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중국 곡부/ 공묘, 공부, 공림

정헌의 티스토리 2025. 6. 21. 22:07

■중국 곡부 /  공묘, 공부, 공림

 

오전일정으로 태산을 둘러보고 중식후 취푸(곡부)로 이동하였습니다.

곡부(취푸)는 성도인 지닝시에서는 약130km, 태안시에서 남쪽으로 제법의 거리 상에 위치한 도시로 산둥성 지닝시 관할에 있는 현급시로, 인구는 2007년 기준 현인구 64만명(시내 6만) 정도입니다.

주대(周代) 이전에는 엄국(奄國/가릴 엄), 춘추전국시대에는 노국(魯國)이라 했으며 취푸라는 이름은 수나라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합니다.

곡부의 공묘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 공부는 직계 후손들이 거주하는 곳, 공림은 공씨의 공동묘지가 있는 거대한 숲으로 공자의 묘소도 이곳에 있습니다.

니구산은 취뿌(곡부)시내에서 동남방향으로 약간의 거리에 있으며, 우리 일정에는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사진 캡션과 관련하여 상당부분은 신안정사 강장 강동욱 박사님의 자료를 옮겼음을 알려드립니다.

 

▷일정

공묘 - 공부 - 공림 (2025. 6. 13.)

 

▷탐방후에

 

◐공묘

 

곡부의 남문앞에 왔습니다.

 

만인궁장(萬仞宮牆 /길 인, 담장 장)

공묘의 주 출입문인 남문 위에 만인궁장(萬仞宮牆)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명나라 때 공묘와 공부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벽으로 1978년 성문의 남,동, 북문과 성벽의 동북쪽 모서리만 남기고 철거되었다가 2004년 9월 복원되었다 합니다.남문의 원래 이름은 앙성문(仰聖門)이었으나, 청나라 곤륭제(재위 795  영정조)때 바꿔 새겼으며 궁장은 궁궐의 성문입니다.

만인(萬仞)은 논어 자장편에서 취했다합니다. 노나라 대부 숙손무속이 "자공이 중니보다 어질다(子貢賢於仲尼)"라고 하자 자공이 "내 집의 담은 어깨 높이쯤 되어 누구든지 집 안에 있는 것을 엿 볼 수 있지만, 선생님 집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 대문을 찾아 들어갈 수 없다. 아름다운 종묘와 백관의 많음을 볼 수 없다.(賜之牆也及肩/어깨 견), 규견실가지호(窺見室家之好/엿볼 규)  부자지장수인(夫子之牆數仞), 부득기문이입(不得其門而入)  불견종묘지미(不見宗廟之美) 백관지부(百官之富)"고 했습니다. 청 건륭제가 수인(數仞 )을 만인(萬仞)으로 바꿔썼다고 합니다.. 

 

 

 

 

 

공묘, 공부, 공림 표지석 앞에 이분들은 무슨 의례인지 모르겠습니다.

 

 

 

 

 

곡부(취푸)는 중국 산동성  지닝시의 관할에 있는 현급시입니다. 인구는 약 67만명(2007)으로 공자 탄생지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삼황오제 가운데 염제(신농씨), 황제와 그의 아들 소호가 취푸땅을 도읍으로 정했고 하왕조 시대에는 엄국에 속했다고 하나, 사료상으로 확실한 것은 주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을  이 땅에 분봉하면서 이곳이 한 나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주공 본인은 노에 머무르지 않고 아들 백금에게 맡기고 자신은 수도에 남아 무왕 사후 불안정한 정치를 보좌했다고 합니다. 이후로 이 땅은 873년 간 세월에 걸쳐 노나라 도성이 되었으며, 주 천자 제후국 수도 가운데 가장 길게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취푸는 성벽의 길이가 약 12km, 사면에 성문이 각3개 있었습니다. 성 서남쪽은 궁전이나 사당, 묘 등 왕의 건축군이 있는 내성이며, 성 서쪽은 조자기를 만드는 지구, 성의 북쪽은 야금 공업지구, 성 동쪽은 군영, 나머지는 시민 주거나 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위키백과에서>

 

 

 

 

 

성밖의 해자.

