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여행 / 공주 공산성, 송산리 고분, 공주박물관, 마곡사
초등학교 동창 32명이 모였다,
1박 2일을 공주, 부여 일원에서 보냈다,
공주, 부여는 과거 초등학교 주요 수학여행지이기도 한 곳이고, 지리적으로 서울과 부산의 중간쯤이어서
모임에 유리한 면도 있다.
생각외로 근년에 이곳을 찾은 친구들은 별로 없는것 같다,
▷ 탐방일정
1. 공주 공산성 - 송산리고분군 - 공주박물관 - 마곡사 - 숙박 ( 2017. 10. 6 )
2. 부여 궁남지 - 부소산성 - 중식 - 강경젓갈시장 - 해산 ( 2017. 10. 7 )
▷ 여행후기
▣ 공주역, 중식, 공산성
KTX공주역이다,
울산에서 3명을 태우고 아침6시에 출발한 버스는 7시 부산에서 13명, 창원에서 2명. 진주에서 3명.
산청에서 3명을 태우고 공주역에 도착하니 12시 50분경이다,
예상시간보다 50분 늦었다,
이곳 공주역에서 서울동창 9명과 합류한다,
일정을 고려하여 부여공산성 앞으로 왔다.
우렁된장찌개 정식,
1인분 11,000원, 아주라고 하기에는 그래도 맛이 정갈하다,
중식후 공산성을 둘러본다,
개인 1,200원, 단체일 경우 1인당 1,100원. 주차료는 없다,
아침부터 한 잔 해서인지, 아예 걷기가 싫어서인지 몇놈 빠졌다,
비석군을 지나,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 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지어졌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안내문에서>
공산성 성곽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아본다,
첫번째 제법의 언덕위에 오르면 저만큼 공산정이 보인다,
공산정,
방향을 달리하여,
배다리와 금강철교,
공주가 발전하면서 금강을 거는는 사람들과 물자가 크게 늘어나자 그동한 사용하던 나룻배로는 감당이 않되어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지만 이것마져도 홍수에 떠내려 간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배다리다,
나룻배 20.30척을 잇고 그위에 널빤지를 깔아 폭 3m, 길이 150 m로 배다리를 놓았다.하지만 배다리도 홍수와
오랜세월에 견디기 힘들었다, 마침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대가로 금강에 다리를 만
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금강철교이다, 금강철교는 그때분터 공주의 관문역할을 하였다,
공산정에서 제법의 급경사를 따라 저만큼 아래로 공북루가 보인다,
공북루,
성의 북쪽에 있는 공북루는 제법 웅장하고 물가에 임하여 경치가 좋다, 선조때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감사로 와서
이 누에 올랐다가 시 한수를 지었다.
소동파는 적벽강에 놀았으나 나는 지금 창벽에 놀고, (蘇仙籍壁今蒼壁 / 소선적벽금창벽)
유양은 남루에 올랐지만 나는 여기 북루에 올랐노라. (庾亮南樓是北樓 / 유양남루시북루)
창벽은 금강 상류에 있고 누의 이름이 공불루였기 때문에 이렇게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서응의 나쁜 시라하나 서경은 아름다운 글귀라 자찬하였다,
서경의 나쁜시 : 서응이 어떤 폭포를 구경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 가닥 물이 푸른 산빛을 갈라 놓았다."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시라고 칭찬하였으나 소동파는 "서응을 위해 이렇게 나쁜 시로 더럽혀진 폭포를 씻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에서>
다시 언덕 위로,
공산성의 얼음창고,
조선시대 공산성에는 석빙고가 있었다,
한겨울 맑은 금갈물이 얼음을 왕겨에 싸서 저장해 두었다가 더운 여름에 꺼내 썼다,
그후 일제강점기에 한때 한약재를 보관하거나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로 다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에의 알을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하던 잠종저온창고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잠종 저장고에서 살짝 급경사를 지나 내려가면
만하루와 연지가 있다.
