. 물론 주류 사학계와 불교계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최 박사는 "그렇다면 미스터리라고 놔두지 말고 불교 사원임을 입증해달라"고 했다.
초저녁 운주사에 가본다. 불상이 되었든 무사상이 되었든 개의치 않는다. 누워 있는 석상 위로 별이 흐르고, 겨울 하늘은 짙푸르다.
화순엔 이곳 저곳 볼거리가 많다.
몇 군데 찾아보지 못한 곳을 둘러보고자 화순을 찾았으나 겨울철 해는 짧다.
◐화순 관광안내 지도
과거 화순 여러 곳을 다녀왔지만 화순군관광안내도를 보니 소소한 볼거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읍면단위별로 정리해 본다.
○화순읍 : 만연산철쭉공원(5경 / 수만리), 무등산양떼목장, 무등산바우정원(입장료10,000원), 만연사, 만연산치유의 숲, 정약용선생 독서기비, 동구리호수공원(만연저수지 상부 및 하부), 화순군립최상준미술관(만연저수지아래 동구리 호수공원변), 고사정(화순축협 마트 인근), 칠충각(화순읍서쪽 화순 제일중학고 뒷편) , 남산공원, 다산영당 강의재(화순읍 동남쪽 근거리), 소아르미술관(셀레브카페, 화순읍 이십곡리601-12), 태곳미술관,
○ 이서면 : 옹성산과 철옹산성, 화순적벽(1경), 몰염정, 몰염적벽, 이서은행나무와 야사리느티나무(이서커뮤니티센터 내), 규남박물관, 망미정, 망향정, 규봉암, 무등산편백자연휴양림,
○ 백야면 : 백야산 하늘다리(4경), 백야산휴양림, 화순온천, 화순 서유리공룡발자국화석산지, 승모랜드,
○ 동면 : 충의사와 최경희장군 사당, 용성마을 고인돌, 환산정과 서성제,
○ 동복면 : 옹성산과 철옹산성, 도원서원(동복향교 북쪽 근거리), 동복향교(동복면 서북쪽 근거리), 토원(체험학습장,동복초 가수분교 리모델링), 가수리 상대마을 짐대(솟대), 오지호화백기념관, 화순독상리 남덕원비, 동복한천농악전수회관, 고려인삼재배지(모후산자락), 연둔리숲정이(7경), 김삿갓종명지,
○ 사평면 : 임대정원림, 조영산방(윤진철판소리수련관), 장치제, 유마사, 남계한옥마을(유마사 입구마을), 다산미술관(사평면 다공길25),
○ 이양면 : 쌍봉사, 소설가 정찬주 작업실(이불재, 쌍봉사 앞), 학포당,한후정, 쌍충각(쌍봉리충신각), 송석정(예성산 맞은편),
○ 한천면 : 한천휴양림, 용암산,현학정(그린랜드, 예성산 들머리 건너편 ),죽수서원
○ 춘앙면 : 개천사, 개천사비자나무 숲, 해망서원, 부춘정(춘양면 부곡리216-3, 부춘동마을 입구), 침수정(춘양면 동쪽 우봉마을 입구,부춘정과 근거리임),
○ 도암면 : 운주사(2경), 운주사문화관,
○ 능주면 : 조광조 유배지, 영벽정, 정율성유적지?, 삼충각, 주자묘, 세계유산 고인돌 유적지, 고인돌선사체험장, 양참사댁, 학재고택, 테마파크 소풍,
○ 도곡면 : 도곡온천, 세량지(8경), 양한묵선생묘소, 소소미술관(지강로467-1, 1층 카페)
○청풍면 : 없음
◐ 화순 운주사
입구에 운주사문화관이 있고 주변 공원을 지나면 운주사 주차장이 잘 갖추어져 있다.
주차료, 입장료 등은 없다.
영구산 운주사 편액을 달고 있다.
영구산이 낯설다. 주변이 야산이어서인지 카카오 지도상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주문 가운데 거북이 한마리가 운주사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저께 내린 눈의 잔재가 겨울임을 알리나 날씨는 포근한 편이다.
