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지역 둘러보기 3 /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행로유적지, 단계마을 돌담길, 완계서원, 도양서원,이택당, 율곡사 외,
산청지역학연구모임 3번째 답사이다,
산청과 합천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황매산이 우뚝하다, 이곳 황매산 서쪽편에서 발원하여 차황면 소재지를 거쳐 신등면으로 흘러드는 단계천과 황매산 동남쪽에서 발원하는 도탄천이 신등면으로 흘러들어 역시 황매산 남쪽자락에서 발원하는 상법천과 만나 신등천을 이루면서 신등면소재지 인근에서 합류한다, 이들 두 하천이 합류하는 곳에 신등면소재지가 위치한다, 일명 단계라 부르는 곳이다, 뒤로는 황매산과 그 주변인 부암산. 모산재등 걸출한 산군이 버티고 있고, 두 하천이 합류하는 이곳은 제법 넓은 들판을 이루며 사람 살만한 곳이 되었다.
오늘은 신등면 율곡사에 얽힌 전설과 대한민국 등록문화제 제260호로 지정된 단계마을 돌담길과 도양서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그 일정을 잡았다,
후일 (3.1일) 신면면 지역을 재 답사하여 몇군데 추가하고 차량으로 이동시 편리를 위해 순서도 조정하였다,
▷ 탐방코스
신등면 이순신장군 백의종군행로유적지, 단계리 석조여래좌상 - 단계마을 돌담길 - 완계서원 - 평지리 은행나무, 인지재 - 도양서원 - 이택당과 물산명당 - (상산김씨 고문서 - 장천리 도요지) - 율곡사 ( 2019. 2. 10, 2019. 3. 1)
▷ 탐방후에
▣ 신등면 소재지 /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행로 유적지, 단계리 석조여래좌상, 단계전통시장, 단계정,
신등면사무소와 이충무공 추모행로유적지 사이에 이곳 저곳 둘러보면 된다,
단계마을 돌담길은 단계초등하교 뒷편에서 1089번 도로 사이에 있다.
일반적으로 신등면으로의 접근은 산청군 신안면을 거친다,
합천쪽에서 생비량면을 거쳐, 진주나 산청쪽에서도 신안면 문대삼거리를 거쳐 신등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대체로 좋다,
보이는 고개(이 고개가 지마재 止馬峴인지 모르겠다.)를 넘으면 신등면 소재지인 단계리이다,
이 고개쯤에 하마비가 있나하고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지마현은 단계마을을 지나갈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려 이곳 양반들에게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차황쪽 율현마을을 지나면 고무지(고마정 叩馬亭: 두드릴고, 말 엉덩이를 두들겨 달린다)라는 마을이 있다.
대신,
고개에 이름모를 사당이 음산해 보인다,
안내문 또한 없으니 누구의 무슨 사당인지는 모르겠다,
고개를 넘으면 이내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행로 유적지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 위치가 애매하여 초행이라면 보이는 시멘트길 윗쪽의 언덕위를 생각하기 쉬우나.
뒷쪽에 보이는 신등119 지역대 건물과의 사이에 우측으로 보이는 도로를 따라 진입해야 된다,
119지역대를 지나 조금 진입하면 정면에 주차장과 체육시설이 있고,
이웃하여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행로 유적이 있다,
이순신(1545~1598)운 1591년(선조24)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사천, 당포, 당항포,한산도, 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선조26년(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그러나 1597년 (선조30) 조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일본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그에게 가토기요마사를 생포하라 명한다,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된다.
이후 우의정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597년 4월1일 옥에서 풀려나고, 3일 한양을 떠나 6월 4일 경남 합천의 초계 도원수부 초입까지 걸어갔는데 당시 하동을 거쳐 초계로 내려간 일정이 난중일기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길은 '서울 - 경기 - 충남 - 전남 - 경남 진주'에 이르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는 전날인 1597년 8월 2일까지 걸었던 121일의 여정이다.
