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창기행 / 고창읍성, 문수사.
단풍구경을 가기로 했는데 지리산 주변은 조금 이른것 같다.
고창 문수사 단풍이 유명하다는데 조금 북쪽이니까 단풍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로 고창으로 향한다.
덤으로 고창읍성도 둘러본다.
▷ 가는 길
고창읍성 (주차장 고창읍 읍내리 182-6) - 문수사 (고창읍 고수면 은사리 산 187)
▷ 탐방코스 및 안내도 (2016. 11. 3)
고창읍성 - 문수사
(위 다음지도를 확대하면 고창읍과 문수사간 거리가 머지않은 거리임을 알수 있다.)
▷ 탐방후에
▣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 (1453)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총화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로 만들어 졌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이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50,172평)로 동.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 하였다.
< 고창군청 문화관광과>
△ 고창읍성 주차장,
주차장이 넓찍하다.
한켠에 특산물 판매장이 있다.
이곳에 주차장에서 고창읍성은 입구는 고창읍성쪽을 바라보았을때 우측편(서남쪽)으로 있다.
△ 주차장 앞쪽에 도서관 건물 및 예술의 전당?이 있다.
△ 탐방안내소,
장구모양을 형상화했다.
읍성문 앞쪽으로,
신재효생가. 판소리 박물관, 군립미술관, 동리국악당 등등이 있다.
성을 한바퀴 돌아본후 이들 건물을 둘러볼 것이다.
△ 매표소,
모양새가 쬐끔 빈약하다.
고창읍성입장료 1,000원 / 어른1인.
인근의 판소리 박물관 800원 / 어른1인 이다.
△ 고창읍성,
여러해 전 이곳을 둘러본적이 있지만,
성벽으로 난 길과 소나무 숲외 크게 기억나는게 없다.
△ 답성놀이?
△ 뒤로 비석군도 보인다.
2열로 모두 18기의 비석이 배치되어 있다. 이 비석군은 원래 고창현(현 고창읍) 내에 산재하던 것들인데,
보존을 위해서 근래에 고창읍성으로 옮겨놓았다.
명문의 내용으로 볼 때 현감, 관찰사에 대한 영세불망비 4기, 현감과 관찰사에 대한 선정비 12기, 유애비
2기가 있으며, 건립연대는 대개 1639년에서 1881년 사이의 고창수령을 위한 것으로, 재직할 당시에 세운
것들이다.
△ 성안으로 들어간다.
△ 공북루,
△ 성 안쪽,
성곽을 한바퀴 걷고 성안을 둘러 볼려고 한다.
△ 시계방향으로 둘러보기로 한다.
답성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방향이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단다.
△ 성벽에 올라 주변을 본다.
△ 공북루,
△ 남쪽으로의 성벽이다.
△ 앞쪽.
동리국악당, 매표소, 신재효생가. 판소리박물관, 군립미술관 등등.............
△ 공북루 성루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 성곽 탐방에 나선다.
△ 3.1독립만세터,
1919년 3월 21일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고창청년회원, 고창고등학교 힉생 200명이
이곳 읍성 북치광장(北稚廣場)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 고창읍소재지중 동쪽편이다.
고창읍성에서는 동북쪽인 셈이다.
저쪽 어딘가에 석정온천. 석정CC가 있고 고개를 넘으면 백양사 IC가 있다.
△ 전원주택단지를 줌으로 당겨본다.
이국적인 느낌도 든다.
△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군 단위로는 최대의 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고창읍성 (모양성)과 선운사, 그리고 동리 신재효와
미당 서정주의 고장인 고창은 삼한시대인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열리기 시작,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래"고창현"으로 불렸다. 고창은 방장산을 긴 노령산맥을 등허리에
안고, 서해에 연해지면서 자리한 고을터이다. 특히 고창은 전북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 여맥이 이어져 일으켜 세
운 곳이다.
<고창군청 문화관광과 이하 같다.>
* 연혁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이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 축성 목적
산성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
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 때는 노령산맥인 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갈재는 험준하고 봉변을 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
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 산성이 담당했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에서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지역은 너무 멀어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창읍성은 이런
이유로 축성되었고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 부터 지켜왔다.
* 축성방식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여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 고창읍성의 특징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은 나즈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 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 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 축성년도
고창읍성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창읍성의 관아건물 보수시에 나타난 상량문과
각종 문헌 및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이 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
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동문옹성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 (癸酉所
築監董宋芝玟)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서 이를 해석해 보면,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 등양루.
성의 북쪽에 위치한 문이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 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
므로 성종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 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 (1484)이전의
계유년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으며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
장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 이후의 계유년이 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
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 등양루,
성곽을 도는 방법은 세군데이다.
