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양 창평기행
담양읍에서 소쇄원이 있는 남면 주변 정자로 송강정, 면앙정, 명옥헌,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풍암정 /
광주 충효동) 소쇄원, 독수정 등을 들 수 있으며 담양정자 기행이란 테마로 둘러보실 수 있다.
담양 창평면은 동으로 대덕면, 서쪽으로 고서면, 남쪽으로 남면과 북서쪽으로 봉산면과 무정면이 접하고
있으며 아시아 최초 슬로우시티로 지정된 삼지천 마을이 있다. 월봉산 산행과 더불어 슬로우시티 창평을 둘
러 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창평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잡아 본다.
▷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옥과IC - 대덕면 금산리 / 무월마을 - 대덕면 장산리 / 미암 기념관 - 창평 - 명옥헌원림 -
(식영정), (가사문학관), 취가정, 환벽당 (소쇄원) (독수정) - (몰염정) - 동복 - 주암 - 진주
▷ 여행코스
무월마을 - 미암기념관 (모현관, 연계정) - 슬로시티창평 삼지천 마을 - 명옥헌 원림 - 취가정, 환벽당
▷ 여행안내도
면사무와 창평교회는 이웃해 있으며, 창평교회의 첨탑 2개는 멀리서도 보인다.
▷ 여행후에
▣ 달빛 무월 마을
△ 담양 대덕면 금사리 무월마을을 둘러본다.
호남고속도로? 옥과 IC - 담양 방면 - 오례삼거리 - 대덕면 방향으로 좌회전 - 성곡리 삼거리에서 금산리로 우회전하여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가면 무월마을이 있다.
△ 초승달 모양의 달빛 무월마을 표시판이 두군데 있다.
들머리를 지나 마을회관 앞에서 주차하면 된다.
△ 무월마을 앞의 안내도이다.
굳이 세월의 흔적이라 하기에는 뭐하지만 돌담과 한옥을 테마화한 마을이다.
△ 마을 앞쪽에 한옥체험관과,
△ 바로 옆에 달빛문화관이 있다.
달빛문화관은 마을 경로당 내지는 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 또한 달빛문화관 우측 뒷편으로 무월정이 자리하고 있다.
△ 무월정 뒷편으로 목탁바위와 소망탑이 좀은 어수선하다.
좌측 달신소망탑, 우측 해신소망탑, 옆엔 안내문과 반쯤 보이는 것이 목탁바위이다.
△ 최근에 쌓은 듯한 돌담길에서 세월의 역사는 찾기 어렵지만,
△ 아늑한 금산의 품안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 문패의 모양도 제각각으로,
△ 마을 전체를 통털어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다.
△ 마을 가운데로 들어서면 허허공방이 있다.
△ 마을 이장댁 ?
△ 어수선하며,
뛰어남도 없지만,
△ 다른데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볼거리가 된다.
△ 의도야 모르지만 처마끝엔 해학이 있다,
△ 공방 뒷편으로 돌아가면 또다른 다름이 있다.
△ 허허공방 이곳 저곳 둘러보고,
마을 뒷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 골몰샘 ?
△ 음용수로는 부적합해 보인다.
△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니 무월디딜방아간이 있다.
△ 바로 옆엔 중뜸샘이 단장중이다.
△ 죽은 감나무에 혼을 불어넣고,
△ 마을 좌측 뒷편 언덕으로 올라서면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 몇그루가 있다.
△ 마을 앞쪽으로 내려선다.
△ 위와 같은 집이다.
아랫뜸 한옥 민박.
주변에 여러 한옥들이 신축중에 있다.
아마 많은 지원이 있지않나 싶다.
△ 금산 보건진료소도 한옥이다.
△ 1시간쯤 무월마을을 둘러보고 창평으로 향한다.
금산 무월마을은 근대와 현대가 돌담과 한옥이라는 과거를 지향하는 마을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세월이 좀더 지나 남아있는 낡은 스레트 지붕이 전부 기와로 바뀌는 날 더욱 아름다운 마을이 될 것이다.
