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순 능주기행
조선일보에서 "신비를 품은 땅, 화순"을 소개하고 있다.
화순 춘양면 예성산을 산행 후, 조선일보에서 소개된 화순 능주 주변 유적지 몇 군데를 둘러본다.
산행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능주 주변은 대충 대충이 되었다.
이곳 유적에 대한 사족은 녹색으로 표시된 조선일보 기사 내용과 화순군청 문화관광과 자료를 참고 하였으며,
실제 다닌 순서와 달리 춘양면 예성산 산행후 가까운 거리순으로 재 편성하였다.
▷ 가는 길
진주 - 순천.영암고속도로 보성 IC - (예성산 산행) - 화순 능주면
▷ 탐방코스 ( 2014. 11. 29 )
송석정 - 죽서서원 - 영벽정 - 조광조 유배지 - 주자묘 - 화순 고인돌 유적 - 빛고을 회관
▷ 탐방안내도
▷ 탐방후에
▣ 운주사
화순 운주사는 몇년전 두번 다녀온 적이 있다. 오늘 운주사를 탐방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일보에서 화순과
관련, 신비롭고 새로운 시각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어 올려본다.
[아래 녹색 글씨는 조선일보에서 "신비의 땅 화순"이란 제목의 기사임을 밝혀 둡니다 ]
# 미스터리 1. 운주사
천불천탑을 하룻밤 만에 쌓은 절이라는 전설이 있다. 창건부터 폐사까지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는 운주사
이야기다. 서산(西山) 언덕에 있는 와불(臥佛) 한 쌍은 그 전설에 신비감을 더한다. 그 어느 고고학자도 근원
을 명쾌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 운주사가 불교 유적이 아니라 도교 유적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화순군과 함께 화순 일대 역
사 유적을 연구하는 한국레저경영 연구소 최석호 박사는 "운주사는 불교 사찰이 아니라 도교 사원이었다"고
주장한다. 주된 내용은 이렇다.
"불상·보살상은 지위와 진리를 상징하는 손가락 동작(수인·手印)이 있다. 경전을 모르는 중생들이 깨달음을
직접 익힐수 있도록 하는 표현이다. 운주사에 있는 석상들은 하나같이 손을 소매 속으로 감추고 있다. 수인
은 감춰지면 무의미하다. 운주사 석상들은 불상이 아니라 사원의 무인상이다." 실제로 보면 운주사 석상들은
옛 무덤 앞 문·무신상처럼 길게 늘어뜨린 소매 속으로 손을 감추고 있다.
석탑들도 전통 양식과 다르다. 서산 초입에 있는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정설이다. 탑들
의 배치 또한 북두칠성 일곱 별과 유사하다. 그꼭대기에 와불이 있다. 최석호 박사는 "탑들에 새겨진 기하학
문양 또한 천문학적인 상징이고 와불 또한 불상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도교무사상" 이라며 "여러 증거
를 보면 운주사는 13세기 도교 사원을 건설 중이던 이 지방 호족들을 경계해 무신 정권이 공사를 중단시킨
미완의 사원"이라고 했다. 물론 주류 사학계와 불교계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최 박사는 "그렇다면 미스터리
라고 놔두지 말고 불교 사원임을 입증해달라"고 했다.
초저녁 운주사에 가본다. 불상이 되었든 무사상이 되었든 개의치 않는다. 누워 있는 석상 위로 별이 흐르고,
겨울 하늘은 짙푸르다.
▣ 송석정
화순군 이양면 강성리 75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송석정을 둘러본다.
학포 양팽손의 증손인 양인용은 이조 선조, 광해군때 사람으로 선조때 과거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으로 재직하게
된다.
광해군 등극 후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을 서궁으로 폐출시키자 이의 부당함을 충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613년에 건립한 정자라 한다.
앞쪽,
농로변에서 본 송석정이다
지석강변, 소나무와 바위가 어울려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약간 각도를 달리하여,
앞엔 작은 또하나의 강이 흐르고 있다.
좌측으로 우회하여 도로를 따라 송석정으로 오른다.
인접하여,
이 집엔 후손들이 사는 집인가?
앞뜰? 뒷뜰? 에는
늘씬한 두그루의 은행나무도 운치를 더하고 있다.
뜰엔 송석정기적비와,
인접하여 松石亭記를 기록한 비가 있다.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조그만 동산에 자리한 송석정이다. 앞뒤로 편액이 보인다, 추사 김정희 글씨라 한다.
사방으로 마루가 깔려있고,
가운데는 방으로 되어있다.
이양면쪽으로 넓은 들판이 보이고,
아름들이 노송과 어울린 정자는 그림같다.
서산에 해는 조용히 지고 있다.
