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겨울 경주 둘러보기 2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조식 후, 경주 관광에 나선다.
오전엔 주요 시내 사적지를 둘러보고 오후 한두 군데로 경주 주변을 둘러 보았다.
대릉원이나 안압지 주차장에 주차하시면 경주 역사지역 월성지구(첨성대, 계림, 반월성, 석빙고, 교동 마을과
최씨고가 등)와 대릉원(미추왕릉, 천마총 등), 안압지 등이 도로 또는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인접하고
있어 산책을 겸해 같이 둘러 볼수 있다.
안압지에서 가까운 곳에 황룡사지가 있으므로,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같이 둘러보는 편이 좀더 편할 것 같다.
남산지구로 이동하는 중에 오릉이 있고, 시내를 벗어나면 나정, 포석정, 삼릉 등 이정표가 차례로 있다.
오늘은 포석정까지만 둘러보고,
서악지구로 이동하기 위하여 (고속) 버스 터미널 사거리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좌측으로 무열왕릉, 우측으로
김유신 장군묘 이정표가 있다.
무열왕릉만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 코스
켄성틴 리조트 조식 - 대릉원 주차장 - 첨성대 - 계림 - 석빙고 - 반월성 - 대릉원 - 분황사 - 황룡사지 -
중식 - 포석정 - 나정 - 무열왕릉 - 오릉 ( 2014. 2. 23 )
▷ 여행후에
△ 경주 보문단지내 켄싱턴 리조트에서 하룻밤 묵었다.
△ 오전엔 시내 사적지를 먼저 둘러본다.
대릉원 주차장에 주차 후,
첨성대로 향한다.
△ 월성지구,
즉 첨성대. 계림. 반월성쪽은 입장료는 없다.
입구에 비단벌레차 매표소가 있다.
△ 먼저,
경주 동부사적지대이다.
이 일대는 동서쪽 안압지에서부터 교동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 신라왕경의 중심부였기 때문에 월성.안압지, 첨성대, 계림등 중요사적과
내물왕릉을 비롯한 수십기의 왕릉이 완전한 형태로 밀집되어 있고,
반월성, 석빙고, 교동마을과 최부자네집을 둘러 보실 수 있다.
△ 뒤로 보이는 숲이 계림이다.
△ 우측으로 고분군을 바라보고 진행하면 첨성대가 있다.
△ 첨성대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에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주장,
사방 어디에서 보나 똑같은 모습 그 자체로 해시계의 역할과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건축물 등 여러 주장들이 있다.
△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는 첨성대는
둥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쌓은 돌이 모두 362개로, 음력 1년의 날 수와 같고, 12개의 기단은 1년의 12달을 의미해서 신라인들 에게
달력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한다.
△ 첨성대가 세워진 후,
삼국사기에는 일식, 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이변 등을 관측한 기록들이 예전 보다 많고 매우 정확한 것이어서,
아름다운 외형과 과학적인 구조로 만들어진 첨성대가 뛰어난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이 접목된 우리 민족의 독창
적인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상 첨성대 관련,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
△ 앞쪽 계림으로 이동하였다.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숲이다.
계림은 원래 성스러운 숲이라는 뜻의 '시림'으로 불렸는데,
닭과 관련된 김알지의 탄생설화 때문에 닭이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리게 되었다.
△ 탈해왕 9년 (65년), 왕은 한반중에 금성 서쪽 시림이라는 숲 사이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를 보낸다.
조그만 금빛 궤짝이 나무 가지에 달려있고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아이는 갈수록 총명함을 더했고,이름은 알지 금궤속에서 나왔다 하여 김이라 성씨를 붙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왕위를 받지 않았으며 김알지의 6대손에 와서 김씨가 왕이된다.
△ 신라인들에서 닭은 어둠을 물리치고 아침을 알리는 동물로 매우 신성한 존재로 여겼으며,
황금상자는 권령을 상징하는 토템과 금 숭배사상을 짐작케 한다.
계림안에 있는 고분은 신라 17대 내물왕(356~402)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번째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로 김씨에 의해 세습이 유지되었으며,
왕의 칭호로 마립간을 썼다.