▣ 모현관, 연계정, 미암유물 전시관
△ 대덕면 장산리,
금산 무월마을에서 청평면으로 향하다 고창.담양간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은 창평방향, 우측은 무슨 마을? 방향 표시가 있다.
이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여 조금 진행하면 미암유물전시관 이정표가 있다.
△ 유물전시관 내부 좌측에 건물 신축 공사중으로 문이 굳게 닫쳐있다.
굳이 내부로 들어 갈려면 좌측 뒤편으로 도로를 따라 돌아가면 들어갈 수 있다.
△ 미암유물전시관에 모현관 편액이 걸려있다.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조선 명종, 선조 년간의 유학자로,
선조 원년부터 10년까지 11년간에 걸친 일기로 조정의 공사에서 부터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매일의
일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왕조의 정치사,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등의 자료로서 선조실록수찬의
기본 사료 중 하나가 되었다 한다.
△ 미암유물 전시관을 둘러보고 모현관으로 향한다.
△ 주변 경관과 연못 가운데 석조건물이 특이하다.
△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 목판
보물 제 260호
이 일기는 조선 명조으 선조 연간의 유학지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이 남긴 선조 원년(1567)
10월 부터 선조 10년(1577) 5월까지의 11년간에 걸친 일기이다
여기에는 조정의 공사(公事)로부터 지신의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매일 일어난 일과 견문한 바가 빠짐없이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는 조선 왕조의 정치사, 사회사, 경제사. 문학사 등의 자료로서 선조실ㅊ록수찬(선조실록수찬)의 기본
사료 중 하나가 되었다. 본래는 14책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11책 뿐이며 부록으로 미암과 그의 부인 송씨의
시문(詩文)과 잡록(雜錄)이 실려 있다.
< 안내문 >
△ 연계정
△ 연못 좌측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마루는 먼지 투성이고 문종이는 낡아 구멍이 숭숭하지만 바람은 시원하다
△ 모현관 뒷편에 미암사당이 있다.
담양 미암사당
전남도 민속자료 제 36호
미암 사당은 조선 선조 초년의 명신인 미암 유희춘의 사당이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정면 문틀 상당 외벽에 칸별로 6자×2자 크기의 벽화가 3폭 있는데
왼쪽부터 백학도, 등룡도, 봉황도가 그려져 있다.
건물의 건축년대를 보여주는 상량문은 없으나 기와를 깔아 끼우면서 명문(銘文)이 있는 암막새 기와가 발견되었다.
명문에는 양각으로 7행이 세로로 쓰여져 있는데 추월산 진경사에서 만력 36년(16.8년)에 만든 기와 임이 확인되었다.
유교적 건축물인 사당에 벽화가 그려져 있기는 매우 드문 사례로 희귀성이나 상징미가 돋보여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안내 표지판 >
▣ 슬로우시티 삼지천마을
△ 창평면 소재 삼지천마을로 이동하였다.
△ 창평면사무소이다.
지금은 이 건물은 없어지고 목조 건물로 신축되어 있다.
바로 앞에 창평교회가 있다.
마을 반대편에도 주차장이 있지만 초행일 경우 면사무소 또는 첨탑 2개가 인상적인 창평교회에서 시작하면 쉽다.
△ 면사무소와 교회 사이로 난 도로로 들어선다.
창평면의 중심도로와 이웃하여 이런 돌담이 보존되어 있다는게 놀랍다.
△ 야생화 효소 체험 학습장.
△ 체험 학습장마당가에 야생화가 가득하다.
△ 대체로 보면 삼지천 마을의 북쪽?
고재선 가옥 뒷쪽에 위치한 골목입니다.
△ 2층 건물이 있는 제법 넓은 정원을 가졌다.
면사무소 뒷편에 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 되돌아 나와 고재선 가옥을 둘러본다.
△ 담양 고재선 가옥 (潭陽 高在宣 家屋)
전남 민속자료 제 5호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이 가옥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헛간채 등 전통적인 상류 주택의 모습을 잘 간직한 것으로 1915년 경에 원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었다.
대문은 3칸으로 중앙 칸이 평대문으로 되어있고 좌우에 방이 1칸씩 구성된 맞배지붕(측면이 八자 모양지붕)이다.
