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칠칠회

청주 정북동 토성, 고인쇄박물관, 충북대학교

정헌의 티스토리 2026. 6. 23. 22:12

■청주 정북동 토성, 고인쇄 박물관, 충북대학교,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 

 

信77會 모임입니다. 20대 초반에 만났으니 그의 50여년이 되었습니다.

금차 모임은 청주에서 모여 모교도 둘러보고 옛 추억있는 지역을 둘러보기로 하였는데, 청주 친구 숙소를 속리산에 잡았습니다. 그래서  오후 시간에 만나 모교 둘러보고, 문의에서 저녁 식사후 속리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정북동 토성과 청주 고인쇄박물관은 친구들 모임 전에 약간 시간이 남아 둘러본 곳으로 당시 학교에 다닐때에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산성이 많은데 정북동 토성은 일반 중고등하교 운동장  두어배 정도의 넓이로 평야지대에 설치된 토성으로 해자 등을 갖추었습니다. 고인쇄박물관은 직지의 발견으로 설립된 고인쇄박물관입니다.

 

 

▷일정

청주 정북동 토성 - 삼동소바 중식  - 청주 고인쇄박물관 - 카페 너바나 커피  - 충북대학교 - 문의 '마중가는 길' 석식 -보은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 숙박  /  2026. 6. 21.   

 

 

▷탐방후에

 

청주시 북쪽 멀지않은 미호천변에 정북동 토성이 있습니다.

주차장과 화장실을 비교적 근년에 지었는지 아담하고 깨끗하게 신축되어 있습니다.

물론 주차료나 입장료 등은 없습니다.

 

 

 

 

 

정북동 토성으로 갑니다.

 

 

 

 

 

왜 임시라는 표시를 하였는지 모르겠네요. 

 

 

 

 

 

주차장에서 토성까지의 거리가  2~300m로 가까운 곳인데 사진으로 보기엔 멀어보입니다.

 

 

 

 

 

이곳은 미호천(강)변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무가  그의 없어 여름철 낮에 둘러본다면 파라솔을 준비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동문쪽으로 접근합니다. 동쪽성곽 외부에 해자의 흔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해자는 성 주변을 둘러 파서 만든 도랑으로 방어와 배수 등의 기능늘 겸한다. 정북동토성의 해자는 두 차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첫 번째 해자는 성벽의 바깥을 따라 돌아가면서 파여졌다. 이 첫번째 해자를 수리하고 만들어진 두 번째 해자는 안쪽과 바깥의 이중으로 만들었다.

정북동 토성 해자의 특징은 바닥면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천천히 낮아진다는 점이다. 이런 구조는 해자가 물을 채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호천의 물을 일부 끌어들여 성을 돌아나가도록 배수시키는 기능을 겸할 수 있도록 만들여졌음을 알려준다.

두 번째 해자는 토성이 방어의 기능을 잃게 되면서 폐기되어 메워졌으며, 그 메워 다져진 위쪽에 통일신라의 수레가 다니던 도로와 그 이후의 집터를 비롯한 생활유구들이 자리하게 되었음이 발굴을 통해 알려졌다.

<현지 안내문에서>

 

 

 

 

 

동문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첫 느낌은  정방형의 토성에 그렇게 크지않은 (가로.세로 거리가 160~170m 전후) 넓이이다 싶습니다.

주로 산성만 보아오다가 이런 평지의 야트막한 토성을 보니 방어의 수준으로는 미흡해 보입니다.

 

 

 

 

 

성의 내부입니다.

 

청주 정북동 토성은 미호천 평야 중심에 흙으로 쌓은 사각 형태의 성으로, 성벽의 둘에는 675m, 높이는 3.5m가량이다. 4면의 성벽마다 중간에 성문을 두었으며, 특히 남북쪽은 성문을 공격하는 적군을 측. 후방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좌우 성벽을 서로 어긋나게 만들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적을 동태를 살피기 위한 높은 누각을 세웠으며, 모서리와 성문 사이에는 치성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또한 성벽 바깥으로 해자를 파고 물을 채워 적군의 접근을 막았다. 흙으로 쌓아 올린 성벽은 안팎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나무판자로 구분하여 흙과 진흙을 교대로 다져 쌓은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정북동 토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4세기 혹은 6~7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쓰인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후백제의 견훤이 까치내 옆에 토성을 쌓고, 백성들에게 걷어 들인 곡식을 쌓아 두었다가 상당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후삼국시대(9세기 말~10세기 초)에 정북동 토성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북동 토성은 국내 토성 중 가장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문화재로, 한국 초기 토성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성의 형태를 대충 가늠할 수 있습니다.