산청지역은 하동 옥종 - 산청 단성 - 단계 - 합천 삼가 - 합천으로 이어가는 길이나 별도의 탐방로가 아니라 차도변을 따라 걷는 길로 둘레길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보아야 겠다,
이순신장군 백의종군행로기념비 뒷편이자 신등면복지회관 앞쪽에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29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곳 단계마을의 지형이 배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므로, 이 배를 띄우기 위해서는 예로부터 냇물이 넘쳐 물난리가 잦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부처의 힘으로 물난리를 막기 위해서 불상을 세웠다,
그런데도 물난리가 계속되자 배에 돛대와 삿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만들어 주위의 가까운 나무에 걸어 두었더니 과연 그 뒤로 수해가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이 불상이 손이 두 개 모두 있으면 배를 저어 떠난다 하여 불상의 한쪽 손을 떼어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현재의 불상은 오른쪽 팔 부분이 떨어져 나간채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떨어져 나갔던 불상의 머리부분은 부근에서 찾아 내어 다시 붙였다한다, (원래 제 불두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얼굴은 통통한 편이지만 세부적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넓고 각이 진 어깨 튼튼한 가슴으로 표현한 상체는 건장한 모습인데 비해 하체는 상대적으로 빈약하여 안정감을 잃고있다, 이처럼 하반신이 상반신에 비해 약하게 표현되는 양식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왼손에 약 항아리를 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로써 우리는 이 불상이 약사여래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약사여래는 인간 세계의 모든 질병과 무지 (無知)를고쳐주는 부처로 대의왕불 (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 안내문에서 >
이순신 장군백의종군 행로유적지와 단계리 석조여래좌상을 둘러보고,
인접한 강변을 둘러본다,
하부쪽,
저쪽 어디쯤에서 신등천과 합류될 것이다,
이곳은 본래 신라 때 적촌현인데, 고려 제8대 현종 때 단계현으로 고쳤다가, 세종때 단성현에 편입 되어 단계, 단기 또는 단구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곡동과 도산면의 벽계동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단계리라해서 산청군 신등면에 편입되었다.
단계는 한문으로 丹溪로 쓰는데 이 곳 단계천이 날씨가 맑고 건조하면 하천의 물이 붉게 보인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단계 5일장은 00일날이다,
마을이 한옥이 많아 시장의 지붕도 한옥으로 꾸몄다,
오늘은 장날이 아니어서
조용하다,
이곳은 천주교 단계공소 건물이다,
목조의 도색이 산듯하다,
공소 앞 정자,
마당은 넓지 않다,
단계초등학교 앞으로 이동하면 단계루가 있다,
보통 정자와 누각은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있거나,
관에서 만든 정자라도 주변을 운치있게 꾸미는데 이곳은 옛 정취가 뭍어나는 누각은 아닌 것 같다.
단계초등학교 정문이다,
삭비문 (數飛門) 현판이 걸려있다, 數 자는 자주 삭, 셈할 수로 읽힌다.
論語 學而編에 如鳥數飛(여조삭비)란 말이 나온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개짓 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배우기를 쉬지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힘을 뜻하여 이름을 지었나 보다,
단계초등학교 교정이다,
▣ 산청 단계마을 옛 담장
단계마을 돌담길
이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은 향촌마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이를 잘 가꾸어 후손들에게 넘겨주고자 등록문화재로 등재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습니다,