 

춘추시대에 후세에 문성, 대성지성 선사라 불리게 될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가 출현하였으며, 그 사상은 후에 <유교>라 불리우며 중국이나 동아시아에 수천년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공자사망 1년 후에 노공은 공자에 대한 제전을 실시했고, 전한시대에 들어가면서 고조 유방은 한층 더 대대적으로 공자를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공자 자손들은 대대로 취푸에 거주하면서 역대 조정으로부터 봉상을 받아 연성공(衍聖公/넘칠 연)이라는 칭호를 세습하여, 점차 중국 제일 명가가 되었습니다.

<위키백과에서>

 

 

 

 

 

전국시대 말기 노가 초에 멸망하고 초의 노현의 되었으며, 한 왕조가 군국제를 실시하면서 황족을 노왕으로 봉하였습니다.

수 때에는 성의 동쪽으로 부(언덕)가 있어 위곡(위곡)의 길이가 78리라하는 유래로부터 이름이 취푸현(곡부현)으로 바꾸고 연주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명.청대를 거쳐 근대까지 끊임없이 공가의 본거지로서 번창해 왔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으로 공가의 직계자손은 대만으로 피신했습니다.<위키백과에서>

그의 일족은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제77대 쿵더청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2008년 심부전으로 88세에 사망하였습니다. 취푸 주변에는 10만명 이상 공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취푸에 있는 공자무덤(공자묘)이나 거주지(직계 자손이 사는 궁전)는 공부로 불려 역대 황제 보호아래 끊임없이 확장해 오늘날 볼 수 있는 장대한 건축군이 되었습니다.

 

 

 

 

 

공묘(공자를 모셔 놓은 사당)에는 노거수 향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영성문(欞星門/격자창 령)

현재 공묘의 정문으로 외형은 석조패방이다. 15세기 명나라 영락제 때 목조로 만들어진 것을  1754년 청나라 가경제 때 석조로 바꿨다. 영성문에선 공자를 하늘처럼 존경하라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패방(중국 전통적 건축 양식의 하나인 문의 일종)글자는 건륭제의 친필이라 합니다.

영성은 옛날 전설에 천상에 있는 별로, 고대 제왕을 제사지낼 때는 이 별에 대해 의식을 진행했지만, 공자도 이들 제왕과 동격으로 취급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합니다.

 

모두 9개의 문을 통과해야 공묘에 도착합니다.

주변엔 오래된 향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거대한 비석 등이 있으며 사당 중에는 아마 세계 최대일 것입니다.

북경의 고궁과 태안의 대묘와 함께 중국 3대 건축물의 하나로 꼽힙니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공부, 공림과 함께 삼공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

태화원기 패방입니다. 공자 사상이 우주 만물의 근원이자 지고하고 무상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라 합니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산둥 순무를 거친 증선의 필체라 합니다. "공자의 도는 태초의 조화로운 기운과도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기원전 478년 노나라 애공이 공자가 생전에 거주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던 고택(행단.杏壇)에  대성전을 지어 그의 위패를 모신 것이 공묘의 시초였다 합니다. 당시에는 방 3칸에 불과했지만 황제들이 공자의 제를 성대하게 올리면서 공묘의 규모가 점점 커져 지금의 규모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195년 한나라 유방이 최초로 공자에게 제를 올린 이래로 총12명의 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곳에 친히 방문했다 합니다. 그 밖에 100여명의 황제가 196회에 걸쳐 대리인을 파견하여 체례를 지냈습니다.

 

 

 

 

 

 

안쪽에서 되돌아 본 풍경

 

 

 

 

 

 

 

 

 

 

덕모천(德侔天 / 가지런할 모)

 

 

 

 

 

성시문(聖時門)

명나라때 건립해 청나류 옹정제(재위 1709~1722, 영조 때)가 명명하였습니다.