▣ 죽수서원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3번지에 위치한다.
한천면이지만 능주면 소재지에서 강 건너로 다리를 사에에 두고있어 능주면과는 2k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현, 죽수서원으로 진입하는 도로 확포장 공사가 진행중이고,
들머리 하마비 옆에 약간의 주차 공간이 있다.
죽수서원은 이곳 홍살문에서 1-200m쯤 올라가야 한다.
오름길 좌측으로,
국사봉 등산로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죽수서원에서 국사봉까지 4.2km를 알리고 있다.
뒷편 연주봉을 지나 고만 고만한 봉우리를 여러개 넘아야 하지만 높지않은 산이라 산책하듯 종주할 수 있을것 같다.
하산은 주자묘를 거쳐 도로를 따라 이곳으로 되돌아 오면 되겠다.
죽수서원은 문정공 정암 조광조(l482~1519)와 학포 양팽손(l488 ~l545) 을 배향한 서원으로,
전남지방에서는 순천의 옥천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l570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라 한다.
서원 앞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다.
정암 조광조는 중종 l4년(l5l9)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능성현에 유배되었고,
이때 평소 정암선생을 흠모하고, 생원시와 현량과에 함께 등용되는 등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던 학포 양팽손(1488
~1545) 선생도 관직을 삭탈당하여 고향인 능성현 월곡리로 돌아와 학포당을 짓고 서화에 잠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여섯살로 조광조가 25세때 처음 만났으며, 사마시에 같은 해에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시에.
양팽손은 생원시에 장원급제를 했던 각별한 사이였다,
처음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했을 때 유생들이 촌뜨기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유독 조광조만은 이를 말리고 그의 학
식과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이에 자연히 조석으로 만날 수 있게 된 정암과 학포는 서로 강론하면서 의리를 교환 하였으며,
정암선생이 유배된지 1개월 정도에 사사를 당하자 학포는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서원터) 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후 선조1년 (1568)에 정암선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이 논의되었고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
그후 1613년 서원을 중수하였고 l630년 도내 유림들과 조정에서는 사계 김장생 등의 발의로 학포선생을 죽수서원에
배향하였다.
l868년 죽수서원 훼철령에 따라 위패는 매안하였고 단만을 마련하고 제향 하였고,
l97l년 능주의 유림과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그러다가 l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를 중심으로 한 정암선생 후손들에 의하여 원래의 위치이자
죽수서원 사액을 받은 모산리에 죽수서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건하고 신축하였다.
서원의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된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1989년 동재를 신축하고 1994년 외삼문 보수, 1997년 내삼문을 보수하였다.
< 이상 죽수서원 자료는 화순군청 문화관광과에서 가져왔다.>
▣ 영벽정
영벽정은 능주면 관영리 산1번지, 능주면 소재지 동북쪽 지석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계절에 따라 변모되는 연주산의 경치를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있게 바라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능주팔경(영벽상천(映碧賞泉)중 하나이다.
2층의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을 하고있다.
앞 지석강변엔 노거수 왕버들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강물 또한 정지된 듯, 저수지 같은 느낌이 든다.
영벽정의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l488~l545)의 제영, 신증동국여지승람(148I~1531신증),
김종직 (1431~1492)의 시로 보아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변에 3개의 중수기념비가 나란히 있는 영벽정은,
인조 10년(l632)에 능주목사 정연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개수하였다고 전하며,
고종 9년(1872)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이듬해 고종 l0년(l873) 목사 한치조가 중건하였다 한다.
이후 보수를 거듭해 오다가 1982년, l983년에 각각 보수하였으며,
l988년에 해체 수리하였다 한다.
기단 위에 주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으로 누하주를 세웠는데 원래는 목조 기둥이었으나,
l988년 해체 복원시 영구성을 위해 석조로 대체하였으며,
이 기둥위에 마루를 깔아 중층 누각형 정자를 만들었다.
정내에는 9개의 시문이 있고,
마루의 사방에는 계자 난간을 돌려 장식하였고 처마밑에는 활주를 세웠다.
누상주의 기둥머리는 익공형식의 공포를 하었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나 중앙부는 우물천정을 설치하였다.
지붕을 3겹으로 한 것은 아주 보기드문 일로 주목된다.
(이상 화순군청 문화관광과 자료입니다.)
주변, 철교가 운치있게 다가와 있다.
지석강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자리하고 있어,
여러 사람들이 찾는 휴식처가 되는 곳이다.
▣ 조광조 유배지
#미스터리 3. 서인(西人)의 순례지 화순 / 조선일보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이 된 중종은 젊은 학자 정암 조광조를 중용했다.
조광조의 혁신 정치에 반발한 보수파는 조광조에게 반역죄를 씌워 유배시켰다. 기묘사화다.