운주사지일원 / 사적 제312호
운주사는 돌로 된 석불석탑이 각각 1천구씩 있었던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석불 93구와 석탑 21기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1481년애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석불 석탑 각 1천구씩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까지는 분명히 실재했었다고 판단된다. 현재 남아있는 석불상은 10m의 거구에서 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불상들이 산과 들에 흩어져 있다. 이들 불상은 대개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팔과 손, 어색하면서도 규칙적은 옷주름, 둔중한 기법 등은 운주사에 있는 불상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석불상 양식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아마도 석인상을 제작하던 석공들이 대거 동원되어 만든 고려 석불상이라 하겠다.
석탑21기도 산야 여기저기에 즐비하게 서 있는데 둥근 원형탑, 원판형탑 같은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으며 3층 5층 7층 9층 등 층수도 다양한 편이다 일반적인 사각형 탑들은 너비가 좁고 높이가 고준하며 옥개석이 평면적이어서 고려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연꽃받침석들이 더러 보이는 것 또한 고려양식의 특징이다. 특히 이 석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단이나 탑신석의 면석에 ×◇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돋을새김과 선새김 등으로 새겨져 있는 점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무늬의 애용은 불상의 기하학적 주름과 더불어 이 운주사 유적의 가장 특징적인 양식으로 크게 주목된다. 이처럼 특이한 석불, 석탑 천여구씩이 한 절안에 봉안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이어서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아울러 미술사 내지 불교사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운주사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지만 운주사의 정확한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히지 못하여 여전히 신비로운 사찰로 남아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탑과 불상이 있는 지역으로 들어선다.
과거 두어번 이 곳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석탑과 불상의 규모가 더 커 보인다.
처음 만나는 구층석탑 주변 우측 암벽 아래에 불상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우측 산등성이로 오르는 탐방로가 데크계단으로 개설되어 있다.
운주사 층상응회암
운주사 주변의 돌들은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돌덩이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응회암입니다. 이곳의 석불과 석탑은 보통의 화강암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비교적 납작하고 형태가 뚜렷치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석불과 석탑이 운주사 주변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응회암층을 그대로 떼어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옛 선조들은 층의 형태로 잘 깨지고 부스러지기 쉬운 이 응회암의 암석학적 특징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여 석불과 석탑이 제작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에는 주변 암석의 지질학적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이 곳을 무등산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명소로 지정하였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석불군 가
운주사 입구 9층 석탑의 동쪽에 있다. 암벽은 높이 약 8m, 너비 약 20m이며, 수직 단애면에 대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셨다.
현재는 좌불 1구와 입상 5구가 있는데 입상1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좌대를 갖추고 있다.
석불군은 두 손을 합장한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나머지 불상이 배치되어 있다. 1984년 발굴 조사시, 맨 오른쪽 불상 대좌 뒤편에서 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과 여래 입상이 출토 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석불군 나
이 석불군은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에 있는데 석불군 가와는 10여m정도 떨어져 있다.
석불군이 있는 암벽은 높이 5m, 너비 25m로 석불군 가 보다 규모가 작으며 암결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 높이 4.75m의 대형 입상인 주존불이 있으며, 주존불 좌우에 입상 7구의 협시불이 배열되어 총 8구의 석불로 되어 있다.
