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
낙동강 남지개비리길은 남지읍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에 이르는 낙동강가를 따라 난 길이다.
강 주변에 위치한 마분산으로 거치는 길과 낙동강변 길을 연계하여 산과 강을 동시에 즐길수 있다.
또한 주변에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 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여 역사적 의미도 되새길수 있다.
▷ 가는 길
산청 - 의령 - 창녕 남지 수변공원.
▷ 탐방코스
능가사, 남지철교 - 남지 수변공원 - 남지 개비리길.
(수변공원 왕복 1시간, 개비리길 왕복 약 2시간 / 2015. 11. 22 )
▷ 탐방안내도
△ 우측 남지농공단지로 표시된 곳은 현 수변공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 탐방후에
▣ 능가사
△ 능가사
함안군 칠서읍 계내리,
남지읍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남지교 건너편에 보이는 절이다.
바로 앞에 근대문화 유산 등록 145호로 지정된 남지철교가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 경내를 둘러본다.
절의 규모는 작아 대충 둘러본다면 5분도 안걸릴 곳이다.
들머리 약사여래대불.
△ 가운데 대웅전,
좌측으로 종각 우측 관음전 ...............
△ 능가사 칠성탱 (문화재자료 396호)
칠성의 주불인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한 칠여래와 주존의 좌우 협시보살로,
아랫쪽에 일광.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칠원성군을 배열하였다.
△ 절의 규묘가 아담하며 낙동강변 절벽위의 절묘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간혹 남지를 지나면서 한번쯤 들러보고자 한 곳이다.
하지만 주변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뭔가 엉성한 느낌을 지울수 없다.
△ 강변쪽,
부도탑인가 ?
△ 능가사에서 본 남지철교,
△ 주변의 풍경과 멋지게 어우러진다.
▣ 남지철교
△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5호, 1931년 건립.
이 시설물은 창녕과 남지사이 낙동강을 가로질러 설치한 근대식 트러스 구조의 철교이다.
철근콘크리트 T형 다리로 상부 철골 트러스교의 트러스는 교각부분을 더 높게 설치하여
마치 물결이 치는듯한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이 시기에 제작한 철교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우수한 다리로 평가받고 있다.
△ 능가사 앞쪽에 남지철교가 있다.
△ 현재는 보행자와 자전거 통행로로 이용된다.
△ 남지철교에서 바라본 능가사.
△ 능가사와 더불어 낙동강과의 조화가 더 좋다.
▣ 남지 수변공원
△ 남지수변공원은 남지교 전후(위,아래) 전후에 조성된 수변공원이다.
대체로 가운데 남지교를 기준으로 사진상 좌측 하류쪽은 운동시설,
우측 상류쪽으로 넓은 유채밭과 자전거길,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남지 개비리길 시작은 맨 우측 용산리에서 시작한다.
△ 남지 수변공원 중간쯤에서 탐방을 시작한다.
현재 이곳의 위치는 남지교와 남지개비리길 용산 창나루 주차장 사이의 중간쯤 될거다,
시간적 여유가 있고 걸음을 많이 걷고 싶다면 능가사에서 출발하여 남지철교와 수변공원을 거쳐,
아님 남지교 아래의 수변공원에서 시작하여 개비리길로 향해도 된다.
거리는 대충 3- 4km쯤, 소요시간은 40-50분 추정해 본다,
△ 낙동강 자전거길 안내도가 있다.
남지 개비리길 구간은 마분산 주변을 넘어가는 산길로 주로 황토색 시멘트 길이다.
△ 유채가 싱싱하다.
너무 웃자라 이 상태로 월동을 할수 있을까? 우려를 해 본다.
△ 갈대와 유채밭
강변을 따라 탐방로는 크게 2-3곳 있어 마음 내키는대로 걸으면 된다.
△ 교량도 있다.
△ 억새꽃
천년바위 / 金錫振
솜털구름 매끄러운 은빛 물결
낮게 내려앉고 속살의 속삭임에
눈부신 가을햇살이 짙어가는 가을향기
소슬바람에 흔들리면 고요한
바람꽃으로 피어나 사색의 심연에서
서걱거리는 솟구치는
감미로운 억새꽃 숨소리 가슴벅찬 감흥
만리를 간다. 가을을 수놓는다
아
가을이다.