2006. 6. 19. 문화재청장
일반적으로 단계마을 돌담길이 탐방이 처음이라면
단계초등학교 옆 도로변 주차장에서 출발하면 된다,
주로 돌담은 단계초등학교 뒷편 마을에 집중되어 있고 근대, 현대 건물과 뒤섞여 있어 이곳 저곳 발길 가는대로 다니면 되겠다,
사진상 우측은 단계초등학교,
이곳으로 진입했다,
자세히 보면 옛 돌담을 근년에 보수한 흔적은 역역하지만,
옛 돌담 자체에서 은은한 정취를 느낄수 있으리라,
갈림길에선 우측으로 돌았다,
보이는 곳의 끝에서는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로로 연결된다,
저만큼 도로,
골목이 좁아 차량이 다닐 수 는 없겠다,
그래서 인적드문 마을길을 사부작 거리며 걷기 좋다,
마을 가운데쯤 박씨고가가 있다,
주소는 신등면 신차로 546-8번지
대문이 닫쳐있어 담너머로 박씨고가를 본다,
우측 사랑채, 좌측 대문채 안으로 안채가 조금 보인다,
닫힌 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사랑채 앞쪽 텃밭?이 제법 넓직하다,
이곳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동향건물로 1칸 크기의 마루는 넓게 조성하고 2개의 방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있지 않아 마당가에 폐기된 냉장고를 비롯하여 건축물 보수에 쓰인 자재들어 널부러져 있고, 말라 비틀어진 풀들은 관리되지 않아 보기 흉하다,
이 박씨고택의 안채는 1918년 세워졌으며, 그 외의 건물은 1940년 무렵 세워졌다 한다,
건물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대문채, 곳간채가 'ㅁ'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모임지붕 건물이다, 1칸 크기의 대청 좌우에 각기 1칸, 2칸 크기의 방을 두었다, 마루의 북면은 틔우지 않고 도장방을 만들어 수장공간으로 활용하게 꾸몄다, 잡석으로 낮게 기단을 만들고 자연석 주춧돌 위에 네모 기둥을 세운 민도리 집이다,
보이는 우물때문에 이 집이 망했다는 소리도 전해온다, 이곳 단계지형의 모양이 배의 형상을 하고있어 배에 구멍(우물)을 뚫었느니 배(집)가 성할수 없어서이다,
요즘 위성 지도로 단계지역을 내려다 보면 배의 형상은 아닌 것 같다,
억지로 갖다 부친다면 이곳 단계천의 흐름 모양이 배의 외형(앞머리에서 바닥, 뒷 고물로 이어지는 선)을 닮았으나 이 경우 우물과의 관련성을 지우기에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이 건물은 사랑채를 집안에서 본 모습이다,
사진상 건물 좌측편에 샛문이 있다,
곳간채는 가운데 기둥과 토벽이 지붕을 지지하게 만들어 졌다,
박씨고가를 둘러보고 중심 도로쪽으로 나오면 산청율수원이 있다,
이곳은 순천박씨 판윤공파 후손인 고헌(古軒) 휴창(烋昌)선생이 1940년에 증수한 것을, 재능그룹 회장으로 있는 박성훈이 2013년 확장, 신축하여 조성한 전통한옥 체험 시설이다,
본 한옥은 안채인 하계재를 비롯한 7개의 건물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설과 이용은 인터넷 상에서 <산청 율수원>으로 검색하면 되며 일반인들이 이용하기에는 다소 비용 부담은 감수해야 할 듯,
이곳 단계 옛마을에는 솟을대문을 한 집들이 더러 보인다,
사람이 살고 있고, 대문 또한 닫혀 있어 아무집이나 밀고 들어갈 수는 없겠다.
이곳은 권씨 종택이라 한다,
주소는 신차로 504번길 73.
주택 뒷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엔 단청까지 되어있다,
권씨 종택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온다,
권씨 종택의 사당을 뒷쪽 도로변에서 본 모습이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는 이곳으로 연결된 후 합천으로 간다,
일반 둘레길처럼 걷는 위주의 탐방로와는 달리 차도변을 따르는 길어어서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학생등 단체가 행군하듯 걷는 길 쯤으로 연상하면 될 듯.
박씨고가로 왔다,
신등고등학교쪽으로의 도로와 접하고 있지만 초행이라면 찾기 어려울 수가 있다,
이와 비슷한 솟을대문을 한 집도 몇채 있고, 안내문 또한 집안에 있기때문에 외부에서 찾기어렵고, 찾아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 선듯 들어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소는 신차로 556-15.