 

孔子, 聖之時子也  (공자 성지시자야)

성인은 성인이시되 시를 아는, 시에 맞는, 정말 시를 구현하는 성인이라는 말이라 합니다. 이말 앞에 <伯夷 聖之淸者也  伊尹 聖之任者也, 柳下惠 聖之和者也 / 백이 성지청자야  이윤 성지임자야, 유하혜 성지화자야  >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성전까지 9개의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어느문이 무슨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시문 다음에 홍도문이 있는데.......

 

홍도문(홍도문)

1377년 명나라 때 공묘의 정문으로 지었습니다.청나라 옹정제가 <논어> 구절중  '인능홍도 비도홍인 / 인능홍도 비도홍인'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지었다 합니다.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어도, 도가 사람을 넓힐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공자의 유교 인간관을찬양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중문(대중문)

앞에 지나온 3개의 문이 후대로 가면서 공묘가 증축된 증거라면, 대중문이야 말로 진정한 공묘의 정문이었습니다. 송나라 때 중화문(중화문)이란 이름으로 세운게 시초입니다. 명청대에 개명과 증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중자천하지정도(중자 천하지정도)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중이란 공자 사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순리에 맞게 여러 일이 풀린다는 뜻입니다. 대학과 중용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건륭제(재위 1736~1795,영정조 때) 가 쓴 어필입니다.

 

동문문(동문문)

북송 태평 흥국8년(983)에 세워진 문으로 당시에 공묘의 정문이었으나, 금대에 2문이 되었다가 지금은 성시문, 홍도문, 대중문에 이어 4번째 문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삼동문(참동문)이었으나  청 옹정 8년 동문문으로 명명 오늘에 이릅니다.  차동궤(차동궤),  서동문(서동문), 행동륜(행동륜)이라고도 했습니다. 수레바퀴를 하나로, 책의 문자를 하나로, 행동의 윤리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말입니다. 건륭제가 쓴 어필  금천하 차동궤 서동문 행동륜 <중용> 제28장.

 

 

 

 

 

13碑亭(13비정)

한고조 유방이 방문기념으로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위에 정자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ㅇ비석 위에 정가를 비정이라 합니다. 한고조 이후 12명의 제왕이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비석을 하나씩 세워 13비정이 되었습니다. 금(金)대에 2개, 원(元)대에 2개, 청(淸)대에 9개를 세웠습니다. 특히 뒷줄 5개 비정중 청나라 황제들이 세운 4개가 걸작으로 꼽힌다 합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세운 비석은 이곳에서 600KM떨어진 북경 서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무게가 65톤으로 운하를 이용했고, 겨울에 물을 뿌려 얼린 뒤에 끌고 왔다고 합니다.

 

 

 

 

 

13비정은 황제의 어비를 보존하기 위해 지은 것이므로 어비정(御碑亭)이라 부릅니다. 비정 안에는 모두 55개의 비석이 있습니다. 당.송.금.명.청.중화민국 등 7대에 걸쳐 세운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황제가 공자에게 시호를 더하거나 봉작을 높이고, 때로는 친히 공묘에 와서 제사를 올리거나, 신하를 파견하여 제사를 올리고 묘당을 수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용된 문자는 한문뿐만 아니리 원대 몽고의 문자와 만주족의 문자도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5곳의 비정은 강희, 건륭, 옹정 년간에 세운 거이며, 남쪽에 있는 8곳의 비정 가운데 4곳은 금.원대에 세운것이라 합니다. 동쪽의 3번째와 6번째 비정은 금의 明昌 6년인 1195년에 세워졌으며, 4번째 비정원 원의 至元 5년인 1286년에 세웠고, 5번째 비정은 원의 大德 6년인 1302년에 세웠습니다. 나머지 4곳은 모두 청대에 세웠습니다. 특히 눈을 끄는 것은 금대에 세운 4곳의 네모난 비정으로,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공간 배치가 특이하다 합니다. 이 비정은 공묘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므로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고건축입니다.