 

 

 

 

 

동문지에서 성곽으로 오릅니다.

보이는 방향은 동남쪽입니다.

 

 

 

 

성곽에서 바라본 지나온 곳(주차장 쪽)

 

 

 

 

 

성곽은 그의 정방형 모양입니다.

동문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아봅니다. 따라서 사진은 북쪽 방향이 되는 셈입니다.

 

 

 

 

 

성내,

건물터 등 복원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청주공항에 착륙하려는 여객기인듯 합니다.

 

 

 

 

 

이곳 토성은 일부 성곽(성의 동남쪽)에  소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  나무가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합니다.

 

 

 

 

 

사면의 가운데 성문의 흔적이 있는 곳은 내려섰다 다시 성벽으로 올라야 합니다.

 

 

 

 

 

성 밖으로도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수 있도록 도로를 내었습니다.

이곳은 북문지 입니다.

 

 

 

 

북문안쪽 입니다.

 

 

 

 

 

서문쪽으로 갑니다.

 

 

 

 

 

저만큼 서문안쪽

 

서문은 동문과 마찬가지로 성벽을 절단하여 성문을 만든 구조이다. 서문터의 바닥에 대한 조사로 성문 구조를 알 수 있는데,  4.2m 너비의 개구부를 두고 여기서 다시 좁혀서 3.2m 너비의 문구부를 만들었다. 또 처음에는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가 뒤에는 냇가의 돌을 모아 다진 후 기둥을 세워 문을 다는 형태로 바뀌었다. 서문의 북쪽에서는 돌을 쌓아 만든 너비 6.3m의 성문 기초가 확인되었다.

서문 바로 남쪽에서 확인된 치성(곡성)의 구조는 토루(체성)보다 너비 4.2m, 높이 80cm정도 크게 만들어졌다. 치성의 모양은 체성 안팎으로 정토를 덧대어 반원형으로 만들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남문으로 왔습니다.

 

남문은 좌우의 성벽이 어긋나면서 일정 부분이 겹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옹성(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둥글거나 네모지게 밖으로 둘러 쌓은 시설)의 초기 형태로 여겨지는데,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앞뒤에서 쉽게 공격할 수 있다.

남문  밖에는 해자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최대 너비 17m의 1차 해자에 3.5~5m 너비의 2차 해자를 덧붙여 사용하고, 마지막에는 크기가 줄어 9m 정도 너비의 해자가 사용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전장용으로서의 성곽 기능이 없어진 9세기 이후에는 메워졌고, 적심석(기둥을 세우기 위해 돌을 박아 기초를 만든 둥근 형태의 돌무더기)을 이용한 건물터가 발굴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남쪽 성곽인 셈입니다.

 

 

 

 

 

저곳에서 방향을 북쪽으로 틉니다.

 

 

 

 

 

저만큼 동문지로 되돌아 왔습니다.

 

성내에 마을이 있을 당시 주 출입구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동벽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있다. 동문 북쪽에 드러난 자름면을 통해 중신 토루(체성)에 외피를 덧댄 모습의 성벽 구조를 볼 수 있다. 외피를 포함한 성벽이 너비는 10~11m 정도이다.

성벽의 평면은 안팎과 중간 각 2개씩 4개의 기둥으로 구획된다. 성벽 안쪽, 체성에 해당하는 부분은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황갈색의 고은 흙을 다져 쌓았다. 반면 외피에는 모래가 섞인 흙과 함께 교대로 다져 쌓아 구별된다. 또 동문 안쪽 성벽면에서는 체성을 쌓았던 흔적인 기둥구멍이 성벽 방향으로 1.1~1.7m 간격으로 나타났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북동 토성을 한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삼동소바

 

소바로 소문난 집인가 봅니다.

