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평 세미원과 두물머리,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세미원은 세미원 주차장이나 아님 두물머리쪽에서 양방향 진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세미원 주차장을 들머리로 할 경우 세미원을 둘러보면서 다리를 건너 두물머리로 건너 갔다 되돌아 올 수 있습니다. 세미원은 국사원, 장독대분수, 넓은 연못, 세한정 등 볼거리와 걷기좋은 곳이나 아직은 이른 봄이라 기대했던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배다리를 건너 두물머리로 건너가면 온실과 카페, 연핫도그집 등과 강변으로 난 경관좋은 산책을 즐길수 있습니다.
양평 용문산 용문사를 마음에 두었는데 서울 살고있는 손녀와의 저녁 약속 때문에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대했습니다. 정약용 유적지는 기념관, 사당, 생가, 묘소와 실학박물관을 둘러보고 강변쪽 제법 넓은 생태공원등이 있어 천천히 산책할 수 있습니다.
▷탐방코스
(운길산 수종사 - 백월산 금선사) - 양평 세미원과 두물머리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 2025. 3. 29.
▷탐방후에
◐양평 세미원

세미원으로의 입장은 두물머리와 세미원주차장 2곳에서 입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세미원 주차장에 주차후 세미원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이곳이 입구입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국사원이 있습니다.

국사원은 나라를 생각하는 뜨란입니다.
한반도 모양의 연못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수련을 심었습니다.

지금은 초봄이라 연못의 물은 말라있고, 수련도 볼 수 없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한반도 모양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독도도 있고, 제주도도 있습니다.

장독대 분수



페리기념연못을 지납니다.

좌 홍련지, 우 백련지

세족대옆을 거닙니다.

홍련지?


열대수련정원으로 표시된 곳입니다.


세한정으로 왔습니다.

세한도와 관련된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세한도의 소나무는 아니지만 상징하듯 소나무 한그루 싱싱합니다.


세한정 인근에서 배다리를 건너 두물머리로 갈 수 있습니다.

베다리를 건너왔습니다.

배다리를 건너면 매표소가 있습니다.
두물머리에서 입장하거나 세미원 입장객이 두물머리를 둘러보고 다시 세미원으로 재입장 할 경우 티켓을 제시해야 합니다.

배다리를 건너면 비닐하우스형 온실이 있습니다.


주변 핫도그집, 카페 등이 있습니다.













두물머리에도 연못이 있습니다.

배다리를 건너 세미원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곳은 세미원의 가장 남쪽이 되겠습니다.

세계수련관쪽을 자니 출구로 나갑니다.
메타세쿼이아 길이 좋습니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 기념관, 사당, 생가, 묘지, 실학박물관, 생태공원

남양주 마재마을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또 노년이 되어 삶을 마감한 정약용 선생의 고향입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집과 말년을 보낸 '여유당'이 모두 떠내려 가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정약용 선생의 자취는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정약용 선생과 부인 홍혜완의 묘소만은 수마를 피하여 지금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 옛 사진을 토대로 정약용 선생의 고택을 복원하고,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을 개관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안내 팜플릿에서>

입구 다산문화관에 들렀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삶과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공간입니다. '여유당 상상마루' 의 다양한 체험 활동을 통해 정약용 선생을 깊이 이해하고 '여유당 상점'에서 판매하는 정약용 굿즈도 만나보세요.
<안내 팜플릿에서>

가볍게 둘러보시면 되겠습니다.
대충둘러본다면 별 볼것은 없지만...

다산 기념관입니다.

정약용 선생의 위대한 업적과 발자취를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정약용 선생의 실학 정신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안내 팜플릿에서>

정약용
1.다산정약용의 성장기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기리니 멀고 가깜움이 달라서라네"라는 시를 써서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았다.
2.정약용의 사환기(仕宦期, 벼슬할 사, 벼슬 환 / 벼슬시절)
28세때 벼슬에 나아간 다산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30세때 진산사건이 발생한 후로 정적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3.다산의 유배기
신유사옥으로셋째형 정약종은 순교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4.정약용 만년의 삶 /해배 이후
18년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다산을 저술의 수정보완을 계속했다. 한편 소론계의 석천 신작, 노론계의 대산 김매순, 연천 홍석주 등과 같은 석학돌과 학문 교류를 했다. 다산은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찬묘지명'을 썼는데, 여기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기다릴 사)이라 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되 미혹됨이 없다, 百歲以後聖人而不惑"에서 따온 이름이다. 학문적 자부심일 수도 있다. 훗날에 대한 기다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836년 회혼일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의 가계도

다산, 마현에서 교유하다.

다산, 선생의 생각을 읽다.
장지를 거쳐 강진까지 햇수로 18년의 유배 동안 다산은 복숭아뼈기 세 번이나 뜷릴 정도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였으며 <1표2서>라는 불후의 명저를 비롯해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다산의 저술에는 고통 속에 빠진 이웃에 대한 공감과 새로운 나라와 올바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던 마음이 남아 있다. 나무나도 인간적인 사람 정약용의 모습들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선생의 정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는 귀감이 된다.

사당 문도사
1910년(융희4), 순종은 정약용 선생을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고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이를 기리고자 정약용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이름을 문도사로 지었습니다. 평상시에는 개방하지 않으나, 매년 이곳 문도사에서 정약용 선생께 존경의 의미로 차를 올리는 헌대례를 봉행함으로써 다산 정약용 문화제 개최의 시작을 알립니다.
<안내 팜플릿에서>

사당문은 잠겨있어 외부만 봅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정양용 선생이 회갑이 되던 1822년,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묘지명이라는 문체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광광)이 있으며, 아래 명은 광중본으로 만족문화추진회의 국역글이다
이는 열수 정용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 자는 미용, 호를 사암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는 재원이다. 음직으로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은 해남윤씨이다. 영조 임오년 6월 16일에 용을 열수(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에서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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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가는 길

선생의 묘소
문도공 다산 정약용, 숙부인 풍산홍씨 합묘이다.

다산 생가로 내려왔다.

선생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을에서 정재원과 해남 윤씨 슬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마재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지내던 정약용 선생은 정조가 승하했을 때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채에 어유당이라는 편액을 걸었습니다. 겨울 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약용 선생이 느꼈을 불안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안내 팜플릿에서>



아랫채를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실학 박물관에 왔다.
다산 생가 앞쪽에 있다.


박물관은 2층이다.













강쪽으로 나가면 다산 생태공원이 있다.


한강변으로 난 다산생태공원은 제법 넓다.
시간이 되면 천천히 산책을 해도 좋을 곳이나 위치만 확인하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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