유배 한 달 닷새 만에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서른여덟살이었다.
조광조는 "관은 얇게 만들어 운구하기 쉽게 하라"고 했다. 그곳이 화순이다.
그가 유배당했던 곳에는 비석과 사당이 서 있다.
이후 그의 도학 정치를 이상시한 사림 학자들이 화순을 수시로 찾았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 시신을 수습해 가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 화순으로 낙향해 서재를 짓고 제자를 길렀다. 그 서재가 학포당이다.
훗날 조광조 가묘가 있던 자리에 두 사람을 기리는 죽수서원이 건립됐다.
신재 최산두도 기묘사화로 화순으로 유배된 사람이다.
조광조보다 성균관 2년 선배인 최산두는 유배 생활 중 동복호에서 아름다운 절벽을 보고 적벽이라 이름
붙였다. 그게 지금 화순 이서적벽이다.
적벽을 마주 보는 망미정(望美亭), 이양면에 있는 송석정(松石亭)에서도 도학을 따르는 사림의 전통을
읽을 수 있다.
망미정은 병자호란 의병장 정지준이 지었다. 현판은 김대중 전 대통령 글씨인데 도난당했다.
송석정은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한 양인용의 정자다.
물염정(勿染亭) 또한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한 송정순이 세운 정자다.
이곳 또한 훗날 서인 학자들이 즐겨 찾았다.
실학자 홍대용은 물염정에서 실학자 나경적과 토론 끝에 혼천의를 만들었다.
풍광도 수려하거니와 이곳 정자에 남아 있는 시액(詩額·시를 새긴 액자)들은 세월을 초월한 사림 학자들의
작품이 많다.
왜 반역자들을 멀고먼 남도 화순 땅으로 집합시켰는지는 알지 못한다.
왜 운주사 석상은 아직 일어서지 못했는지 수수께끼다.
왜 주자의 증손이 바다를 건너 동천(東遷)했는지 연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이곳, 남도 평화로운 땅 화순에서 벌어진 사실은 틀림없다.
겨울로 가는 길목, 우리가 화순에 가야 하는 이유다.
능주면 남정리 173-3에 위치한 조광조 유배지이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성리학자(1482~1519)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이다.
어천찰방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4)로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수학하였고, 1510년
(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 1518년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훈구파 중에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예조판서 남곤과 도총관 심정, 홍경주등의 일명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에 휘말려 의심을 받고, 붕당을 짓고, 사리(私利)를 취하며,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이 든 사람을 능멸, 국세를 기울게 하고, 조정을 날로 그르친다는 탄핵을 받게된다.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
여 1519년 조광조, 김식, 김구, 김정 등을 투옥하고 이어 사사(賜死)의 명을 내린다. (기묘사화)
영의정 정광필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어 능주에 유배되었으나, 훈구파 김전, 남곤, 이유청이 3정승에
임명되고, 조광조는 그해 12월에 사사된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조광조 유배지에는 정암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와 영정각, 3칸 초가, 애우당이 있고, 애우당 천장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붙어있다.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절명시(絶命詩), 애우당기(愛憂堂記),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 등, 그 중 역모
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이라고 써진 현판은 조광조 최후의 진술이 적혀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애우당이 있다.
애우당(愛憂堂)은 그가 사약을 앞에 두고,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愛君如愛父 )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憂國如憂家)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白日臨下土)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昭昭照丹衷 / 비출소 또는 비출조, 비칠조, 속마음 충,)의 첫 글자인
애(愛)와 우(憂)에서 취했다한다.
애우당 앞쪽에 유허비각과 영정각이 각각 담으로 둘러져 있다.
유허(遺墟)란 유지(遺址) 유적, 남긴터(자취), 옛터의 뜻으로 여기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하거나 귀향살이 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유허비는 선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비를
말한다.
적려유허란 (적려, 謫廬 / 귀양갈 적, 오두막집 허) 유배지의 유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적려유적은 유배자가 떠나면 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리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었다 한다.
왜냐면 귀양살이 하러 온 사람은 국가의 대역죄인 이었고, 귀양살이 온 고을 입장에서도 영예로운 일은 아니었
기 때문이다.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는 조광조가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지 150여 년 후인 현종8년(1667)에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선조31년, 1598 ~ 현종12년,1671)가 그이 나이 70세때 세운 것이라 한다.