각 비정에 들어있는 비석은 대부분 거북이나 아니면 다른 동물을 밟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동물은 '빠시'라고 하는 용의 아들입니다. 비정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은 당대에 세웠습니다. 하나는 당고종 總章 원년인 668년에 세운 '大唐贈泰師魯先聖孔宣尼碑 / 대당증태사노선성공선니비' 이고 다른 하나는 당현종 개원 7년에 세운 719년에 세운 '魯孔夫子廟碑/노공부자묘비'입니다.

가장 큰 비석은 청의 강의 25년인 1685년에 세운 것으로 3개가 있습니다. 비석의 무게만 35톤이나 되며 비석 아레에 있는 빠시를 수반의 무게와 합치면 65톤이나 됩니다. 이  거대한 비석은 북경의 서한에서 캐온 돌로 만들었으며, 당시의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수 천리나 되는 곳에서 곡부까지 운반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 비원의 동남쪽과 서남쪽에는 세상에 있는 비석을 모두 모아둔 것과 같은 비림이 있습니다. 북쪽 담장에는 수많은 석각을 세워놓았습니다. 역대의 제왕은 물론 대신들이 공묘를 수리했거나 제사를 지낸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비석 마다 글씨체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필법도 각자 달라서 거대한 서예전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또 어떤 비석 측면에는 원말의 紅巾軍(홍건군)과 명대 중기의 劉六(유육), 劉七, 명대 말기의 徐鴻儒(서홍유) 등의 農民起義軍(농민기의군)이 남긴 글이 있어서 농민혁명의 역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합니다.

13비정의 양쪽에는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동쪽에 있는 것이 毓門(기를 육, 순수할 수 또는 부술 쇄)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觀德門입니다. 뮤도 사람들이 출입을 하는 곳으로 황궁에 있는 곳과 같다고 하여 東華門과 서화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문은 공묘로 들어가는 세번째 문입니다.

 

 

 

 

 

 

 

 

 

 

대성문역시 어느 문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13비정 북쪽으로 5개의 문이 나란히 서 있는데, 중앙에 있는 것이 대성문입니다. 이 문은 공묘의 7번째 대문입니다.

'대성'이란 맹자가 공자를 평가한 '집대성(집대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곳에는 5개의 문이 있으며, 공묘로 가는 길은 3갈래로 나누어 집니다. 동쪽에 있는 문은 승성문으로, 공자의 5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며, 서쪽에 있는 문은 계성문으로 공자의 부모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입니다. 가운데 있는 문이 대성저능로 3개의 문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대성문은왼쪽에 금성문을, 오른쪽에 옥진문을 끼고 있습니다. 금성은 음악을 연주할 때 종을 쳐서 시작을 올리는 소리이며, 옥진은 반(반,너럭바위 반)을 흔들어서 연주가 끝나는 것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공자의 사사잉 고대 성현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라는 점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운데 길은 공자 부부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역대의 선현들이나 유학자들을 배향하고 제사를 올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련 :

선각선지 위만세운상입극(선각선지 위만세운상입극) : 먼저 깨닫고 먼저 아니 만세토록 윤리의 지극한 준칙을 아네

지성지성 흥양문방화동류(지성지성 흥양문방화동류) : 지극히 성실하고 지극히 성서르우니 천지의 공화와 함께 흐르네

 

 

 

 

 

선사수식회(선사수식회)

 

대성문 앞에 10m 높이의 나무 한 그루가 지붕을 덮을 듯합니다.

선사수석회라 쓴 비석도 함께 있습니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양광훈이 썼다고 적혀있습니다. 선사는 공자를 높여 부르는 호칭입니다. 공자가 직접 심은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세 그루를 심었는데 모두 고사했습니다. 1732년 청나라 옹정제 대 갑자기 고목에서 가지가 부활했다고 합니다.  한참서서 바라 봐도 믿기 어려운 나무입니다. 만주족 왕조가 정당성을 얻으려고 한족 백성의 신임을 받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다는 기록이 유난히 많습니다.  유난히 공자와 관련된 명소에 다시 살아난 나무가 많은데 우연보다는 기적에 가깝습니다.