현 박씨고가로 진입하는 문은 세군데 있다,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양쪽에 함석대문이 있다,
좌측의 이 문으로 들어서 박씨고가를 둘러본다,
탐방 목적을 말하고 둘러보면 이집을 관리하는 분(주인이 아님)이 거절하지는 않는다,
우측의 이 함석대문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보이는 행랑채?가 바깥을 향하고 있었는데 새로 신축하면서 집안으로 보도록 하였다,
이 대문을 들어서면 위 행랑채 마당이 된다. 따라서 바깥으로 드나들수 있도록 하여 옛 의도를 잃지는 않았는 것 같다,
이 솟을대문과 어울리지 않게 이웃해 새로 만든 철제 대문을 들어선다,
솟을대문 안쪽엔 내외벽이 설치되어 있고,
뒷편에 신축된 행랑채 건물이 보인다, 이집에 살고계시는 분의 말씀에는 저 건물의 방향이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다시 신축하면서 안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한다,
건물 앞쪽이 밖을 향하고 있지만 그곳에도 마당이 있고 대문도 있어 이곳에 유숙하는 분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또한 디딜방아도 낡았다,
사랑채를 지나,
안채,
이곳 단계리 권씨고가는 경남도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택은 안채 종도리와 상량문에 의하면 1919년 무렵에 처음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솟을대문 안의 경내에는 안채, 사랑채, 곳간채, 대문채 등이 있으며, 맞배지붕의 대문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팔각지붕 건물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지붕은 골기와로 되어있고, 곳간채와 대문채는 평기와로 만들어져 있다, 안채의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가운데 대청의 북쪽이 트여있지 않고 마루방으로 막혀있는 것이 특이하다, 곳간채와 대문채는 모두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라고 안내문에 적혀있다, 건축연대와 관련하여 안채와 사랑채 상량문에는 단기 4271년(서기로는 1938년)으로 기록되어있어 1938년에 건축된 것으로 봄이 옳을 것 같다,
마주보는 건물은 곳간채,
좌측의 안채와의 모퉁이에 보이는 건물이 화장실 겸 목욕탕 건물이다,
안채 옆이자 곳간채 옆에 화장실과 목욕탕이 있다,
가운데는 헛간으로 쓰인다,
좌측 화장실의 특이한 점은 일을 보는 곳이 나란히 두군데 있다,
밤에 무서우니까 시종을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나란히 일을 본다? 정 무섭다면 밖에서 지키라고 하면 될 것인데, 과거 중국이나 서양의 공중화장실을 떠올리면 이해 못할바도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구조이다,
우측칸은 목욕탕이다,
옆에서 본 목욕탕,
밖에서 불을 지필수 있게 되어있다,
이 건물을 지을 당시가 일제강점기에 있을 때 임을 감안하면 일본식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쇠솥의 깊이가 제법 깊다,
한쪽엔 평상으로 설계했고, 옆에 목욕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곳간채 앞에서 바라본 집의 구조,
좌측이 사랑채 뒷면, 우측 건물은 안채,
마주 보고 있는 건물은 이집 후손인지? 관리인인지 모르지만 나이 지긋한 분이 살고 계신다,
이분 얘기로는 이 지역에서 권씨네 덕을 안본 사람이 없다하니 좋은 일도 많이 하셨나보다,
사랑채 뒷편이다,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사진으로 보니 툇마루 뿐만 아니라 마루까지 갖춰져 있고 뒷문 또한 있어 건물 앞뒤가 없어? 안채로와의 연결이 쉽게 되어 있다,
과거의 건축물을 보면 사랑채에서 안채로의 샛문구조가 과감히 탈피된 느낌이다,
안채 부엌쪽 옆에는 장독대가 있다,
별도로 담을 둘렀다,
권씨고가를 둘러보는데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했다,
부자집이라 둘러볼 곳도, 이야기 거리도 많기 때문이다,
신등면 소재지 도로변에 용담정사가 있다, (신등면 신차로 545)
용담 박이장(1547~1622)선생은 조선 선조 광해조때 경북 고령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종사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관직은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낙향 후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한다,
선생이 저술한 용담선생문집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동강 김우옹선생과 같이 성주의 청천서원에 모셔져 있다, 후 자손들이 이곳 단계리로 이주해 와서 부조묘(不祧廟)를 받들고 정사를 지어 용담이라 하였다,
용담은 선생이 살던 고령의 마을 이름이었다고 하며, 고헌 회장의 12대조이다,
용담정사는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로
정면5칸, 측면 한칸 반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이곳은 대지가 옆으로 긴 까닭에
대문과 용담정사, 사당, 사당협문이 옆으로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도 좀 독특한데가 있어 보인다,
박인현 고택이다.