화순 운주사 구층석탑 / 국가유산 보물
일반적인 탑과는 달리 별도의 기단을 구축하지 않고 암반 위에 여러 단의 방형 좌대를 조각하고 직접 세웠다. 탑신부에 그 안에 꽃이 새겨진 마름모꼴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히 조각되었다. 특히 하부에 사선이 새겨진 지붕돌은 납작하고 넓을 뿐만 아니라 경쾌하여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형식을 하고 있다. 운주사의 여러 석탑 중에서 제일 높지만 상대적으로 지붕돌이 넓어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화순 운주사 칠층석탑
상자모양으로 다듬은 기단 위에는 원형의 1단 괴임을 만들었고 그 위에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탑신부가 자리 잡고 있다, 초층과 2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기둥형식이 조각되었다. 3층 이상은 탑신은 모두 1매석이며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 되었다. 각층의 두툼한 지불돌은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고 추녀와 처마가 직선형으로 표현되었다. 상륜부는 유실되었지만 비교적 단정하고 소박한 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우수한 석탑이다. 석탑의 높이는 9.6m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환순 운주사 쌍교차문 칠층석탑 /도지정 문화유산자료
이 석탑은 운주사에서 유일하게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 탑 역시 높고 큼직한 방형의 기단석 위에 1단의 방형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탑신부를 얹었다. 비교적 안정되고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석탑의 외형은 신라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각층 탑신석이 특이한 쌍교차문(××)과 측면의 마름모꼴(◇)의 형태를 장식하는 등 국내석탑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운주사 광배석불좌상 / 도지정문화유산
광배석불좌상은 운주사 석불 가운데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유일하게 광배가 표현된 불상이다. 사다리꼴 판석에 조각된 광배는 두광과 신광의 구분이 없고, 불신 주변으로 선각에 의한 화엄문을 음각하였다. 광배는 고부조된 불상에 비해 두께가 얇은 편이다. 불신은 광배에서 약간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으며, 수인(손모양)과 코, 눈썹, 귀는 양각하였다. 전체적으로 상호는 원만상이며, 눈에 비해 약간 높게 표현된 눈썹과 기다란 코, 두툼한 입술을 표현하고 있다. 귓바퀴가 묘사된 큰 귀는 눈썹 부근에서 입술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운주사 광배석불좌상은 석불군 가운데 드물게 광배가 표현돼있어 불상으로서의 가치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제작 시기는 양식적인 불상 표현을 보았을 때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석불군 다
암벽 왼쪽에는 사각형과 원반형 대좌에 석불 4구가 세워져 있다. 중앙에는 사각형 연화대좌를 갖춘 불좌상이 있고 그 좌우로 입상의 석불이 배치되었다. 중앙의 석불은 두 손의 형태는 없어졌으나 다른 불상들보다 입체감 있게 묘사되었는데, 얼굴에는 긴 귀와 코의 흔적이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의 법의를 걸쳤다. 또 복련(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이 묘사된 사각형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오른발를 왼쪽 허벅다리 위에 놓고 왼발을 오른편 허벅다리 위에 놓고 앉은 자세)의 자세로 앉아 있다. 좌우 석불은 다른 불상군의 석불과 마찬가자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보조와 석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석불군 다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의 암벽 좌우에 위치하는데, 오른쪽에는 불두 5편, 석불 입상 3구가 있다. 이 중 가장 큰 석불 입상은 세 조각으로 파손된 것을 1993년 보수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석불군 가 지역에서 석불군 다 지역을 산등성이로 잇는 탐방로가 있다.
양쪽 공히 석탑이 한기씩 있으며 중간은 산책로이다.
중간 전망대
저만큼 운주사 대웅전쪽,
석불군 가 윗쪽에 위치한 석탑이다.
앞쪽 칠층석탑은 석조불감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 도지정문화유산
주변의 다른 석탑이 큰 방형 지대석을 설치하여 기단을 대신한 것과 달리 규모가 작고 낮은 지대석 위에 1단 괴임을 마련하여 탑을 세웠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약하며 상면에 탑신괴임이 생략되었다. 넓고 평평한 옥개석과 그 윗면 네 귀퉁이의 우동마루가 예리한 선을 이루지 않고 두툼하게 표현된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기법이어서 주목된다. 또한 옥개석의 폭과 탑신 높이의 체감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라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화순 운주사 석조불감 / 국가유산 보물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그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단독으로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인 예이다. 운주사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석탑과 석불 중 석조불감은 골짜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앞뒤로 각각 탑이 1기씩 있어 야외 불당의 주존불 구실을 하는 배치를 보이고 있다. 불감은 팔작형태의 지붕을 갖추고 그 위에 용마루 등이 조각되어 있는 목조 건축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감실 내부는 남북으로 통하게 하여 불상 2구가 등을 맞댄 형태로 배치하였다. 이들 좌상은 단순화된 형태를 보이는데, 경직되고 도식적인 평면화 된 표현은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사례를 찾을 수 없으며, 등을 맞댄 쌍배불상 또한 유례가 없는 특이한 형식으로 주목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 / 국가유산 보물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석탑이다. 탑의 구성은 하나의 돌로 된 거북이 모양의 지대석 위에 두툼한 원형 단을 만들고 탑을 세웠다. 기단 면석은 5매석을 조립하여 8각을 이루고 원형의 갑석에는 연꽃을 선으로 표현하였다. 원형의 탑신과 옥개석은 모두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이색적인 면이 보이는 이 원형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5.8m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웅전 앞 다층석탑 / 도지정 유형유산
운주사 대웅전앞에 위치하고 있다. 탑신은 4층의 옥개석까지 남아 있고 그 이상 부재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지붕돌인 옥개석 상부는 일반적인 탑의 곡선 형태가 아니고 전탑과 같은 3단의 층급형으로 이뤄진 모전석탑 유형이다. 즉 돌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것이 아니라 통돌을 계단형으로 깎은 것이다. 특히 호남지방에선 드문 예로서 각 층 옥개석의 모서리 부분에서는 가벼운 반전이 있으며 강진 월남사지 모전석탑과 비교된다, 전체 높이는 3.23m이며 제작 시가는 고려시대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주불전은 대웅전이다.