때가 살짝 지난 시간임에도 많은 분들이 찾습니다.

 

 

 

 

◐ 청주 고인쇄박물관, 흥국사.

 

중식후 고인쇄박물관에 왔습니다.

 

 

 

 

 

고인쇄박물관 입구는 아니지만 문화예술회관 방향으로 들어서 주변 산책로를 잠시 걸어봅니다.

 

 

 

 

 

 

 

 

 

 

 

 

 

 

 

 

 

 

 

박물관 구역과 공원구역과의 경계를 이런 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울 밖,

이런 불상이 있습니다.

 

 

 

 

 

 

 

 

 

 

 

훙국사에 왔습니다.

고인쇄박물관 좌측에서 우로 한바퀴 크게 돌아 온 셈입니다.

 

 

 

 

 

청주 흥덕사지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흥덕사의 옛터이다. 흥덕사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하 직지>를 간행한 곳이다.

직지는 백운화상이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역은 책으로, 우왕 3년(1377)에 흥덕사에서 인쇄하였다. 이는 구텐베르그의 <42행 성서> 간행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1985년 발굴조사 중 '흥덕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금구(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공양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으는 용도로 사용함)가 나와 이곳이 당시의 흥덕사였음을 확인하였다. 이와 더불어 각종 기와, 전돌, 그릇 조각 등을 비롯하여, 청동으로 만든 작은 종과 금강저(승려가 불도를 닦을 때 쓰는 법구의 하나로, 번뇌를 깨뜨리는 보리심을 상징함)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현재는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금당과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회랑지와 강당지도 주춧돌이 노출되도록 잔디를 심어 정비하였다. 

현재 흥덕사지 옆에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있으며, 맞은 편에는 근현대인쇄전시관과 청주시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이 들어서 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인류 문명 발전의 원동력인 지식 정보의 공유와 확산을 가능하게 한 획기적인 발명이자 우리 조상들의 문화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인쇄 문화와 금속활자 제작 기술의 발전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법당엔 철불을 모셨습니다.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은 통일 신라시대 종으로 1970년 청주시 운천동에서 금동으로 만든 불상과 징 모양의 금구와 함께 출토된 것이다. 이 종은 다른 신라 종에 비해 문양이 단순하고 종의 길이(鐘身)가 짧다. 종의 몸통은 전형적인 한국종의 형태인 역(逆) 항아리의 모습을 취하며, 당대와 하대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였고 문양이 전혀 새겨지지 않은 점이 매우 독특하다.

연곽(연꽃무늬로 장식한 네모난 곽)에는 3개의 반원권 테두리 안에 비천상과 삼보문 당초문이 장식되어 있다. 연곽내부는 각각 9개의 연뢰(연꽃의 봉우리 모습을 한 돌기)가 연화좌 위에 돌출되어 있다. 종의 중심부에는 2구의  주악비천상(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한쪽은 비파를 연주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두 손을 모은 합장을 한 모습이다. 주악비천상 사이에는 연화문과 넝쿨무늬로 장식된 2개의 당좌(종을 치는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용뉴(용의 모습을 취한 고리)는 종의 맨 위부분을 두발로 힘차게 딛고, 입을 크게 별려 종 전체를 물어 올리는듯한 용의 모숩과 몸통을 가진 것이 전형적인 신라의 양식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경주 흥덕사지는 한국토지공사에서 시행하던 "운천지구 택지조성공사"중 1985년에 옛 사찰 터가 발견되어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으로 만든 북(청동금구,靑銅禁口)에 "서원부 흥덕사"와 청동불발(靑銅佛鉢/바리때(승려의 밥그릇) 발)에 "황통십년 흥덕사 皇統十年興德寺"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흥덕사의 터로 확인되었다.

이 사찰 터의 규모는 발굴조사 결과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배치되고 주위에 회랑이 돌아간 것으로 밝혀졌으며,  "대중삼년 大中三年" 명 기와가 출토되어 849년에 이미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377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후 화재로 인하여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점면 5칸, 측면 3칸의 이중처마 팔작지붕의 금당과 삼층석탑을 복원, 정비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고인쇄박물관

 

 

 

 

 

 

 

 

 

 

 

직지

직지 활자의 빛이 되어 모두에게 이르다.