도문화재재로 제 444호로 지정되어 있고 주소는 신등면 신차로 542이다.
이 건물은 순천박씨 인현공이 1925년에 세운 부농주택으로 인접한 박씨고가(문화재자료 119호)와 그이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현 대문채, 사랑채는 멸실되고 안채, 아래채, 곳간채만 남아있다. 안채는 정면 7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의 중앙부를 높여 변화감을 주었고, 고급스러운 다듬돌 초석위에 둥근기둥과 네모 기둥을 섞어 세웠다,
솟을대문은 아니지만 이집도 나름 부자집인가 보다,
현 주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마당도 넓다,
사람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르지만,
한적한 마을 안길을 따라 이곳 저곳 기웃거려 봄도 좋을것 같다,
그러나 안동의 하회마을등 우리나라 옛 돌담길이 잘 조성된 마을과 현대적 시점에서 비교한다면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의미를 부여하면 되지 않겠는가,
개량된 품종의 개나리? 아님 다른 종?
꽃망울을 터뜨렸다,
전현대적 주택과 옛집이 어울린 단계마을을 대충 둘러보았다,
신등면사무소 옆의 물레방아 식당.
시설과 음식에 있어서 최고라고는 할수 없지만 깔끔하고 정갈한 맛으로 한번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듯,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된당찌개, 삼겹살, 목살, 정식 등
▣ 완계서원
1614년(광해군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충강공 동계 권도(1575~164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77년(정조 12)에 완계(완계)라고 사액되었으며, 그뒤 동산 권극량(1584~1631)을 추가 배향하였고. 1871년 (고종8)에 훼철되었다. 그후 1883년(고종20)에 강당을 중수하였고 1985년에 중건하였다,
신등면 신등가회로 114번길 61.
대문이 잠겨있어 담 너머로만 둘러본다,
동재,
현 서재는 없다,
인근의 다른 고택,
차창으로만 둘러보고 법물마을로 향한다,
▣ 평지리 법물마을 은행나무, 인지재
수령 약 500년, 높이 약 18m, 둘레 약 4m 의 크기이다,
이 나무는 원래 이 마을 앞산에서 자라던 것이었는데 조선 초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두문동으로 들어간 72현중 한사람이었던 김후(金後, 생몰미상)가 꿈에 한 신선이 나타나 하는 말이 "저 앞산에 있는 은행나무를 동리 안으로 옮겨 심으면 마을이 태평하고 후손이 번창할 것이다"라는 게시를 받고 마을 안 가울가에 옮겨 심었다고 전한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법물마을 회관이다,
나무의 위치는 신등면 평지리 790-4 (신등면 법물길 18) 이며, 나무의 높이가 있어 쉬이 찾을 수 있다,
밑둥치 보다 가지가 벌어진 곳이 비대하여 불안정해 보이며,
미끈하게 잘 생겼다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전설에 따른 마을의 수호신목으로, 마을안이자 강변에 위치하여 여름 시원한 그늘을 보내줌은 고마운 일이다,
평지리 은행나무에서 하천변을 따라 북쪽으로 100m 쯤 오르면 일군의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 돌담도 정겹다,
인지재는 이 골몰 안쪽으로 쬐끔 들어가면 있으나 주변에 그럴듯한 한옥이 있어 같이 둘러본다,
인지재 위치는 신등면 법물길 39 (신등면 평지리 728번지)
장류문(長流門)?