이곳 연지는 장방형의 연못으로 금강변에 위치하여 물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고,
연못 가장지르는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담을 쌓았다,
이곳은 영은사,
임진왜란땐 승병합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영은사,
서문쪽에서 이곳으로 도로가 이어진다,
임류각쪽으로 오른다,
세번째 오르막인 셈이다,
서거정은 우리나라의 옛시와 뛰어난 글을 모아 엮은 <동문선>을 편찬한 인물이다,
그가 집현전 학사시절 공주로 여해와서 공주10경이란 시를 지었다,
금강의 봄놀이, 고마나루의 밝은 달 등을 주제로 공주의 빼어난 운치를 시로 표현했다고 소개한다,
또 인조때 공무목사 신유도 공산성의 공북루, 영은사, 고마나루, 봉황산 등의 아름다움을
'공주10경'이라는 시로 지어 남겼다,
사람과 시대는 바뀌었어도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공산성의 절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임류각
동성왕의 자랑이었던 임류각
옛날 백저의 왕이 살았던 공산성에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많았었다 한다. 그중 하나가 임류각이다,
삼국사기에는 "500년 (동성왕 22)에 연못을 파고 기이한 금수를 길러다"고 하고 '흐르는 금강물을 내려본다'
는 뜻으로 임류각이란 이름을 붙였다한다,
동성왕은 23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고, 기틀을 바로 잡는데 힘을 기울였고, 공산성을 고
치기도 했던 왕이다, 그런데 동성왕이 이곳에서 자주 연회를 열자 신하들은 왕이 정치를 잘못할까봐 걱정을
하기도 했단다,
지금은 복원된 건물이라 아쉽지만 백제의 임류각을 상상속으로 그려 볼까요?
< 안내문에서>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선조31년) 공주에 주둔하였던 명나라 3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비로, 임류각 옆에 있다.
광복루로 간다,
광복루를 지나,
저만큼 동문루로 내려간다,
동문루,
남문을 지난다,
저수지?
저만큼 쌍수정,
쌍수정은 1734년(영조10)에 관찰시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지아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이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루의
나무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었
던 나무에 통훈대부(정삼품의 작위)를 내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전 자리에 삼가정(三架 亭)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쌍수정 뒷편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아 들머리 금서루로 내려간다,
공산성을 한바퀴 둘러보는데 1시간 남짓 소요되었다,
▣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
몇년전에 비해 들머리에 많은 변화가 있는것 같다,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매표소겸 정문,
입장료 1,500원 (단체 1,400원). 이곳도 주차료는 없다.
참고로 반대편에 위치한 공주박물관의 입장료는 무료이며, 공주박물관을 둘러보고
도보로 약 15분정도 소요되어 이곳 고분군으로 오면 관람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겠다,
먼저 모형전시관을 둘러본다,
왕릉 내부
모형이다.
모형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뒷편으로 고분군이 있다.
이곳 고분군이 시작되는 곳에서 바로 정문쪽으로 나가는 길도 있다,
고분군을 좌측에 두고 뒷편으로 오른다,
무령왕릉,
무령왕릉
백제 제25대 우령왕(재위 501-523)과 왕비를 합장한 무덤이다.
1971년 5호분과 6호븐 베수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덤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으로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동감과 창문시설을 설치하였으며 남북길이
4.2m, 동서 너비 2.72m, 높이 2.93m이다
널길의 입구에서 출토된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연대를 말해주고 있다, 송산리고분군에 있는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관장식을 비롯하여 총 108종 4,6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다,
< 안내문에서>
고분 숫자는 많지 않다,
전망대를 지나.