 

 

 

 

 

直指 이름의 의미

 

직지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줄인 말로 "백운 경한 스님이 석가모니와 역대 조사 스님들이 법어와 어록 등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만을 발췌하여 엮은 책"이라는 뜻이다.

白雲 (백운)  직지를 판찬한 경한 스님의 호

和尙 (화상)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

抄錄 (초록,뽑을 초) 중요한 부분만 발췌

佛祖 (불조) 석가모니와 선조사(禪祖師) 스님들

直指心體 (직지심체)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직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불교용어

要節 (요절) 문장에서 요긴한 마디

 

 

 

 

 

직지연표

 

직지는 한국에 없다,

백운화상이 편찬하여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는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써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되었다.

 

 

 

 

 

백운화상 / 고려시대 승려

1298넌 전라도 정읍(고부)에서 출생

1351년 원나라 임제종사 석옹화상과 선문답을 주고 받음

1352년 석옹화상에게서 <불조 직지심체 요절(필사분) 한 권을 받음

1372년 성불산에서 제자 법린의 도움을 받아 <직지>편찬

1374년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77세)

 

1377년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간행

1455년  독일 구텐베르크가 납활자로 <42행성서> 간행

1900년  꼴랭 드 플랑시(주한 프랑스 공사)가 수집,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

1901년  모리스 쿠랑(프랑스 동양학자)이 <한국서지>에 소개

1911년  알리 베베르(골동품 수집가)가 드루오 경매에서 180프랑에 구입

1952년 알리 베베르의 유언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

1972년  세계도서의 해 기념 프랑스 국립도서관 <책>전시회에 전시, 박병선 박사가 사진자료 국내 소개

1985년  청주 흥덕사지 확인

1992년 청주 고인쇄박물관 개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2004년  유네스코 직지상 제정

2015년  직지 금속활자 복원

2023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인쇄! 그텐베르크의 유럽>전시회에 전시

 

 

 

 

 

흥덕사지의 발견

1985년 청주 운천동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흥덕사가 새겨진 청동금구와 청동발우가 발견됨으로써, 직지를 인쇄하였던 흥덕사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흥덕사는 849년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사찰로 1377년 직지를 간행하고 얼마되지 않아 화재로 폐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지랑이는 본래 물이 아닌데 목마른 사슴은 알지 못해 부질없이 헤매인다.

자신이 어리석어 진실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헛되고 헛되다 하네

진리는 원래 형체도 없어 집착이 없고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네

어느날 스스로 성품이 원래 비어있음을 깨달으면 열병에 땀을 낸 듯 후련하리

흐린날.. 비 쏟아져 뜰에 물고이더니.. 물위에 동동 거품 일어나는 것이 보이네..

앞의 것이 이미 사라지는가 하더니 뒤의 것이 다시 생기고.. 앞과 뒤가 서로 이어져 진리에 닿을지니..

 

 

 

 

 

10회 수상기관(2024)

 

 

 

 

 

금속활자인쇄, 목판인쇄, 목활자인쇄

 

 

 

 

 

한국의 금속활자 연표

 

 

 

 

 

 

 

 

 

 

 

금속활자 주조법

조선 초기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전

 

 

 

 

 

민제 박병선 박사

 

박병선은 1923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1955년 프랑스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동양서고에 보관 중이던 <직지>를 연구하였으며, 국내로 사진 자료를 가져와 직지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찾아내어 목록과 내용을 정리하는 등 2011년 국내 반환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본

맹자언해

분류두공부시언해

십칠사찬고금통요

 

 

 

 

 

구결(口訣)

우리말과 어순이 다른 한문을 우리말로 쉽게 풀어 읽을 수 있도록 한자를 이용하여 조사나 어미 등을 끼워 넣은 것을 구결이라 한다. 구결은 한자를 음으로 읽으면서 중간에 우리말 조사나 어미만 넣어서 잃는 음독구결과 한자의 뜻에 맞춰 우리말로 풀어 읽는석독구결로 나뉜다. 고려시대 구결은 한글 창제 이전 우리 선조들의 언어생활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구결은 음독구결과 석독구결로 나눌 수 있으며, 우리가 말하는  '토'를 말합니다. 