만력 경가 (1600년 선조 33) 계하(6월) 관서 양광훈 제

 

 

 

 

 

규문악(규문각) /이 건물이 규문각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음

 

동문문을 지나면 비로소 공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됩니다. 정면에 자리잡은 높이 23m의 3층 건물이 규문각입니다. 세겹의 처마가 아름다운 목조누각입니다. 1018년 송나라때  장서루(장서루)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고, 공자의 업적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관했습니다. 금나라 때 증축하면서 규문각으로 개명했고, 지금은 모습은 1504년 명나라 때 재건한 것입니다. 청나라 때 취푸를 휩쓴 대지진에도 굳건하게 살아남아서 '중국을 대표하는 목조 건축'으로 꼽힙니다.  

 

 

 

 

 

 

 

 

 

 

 

 

 

 

 

 

 

 

 

 

 

 

 

 

 

 

 

 

 

 

 

 

 

 

 

 

 

 

 

 

 

행단

 

공자가 행단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은 <庄子 漁父篇>에 처음 나온다 합니다.

"공자가 우거진 숲을 지나가다가 행단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제자들은 독서를 하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원래 자리가 이곳이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송의 天禧 2년인 1018년애,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공묘를 수리하면서 정전을 확장한 후에 원래 정전이 있던 곳에 단을 만들고 살구나무를 심었다. 그는 그곳을 행단이라 불렀습니다. 금대에 이 단에 처음으로 정자를 짓고 당시 유명한 문인 黨懷英이 篆書體(전서체)로 행단(杏壇)이라는 2글자를 남겼다고 한다,

 

 

 

 

 

 

 

 

 

 

대성전입니다.

 

높이 32m,폭54m, 길이 34m 규모이 대성전은 돌기동28개가 공자의 덕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또한 정면에는 10개의 돌기둥에는 구슬로 휘감은 용이 부조되어 있고 그 위에 황색 기와가 지라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황색 기와나 용을 사용한 것은 공자가 학문의 황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합니다. 이 대성전은 서기 478년 처음 세워졌고, 청나라 옹정 연간(1723~1735)에 중건되었으며, 그 대성전 안에는  "斯文在慈 萬世師表(사문재자 만세사표)"라고 크게 적혀있습니다. 

 

 

 

 

앞쪽에 2천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습니다.

 

 

 

 

 

대성전

 

斯文在玆(사문재자 / 광서제 제11대.  1875~1908 재위 친필)

[子畏於匡(자외어광/바룰 광)이러시니 曰 文王이 旣沒하시니 文 不在慈乎아 天之將喪斯文也하신대 後死者 不得與於斯文也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시니 匡人이 其如予에 何리오  / 논어 9-5 子罕(그물 한)

공자께서 광땅에서 두려운 일이 있었을 때 말씀하셨다.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문화(예악 문물)가 여기에(나에게) 전해져 있지 않느냐? 하늘이 이 전통문화를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을 내가 이 문화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며, 하늘이 아직 이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광인이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을 어찌하겠느냐?)]

德在幬(덕재주/ 휘장 주) 공자의 덕은 수레에 귀한 보석을 싣고 다난 것 같다. 함풍제 제9대(1850~1861 재위) 어필

集大成(집대성)

 

 

 

 

 

공자상 좌우 기둥에 씌여있는 주련은 4곳 있다.

 

德冠生民  遡地闢天開  咸尊首出 (덕관생민 소지벽천개 함존수출) 덕이 생민에 으뜸이니 개벽된 천지를 거슬러 올라가 모두 으뜸으로 빼어냄을 높이네,

道隆群星 統金星玉振 共仰大成 (도융군성 통금성옥진 공앙대성)도가 군성에 융성하니 금성옥진을 거느려 모두 대성을 우르르네.

가운데 보이는  글자는 보이는 기둥 우측

氣備四時興天地鬼神日月合基德( 기비사시흥천지귀신일월합기덕) 기는 하늘과 땅에서 사계정 정연한 질서가 있고 덕행은 천지와 합하고 일월과 같이 빛난다.