가운데 칸의 대문을 들어서면 각종 나무들과 집의 동북쪽에서 수로를 끌어들여 만든 연못으로 구성된 사랑마당이
있다.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우측 끝에 2칸의 마루를 두어 이 지방의 전통적인 평면 구성 수법을 따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는 담으로 막혀있고 중문이 마련되어 있으며 안채 역시 일자형의 평면이다. 전통주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 삼지천 마을내에는 고씨 성을 가진 고택이 4군데 있다.
고재선, 고정주, 고재환, 고재욱 가옥으로 모두 마을 내에 있으며 (안내도 참조) 규모나 문화재적 가치에 있어서
다른 집들보다 규모와 볼거리가 있다.
△ 아랫채로 창고로 이용되었나 싶다.
△ 고재선 가옥 정문으로 나오면
<한옥에서> 라는 민박 및 찻집이 있다.
△ 넓은 마당과 4-5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 마을에서 가장 정갈한 민박집 같아 보인다.
△ 한옥에서..... 찻집을 겸하고 있다.
△ 한옥에서의 다른쪽(반대쪽) 입구로 나왔다.
△ 다른 골목으로 들어선다.
△ 여러 집에서 엿을 만드나 보다.
△ 삼지천 마을 동쪽인 셈이다.
고구려,
밖은 그럴듯 하지만 안 건물은 좀.......
△ 위 고구려 옆에 있다.
삼지천 마을 입구라.......
동쪽 입구인 셈이다.
△ 위 삼지내 마을 동쪽편으로,
농지를 사이에 두고 쬐끔 떨어져 있다.
△ 창평 남극루 (昌平 南極樓)
담양군 향토 유형문화유산 제 3호
담양균 창평면 삼천리 396
삼천리 하삼천 마을 논 가운데 세워진 남극루는 1830년대 장흥인 고광일을 비롯한 30여인에 의해 지어졌으며,
원래 현 창평면사무소 앞인 옛 창평동헌 자리에 있었으나 191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양로정(養老亭)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정자에는 남극루 라는 현판은 물론 문기, 중수기 등 아무런 현판도 걸려있지 않으나 걸려 있던 흔적을 여
기저기서 볼 수 있다. 특히 2층 난간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형 건물로 담양지방의 다른 정자보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 남극루에서 바라본 월봉산 방향.
좌측 봉우리가 월봉산, 인근에 상월정이 있다.
△ 남극루 옆,
오방길,
누정길.
△ 삼지천마을 남쪽부분을 둘러본다.
△ 흙과 풍경
△ 갑을원,
유황오리 전문점
△ 갑을원 안채
△ 안내도상 현위치 지점에서 방향을 가늠해 본다.
△ 춘강 고정주 주택으로 간다.
△ 안내도가 있는 삼거리에서 가까운 곳에 춘강 고정주 고택이 있다.
△ 글자 그대로 고택이다.
많이 낡았다.
△ 달팽이 민박,
빈도림 생활공방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빈도림은 독일인으로 귀화한 인물이란다.
△ 위 빈도림 공방을 둘러본다,
안내도상 고재욱 가옥인것 같다.
△ 마루 한켠엔 생활공방으로 꾸며져 있다.
△ 당일은 맥주 등을 만드는 강의가 있다며
한사람씩 두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 빈도림 생활공방을 둘러보았다.
체험마을이 잘 정착되길 기대해 본다.
△ 마을을 돌아 고재환 가옥을 찾아 간다.
△ 들어가는 입구가 상당히 넓다.
△ 대문이 잠겨있어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 보고 간다.
삼지천 마을은 면소재지의 중심도로에서 살짝 비켜있으면서도 옛 담장과 건물을 보존하고 있다.
크지않은 마을로 과거와 근대가 공존하지만 글자 그대로 천천히 둘러보았다.
▣ 달뫼 미술관
△ 달뫼 미술관.
창평면 용수리,
상월정 가는 길목에 있는데 문은 닫혀 있다.
▣ 명옥헌 원림
△ 담양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명옥헌 원림으로 이동하였다.