대웅전 내부
지장전
대웅전 측면
대웅전 우측 뒷편으로 간다.
산신각이 있고,
미륵전이 있다.
미륵보살
운주사 발형다층석탑 / 도지정 유형유산
대웅전 뒤에(미륵전 앞쪽) 있는 탑으로 매우 독특한 모양의 탑이다. 1층부터 4층까지의 형태가 주판알 같은 모습이다. 현재는 석괴가 4석이나 <조선고적도보>에 따르면, 원래는 7석의 괴석이 얹혀 있었다고 한다, 아래쪽부터 사각형과 원형, 원구형이 중첩된 평면인데도 조화가 잘 된다. 독특한 형태의 석탑이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고 기발한 조영 기법을 보이는 석탑으로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석탑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미륵전 우측 절벽아래 몇 불상군이 있다.
산신각 뒷쪽인 셈이다.
원반형 석탑과 사층 석탑
원반형석탑은 원래는 원형 석탑이지만 사각형 탑의 면석들이 조립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현재의 상태로 보아서는 기단부와 1층 탑신에 다른 석탑의 부재를 사용한 듯하다. 석탑의 기본 구조는 단층 기단 위에 답신부를 만든 것인데 4매의 판석으로 짜인 기단 중석은 남면의 1개가 없어졌다. 운주사에서는 이 탑 이외에도 몇 기의 원형탑이 있으나 모두 서로 형태가 달라서 주목된다.
사층석탑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단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부를 올린 형식의 탑이다. 이 석탑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부재를 혼합한 흔적이 있어 본래의 석탑과는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운주사 마애여래좌상
과거에는 이곳 마애여래좌상을 거쳐 불사바위로 오르는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하고 우측으로 우회하는 길을 조성하였다.
마애여래좌상 / 도지정 유형유산
마애불은 지금의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40m 떨어져 잇는 거대한 바위의 벼랑에 새겨져 있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 있고 희미한 눈썹과 기다란 코는 양각으로, 귓바퀴는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손을 모으고 있어서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 주름과 오른쪽 어께에서 내려오는 옷 주름이 팔자(八)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운주사 석불의 대부분과 같다. 좌대는 8개의 연꽃 무늬가 복련으로 음각되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지 않고 무릎 위쪽까지만 음각 선문으로 표현하였다.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운주사 석불군 가운데 유일한 마애불이며 광배나 좌대를 포함한전체 높이가 5016m로 규모가 크다.
<현지 안내문에서>
불사바위로 오르는 길이다.
불사바위(佛事岩)
이 바위는 운주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 도선국사가 운주사에 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들 당시 이곳에 앉아 운주사를 내려다 보며 공사감독을 했다고 하여 불사바위라 부른다.
<현지 안내문에서>
바위 상부에 오목한 한 사람 앉을 만한 자리가 있다.
불사바위에서 바라본 운주사 입구쪽
불사바위 뒷편은 아담한 동산이다.
상부에 어느 분의 묘지가 있다.
스님들 수행공간쪽이 궁금하여 뒷편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산 정상부의 이곳은 급수탱크인가?
어느 암자앞으로 내려서 운주사로 내려간다.