 좌측 敎垂萬世繼堯舜禹湯文武作之師(교수만세계요순우탕문무작지사) 교육은 만세에 걸쳐서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전하고, 순임금은 우임금에 전하고, 우임금은 탕왕에게, 탕왕은 문무주공에게, 문무주공은공자에게 전하였다. 

 

覺世牖民 詩書易象春秋永垂道(각세유민 시서역상춘추영수도/들창 유) 세상을 일깨우고 백성을 인도하니 시서역상춘추가 길이 도법을 드리우네,

出類拔萃河海泰山麟鳳幕喩聖人(출류발췌하해태산린봉막유성인) 강과 바다 태산 기린과 봉황이 특출하신 성인과 비유할 수 없다,

 

 

 

 

대성전 앞쪽의 수령 2,000년이 넘은 향나무

 

 

 

 

 

生民未有(생민미유) /옹정제 친필, 제5대, 1722~1735 재위

 

 

 

 

 

 

 

 

 

 

 

 

 

 

 

 

 

 

대성전 뒷편에도 이런 건물로 이어집니다.

 

 

 

 

 

위패를 모신것 같은데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침전(침전) : 공자 부인 위패를 모신 곳

공묘에서 세 번째로 큰 건축물로 공자의 이인인 기관(기관)씨를 위한 사당입니다. 홍 천희 2년)1018_에 건설되었으며, 명 홍치 13년(1500년)에 확장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은 가로 9칸, 세로 4칸의 규모이며 높이는 22m입니다.  전 내부에는  "지성선사부인신위(지성선사부인신위)"기 모셔져 있습니다.

위패는 2단의 단 위에 있으며, 금색으로 치당된 두 마리의 용과 구슬, 그리고 두 마리의 봉황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대성전과 같이 상(상)이 있었으나 청 옹정시기에 불타 없어져서 위패로 대신한 것입니다. 침전 또한 8각형의 석주(석주)가 22개 있으며,각 석주에는 72마리의 봉황이 모란과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침전의 주인인 기관씨는 춘추시기 송나라 사람입니디. 19세에 공자에게 시집왔으며 아들 공리(공리)를 낳았습니다. 송 대중상부 원년(1008년)에 운국부인(운국부인)에 봉해졌으며, 원 지순2년(1331)에는  "대성지성문선왕부인(대성지성문선왕부인)"에 봉해지기도 했습니다. 공자 사후 함께 제사지냈으며, 송 천의 2년(1018년) 부터는 침전에서 따로 제사 지냈습니다.

 

 

 

 

 

되돌아 나갑니다.

 

 

 

 

 

 

 

 

 

 

 

공묘의 정문으로 나가는게 아니라 샛문이 있어 이곳을 거쳐 공부로 갑니다.

 

 

 

 

 

공부가는 길

 

 

 

◐공부

 

 

 

 

 

 

 

공부는 공자의 직계후손이 사는 집으로 공묘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시대인 1377년 처음 건축했고, 1503냔 홍치제 시대 지금 골격으로 중건했습니다. 시예에 뛰어난 명나라 권신 엄고의 칠필이 걸린 성부(성부)가 대문입니다.

 

 

 

 

 

두번째 문인 성인지문(성인지문)은 명나랴 대학사 이동양의 친필입니다. 명나라 가정제의 친필은 은사중광(은사중광)이 걸린 중광문이 이어집니다. 문을 지나면 양쪽으로 육청(육청)이 나타납니다. 인장, 제례, 악보나 황제 하사품, 은자, 고움ㄴ서와 노비문서, 악기와 무용기구를 관리하는 6개의 건물입니다.

 

 

 

 

 

중국의 역대 황제중에 공자를 받들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공자의 종손에게는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주었습니다. 송나라 때부터는 종손에게 연성공이라는 직위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종손은 제사를 모시는 기능 외에도 제후로서의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공부는 463개의 방이 있고, 중로(중로), 동로(동로), 서로(서로)로 나뉘어 있습니다.

동사자상이 버티고 있는 공부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중정(중정)입니다. 그 뒤에 <성인지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문이 있는데, 이어서 있는 중광문(중광문)은 종손이 칙사를 마중하거나 의식을 행하던 곳입니다.