< 이상 계림관련 자료,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
△ 대충, 이곳이 계림이구나 하고 지나친다.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 교동마을을 둘러봄직도 해 보인다.
△ 반월성으로 향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계림을 따라, 또는 성으로 교동마을과 최부자네 댁을 둘러보고
반월성으로 되돌아 오는 것도 좋을것 같은데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여 대충 둘러본다.
△ 반월성은 주변보다 약간 높은 지대로,
성 주변의 소나무가 인상적입니다.
△ 반월성 북쪽 변두리에 석빙고가 있다.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에 만든 얼음 창고이다.
길이19m,너비 6m,높이 5.45m의 석실은 직사각형으로, 약1000여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으로 북쪽 성루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 석빙고 내부 모습이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 석빙고를 둘러보고,
동쪽, 안압지 방향으로 좀더 진행하니 반월성 표지석이 있다.
△ 반월성내.
성 주변을 따라 산책을 겸해 박물관, 교동마을로 걷고 싶은 조용한 길이다.
△ 반월성과 안압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있다.
△ 주변 구경을 할 겸, 야트막한 성위로 올라본다.
△ 경주 박물관쪽 방향으로,
토성의 성곽인 셈이다.
△ 성곽에서 건너다 본 동북쪽의 안압지 주차장.
△ 위 주차장 뒷쪽으로 안압지가 자리하고 있다.
반월성 또는 월성지구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셈이다.
△ 안압지 쪽 도로변으로 내려서 첨성대로 향한다.
소형승용차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도로건너편 안압지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만.
야경이 멋있는 안압지는 시간이 부족하여 관람은 생략한다.
△ 첨성대 쪽으로 되돌아 간다.
△ 중간,
작은 연꽃단지도 보인다.
△ 첨성대를 거쳐 대릉원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 대릉원 주차장의 표지석.
△ 주차장 뒷편에 대릉원 입구가 있다.
대릉원 입장료는 2,000원/ 어른1인이다.
대릉원 일원은 대릉원과 4군데의 일원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곳 대릉원의 대표적인 고분은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이 있으며
인근 후문 건너편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누어 노동동 고분군과 노서동 고분군으로 나눌수 있다
노동동의 대표적 고분은 금방울이 출토된 금령총, 금동제 신발이 출토된 식리총, 경주 고분중 가장 규모가 큰
봉황대가 있으며, 노서리에는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쌍상총, 은령총, 천마총(?) 등 14기 고분이 있다.
구 황남리 고분군은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구 황남동 고분군은 황남동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으로 대릉원 옆, 황남초등학교 앞에
위치해 있다. 다섯 그루의 메타세쿼이아가 사철 멋진 자태를 보여 주는 곳으로 사진 애호가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숨은 명소이다.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참조>
△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소나무 숲이 반겨준다.
신라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의 너른 땅 위에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30기의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 무덤들 속에는 무덤 주인과 함께 수많은 껴묻거리(부장품)가 같이 묻혀 있고 때로는 무덤 주인의 시종이나
노비들이 함께 묻히는 순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릉원은 신라의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인 4세기에서 6세기 초까지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천마도의 '천마총'과 대릉원이라 이름 붙이게 된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면서 금관이 발굴된 '황남대총' 등이 모여 있다.
경주의 신라무덤들을 능, 총, 묘로 구분하는데,
‘미추왕릉’처럼 어느 왕의 무덤 인지 확실 할 때는 왕의 이름을 붙여 '능'이라 하고
'총'은 천마총과 같이 발굴 후, 출토된 유물의 보존 가치가 높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때,
'묘'는 '김유신묘'처럼 귀족이하 일반인들의 무덤에 붙여진 이름이다.
<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
△ 이내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미추왕릉과 천마총을 알린다.
좌측 길을 따라 진행하여 나중에 우측 길로 나오기로 한다.
물론 반대쪽으로 돌아도 된다.
△ 거대한 노거수 옆을 지나,
△ 미추왕릉에 도착한다.
△ 신라 13대 미추왕릉은 대나무가 군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려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왕이며,
여러차려 백제의 공격을 물리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한다.