특별한 것은 없고 스님들의 수행공간인 암자가 몇 채 있다고 보면 되며, 골짜기로 난 안온한 길이 있다.
대웅전 앞으로 내려와서 보니 출입을 금해달라는 안내문이 있다.
종각
종각쪽에서 바라본 대웅전쪽이다.
와불로 가는 길 입구
운주사 거북바위 오층석탑 /도지정 문화유산자료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 위에 1매의 방형판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탑신부를 세웠다. 초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짜맞추었는데 각 면의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뚜렸하며 상면에 탑신괴임이 생략되었다. 상륜부는 복발형의 부재가 안치되고 그 위에 보주가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치석의 기법이나 각 부재의 비례가 안정된 탑으로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로 보인다. 전체 높이은 5.57m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운주사 거북바위교차문 칠층석탑 / 도지정 문화유산
거북바위라 부르는 다소 경사진 암반을 완만하게 다듬어 기단부 없이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부를 세웠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의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 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다. 2층에서 7층 까지 탑신 4면에 '×'자문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가 두툼하게 튀어나오는 등 한국석탑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 탑이다. 이러한 기법은 모두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 것이며, 고려시대에 나타난 백제계 석탑을 특징으로 전체 높이는 7.17m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 넓은 바위를 왜 거북바위라 했나 싶었는데 이곳에서 보니 거북 머리가 그럴듯 하다.
위 칠층석탑 아랫쪽인 셈이다.
석불군 바
서쪽 산기슭에 있는 와불로 가는 길 중간의 암벽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군이 다섯이 있는 것에 비해 이곳에는 석불군이 한 곳 뿐이다. 암벽의 크기는 높이 5m, 너비 15m이고, 공간의 넓이는 일부 암반이 떨어져 나가 3*4*2m이다. 이는 너무 길게 암벽 감실을 조성하려다 상부 암반이 무너져 내린 결과로 추정된다. 암벽에는 높이 4m 지점에 지금 1m정도의 암벽을 다듬은 흔적이 보여 석불군 가에서와 마찬기지로 이곳에 대형 불상을 모시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은 중앙에 좌상, 그 주위에 입상들이 배열되어 있다. 불상은 9구이나 대좌는 12개이다. 이로 보아 불상 3구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현지 안내문에서>
와불로 오르는 길 우측편에 한기의 석불이 있다.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 / 도지정 유형유산
운주사 계곡 서쪽 산 정상의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석불 2구로 일명 와불이라고도 한다. 좌상의 대불은 어깨의 폭에 비해 앙 무릎 사이의 폭이 너무 넓어 인구(사람의 형상)의 균형을 잃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큰 불상에 속한다. 작은 불상인 입상의 수인(손 모양)이 시무외인* 여원인**을 취한 것 같으나 어색하고 사실적이지 않다. 또한 옷 주름은 수직선과 사선으로만 처리하여 매우 단순하다.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다 세우고 이 와불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새벽닭이 울어 중단했다고 한다. 이 두 석불은 운주사의 많은 석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며, 크기도 각각 12.7m, 10.3m나 되어 국내에 있는 석불 중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시무외인(施無畏印): 부처가 중상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베푸는 인상(印相),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물건 주는 시늉을 하고 있다.
**여원인(與願印) : 모든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 줌을 보이는 결인(結印),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향하여 드리우는 형상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아랫쪽에서 올려다 보면 입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곳은 상부에서 와불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와불 뒷편의 전망좋은 곳도 둘러본다.
어느 할머니의 묘
묘 앞의 석물이 아담하다.
이곳 묘지에서의 조망이다.
좌청룡 우백호에 조망까지 좋다.
와불에서 내려가는 길은 외길이다.
중간 채석장이 있다.
