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의 산

남원 만인의총, 김병종 미술관, 광한루원

정헌의 티스토리 2026. 5. 16. 23:26

■남원 만인의총, 김병종 미술관, 광한루원

 

산청.함양사건 유족회에서 남원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다녀왔습니다.

만인의총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일만여 명의 의사를 합장한 곳입니다. 전투가 끝난 후, 전사자의 시신을 남원역 부근(남원시 동충동) 매장하고 이를 만인총이라고 불렀는데 1964년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현 만인의총 바로 앞에 충렬사가 있습니다.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남원부성순절 만인지위 무명용사 대표 위패를 중심으로  남원성 전투 순절 충신 56위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중식후 김병종 미술관과 광한루원을 둘러보고 하루 일정을 마칩니다.

 

▷일정

남원 만인의총 - 중식 -김병종 미술관 - 광한루원  / 2026. 5. 14.

 

 

▷견학후에

 

◐만인의총

 

만인의총 역사문화관에 왔습니다.

국가유산 사적 남원 만인의총은 남원성전투 순절자의 넋을 모시고 기리는 곳으로, 1957년 정유재란 남원성전투에서 순절한 조명연합군과 남원 사람들을 기억하고 남원성전투의 역사적 가치를 선양하며, 관련문화유산을 보존활용하기 위하여  2024년 9월 민인의총 역사문화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먼저 역사관을 둘러봅니다.

 

 

 

 

 

 

로비,

입장료나 주차료는 없습니다.

 

 

 

 

 

 

 

 

 

 

 

 

2층으로 오르면 참여갤러리가 있습니다.

만인의총 방향을 조망할 수 있는 편안안 쉼터가 있으며, 갤러리에는 만인의사 추모 공모전 입상작을 비롯한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만인의사, 그날의 불꽃은 아직 / 한수연. 서울예술고등학교, 2025 제2회 만인의사 추모공모전 글짓기 부문,최우수상

 

낮은 언덕 위에 바람이 분다.

잊힌 줄 알았던 이름들이 돌 틈 사이로 피어난다,

 

검은 연기 속에서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칼 없는 자, 총 없는 자,

그러나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자.

 

정문부의 외침은 천 명, 만 명의 마음을 흔들었고

흙 묻은 손, 굳은 몸으로 모두가 의병이 되었다,

 

그날, 나라가 무너지는 소리보다

더 크고 단단했던 것은 백성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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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그림 부분입니다.

전시작품들이 숫적으로 많지는 않습니다.

 

 

 

 

 

정유재란

 

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82) 때와 달리 호남 점령을 재침의 목표로 삼고 14만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습니다.

남원성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입하기 위한 요충지로서 정유재란 시기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간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육상전투의 전장이 되었습니다. 정유재란 재침군은 좌군(49,600여명), 우군(64,300여명)과 수군(7,200여 명)으로 나뉘어, 우군은 함양과 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격하였습니다. 좌군은 하동과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넘어왔으며, 남해안을 따라오던 수군 병력이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구례에서 좌군 병력과 합류, 총 56,800여 명의 일본군이 남원성을 공격, 포위하였습니다.

조선측에서는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이 이끄는 3천여 군사를 보내고,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이 지휘하는 조선군 1천여 병력이 구례로부터 물러나와 합류하였으며, 일대에서 모인 조선 의병 및 남원 백성들이 힘을 합쳐 남원성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측의 막대한 병력 차이로 인하여 포위된 지 나흘 만인 음력 8월 16일, 남원성은 비오는 밤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되었고, 조명 연합군을 비롯한 남원성의 군사와 백성 1만여 명은 온 힘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모두 참혹하게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현지 안내 팜플릿에서>

 

당시 양원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는 기마병 위주였기 때문에 평지인 남원성을 택해 전투를 벌였다하나 왜군은 조총, 조명 연합군은 활과 창을 주 무기로  보았을 때 험준한 산세의 인근 교룡산성에서 방어를 했더라면 전투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지 알 수 없습니다.

 

 

 

 

 

중완구

 

 

 

 

 

우, 비격진천뢰

임진왜란이 시작하기 전 해인 1591년에 군기시의 화포 장인 이장손이 개발한 최초의 시한폭탄이다. 날아가서 전진에 도달하여 폭발하는 장치가 있었고, 안에 있던 비철이 사방으로 퍼져 사람을 상하게 하는 위력적인 무기였다. 궁중에 보관되어 있던 유믈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이다.