고분군 뒷편 맨 상부이다,
이곳에서 고분군 입구로 내려가는 길과 국립공주박물관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이곳에서 공주박물관 까지 느릿느릿 15분쯤 소요된다,
공주박물관으로 간다,
공주 월송동 우물,
박물관 좌측 뒷편에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을 둘러보고 마곡사로 간다,
▣ 태화산 마곡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인만큼 주차시설도 넓찍하고,
음식점 등 상가도 제법 많다,
중간 일주문을 지난다,
마곡사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도보로 약 10분쯤 소요된다,
일주문을 지나면 이내 매표소가 있다,
입장료 3,000원 (단체 2,500원),
입구 주차장 주차료 없음,
매표소에서 마곡사로 가는 길은 두군데이다,
산길은 거리가 쬐끔 가까운 대신 야트막한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시간, 거리 별 차이없다고 보면 된다,
산책로로 간다,
두 길은 마곡사 앞에서 서로 만난다,
마곡사 주변엔 솔바람길이 조성되어있어 산책하기 좋다,
오늘은 마곡사만 둘러본다,
해탈문,
천왕문을 연이어 지나면,
대웅전으로 다리를 건너게 된다,
우측,
종각 건물이 특이하여 시선을 끈다,
탑과 뒤로 대광보전,
탑의 상부,
대광보전의 부처님? 앉은 방향이 남향으로 일반절에서 보기 힘든 구조이다,
마곡사 대웅전,
역시 대웅전이다,
이곳 대웅전 내부의 기둥이 싸리나무로 알려져 있지만 현 4개의 기둥 중 3개는 소나무이고 하나는 칡나무?라 한다,
한데 칡나무?
이건 또 무슨 나무인가?
시계방향?으로 3바퀴 돌면 소원성취 ?
마곡사 청기와를 본적이 있느냐?
염라대왕이 마곡사 청기와를 본적이 있느냐 묻는다,
있다면 극락으로. 없다면 지옥으로..........
근데 이곳 마곡사에서만 청기와를 볼 것이 아니라
우라니라 3곳의 사찰에서 청기와를 봐야 염랴대왕이 극락으로 보내준다 한다,
백범선생 삭발터를 둘러본다.
이곳은 백범 김구선생께서 승려가 되기위해 삭발한 곳이라 한다,
백범일지 기록에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삭발을 하는 마음으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삭발터,
지난날 비로인해 징금다리는 물속에 잠겼다,
명부전 앞이다,
이곳은 단풍으로 멋진 곳이다,
마곡사 영산전
영산전은 세조가 만세가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곳이라 극찬하였고, 풍수지리에서 천하의 대형이라 감탄하는
군왕대의 맥이 흐르는 전각으로 예부터 영험한 기도터로 이름 높다,
세조가 영산전이라는 편액을 직접 쓴 어필은 그 글씨가 힘이 있으며,
그가 김시습을 만나러 왔다가 못 만났기에 가마를 두고 말을 타고 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영산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과거칠불이 모셔져 있으며 현겁의 천불이 봉안되어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사랑으로써 분노를 이기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라,
베품으로써 인색함을 이기고
진실로서 거짓을 이겨라,
법구경
마곡사를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여행으로서의 오늘 일정은 끝이다,
▣ 숙소 솔다리펜션.
목살 바베큐라길래 뭐가 다른가?하고 시켰더니.
목살 숯불구이다,
준비해간 문어와 두치를 겯들이니 고기는 남아 돈다,
소주 3박스를 준비했다더니.
감춰둔것 빼고,
부족해 1박스 추가했다. 시원하다,
▣ 노래방 가는 길
어움속에 뭐 하는 거여 ?
우여곡절 끝에 마곡사관광단지내 노래방에 가는 길이다,
걸어서 15분쯤 소요된다나?
거리가 약 1.5km이니 부지런히 걸으면 그정도면 되겠다,
어느 동네앞을 지나니
마을주민이 무슨일인가 싶어 내다보며 말을 건다,
심심산골 깜깜한 밤중에 단체로 왁자지껄 도로를 걸어가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게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저곳은 어딘가?
마곡사 관광단지내 노래방 간다는게,
어느 누구의 농간에 유구읍까지 갔다,
중간에 집어탄 봉고와 택시가 골짜기를 지나 꼬불꼬불 산을 넘어 한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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