△ 천마총 가는 길에 대나무 숲옆을 지난다.
△ 천마총으로 이동하였다.
천마총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돌무지 넛덜무덤(적석 목관분)이다.
1970년대 정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하여 교육 및 연구 자료로
삼고자 했으나 그와 같은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없는 터라, 그보다 작고 가까이에 있는 155호분을 발굴
하여 경험을 쌓으려 했던 것이 지금의 천마총이 되었고 이때 모두 1만5천 점의 유물이 발굴 되었다.
△ 밑둘레 157m, 높이 12.7m 되는 비교적 큰 무덤으로 5-6세기경 축조된 어느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한다.
구조는 평지위에 나무 널(목관)과 껴묻거리(부장품) 상자를 놓고, 그 바깥에 나무로 짠 덧 널(목곽)을 설치하여
돌덩이를 넣고 흙을 쌓았다.
△ 발굴때 11,5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그중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가 나왔으므로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다.
△ 출토한 주요 유물은 복제품을 만들어 이곳에 전시하고,
무덤 내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 천마총을 둘러보고 산책로를 따른다.
△ 이것은 쌍분인가?
△ 후문앞을 지난다.
△ 법장사?
후문의 도로 건너편으로도 왕릉이 있다.
△ 대왕릉을 한바퀴 둘러보는데 약 40분정도 소요되었다.
△ 분황사로 이동하였다.
주차료는 없으며, 입장료는 1,300원 / 어른1인 이다.
△ 분황사 경내의 규모는 작은 편이다.
신라 석탑중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 모전석탑은 국보 제 30호로 지정되어 있다.
△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을 지켜온 유서깊은 시찰이다.
고려시대 몽고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차려로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광해군 원년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이 사역을 지키고 있다.
△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이다.
△ 한켠에 종각도 보인다.
△ 분황사 앞쪽에 넓은 평지가 있다.
△ 분황사 앞쪽 가까이,
들판에 당간지주가 있다.
옛날 절에서 당이란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 것으로 추정되며,
두 동기둥 사이에 동쪽으로 향하는 돌거북이 있어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 황룡사지로 이동한다.
분황사와 접하고 있어 쉬엄 쉬엄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 황룡사 목탑지이다.
뒤쪽으로, 분황사가 숲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목탑은 자장의 건의로
백제 거장 아비지와 신라장인들이 국태민안의 염원을 담아
선덕여왕 12년부터 3년간의 조성 기간을 거쳐 높이 약 80m의 구층탑을 완성하였다.
△ 고려 고종 25년 몽고의 침입으로 가람전체가 불타면서 목조탑도 소실되었다 한다.
△ 금당지이다.
사찰의 중심건물이며 본존불의 모시는 건물이 금당이다.
황룡사지를 둘러보고,
경주 맛집을 검색하니 대릉원 인근의 첨성대 쌈밤집이 마음에 든다,
이곳에서 쌈밥맛을 본다.
우거지와 한우불고기 쌈밥이다.
△ 중식후 남산지구의 포석정으로 이동하였다.
입장료 1,000원 / 어른 1인, 주차료 2,000원/승용차 이다.
△ 입구에 들어서면 소나무숲이 반긴다.
△ 이내 자그만 규모의 포석정이 있다.
△ 이곳 포석정은 궁궐의 이궁지로 왕의 별장과 같은 곳으로,
신라의 멸망이 서린 비극의 장소로도 알려지고 있다.
△ 신라 말 경애왕이 이곳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왔고,
경애왕은 견훤의 강압에 못 이겨 자살을 하고,
천년 신라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견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음력 11월의 추운 겨울에
과연 그렇게 질펀하게 놀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포석정이 단순히 유희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순국한 사람을 기리던 곳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야트막한 산으로 에워싸여 경관이 수려한 포석정엔 지금은 건물은 없고,
물길을 따라 술잔이 흘러갔다는 구불구불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원래 물을 붓는 자리에 거북이처럼 생긴 돌이 있었지만 19세기 말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추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포석’이라는 명문이 새긴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여기에 있던 정자를 포석정이라 하였다.