△ 수변공원을 지나 억새전망대로 간다.
전망대 주변에 용산리 개비리길 들머리가 있다.
△ 억새전망대. 나룻배 데크를 줌으로 당겨본다,
△ 나룻배 데크.
△ 강의 숨결로 향하는 노슬길 (노을과 이슬의 길)
강은 생명이다,
꽃이 있고, 새가있고 나무가 있으며
마침내 사람마저 그곁에서 안식을 취한다,
인류 이래 강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했다.
인간의 고달픈 삶을 품고 보듬으며
그들을 먹여 살렸고,
때론 준엄한 꾸짖음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렇게 인류와 더불어 살아왔다.
△ 억새전망대.
수변공원 중간쯤에서 이곳까지 약 30분쯤 소요되었다,
남지교에서 시작하면 40-50분은 소요될것 같다.
▣ 남지개비리길
△ 억새전망대 옆 도로변,
창나루 주차장이다.
용산리 남지개비리길 시작 지점이다,
도로는 이곳까지 확포장 되어 있고, 도로변은 주차장이 된다.
물론 도로 아랫쪽 수변공원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 계단을 따라 산으로 오르는 길은 창나루 전망대, 마분산 정상 갈림길 방향이다.
마분산이면 산이지 정상 갈림길로 표시되어 있다, 이정표에 마분산 갈림길은 있어도 마분산 정상은 없다.
강변을 따라 영아지마을로 가는 길은 마분산 갈림길(하) 로 표시되어 있다.
중간에서 마분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 마분산으로 올라 영아지마을로 하산후 낙동강변을 따라 되돌아 와도 되고,
역으로 강변을 따라 영아지 마을로 이동후 마분봉을 거쳐 이곳으로 내려와도 된다.
강변으로 난 길을 먼저 걷기로 한다.
△ 수양벗나무,
옛 신작로 느낌이 든다,
△ 현 창날은 창나루 들머리 인근의 마을이다.
창날마을이 창진마을인지는 모르겠다. 안내표시판 주변에 다른 마을은 없다.
마분산(馬墳山)과 창나리 마을(倉津)
개비리길을 따라가면 용산리 첫 마을인 창나리가 나오는데 창(倉, 창고)이 있었던 나루라는 뜻이다,
또한 마을 뒷산을 창진산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때 곽재우 의병장의 죽은 말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하여
마분산으로 바뀌었다.
△ 곽재우 장군의 토성과 말무덤
임진왜란(1592년)때 의병장 곽재우 장군은 이곳 마분산에 토성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왜적을 맞아
신출귀몰하게 싸워 백전백승하였다.
이 토성은 작은 규모이나 정상에 공간을 두어 강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으며 산을 힘들게 올라온 적과의
육탄전에서 승리할수 있게 정상 안쪽에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430년의 풍상에 토성은 허물어져 겨우 흔적만
남겨두고 있다.
곽재우 장군은 왜장 하사바가 강변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열세인 의병이 전면 전투로는 승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말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여 벌떼의 공격을 받은 적군의 혼
란을 틈타 기습 공격으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적탄에 맞아 자신의 말이 사살되자 그 공을 높이는 뜻으로 토성안의 의병 무덤뒤에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하여 이산 이름이 창진산에서 말무덤산 (馬墳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 평탄한 길을 따라 강변을 걷는 느낌이 좋다.
무엇보다 시멘트 길이 아니어서 더 좋다.
△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이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3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2개월도
못되어 낙동강 북쪽이 모두 점령당하여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그리고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 국운이
백척간두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축하여 창녕과 남지지역 방어를 맡은 미제24사단은 낙동강
박진나루를 중심으로 적과 대치하였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부대인 제4사단은 8월 15일까지 부산점령이라는 시한부 임무수행 목표를 세우고 남지
박진, 영산,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최단거리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합천에 집결하였고, 8월 6일 야간
을 틈타 박진나루를 도강하여 은밀히 기습 침투함으로써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
였고, 8월 11일에는 영산면 까지 침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9월 15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다.
낙동강 남지전투로 9월 8일에는 남지철교 중앙부가 폭파되었으며 치열한 전투로 낙동강 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은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격전지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지 박진에는 박진전쟁기념관과 박진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 폭파철교사진
△ 걷기 좋은 길이다.