 

 

 

 

 

목판의 제작

인쇄용 목판 제작을 위해서는 먼저 적합한 나무를 선정하여 바닷물에 일정 기간 담그거나 소금물에 쪄서 잘 건조한다. 건조된 목재를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잘라서 판면을 고르게 처리한다. 이후 준비된 원고를 목판에 뒤집어 붙이고, 판각과 교정을 반복한다. 판각이 마무리되면 마지막으로 목판 양쪽 끝에 마구리를 끼워서 목판을 완성한다.

 

 

 

 

 

고려대장경과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소

 

 

 

 

 

다양한 형태의 목판인쇄

 

 

 

 

 

천자문, 간경도감

 

 

 

 

 

능화 문양의 세계

우리 조상들은 책과 종이를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히 여겼다.

책을 보호하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여러 장의 한지를 압착해서 공기층을 만들고 다향한 문양을 새겼는데 이를 능화문이라 한다.

 

 

 

 

 

옛 책의 표지문양

목활자와 민간의 인쇄

 

 

 

 

 

청주의 문화유산 사진

 

 

 

 

 

고령신씨 명가묵적(名家墨跡)

고령신씨 명가묵적은 청주에 세거해 온 고령신씨 영성군파 문중에서 전해 온 6점의 문적첩이다.

 

 

 

 

 

윤관초상(좌)

정충수 초상화 및 중모기(우)

 

 

 

 

 

중국의 인쇄문화

중국의 활자 제작은 송나라 심괄의 <몽계필담>에 11세기 필승이 진흙으로 활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내구성 등의 문제로 상용화되지는 못하였다. 목활자의 제작과 사용은 원나라 왕정의 농서(農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목판 인쇄술과 관련해서는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목판 자료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데, 이중 868년에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금속활자를 발명한 고려

고려는 각종 불경과 대장경 간행 등의 거대한 국가사업을 뛰어난 목판인쇄술로 이루어냈다. 당시 고려는 우수한 종이와 사경(寫經), 각종 서적이 이미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쇠와 불을 다루는 기술과 인쇄에 필요한 먹의 제조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13세기 혼란스러운 정세 속의 고려는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지식 정보의 확산과 공유가 필요했다. 금속활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성숙한 문화 흐름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되었다. <동국이상국집>의 <성정예문발미. 1234>와 번각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를 보면, 고려는 이미 13세기 초에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금속활자 인쇄를 실용화한 것으로 보인다. 직지가 탄생된 1377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고려는 이미 세계 최고의 인쇄문화를 꽃피운 문화강국이었다.

 

 

 

 

 

활자로 태어난 직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화상의 문하생인 비구(남자 스님) 석찬과 달잠이 비구니(여자스님) 묘덕의 시주를 받아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현재 국내에는 전하지 않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 1책이 소장되어 있다. 금속활자로 간행된 후 1년 뒤인 1378년에는 여주 취함사에서 목판본으로 한 번 더 간행되었다.

 

금속활자분 직지의 인쇄 특징

부족한 글자는 소자(小字)사용

비뚤어진 글자

거꾸로 인쇄된 글자

너덜이(쇳물 찌꺼기)가 붙은 글자

빠진 글자는 필사 보충

 

 

 

 

 

고인쇄 박물관을 대충 둘러보았습니다.

 

 

 

 

◐금속활자전수 교육관

 

오후 3시,

당시 금속활제 제조과정에 대한 시연이 있다고 해서 둘러보러 왔습니다.

 

 

 

 

 

 

 

 

 

 

 

 

 

 

 

 

 

 

 

 

 

 

 

금속활자에 시연에 쓰인 재료에 직접 쇳물을 붓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제조과정은 알만합니다.