운주사의 많은 석불과 석탑이 이곳의 석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소이다. 석재의 결을 따라 구멍을 일렬로 뚫고 그곳에 쐐기를 박아 돌을 쪼갰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운주사 찰성바위 앞 칠층석탑 / 도지정 유형유산
운주사 계곡 서쪽 산록의 칠성바위라 불리는 곳의 큰 암반 위에 서있는 탑이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 없이 자연 암반 위에 탑신부만을 건립하였다. 탑신석 각면에는 양쪽 귀퉁이에서 넓직한 우주가 두드러지게 모각되어 약간은 둔중한 느낌이 든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뚜렸하며 상면에 탑신괴임이 생략되었다. 대체적으로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에 반전이 나타나며 낙수면도 평박한 편이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1석으로 조성된 상륜부가 얹혀져 있다. 전체 높이는 7m이고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칠성바위만을 사진에 담기에는 곤란하다.
들머리 구층석탑쪽으로 내려왔다.
여기에 있는 석불들은 1997년 제2회 화순 운주대축제 개최 당시부터 해마다 한 구씩 제작된 것이다. 1996년 제1회 화순 운주재축제 당시에는 목조 불상제작 퍼포먼스를 통해 그 의미를 새기고 별도 석불을 제작하지 않았다. 2002년에는 두 구를 제작하기도 했고 2006년 부터는 운주문화축제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다. 운주사는 하루에 천개의 불상솨 건 개의 탑을 세우게 되면 새로은 세상이 된다는 전설이 있는 간절한 소마의 천불천탑 기도 도량이기도 하다.
근년에 제작된 불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작하지 않았나 보다.
◐조광조 유배지
능주면소재지 내에 위치한 조광조 유배지에 왔다.
입구를 들어서면 애우당의 옆 모습이 보인다.
애우당
애우당에서 영정각 또는 정암선생이 기거했던 초가로 들어가는문과 비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각각 있다,
영정각
조공조 선생이 살았던 초가집
정암 조광조 선생이 이곳 능주로 유배와서 살았던 초가집을 1986년 복원한 것입니다.
선생이 유배 왔던 능주목 당시 이곳은 능주로 들어가는 북문에 위치했고 이 집은 능주현 관아에서 일하던 노비의 집이었습니다. 선생은 이 집에서 당시 관직을 그만 두고 낙향했던 학포 양팽손 선생과 교우하며 지냈습니다. 또한 한양에서 해배(解配, 귀양의 형벌에서 풀어주는 것을 이르던 말)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항상 방문을 열고 지냈다고 합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기묘사화로 귀양 와 있던 정암 조광조 선생과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 한 학포 양팽손선생(갓 쓴 사람)이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이곳은 비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도지정 기념물
이 비는 정암 조광조 (1482~1519)선생이 기묘사화로 인하여 유배 왔던 이곳에서 사사당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을 단행하다가 중종 14년(1519) 훈구파의 모함을 받아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현종 8년(1667) 당시의 능주 목사인 민여로가 우암 송시열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 유허비 번역문
아, 이곳은 정암 조선생이 귀양와서 별세하신 곳이다. 아, 이제 정암선생께서 돌아가신지 149년이 되었는데도 기묘 학사와 대부들은 그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은 그 은혜를 생각함이 더욱 오래 될수록 더욱 잊지 아니하고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윤리를 알게하여 이적(되놈)과 금수(짐승)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암선생의 덕택이라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엄숙하게 머리 숙여 공경치 아니한 이 없으리라.
이는 그 누군가 그렇게 하셔서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아! 저 남곤, 심정, 홍경주 무리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고 우리나라는 기자가 성인의 학문을 밝히고 어진 정치를 한 뒤로 수 천년 동안 학문과 정치가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선생 등이 나시어 성인의 학문을 밝혔으나 송나라 성리학자 명도 정호, 이천 정이, 회담 주희 선생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요순의 왕도정치에 뜻을 두어 뛰어나게 명덕과 신민으로써 이 학문의 표준을 삼는 자는 정암 선생으로부터 비롯 되었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선생의 휘(이름)은 광조요, 자는 효직이니 한양인이다. 성화 임인(성종13년,1482)에 출생하여 정덕 경오(중종5년, 1510)에 진사장원하고 을해(1515)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기묘는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여 변을 일으켜 변고가 일어나 즉시 이곳 능주에 유배되니 옥주는 관노 문호종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 화순 학재고택, 양참사댁, 학포선생 부조묘, 양희두가옥
능주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멀지않은 곳에 고인돌 유적지가 있다.