성밖으로 난 길과 성벽길, 그리고 성벽 안쪽으로도 한바퀴 도는 길이 있다.
* 전래풍속
▶ 답성(성밟기)놀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병이 없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
엿새 날에 답성행렬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바퀴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바퀴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
퀴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성을 돌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번 돌아야 하고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아두도록 하였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도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밟아 굳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게 함으로서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다지게하는 의도에서 였을
것이다. 성밟기를 한 후 머리에 이고온 돌을 일정한지역에 쌓아놓게 한 것은 유사시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한 유비무환의 예지라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민속놀이를 통해 우리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을뿐만 아
니라 백성들의 동원을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참여시키는 독특한 우리문화의 양상을 엿볼 수가 있다.
▶ 수문장 재현
음력 9월 9일을 전후하여 4일간 '모양성제'가 열리며, 이때 조선시대 관군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된다. 고창 읍성의 성곽 주위에 수십개의 옛 진영 깃발을 꽂아 고을수령(현감)이 재임
하던 시절 관아의 위엄을 갖춰놓고 형형색색의 멋진 조선시대 관군복에 칼을 든 수문장과 흑백색의 순라복장
에 창을 든 포졸을 공북루에 배치했다. 특히, 스스로 관군이 되어보기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관군복을 비치해놓고 이를 빌려줌으로써 사진촬영을 통해 관군으로서의 체험도 직접할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마련해 놓고 있다.
▶ 척화비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 진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
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 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우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 관아건물
읍성 내에는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1976년부터 지금까지 동헌과 객사 등 12동의
관아건물을 복원완료하였고 나머지 10동도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
△ 옹성
△ 진서루
△ 성곽과 성내를 한바퀴 둘러보고 성을 나선다.
▣ 동리국악당
△ 고창읍성 바로 앞에 있다.
동리국악당 건물이 근사하다.
△ 내부 관람은 무료이나 크게 볼것은 없다.
△ 이곳에선 영화상영도 있다.
△ 앞 이정표,
▣ 신재효 생가
△ 신재효 생가
▣ 판소리 박물관
▣ 식당가
▣ 고창 군립 미술관
△ 고창읍성과 주변을 둘러보고 문수사로 향한다.
▣ 문수사
청량산 중턱에 있는 문수사는 백제 의자왕 4년(644)에 자장율사가
지은 사찰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나라의 청량산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자장율사는 꿈속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부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땅의 형세가 당나라의 청량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절을 짓고 문수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효종 4년(1653)과 영조 40년(1764)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은 고종 13년(1876)에 고창현감
김성로의 시주로 묵암대사가 다시 지었다고 한다.
지방유형문화재 제51호 문수사 대웅전, 제52호 문수사 문수전, 제154호 문수사 부도, 제207호 목조삼세불상,
제208호 문수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이 있으며 기타 명부전, 한산전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소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이 특이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단풍나무 수백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절경을 이룬다.
△ 문수사 주차장,
특히 단풍철, 알음알음 찾는이가 많아져 주차장이 생겼다.
△ 화장실과 용도가 분명치 않은 또하나의 건물이 있다.
△ 아래 주차장에서 일주문 까지는 몇백미터,
약간 오르막이긴 하지만 쉬엄쉬엄 걸으면 된다.
△ 일주문,
청량사문수사.
△ 신도가 아니라면 일반차량은 이곳까지 진입할수 있다.
약간의 주차공간이 있지만 아래 주차장에 주차후 걸어와도 좋다.
△ 이 숲을 보러 왔다.
△ 일주문에서 문수사까지는 0.7km,
짧은 거리이다.
△ 안내도상 문화재 관리소가 있는 곳이다.
화장실 외 관리소 건물은 없었는것 같다.
△ 화장실 외 문화재 관리소 건물은 없다.
현재로는 제법의 공터로, 번잡한 단풍철을 제외하면 이곳까지 일반 차량 진입도 가능하겠다.
△ 이곳에 임도가 있다.
문수사 를 둘러보고 내려와 조금 이 임도를 따라 보았으나,
문수산(청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보지 못했다.
△ 현위치 주변 단풍나무숲 안내도가 있다.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나 크게 기대하지는 마시라.
△ 문수사로 오른다.
△ 대웅전으로 바로 올라가,
물류운반차로쪽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된다. 그게 그거다.
△ 일주문으로 되돌아 왔다.
△ 일주문의 단풍나무,
△ 오늘이 11월 3일
금년 단풍은 2주일쯤 후, 11월 13일경쯤(일요일) 이 지나야 절정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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