△ 모퉁이를 돌아,
△ 컨테이너 주택이 보인다.
△ 건너로 보이는 곳.
플라타너스, 정자, 용산 양수장...........
△ 남지 개비리길 유래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유래는 여러 이야기로 전해진다.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만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지방 사투리)였다.
힘이 약했던 조리쟁이는 어미젖이 10개 밖에 되지 않아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씨 할아버지는 그런
조리쟁이를 가엾게 여겼었고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山) 너머 시집간 황씨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집인
알개실(용산리)로 데려갔다. 며칠 후 황씨할아버지의 딸은 깜짝 놀랐다.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山)을 넘어 온 것이었다.
그런일이 있은후에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개실 마을에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
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면의 급경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
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 다녔던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라는 길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말로서 강가 절벽 위에 난 길의
뜻으로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
△ 용산 양수장.
△ 세가닥 길이 보인다.
맨 아랫쪽 길은 지나온 길의 이음이지만 개인소유 농지로 이어진다.
물론 계속 따르며 끝에서 가운데 길과 만나게 되나 길의 상태가 질퍽해 보인다.
가운데 길은 새로 생긴 탐방로이다. 이 길을 따름이 옳다,
우측길은 산쪽으로 나 있다.
△ 가운데 길을 따라 간다.
아랫쪽 길은 좌측으로 보이는 농지로 이어진다.
△ 옹달샘 쉼터.
조그만 꽃밭이 조성되어 있다.
△ 이곳이 옹달샘이가 보다.
△ 뒤돌아 본다,
감나무가 운치있다.
△ 옹달샘 쉼터를 지나면 마분산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있다.
창나루 주차장 2.21km
영아지 주차장 1.53km
마분산 갈림길(상) 0.53km
△ 추락위험 표지판이 보인다.
벼랑길이 시작된다.
△ 한사람 겨우 지나갈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둘이 나란히 걷기는 어렵지만 폭은 제법 넓고,
아래로 공포을 느끼기 보다는 안정된 느낌이다.
△ 벼랑길을 지나,
주변 마삭줄이 많이 보인다.
△ 대나무숲이다.
△ 숲이 정갈하다.
△ 죽림쉼터.
창나루 주차장에서 약 35분쯤 소요되었다.
이곳에서 35분여 중식과 휴식시간을 갖는다.
△ 두군데,
4개의 평상이 있다.
△ 대나무숲을 지나면 가을의 잔재를 느낄수 있는 숲길이 계속된다,
△ 마삭줄, 낙엽, 숲............
△ 야생화 쉼터로 표시되어 있다.
△ 규묘는 작다.
△ 낙동강을 조망할수 있는 데크가 마련되어 있고,
△ 잠시 쉬어가기 좋다.
△ 전망데크에서 상류쪽 조망이다,
△ 강변길은 오르내림이 없는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 두번째 위험 표지판이 있다.
△ 두번째의 벼랑길인 셈이다.
△ 되돌아 본 벼랑길.
△ 낙엽 무성한 길을 걷는다.
△ 낙동강 상부,
오늘 탐방 구간중 가장 상부이다.
△ 영아지 주차장이 가까운것 같다.
우측 산기슭에 전망대로 가는 들머리가 보인다,
△ 낙동강,
△ 지나온 곳,
창나루 주차장에서 약 3.7km,
중간 35분여 중식시간을 포함하여 1시간 30분쯤 소요되었다,
△ 앞쪽,
도로는 이곳을 거쳐 영아지마을로 간다.
△ 영아지 마을쪽 제법 넓은 들판이 있다.
△ 주차장
넓은 면적은 아니다.
좌측 끝에 영아지전망대로 가는 또다른 들머리가 보인다.
△ 영아지 전망대 및 마분산 가는 길
가운데 화장실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오르는 길이 있으며 조금 윗쪽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 주차장에서 전망대 가는 길 들머리는 나무 계단으로 되어 있다.
△ 아래 화장실 양쪽에서 오르는 길은 이내 서로 만난다.
△ 정갈한 벤치 옆을 지나.
△ 영아지 전망대에 오른다.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안내표지판을 볼 수 있다.