고인돌유적지 입구 주변에 화순고인돌 선사체험장, 화순세계거석테마파크,효산리 모산마을고인돌나군, 홍남순변호사생가 등이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이곳은 고인돌 유적지에서 가까운 월곡리에 고택 몇 채가 있어 고인돌 유적지를 둘러보기 전에 이곳에 먼저왔다.
화순 학재 고택 / 국가민속유산
대문이 닫혀있어 내부는 둘러보지 못했다,
이 집은 원래 서쪽의 양재국씨 가옥과 한 집으로 이쪽은 안채, 저쪽은 사랑채였다고 한다. 두 집을 합해도 사대부집의 공간 짜임새가 퇴색되어 보이는데 아마도 부속건물들이 중가에 헐렸을 것으로 추측되며, 건립시기는 19세기 중엽이다.
안채는 'H'자형 평면으로 골결은 남도형인데, 부엌 뒤로 부엌방과 안방 뒤에 골방을 두고 머리칸에 갓방과 갓대청을 배치하였다. 'H'자형 날개부분의 뼈대는 본제와 구분하여 따로 기둥을 세웠다. 대청문을 판장문으로 하는 등 구조 기법에서 고식(古式)을 볼 수 있다.
사랑채(양재국씨 가옥)는 ' H'자형 주택에서 미리칸을 떼어버린 'ㅓ'자 모양 집이다. 안채보다 규묘있게 지었을 뿐 평면구성, 구조기법 등이 양재국 가옥과 유사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학재고택 바로 옆집이 양참사댁이 있다.
이곳 사랑채는 카페를 겸하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 좋다.
사랑채 앞 마당이다.
마당 저쪽편으로 가보니 배수로 건너편에 텃밭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화순 양참사댁 / 국가민속유산
이 집은 'ㄷ'자 모양의 안채와 'ㅡ'자 모양의 사랑채가 'ㅁ'자를 이루며, 바깥대문과 안대문을 설정하는 등 사대부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안채는 18세기, 사랑채는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기본적으로 큰방과 대청이 나란히 놓인 남도방식이지만 대청공간이 대단히 크며 3개의 공간으로 구분된 점이 특이하다. 부엌방, 대청 뒤의 고방(庫房)과 가운데 방, 머리칸의 갓방과 갓대청의 설정 등은 남도지방 사대부 가옥의 한 유형이다.
사랑채는 'ㅡ'자로 평범한데 구들이 많고 대청의 규모가 작은게 다른 지방의 사대부 집과 다르다. 안마당 동쪽의 나락곡간채(穀間房)도 벽체를 널빈지(벽체를 한 짝식 끼웠다 떼었다 할 수 있게 만든 나무로 만든 벽)로만 둘러서 소박한 느낌을 준다.
<현지 안내문에서>
저쪽 부엌앞에 자리잡은 개님이 심하게 짓어대는 바람에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과거 우물 뚜껑이 이렇게 장식품이 되었다.
안채를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뒷편에 뜰이 있으나 단정치는 못하다.
◐학포선생부조묘
양참사댁 뒷편에 위치한 학포선생 부조묘에 왔다.
혜학문(慧學門) 편액을 달고 있다.
대문이 닫혀있어 낮은 담 너머로 주변을 본다.
바라보는 입장에서 우측 건물이다.
이곳은 좌측 건물
부조묘(不祧廟/부조조, 사당묘)란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둔 사당을 말한다,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부조묘는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부조묘가 등장한 것은 고려 중엽 이후 사당을 짓게 되면서부터이다.
불천위가 된 신주는 처음에 묘 밑에 설치할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종가 근처에 사당을 지어둘 수 있게 됨으로써 부조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부조묘는 본래 국가의 공인절차를 받아야 하나 후대로 오면서 지방 유림의 공의에 의해서도 정해졌다.
<한군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학포선생부조묘 /화순군향토문화유산 제7호
이 부조묘는 학포 양팽손을 모시는 사당으로 현재는 신실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사당 배치를 하고 있으며 신실구역에만 보호담장을 둘렀다.
학포 선생은 조선 중종 때 정계에 진출하여 사간원 정언 등 벼슬을 하다 용담현령을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는 기묘사화로 관직이 삭탈된 후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선생은 특히 선비로써 갖추어야 할 시서화에 능했는데 개인문집인 학포문집이 전하며 10여점의 남종화를 남겨 남종화의 태두로도 알려져 있다.