평지리 법물마을은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 한사람인 단구재 김후(1365~1397)선생이 처음으로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600여년간을 상산(商山) 김씨들이 단일 성씨를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
대문안으로 들어서니 임계재(臨溪齋) 현판을 달고있다,
앞쪽의 작은 건물이 보인다,
김광려 삼남매 화회문기(金光礪 三男妹 和會文記) /보물 제 1020호
1480년에 작성된 남매 사이의 재산 분배를 기록한 문서이다, 상산김씨 16세 손인 진사 김광겨, 광범형제와 전좌랑 한건의 처 등 3남매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를 서로 상의하여 분배한 내용이 담겨있다,
재산의 분배는 성별순이 아닌 나이 순으로 하였고 마지막 부분에 각자의 이름을 적고 수결(手決)을 하였다,
조선 초기 시회제도 및 가족제도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관리사 황토방 속에 도란도란 목소리가 들린다,
우유문(優游門)
대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다,
봉덕문(鳳德門)? 앞에 산청 인지재 안내문이 있다,
산청 인지재 (山淸 仁智齋)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433호로
경남도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728
인지재는 1816년(순조16)에 건립한 이후1898년 (광무2)에 중건한 재실이다,
'인지'는 논어에서 배우기 싫어하지 않음을 '지智'라 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을 '인仁'아라 하는데서 따온 말이다, 인지재라 편액한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전면과 후면에 퇴칸을 둔 겹집형식으로서 방을 후퇴칸까지 연장하여 공간을 확장한 점이나, 대칭의 배면에 반침을 둔 점 등은 조선후기의 평면구성이 확장되는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5량(樑)으로 가구 하였으며 서까레만 쓴 홑처마에 지붕은 합각지붕 형식이다,
옆에 또다른 솟을대문이 있다,
위 두 솟을대문 사이를 지나 인지재로 들어설 수 있다,
'인지재는 조선 숙종 12년(1686)에 건립된 학자들의 강학소이다.
수차려 변란으로 장서가 분실되는 등 애로를 격어오다 상산김씨 선조인 이표(履杓)공이 거금을 희사한 후 20년만에 고서 1,000여권을 모아 도서관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산청군 인지재의 경우 3000권 정도의 문헌이 있어 96년과 2003년 자료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두차례 도둑을 맞은데 이어 2004년 모든 문헌을 도난당했다.'
인지재에는 도서를 보관할 공간은 아닌것 같다,
담 너머로 옆집인 우유문 안집을 엿본다,
들머리 두곳의 솟을 대문중 우측 것 안쪽은 경사가 제법 심하다,
윗쪽으로 연결되는 곳에,
전암정사(傳巖精舍)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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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산청 덕천서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에 오르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글이 '경의당 중건기(重建記)'이다. 덕천서원은 대원군의 훼철 이후 46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1916년 도내 유림들이 진주 향교에서 도회를 열어 덕천서원 강당인 경의당 중건을 결의하였다. 그로부터 2년후 1918년 3월 1일 수곡선비 하재화의 주선으로 경의당을 중건하였다. 이때 강당인 경의당만 복원 중건되었던 덕천서원은 1926년에 건물들이 대략 복원되었다. 당시 정황을 기록한 글이 바로 중건기인데, 지금 덕천서원에 걸려있다. 중건기 말미에 ‘歲甲午陽復節後學商山金鎭文謹書’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1954년 상산 김씨인 김진문(金鎭文)이라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덕천서원 경의당 중건기를 쓴 김진문이란 선비는 누구인가. 덕천서원 경의당을 오르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김진문은 한말 산청출신 대학자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선생의 종제(從弟)로 법물사람이다. 1881년 법물에서 출생하여 1957년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난 선비로 호는 홍암(弘菴)이다. 일찍이 종형인 물천과 면우 곽종석에게 사사(師事)하여 학식이 뛰어나고 지조와 행실이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홍암은 1881년 12월 29일 법물리에서 성표(聲杓)와 숙부인 문경(聞慶) 송씨(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타고난 자질이 남달라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른들을 공경스런 마음으로 대하였다. 어린 나이에 통감 사략 등을 읽고 이어 소학 대학 등 경서를 부지런히 읽었다. 당시 법물리는 성재 허전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이택당(麗澤堂)을 새로 지었는데, 성재의 고족(高足)이라고 할 수 있는 만성 박치복이 강좌를 개설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홍암도 겨우 10여세의 나이로 강학에 참석을 했다. 만성은 그때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 네글자로 된 부(符)를 주었는데, 홍암에게는 ‘물시기재(勿恃其才)’ 즉 ‘재주를 너무 믿지 말라’라는 글을 주면서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다. 