 

좌, 비격진천뢰

무장읍성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로 날아가서 떨어진 뒤에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준 무기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군의 위력적인 무기가 되었다. 남원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의 <난중집록>을 비롯하여 당시 기록에 자주 등장하였다. 고창고인돌박물관 소장품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당시 사용되었던 (삼)총통, 철탄환과 돌탄환, 마름쇠, 화살촉 등

 

 

 

 

 

인류에게 전쟁은 없어야 한다.

 

1957년 남원성은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현장이었다. 유럽에서 최신 무기 조총을 받아들이고 전국시대의 전란을 겪으며 전투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던 일본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와 달리 전라도 침략을 위해 남원성을 공격해 왔다. 필사적으로 맞서 싸운 조선과 명나라의 수많은 군사들, 그리고 남원의 평범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죽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크라이나, 가자,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다. 모든 전쟁에서 희생이 뒤따른다. 어떤 이유라도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영상체험실에서는 남원성의 모두가 희생된 전투의 마지막 밤을 영상으로 그려냈습니다.

 

 

 

 

 

 

 

 

 

 

 

 

 

한글 노래가 쓰여진 찻잔

 

일본으로 끌려간 도자기 장인의 후손이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 지역에서 만든 찾잔이다.

겉면에 "개야 짖지 마라."로 시작하는 한글로 된 가사를 썼다. 이 글은 조선에서 불리던 시조를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수집가 후지이 다카아키의 가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코 무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쟁의 공을 확인받기 위해 코를 베어 바쳤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영수증도 남아 있다. 일본 교토의 도요쿠니 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곳인데 그 옆에 가장 규모가 큰  코무덤이 있다. 또한 오키야마, 후쿠오카, 구마모토, 대마도 등에서 코무덤이 발견되었다. 경남 사천과 전북 무안에서 일본 코무덤에서 가져온 흙을 봉안하여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형련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책 / 1981년 형련 후손 형성욱 기증

 

형련(1544~1597)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형련은 정유재란 때 남원부사 임현과 함께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배자에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말과 이름을 썼는데, 전투가 끝난 후 배자를 수습하여 무덤을 조성하였고 비석에 형련의 무덤이라고 기록하였다.

 

 

 

 

 

양대박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책의 목판과 기록한 책

 

 

 

 

 

 

 

 

 

 

 

 

 

 

 

 

 

 

 

해설사님 감명깊게 정성을 다해주셨습니다.

 

 

 

 

 

들머리 만인의총 표지석

 

 

 

 

 

홍살문 앞쪽에 위치하여, 유교적 건축물 배치로 보았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문입니다.

 

 

 

 

 

萬人義士殉義塔

 

만인의사 순의탑은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만인의사의 정신을 담아 2000년 12월에 세워졌습니다. 막대한 병력의 일본군에 맞서 민관군이 함께 싸은 정신을 3개의 수직기둥과 상단부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상단의 탑신 높이는 15.7m, 기단 높이는 1.9m이며, 양 츠겸의 부조는 2.5m높이로 되어 있습니다.

 

 

 

 

 

 

 

 

 

 

 

 

홍살문은 능, 원, 묘, 궁전, 관아, 향교, 서원 등의  정면에 세우는 붉을 칠을 한 나무 문입니다. 한문으로는 紅箭門(홍전문)으로 쓰고 홍살문으로 읽습니다.

붉은 색은 악귀를 쫓고 화살은 액운을 물리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안쪽 구역은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시면 될 겁니다.

 

 

 

 

 

외삼문인 충의문

 

 

 

 

 

내삼문인 성인문

 

 

 

 

 

만인의총 정화 기념비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의 우측 마당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내삼문으로 들어갑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충렬사가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612년(광해군 4)에 남원성 전투에서 순철한 충신 7위를  제사하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하였고, 1653년 (효종 4)에 충렬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사당에는 '남원부성순절 만인지위' 무명용사 대표 위패를 중심으로 정기원, 이복남 등 남원성 전투 순절 충신 56위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이곳 향로는 최신식입니다.

일반 참배객이 분향시 준비된 향에 불을 붙이지 않고 그냥 향로에 꽃으시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만인의총

남원역 부근에 있던 것을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만인의총 비

 

1964년, 넙 60cm, 높이 170cm, 두께 27cm

만인의총비는 1964년 5월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면서 세운 비다. 원래 만인의총은 옛 남원역 부근에 있었다. 비문에는 정유재란(195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신들과 민인의총을 조성한 일을 기록하였다. 비는 네모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용 모양의 머릿돌을 올렸다. 비문은 남원 출신의 이만기가 국한문 혼용으로 짓고 썼다,

<현지 안내문에서>

 

 

 

 

 

 

 

 

 

 

 

 

 

 

 

 

 

 

만인의총과 만인의총 역사문화관을 둘러보았습니다.