신실 구역의 건물은 인조 9년경(1631)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철거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7년에 복원하였고 199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강학구역인 경장각은 신실 정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1892년 (고종29)에 인근 월곡리 513번지에 있었던 건물을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축했고 1992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서 '학포문집' 과 '정암문집'을 만들었는데 판각은 6.25때 소실되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이 부조묘에서는 음력 8월18일에 후손들이 모여 학포선생의 학덕을 기리며 제사를 모시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세계거석테마파크, 화순고인돌선사체험장
세계거석테마파크
이웃하여 화순 고인돌 선사체험장이 있으나 겨울철은 운영하지 않는 것 같다.
거석테마파크 입구
콜롬비아 산 아구스틴 돌멘
위치 : 콜롬비아 우일라주
시대: 기원전 약 500년경
콜롬비아 산 아구스틴 돌멘은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남서쪽으로 450km 떨어져 있는 산 아구스틴 고고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돌멘은 현재까지 320기 이상 발견되었고 높이는 최대 4m를 넘는 것도 있다. 커다란 눈이나 입, 앞니, 뽀족한 큰 코, 튀어나온 혀 등이 특색이고 때에 따라서 창, 곤봉, 수급을 손에 들고 있으며, 흑.백.적.등(黑.白.赤.橙/등나무등)으로 채색한 것도 있다.
주변에 채석장이 전혀 없어서 석물의 재료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석물과 고분을 통해 여러 시대에 거쳐 비교적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며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산 아구스틴 고고공원은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작 : 돌멘 H 2.0m (원형제작). 석상 H 1.5~2.0m (축소제작)
<현지 안내문에서.>
저곳은 고인돌인것 같다.
세네감비아 환상 열석
200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환상열석은 아프리카 세네갈의 중앙지역과 감비아의 북부 지역이 겹쳐지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 환상열석들은 감비아 강을 따라 350km에 이르르며 100km의 폭으로 떼를 지어 나타난다
이곳의 돌기둥은 대부분 라테라이트 기둥으로 붉은 색을 띠고 있으며 천여 개 이상의 돌기둥들이 지상에 수직으로 세워져 있으며, 돌들의 높이는 65cm이서 3m까지, 서로 간의 거리는 5m에서 10m까지로 다양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돌기둥들은 수십기의 원 모양을 만들고 있는데 대부분 단일한 원형이지만, 일부는 동심원을 그리는 여러 개의 그룹을 이루는 등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기도 하다. 원 모양들은 매장 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심에는 유골과 함께 창, 화살, 이외의 다른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돌 원모양들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건설했는지 모르지만 매우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감비아의 지폐에도 이 환상열석이 그려져 있다.
-제작 : 1.1~2.0m 축소제작
<현지 안내문에서>
이스터섬 모아이 석상
위치 : 칠레 이스터 섬(라파누이 국립공원)
시대 : 기원전 1600~1000년경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모아이라고 불리는 불가사의한 석상은 남미 대륙에서 3,800km 떨어져 있는 남태평양 이스터 섬에 위치해 있다.
모아이 상은 높이 3~10m, 무게 3~10톤으로 된 거대한 석상으로, 120㎢에 불과한 작은 이스터 섬에 1,000개 이상이 건설되어 있다.
겉모습은 모두 인간의 상반신을 닮았으며, 특히 얼굴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좁은 이마 높고 큰 코, 긴 귀, 턱을 조금 내밀고 굳게 다문 엷은 입술, 좌우로 붙어 있는 뺨, 낮고 오목한 눈, 눈 부분에는 산호와 붉은 화산암이 박혀 있으며, 머리 부분에는 재질이 다른 모자 형태의 돌이 얹혀 있다.
모아이 상은 섬의 동남부 연안에 있는데, 모두 바다 쪽을 등지고 섬의 중앙을 향해 줄지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을 수호하는 의미로 보인다.
-제작 : H 2.8 ~ 4.2m (축소제작)
<현지 안내문에서>
이곳은 고인돌선사체험장인데 운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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