이어 종형인 물천에게 수업을 하게 되는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서 능히 문장의 뜻을 해석하고 외우기를 잘했다. 홍암이 재주가 뛰어난 것을 본 스승 물천은 경계하여 말하기를 “증자는 사람들이 노둔하다고 했지만 공자의 도를 전하였고, 자공이나 자하같은 사람들도 증자를 따르지 못했다. 믿지 못할 것이 재주이니 오직 학문의 도는 조심하고 입지(立志)하는데 있고 근(謹)과 근(勤)으로서 근본을 삼는 것이니 너는 명심하도록 하여라”고 타일렀다. 홍암은 스승 물천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겨서 이후로는 비록 일언일행(一言一行)의 사소한 일이라도 감히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으며 오직 선생의 가르침에 복종하였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랐던 홍암은 만성, 물천, 면우 등 기라성 같은 선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마음을 가라 앉히고 평생 선비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간 것을 알 수 있다. 1901년에는 면우 선생을 모시고 ‘대관대(大觀臺)’를 거쳐 남해 금산을 유람하였다. 대관대는 사천 구암의 구암 이정선생 유적지이다. 이때 대관대에서 구암 선생 문집을 중간(重刊)하고 있었는데, 홍암은 이 일을 돕기도 했다. 금산 유람에는 홍암을 비롯한 평곡 김영시, 중헌 김재수 등 법물의 선비들이 동행해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좋은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 합천 선비 후산 허유가 이택당 당장(堂長)으로 있으면서, 법물마을을 찾아오면 언제나 홍암을 불러 별지부(別知賦)를 외우라 하고 특별히 사랑하는 마음을 보였다. 1904년 후산이 세상을 떠나자 물천을 모시고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사실상 망하고 1908년에는 스승인 물천이 세상을 떠나자 홍암은 슬픈 마음을 억누르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을 한다. 물천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물천집' 발간을 도왔으며, 1924년에는 '대동보'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4년 5월에는 산청 정취암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신고당 김극영, 송산 권재규, 수재 김재식, 중헌 김재수, 평곡 김영시 등 여러 산청 선비들과 '근사록'을 강독하였다. 1942년 7월에는 회봉 하겸진, 복재 조현규, 중헌 김재수 등 및 여러 선비들과 고려 공신 강민첨 장군의 영정을 모신 두방재에서 피서를 하면서 매일 강독을 하고, 시를 읊는 등 학문을 토론하다 십여 일만에 돌아왔다. 홍암은 나라를 잃은 시대를 살면서 이택당, 물천당, 인지재 등지에 거처하면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체구는 작았지만 학문은 진솔되고 정미하여 물천 선생의 학문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만년에는 가계가 궁핍하고 세태가 어지러운 것을 당해서도 스스로를 지키고 뜻을 확고하게 세워 신중히 처신하여 결코 구차하고 낭패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홍암이 살았던 법물마을에는 평소 그가 학문을 닦았던 숭학정사(崇學精舍)가 있다. 숭학정사 기문에 “선생에게 수업한 제자들이 사시던 곳에다 정사를 창건하여 편액을 숭학정사라고 했는데, 선생이 평소 후학들의 학업을 지도하고 손님을 맞아 시를 읊조리며 정진하던 곳으로 그야말로 학문을 숭상하고 한가롭게 일생을 보내시던 곳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중재 김황은 “아! 슬프다 선비 되기가 어렵다. 가르치고 기름에 그 사람을 얻기가 쉽지 않아 우리 유학이 날로 쓰러 져가니 공과 같은 사람을 누가 또 진면목을 알아보겠는가. 내가 또한 공을 안다고 하면서도 능히 갖추어 다 말하지 못하니 후세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여 홍암의 진면목을 알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는 학문의 폭이 넓어 일반 선비들이 짐작할 만한 선비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물천의 학맥을 계승하면서 지역의 대학자들에게 학문의 깊이를 더했으니 중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지금 ‘홍암 문집 ’ 4권 2책이 있어 그의 학덕을 전하고 있다. 덕천서원 중건기를 지을만큼 향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홍암. 평생 물천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후산 허유, 면우 곽종석을 사사하였고, 제남 하경락, 과재 이교우, 정산 이현덕 등 지역의 선비들과 강론하고 연마하였으니 문사가 날로 성취되어 갔던 것이다. 홍암이 세상을 떠난 후 박헌수, 중헌 김재수 등이 그의 학문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마음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출처] 265.홍암 김진문|작성자 더불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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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로 올라서면 단구관(丹邱館)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알수 없으나 상산김씨 제학공파 재실인가 보다,
인지재 주변을 둘러보았다,
▣ 도양서원
평지마을 조금 못미쳐 도로변에 도양서원 표지석이 있다,
이곳 도양서원은 신등면 평지리 589번지 (신등면 내당갈 7-21)에 있다.