오희도(吳希道, 1583 ~1623).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이라 한다. 오희도는 성인이 되면서 광해군 치하의 어지러운 세상을 개탄하여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그만 서재를 짓고 자연과 벗 하면서 은거하였다, 그는 1620년경 능양군(인조)이 반정 동지를 구하기 위해 이 마을에 들렀을 때 그와 인연을 맺었다, 반정은 성공했고 이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오희도는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으로 천거되었으며 기주관(記注官)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檢閱)에 제수 되었으나 얼마 못가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주 오씨인 오희도가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릴적에 모친을 따라 외가인 이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오희도(吳希道)가 세상을 떠나고 30여년 후, 그의 넷째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아버지의 뜻을 기리면서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 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바 명옥헌의 다른 이름인 장계정(藏溪亭)이란 명칭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는데 정자 뒷편에 도장사라는 사당이 있어
서인지 도장정으로 불리기도 한다.
△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여 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 (배롱나무, 백일홍 같은 나무 다른 이름이다.) 등이 숲을 이루고 있고, 못 가운데 조성된
섬에도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어 뛰어난 조경으로 알려져 있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마루를 바닥에서 약간 높여 설치하였고, 그 중앙에는 실(온돌방) 하나를 두었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으며, 방문은 여닫이 이분합 때살문을 달았고,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두었다.
뒷쪽에 계단을 놓아 정자에 오르내릴 수 있게 했으며 앞쪽 처마 밑에 명옥헌 편액이, 오른쪽 마루 안쪽 창방에는 삼고三顧
라고 쓴 편액이, 그리고 기둥마다 명옥헌의 품위를 높여주는 주련이 걸려있다,
명옥鳴玉은 금관조복에 늘여 차는 옥인 패옥佩玉을 울리다 또는 패옥소리라는 뜻이다,
때로는 바위에 부딪쳐서 나는 물소리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정자의 이름 '명옥'은 '삼고'라고 쓴 편액과 연관해 볼 때
명옥예리 鳴玉曳履라는 말과 관련을 짓는 분도 있다, 이것은 패옥을 울리며 비단으로 만든 신을 끌고 걷는다는 말로 관직이
이 높고 녹이 후함을 상징한다, 한편 삼고는 세번 초빙한다는 의미로 선비는 아무리 좋은 자리를 준다해도 명분에 맞지않으
면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삼고'란 말속에 담겨 있다, '명옥'이라는 이름과 '삼고'라 쓴 편액은 이런 의미로 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애기하는 분도 있다,
제12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전남 담양 명옥헌 원림
2011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한 곳이다.
삼고 三顧
△ 명옥헌 뒷쪽이다,
이곳에도 중앙에 조그만 바위섬을 가진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 정자 좌측 뒷쪽에서 본 모습이다.
△ 명옥헌 원림을 둘러보고 취가정으로 향한다.
▣ 취가정
△ 취가정으로 이동하였다.
취가정과 한벽당은 광주호 상류에 위치한 가사문학관에서 다리를 건너자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북구 충효동으로 환벽당 보다는 조금 안쪽으로 있으며, 임진왜란때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을 추모
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 취가정(취가정)이란 이름은 모함을 당한 김덕령장군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노래 부르자, 권필이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한다.
△ 취할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듣는 사람이 없네......
△ 즉 김덕령장군이 취했을때 부른 노래란 뜻으로 취가정으로 이름지은 것이라 한다.
1950년 전쟁으로 불타고, 1955년 다시세운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작은 방이 있다.
△ 취가정을 둘러보고 가사문학관 방향으로 되돌아 나온다.
중간, 00절이 있고 도로변으로 돌담이 있다.
위 조그만 대문이나, 앞에 있는 절로 올라도 된다.
▣ 환벽당
△ 위 대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환벽당이다.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 : 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환벽당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며.
그 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며.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풍암정, 식영정, 가사문학관,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오늘은 예전에 못 둘러본 환벽당과 취가정을 둘러보고 일정을 마무리 한다.
풍암정이라.......
이곳은 아쉬움으로 뒤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