 

 

 

 

◐남원한정식 중식

 

남원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시설은 제법 낡았습니다만 전통있는 집인것 같습니다.

금액은 2인  각25,000원, 3인 이상은 23,000원입니다.

 

 

 

 

◐김병종 미술관

 

중식 후 회장님 가족분들이 차한잔 내신다기에  김병종 미술관으로 왔습니다.

미술관도 둘러보고, 차도 마실수 있으니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먼저 카페에 들렀습니다.

 

 

 

 

 

 

 

 

 

 

 

 

2026년 남원시립 김병종미술관 소장품전 <아침의 아이>는 김병종 작가의 호인 단아(旦兒)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단아라는 아호에는 아침에 눈을 뜬 아이가 세상과 사물을 바라볼 때 늘 신기해하고 설렘을 느끼 듯, 나이가 들어도 일평생 어린아아 같은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소장한 김병종 작가의 작품 500여 점에는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의 작품이 두루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50여 년간 이어진 아침의 아이 김병종의 수용과 도전, 穿鑿(뚤을 천, 뚫을 착)과 확장의 여정을 파노라마와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畵歷(화력) 중에서 이정표라 할 수 있는 <제11회 전국대학미술전람회> 대통령상 수상작 <작업>(1979), <歷代名畵記역대명화기>의 '運墨而五色具운묵이오색구 /먹을 잘 운용하면 오색이 갖추어 진다.'는 정언원의 말처럼 붓과 먹의 운용을 통해 생명의 역동성을 표현한 <숲은 잠들지 않는다.>(2003)를 비롯하여, 김병종 작가의 예술 세계를 말할 때 받드시 언급해야 하는 <송화분분>,<화홍산수>, <화첩기행> 연작 중에서도 작가의 폭넓은 예술 세계를 확인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남미기행 / 2007

혼합재료에 먹과 채색

 

 

 

 

 

송화분분 / 2006

닥판에 먹과 채색

 

 

 

 

 

상선약수 / 1998

골판지에 먹과 채색

 

 

 

 

 

기병종의 드로잉 : 그럼에도

 

 

 

 

 

 

 

 

 

 

 

 

 

 

 

 

 

 

 

 

김병종의 드로잉 : 그럼에도

 

김병종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분단 현실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의 굴곡과 애환을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조명해 왔다. 그는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아우르며 우리 근대사의 정신과 정서를 탐구했고, 그 사유의 여정을 다섯 권의 <화첩기행>(문학동네)으로 엮어냈다.

깊이 있는 통찰과 섬세한 필치, 그리고 화가의 시선이 어우러진 그의 글과 그림은 독자와 관람객 모두에게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임을 전한다.

 

 

 

 

 

 

 

 

 

 

 

 

드로잉은 단순한 線(선)이 아니다,

선을 긋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한 줄의 선에는 오랜 사유와 반복된 몸짓, 고된 수련의 시간이 겹겹이 스며 있다. 그갓은 순간의 흔적이 나니라 삶이 응축된 자리이다.

이미지가 즉각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속도는 미덕이 되고 노력은 데이터로 환원된다. 그러나 김병종의 드로잉은 이러한 속도의 질서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의 선은 빠름이 아니라 깊이를, 속도라 아닌 밀도를 드러낸다. 일필휘지의 선은 순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행의 시간과 숙련의 세월이 응축돼 있다. 그의 선은 재현이 아니라 현존이며, 묘사가 아니라 존재의 발화이다.

 

망설임과 결단, 반복과 절제가 교차하며 태어난 선은 생명의 떨림으로 진동한다. 닫히지 않은 형상은 미완의 흔적이 나니라 멈추지 않는 생성의 호흡이며, 여백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가능성을 품의 사유의 장이다. 이는 채움보다 비움을 통해 본질에 다가가려는 한국적 미의식의 태도와 맞닿아 있으며, 생명의 화가 김병종의 예술 철학을 고스란히 대언한다.

 

김병종의 드로잉 : 그럼에도는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대체해가는 오늘 예술의 기원을 다시 묻는다.

에술을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알고리즘의 계산인가.

아니면 몸과 사유가 만나는 한 줄이 선인가.

 

이 전시는 이러한 물음 앞에서 분명히 말한다,

예술의 시작은 속도나 계산이 아니라, 시간과 사유가 켜켜이 쌓인 손의 밀도에 있음을.

그리고 그 한줄의 선이야말로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자리임을.