△ 영아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상류.
△ 전망대에서 조그만 봉우리를 살짝 넘는 곳에 영아지 쉼터가 있다.
영아지 마을에서 오르는 임도이자 낙동강 자전거 길을 만나 이 길을 따르게 된다.
앞쪽 능선으로 몇몇 리본이 붙어있는 산길이 있으며 이 길을 따르면 얼마 후에 이 임도를 다시 만나게 된다.
△ 이곳 영아지 쉼터의 이정표이다.
영아지 주차장에서 약 4-500m쯤 거리에 있다.
△ 임도를 따라 오른다,
황토빛 시멘트 길로 자전거 길이다.
△ 이내 고개를 넘어간다.
영아지 쉼터에서 앞쪽 능선의 산길을 따르면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 길 양쪽으로 신경을 썼다.
높지않은 마분산 능선 주변을 따라 난 길이다.
△ 임도입구,
마분산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영아지 쉼터에서 0.77km
직진 임도에서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다.
마분산 갈림길. 마분산 정상 갈림길 등 초행일 경우 헷갈릴수 있는 이정표들이 있지만
감으로 알수있다.
△ 자전거길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접어들면 이내 마분산 갈림길(하)이 있다.
이곳에서 낙동강변으로 내려설수 있지만,
초행일 경우 이 길을 걸을 이유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없다.
마분산 정상 갈림길 방향으로 향한다.
△ 능선을 따른다.
특별한 운치는 없지만 소나무 숲길이다.
△ 능선상의 야트막한 봉우리를 살짝 넘어가면,
목동이 쓴 이름돌 두개가 있다.
△ 목동 ?
산세로 보아 목동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고
과거 소먹이로 왔거나 나무하러 와서 끄적거려 놓은 것 같은 생각을 해본다.
△ 글자는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 마분산 정상 직전에 마분산정상갈림길이 있다.
마분산 정상은 이곳 갈림길에서 몇십미터 거리에 있으며,
정상으로서 볼품이 없고 또한 묘지가 있어 정상을 오르지 않고 우회하는 길의 표시이다.
△ 마분산 정상이다.
△ 정상을 지나내려오면 이내 우회하는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다.
이곳 정상갈림길 두군데 다 정상방향으로의 이정표는 없다.
△ 삼형제 소나무로 이름붙어 있다.
△ 리기다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 창나루 전망대에 도착한다.
△ 창나루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되는 곳이기도 하다.
△ 마분산과 창나리 마을
△ 창나루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이곳 창나루 주차장에서 영아지 주차장까지 강변을 따라 가는데 중간 휴식시간 포함 약1시간 (55분),
영아지 주차장에서 마분산을 거쳐 이곳까지 돌아오는데 약 1시간,
합해서 쉬엄쉼엄 2시간쯤 소요 되었다.
수변공원을 따라 주차한곳 까지는 약 30분쯤 소요된다.
▣ 남지 수변공원
△ 억새전망대
맞은 편엔 남강이다.
수변공원을 따라 주차한 곳으로 간다.
△ 억새꽃
성기각(1960 - )
햇살 낭창낭창 흘러 낙동강 흘러
휘우뚱 감돌아 예까지 흘러
뒤늦게 는실난실 꽃을 피운다.
환하게 깔깔대던 봄날 다 보내고
이제사 흰 옷고름 풀고 있구나.
...................
봉두난발 흔들며 신명나게 살아볼까
해동갑 하여 내내 꽃멀미 하다가
풍진세상 한 세상 나풀나풀 살아볼까
뒤태 고운 억새바람
뽀얗게 젖은 속살 말리는 꽃
꽃잔치 만냔판이다 가을강 저녁놀
꼴깍,
또하루가 저문다.
△ 넓은 유채밭,
군데 군데 억새와 어울려 걷기좋다.
△ 남지 수변공원은 길다.
남지교에서 개비리길 입구인 창나루 주차장까지 약 4km 가까이 될것 같다.
넓은 면적에 유채꽃이 피면 장관을 이룰것 같다.
능가사, 남지철교, 수변공원, 개비리길을 연계해 적의 걷고,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도초산 쪽으로 이어가도
되겠다.
머지않은 곳에 박진전쟁기념관과 전적비가 있다.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