뒷면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동춘당 송준길(뛰어난 성리학자, 이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명필)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최고의 문신이자 학자로 흔히 노론의 영수로 알려져 있는 대 유학자이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어왔다, 정계에서 은퇴후 화양동에 은거하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후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이어
국문을 받기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송시열의 비문을 가다듬어 전서(槇書, 나무끝 전)한 사람은 민유중 (숙종의 비였던
인현왕후의 아버지)으로 그 역시 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의 중신으로 경서에 밝았다한다,
비석 아래의 거북이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는데 보수하면서 파 올렸고, 강당 쪽에 있는 문은 원래 비각
정면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애우당 앞쪽의 또다른 작은 문을 들어서면 영정각과 초가가 있다.
영정각이다.
이 초가와 영정각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 주자묘(朱子廟)
#미스터리 2. 주자묘(朱子廟) / 조선일보 신비의 땅 화순편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 고려로 망명한 주자의 증손자 주잠의 무덤.
주잠(朱潛·1194~1260)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증손자다.
남송이 원나라에 항복하매, 1212년 주잠은 한림원 학자 일곱 명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나주 땅에 망명했다.
원이 송나라 학자들을 찾아 고려 땅을 이 잡듯 뒤지자 주잠은 이름을 바꾸고 화순으로 은둔해 그곳에서 죽었다.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다.
주잠은 이웃 마을 구씨 가문과 통혼을 하니, '주야장천'의 잘못이라는 '주구장창'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 주잠의 무덤이 화순에 있다.
최근 주자를 모신 주자묘(朱子廟)가 무덤 옆에 세워졌다.
공식 사서는 1290년 고려 학자 안향이 이 땅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하지만 주씨 가문은 이에 앞서 주잠과 그 제자
들이 성리학을 가져와 전파했다고 믿는다.
한적한 시골길을 들어가면 산자락에 큰 한옥이 보인다. 주자묘다.
주자 동상을 지나 왼편 언덕에는 주잠의 무덤이 있다. 무덤 오른편에는 사적비가 있다.
사적지는 전 국무총리 이홍구가 썼다. 이홍구는 주씨 가문 외손이다. 33세손 주호영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다.
△ 해가 넘어간 주자묘에 어스름이 든다.
화순 능주면 천덕리 337번지에 위치한 주자묘(朱子廟)는 조선 성리학의 근간이 되는 주자학의 시조 주희(朱熹)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 묘(廟)는 (주자廟의 廟자는 묘지墓자가 아니라 사당廟를 씀, 영어로는 Shrine)는 1978년 10월에 준공되었으며,
매년 5월 5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 주자(1130-1200)의 이름은 희, 호는 회암, 자양등으로 불리우며,
송학(宋學)을 집대성하고 성리학의 체계를 이룩하여 주자학의 시조가 된다.
△ 주자학은 1224년 고려로 망명한 그의 증손 주잠에 의하여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이어 안향, 정몽주, 이색, 길재 등 고려조의 학자가 이를 계승하였고,
△ 조선조에 와서는 국학이 되어 김종직, 조광조, 서경덕, 이항, 이이, 송시열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 동원사란 현판을 달고 있다.
▣ 화순 고인돌 유적지
도곡면 효산리 64번지에 위치한 고인돌 유적지를 둘러본다.
능주면 소제지에서 6km전후쯤 거리에 있으며, 어둠이 내린뒤라 차안에서 위치만 확인하고 되돌아 간다.
주변 도로는 공사중인지, 현 비포장 상태로 있으며, 도로를 따라 쭉∼ 둘러 보아야 한다.
▣ 여행후에
[역시 조선일보 화순관련 기사 내용이다]
1.미스터리 여행 추천 코스(모두 내비게이션 키워드)
운주사→조광조 유배지→송석정→죽수서원→주자묘→임대정→만연산 드라이브
2.임대정 고종 때 병조 참판을 지낸 민주현이 지은 정자와 정원. 낙엽 가득한 연못 (한천면 사평에 위치함)
3.만연산 드라이브 화순읍내 신기교차로에서 수만리 방향. 스위스 알프스를 연상시키는 드라이브
4.별미
① 빛고을회관: 6500원짜리 청국장백반 강력 추천. (061)372-1173 능주면 석고리 314
② 금막동갈비: 돼지생갈비 1인분 1만2000원, 돌판비빔밥 6500원. 374-8892 화순읍 만연로 66-8
③ 사평다슬기수제비: 다슬기 수제비 8000원, 닭백숙(두 시간 전 예약요) 5만원. 372-6004 화순읍 삼천리 815-2
5.숙박 인터넷에서 '도곡온천타운' 검색
6.화순군청 www.hwasun.go.kr, 문화관광과 (061)379-3178
화순 고인돌 유적지를 둘러보고 능주면으로 되돌아 오니 오후 6시경이다.
조선일보 추천 빛고을회관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회관 앞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어 주차하기 좋고, 청국장과 제주뭐라는 삼겹살이 주 메뉴이다.
청국장 보다는 삼겹살이 더 맛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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