< 이상 포석정 관련 자료는 경주시청 문화관광과에서 발췌하였음 >
천천히 20분여,포석정과 주변 산책로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나오면,
입구쪽에서 남쪽으로 지마왕릉가는 길이 있다.
산책삼아 다녀옴직도 하다.
△ 포석정에서 시내쪽으로 멀지않은 곳에 나정이 있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 우물터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기원전 69년 어느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 말은 간곳이 없고 그자리에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 났는데 13세 되는해 (기원전 57년)에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았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이곳에 지금도 우룰이 남아 있으며.........
△ 조선 순조 2년(1802)에 세운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 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잘 남아 있다.
특히 팔각 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곳 나정에 박혁거세를 제사지내는 신전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 이상 나정관련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
실제로 가보면 우물터나 신궁터 등 별로 볼 게 없다.
둘러보는데 5분여,
주차시설은 없고 입장료를 받을만한 곳은 아니다.
△ 경주 나정 (사적 제 245호)
이곳은 경주시에서 추진한 나정 정비사업 일환으로 인하여 중앙문화제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후, 지도의원 회의결과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유물을 제외한 기타 유물을 매몰한 곳이다.
△ 무열왕릉으로 이동하였다.
주차비는 없으며, 입장료 1,000원/어른1인 이다.
△ 건무문을 들어서면
△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신라 29대왕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 무열왕릉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는
현재 비몸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아 있다.
△ 김춘추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29대 태종무열왕,
삼국을 통일한 왕은 문무왕이지만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쌓은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죽은 후에 태종이란 묘호를 붙였다.
신라에서 시호인 무열과 묘호인 태종을 함께 사용하는 유일한 왕으로 신라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 김유신의 적극적인 지지로,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김춘추.
특히 외교에 능숙하여 당나라와의 연합을 성사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였다.
△ 경주에는 많은 고분이 있지만, 주인이 밝혀진 것은 드물다 한다.
무열왕릉에 들어서며 고분의 주인을 밝히는 태종무열왕릉비, 지금은 몸돌인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이수에는 여섯 마리 용의 조각되어 있고,‘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당대 명필이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아버지를 위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상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 무열왕릉 바로 뒤편, 경사진 구릉 위에 산 같은 고분 네 기가 솟아 있다.
경주 시내의 여느 고분군들과는 달리 장중한 위용이 느껴질 만큼 큰 고분들이다.
차례대로 능선이 겹쳐지면서 아스라한 풍광을 자아내는 고분들의 늘어선 모양새가 퍽 운치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으니 맨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1호, 2호, 3호, 4호분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웃해 있는 왕릉인데, 추사 의견을 따르면 시대 차가 너무 크다거나 무열왕릉의 후손인데
무열왕릉보다 더 위쪽에 있는 점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23대 법흥왕,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무열왕의 아버지 용춘(문흥대왕)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발굴 조사를 하지 않아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왕릉 가운데서도 큰 편에 속하는 점으로 미루어 왕의 무덤이라는 추정에는 아무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들 서악동 고분군의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허리에도 또 한무리의 고분들이 있는데,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이라 전하고 있다.
<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 서악동 고분군을 앞쪽에서 본 모습이다.
무열왕릉과 서악동 고분군을 둘러보는데 약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 신라 오릉으로 이동하였다.
입장료 1,000원/ 어른 1인, 주차료 1,000원 / 승용차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 알영부인, 그리고 3명의 박씨 왕인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까지 다섯 명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사적 127호 이다.
한편,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후 그의 유체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다.
시신을 수습해 한곳에 묻으려 하자 갑자기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는 바람에, 다섯 군데로 나눠 묻었다 하여
'오릉'이라 부르기도 하고, 뱀이 나타났다고 해서 '사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 보이는 곳에서 좌측 뒷편으로 왕릉이 보이고,
우측으론 사당이 있다.
△ 옆으로 돌아가면 5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 뒷쪽으로 돌아,
△ 숭의전 사당을 둘러보고,
△ 쉬엄 쉬엄 30분여
오릉을 둘러보고 입구로 돌아나와 오늘 일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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