 

 

 

 

 

좌, 화첩기행 -나운규의 아리랑 / 1998

골판지에 먹과 채색

 

우, 혁명가 김산 / 2000

한지에 먹과 채색

 

 

 

 

좌, 화첩기행 - 하회탈충 / 2005

한지에 먹과 채색

 

중, 진도아리랑 / 1997

한지에 먹과 채색

 

우, 화첩기행 -진도들노래 / 1998

한지에 먹

 

 

 

 

 

 

 

 

 

 

 

 

 

 

 

 

 

 

 

좌, 작가초상 / 2018

종이에 채색

 

우,  알베르 카뮈 초상 / 2018

종이에 채색

 

 

 

 

좌, 화첩기갱 - 미사리에서 2006

한지에 먹과 채색

 

우, 화첩기행- 미사리 카페에서 2004

한지에 먹과 채색

 

 

 

 

 

좌, 화첩기행 -금강산 경비병 1999

한지에 먹과 채색

 

우, 화첩기행 - 금강산 인근 온정리 인민학교 아이들, 1999

한지에 먹과 채색

 

 

 

 

 

화첩기행 -상해에서, 1998

한지에 먹과 채색

 

 

 

 

 

 

 

 

 

 

 

 

 

 

 

 

 

 

 

 

 

 

 

 

 

 

 

 

 

 

 

 

 

자스민, 어디로 가니

 

 

 

 

 

자스민 어디로 가니

자스민은 강아지 이름인가 봅니다.

 

 

지스민 어디로 가니

 



 

 

통유리창이 자연 액자가 되었습니다.

 

 

 

 

 

김병종미술관을 둘러보았습니다

 

 

 

 

 

◐광한루원

 

광한루원 서문으로 왔습니다.

서문 앞쪽에 대형 주차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른 개인 4,000원

경로 무료

 

 

 

 

 

오작교쪽으로 왔습니다.

 

 

 

 

 

광한루 앞 호수는 은하수를 형상화 하였답니다.

안에 삼신산이 있습니다.

 

 

 

 

 

광한루

 

 

 

 

 

 

 

 

 

 

 

 

 

 

 

 

 

 

 

 

 

 

 

 

 

 

 

 

 

 

 

 

 

호암제일루

목조 건물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기울어짐을 방지하는 묘책으로 올라가는 문을 후에 설치함으로써 누각으로 오르는 편리와 기울어짐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석군

 

이곳 비석은 과거에 남원과 인연을 맺은 부사, 관찰사, 어사들의 사적비 및 선정비 등이다. 예전에는 남원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실과 훼손을 방지하고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석의 제작 연대가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하여 남원의 역사와 비석 형식의 변천 괒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부사 성안의 선정비는 비석군 앞쪽 별도로 있습니다.

 

 

 

 

 

성안의(成安義, 1561~1629)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정보, 호는 부용당이다, 선조 24년(1591)에 3년에 한번씩 시행되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정6품)과 남원부사를 거쳐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죽은 후, 인조 26년(1648)에 이조판서, 형관대제학(정2품)으로 증직되었다. 이 비석은 성안의가 선조 40년(1607)에 남원부사로 부임 후 4년 여 동안 베푼 선정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3년(1611) 8월에 세워졌다.

<현지 안내문에서>

 

성안의는 영주 사람이다.  선조 40년 남원부사로 부임후 4년여 동안 베푼 선정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이 선정비는 이몽룡 실존설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라고 전한다. 그의 아들 성이성은 13세에 아버지를 따라 남원으로 갔는데 그가 바로 춘향전 이도령이다.

성이성은 13세~17세 동안 남원에서 생활할 때 어떤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와의 인연 이야기가 소설 춘향전의 발단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뽕나무

 

이 나무는 1855년 철 종재위 6년경, 부사 이상억이 광한루를 중수 할 때 심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나무는 높이가 18m, 수관폭 약15m정도이며 열매는 6월에 흑자색으로 익는다. 뽕나무는 낙엽활엽 교목으로 잎의 모양이 넓은 난형이며 길이가 5~15cm, 너비가 4~12cm가장지리는 톱니가 있다.

꽇은 암꽃과 수꽃이 한그루에 따로따로 피거나 다른 그루에 핀다.

<현지 안내문에서>

 

 

 

 

 

성춘향사당으로 왔습니다.

 

 

 

 

 

 

 

 

 

 

 

 

 

현판은 烈女春香祀(열녀춘향사)

바로 아래 토끼와 거북이

 

 

 

 

 

춘향의 초상화

 

 

 

 

 

은하수 속의 삼신산을 둘러봅니다.

 

 

 

 

 

 

 

 

 

 

 

 

 

 

 

 

 

 

 

 

 

 

 

 

 

광한루원 탐방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