그 뒤에 있는 이당(이당)은 연성공이 고급 관리를 직접 접견하고 지방 예비 과거시험을 치르던 곳이며, 삼당(삼당)은 공씨(공씨)가문 내부의 분쟁을 처리하거나 죄를 논하는 곳이었고, 그 뒤에 있는 내택문(내택문) 안은 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연성공의 사택입니다. 동로에는 가묘(가묘)가 있고, 세로는 손님을 맞는 곳으로서  봉건제후의 생활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부를 둘러보고 뒷문으로 나갑니다.

 

 

 

 

 

뒷쪽에는 여러 상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둘러보고 마차를 타고 공림으로 이동합니다.

 

 

 


◐공림

 

공림가는 길

만고장춘 패방을 지나 한동안 양쪽으로 향나무 길이 이어집니다.

 

 

 

 

 

문 양쪽에 이런 거대한 비석이 있습니다.

 

 

 

 

 

 

 

 

 

 

 

공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공림 입구에도 향나무길입니다.

공림의 전문(전문)에 해당하는 지성임방(지성임방)에 들어서면 이림문(이림문)이 나온다는데 어느문이 이립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이림문을 기준으로 안쪽은 노(노)나라, 바깥은 제(제)니리러 정했다는데 바로 이 문이 국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림문 왼쪽에는 72명의 제자를 상징한 72그루의 나무가, 오른쪽에는 공자가 73세에 별세하였음을 상징하는 73그루의 나무가 심겨져 있습니다.

 

 

 

 

 

 

 

 

 

 

 

 

 

 

 

 

공자생적원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곳이 공림의 정문인가 봅니다.

 

 

 

 

 

지성림(지성림)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매표후 정문을 지나 이런 차를 타고 한바퀴 둘러보게 됩니다.

물론 공자묘에서 정차를 합니다.

 

 

 

 

공림은 약 70만평 정도의 면적에 약 24만기 정도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숲속에 수많은 후손들의 크고작은 무덤으로 가득합니다.

무덤위에 또 다른 무덤을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유종재념(유종재념)

 

 

 

 

 

 

 

 

 

 

 

차량은 공자묘 입구에 정차를 합니다.

 

 

 

 

 

 

 

 

 

 

 

 

 

 

 

 

 

공자묘에 왔습니다.

 

 

 

 

 

공자묘입니다.

비석엔 전서로 대성지성문선왕묘(대성지성문선왕묘)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앞쪽에 이런 건물이 있고,

 

공자묘 인근에 작은 집은 공자 제자인 자공이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6년간 묘를 지키던 곳이라고 하는데 이건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자공수식계(자공수식계)인 공자가 사망하지 자공이 당시 지팡이를 짚고 왔다가 6년상을 치루고 돌아가던 길에 꽃아 두었던 것이 싹을 튀우고 살아났다는 향나무가 있다는데 이 또한 모르겠습니다.

 

 

 

묘는 일반 왕릉정도의 크기로 보면 되나 수풀이 무성합니다.

공림은 자체가 거대한 숲이므로 음지에서 잔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공자묘 옆에 공자의 아들 공리의 묘가 있습니다.

공리(공리)는 자가 백어(백어)로 이름과 자에 물고기가 들어있는데, 태어났을 때 노나라 조공이 잉어(리)를 보내 축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리는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불학시 무이서 불학례 무이립 / 불학시 무이서 불학례 무이립)"의 가르침을 받았다 합니다.

 

 

 

 

공리의 묘비에는 사수후묘(사수후묘)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손자인 공급(공급, BC 483~402) 기국 술성공의 묘 / 이야기는 들었는데 사진에는 없습니다.

공급은 자사(자사)라는 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군국시대를 살며 공자의 학문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 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이 때문에 기국술성공(기국술성공)으로 불립니다 자사는 사서중의 하나인 중용(중용)을 저술한 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공림을 끝으로 곡부 일정을 마칩니다.

 

 

 

 

◐권리빈사 숙박

 

오늘 숙박과 석식, 조식을 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