 

 

 

 

◐카페 너바나 커피

 

오후 4시, 

충북대학교 정문 앞에 있는 이곳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이 건물은 청주 친구네가 건축한 건물로 처음 당구장을 개업한 곳이었습니다.

 

 

 

 

 

그러구로 몇 십년이 지나고, 주인도 바뀌었고,

지금은 아담한 카페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현 이곳 주인장은 충북대의 한참 후배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충북대학교

 

우선 정문의 모습이 바뀌었네요.

조금은 검소한 듯

 

 

 

 

 

당시에는 없었던 법학전문대학원 건물이 제법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학본부 건물은 이곳으로 이전 신축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녔던 대학으로 갑니다.

 

 

 

 

 

플라타너스 나무도 수십년이 지난 지금 고목의 자태를 풍깁니다.

 

 

 

 

 

입학 당시 모집 정원이 900명이 채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중간에 군대에 갔다오고나니 건물이 신축되고 대학의 재비치가 이루어졌으며 모집 정원도 대폭 확대외었습니다.

이곳은 복학후 우리가 다녔던 건물로 변함이 없습니다만 정원수는 많이 자랐습니다.

 

 

 

 

 

과 사무실로 들어가 봅니다.

 

 

 

 

 

리모델링을 막 마쳐서인지 깨끗해 졌습니다.

 

 

 

 

 

마침 한참 후배님이 우리를 안내해 줍니다.

 

 

 

 

 

실험실도 둘러보았습니다.

 

 

 

 

 

 

 

 

 

 

 

 

 

 

 

 

 

개신동,

당시 이곳은 학교 변두리의 하숙촌이었습니다.

 

 

 

 

 

당시 하숙하던 때는 기와집의 근대 건물들로 시골의 어느 한 마을이었습니다.

후에 학교에서 이 일대를 매입하여 학교부지로 편입하고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였기에 옛 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당시 대학 본부쪽으로 방향을 잡숩니다.

 

 

 

 

 

당시 대학본부가 자리한 장소엔 새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박물관입니다.

 

 

 

 

 

이곳은 학생회관

 

 

 

 

 

잔디광장

 

 

 

 

 

잔디광장은 야외 박물관으로 변했습니다.

 

 

 

 

 

박물관 앞쪽이기도 해 관련 유물들 몇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잔디광장 옆을 지나 당시 도서관으로 가봅니다.

 

 

 

 

 

당시의 도서관은 건물의 모양새도 달라졌고,

 

 

 

 

 

정보화 본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학교 후문쪽으로 왔습니다.

 

 

 

 

 

안동. 군위에 사는 친구는 이 일대에서 하숙을 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농촌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 인근은 공대가 있었던 주변입니다.

 

 

 

 

 

당시의 건물은 아닌것 같습니다.

 

 

 

 

 

이런 건물도 있습니다.

 

 

 

 

 

당시 대운동장이 있었던 곳 주변입니다.

이곳에 도서관이 확장 이전 신축되었습니다.

 

 

 

 

 

 

 

 

 

 

 

개신 문화관도 기억에 없는 건물입니다.

 

 

 

 

 

사회과학대학

 

 

 

 

 

현 도서관 자리와  그 주변 일대가 하도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습니다.

현 도서관 자리가 당시 대운동장이었는지 아님 이곳이 대운동장이었는지 가물가물 합니다.

 

 

 

 

 

경영대학

 

 

 

 

 

당시 대학본부를 중심으로 한바퀴 돌아 정문쪽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우리가 주로 다녔던 캠퍼스 동선을 위주로 한바퀴 둘러본 셈입니다.

입구쪽 법학전문대학원 뒷쪽의 저곳도 간호대학이 별도로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중 가는길

 

문의에 있는 음식정 '마중가는 길'에 왔습니다.

 

 

 

 

 

별관? 본관?

 

 

 

 

 

내부도 정갈합니다.

 

 

 

 

 

모던 한정식집으로 음식이 깔끔하고 고급스럽습니다.

 

 

 

 

 

뒷쪽애 강민주의 들밥집이 있습니다.

지난해인가 들렀던 적이 있는 집 같은데 상호는 달라진것 같습니다.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에 왔습니다.

말티고개 상부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의 숙소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