인터넷 다음지도를 확대하면 '일향참살이농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양서원,
중재 김황(1896~1978)선생의 선조는 본래 경북 성주에 살다가 의령, 진주 압현으로 이사였고, 중재의 조부대에 인근 마을인 승산에 정착하였다,
선생은 1896년 의령 궁유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매서가 동학 (東學)을 배척하였으므로 동학도들의 원망과 행패를 피해 이 골짜기에 살게되었다 한다, 선생이 15세때 1910년 한일합방이 있었고, 매서 선생의 부친은 가족을 이끌고 차황면 상법리로 이사왔다,
선생이 24세 되던해 면우 곽종석의 조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고종의 인산(장례식)에 참석하였다가 3.1운동을 보았다.
(고종은 1919년 1월 22일 67세로 사망하였으며 당시 독살설은 전국적인 규모의 3.1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중 하나였다,
애도기간 중인 3.1일 기미독립선언문이 공포되었고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면 되겠다,)
이때 집안 종손인 심산 김창숙을 만나 면우 곽종석에게 파리평화회의에 청원서를 보낼 계획을 알리라는 부탁을 받는다,
중재선생은 파리청원서에 관한 일에 참여하면서 면우의 명을 받아 진주 서부지역 유림대표의 서명을 받는 일을 추진하였다가 동년 5월 체포되어 한동안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유림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도 참여하였다,
동재,
중재는 면우 곽종석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면우는 한주 이진상의 제자이고 한주는 정재 유치명의 학맥은 결국 퇴계학파에 속한다고 본다, (면우도 남명 조식 문하생임)
그러나 남명 조식의 정신적 형향력이 큰 지역에서 주로 강학(講學)활동을 했으므로 남명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 관심이 적지 않았다 한다.
서재.
중재는 33세(1928)때 신등면 내당으로 이사한 뒤로부터 여택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별세 할 때까지 내당을 떠나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방이후 집안의 종손인 김창숙이 성균관대학을 창설하고 교수로 초빙했지만 사양했다고 한다,
36세때 신고당이 준공되어 거기서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중재 나이 15세때 나라가 망했으므로 일본 강점기때 학문을 완성하였다. 신학문에 물들지 않고, 유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후학들에게 전수함으로써 우리나라 마지막 유학자로 불리기도 한다,
평생 1,460수의 시와 4,051편의 산문을 남겨 양적으로도 풍부하다,
중재 선생은 뛰어난 자질과 교육을 강마하여 학문을 성취하여 큰 업적을 남겼으며,
한평생 오로지 학문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한 전형적인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생비량면 제보리 하능마을에도 선생의 유적이 남아있다,
1978년 11월 내당서사에서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
중재 자신이 지은 사례수용(四禮受容)에 의거 옛예에 따라 6월장을 거행하니 조문객이 3천여명이었고, 문인으로 服을 입은 사람이 300명이었고, 접수된 만사(挽詞)와 제문이 700여편에 이르렀다 한다,
신문사, 잡지에서 특집으로 다루었고 방송사에서 장례식 장면을 중계하였다 한다,
▣ 이택당과 물산영당
일향참살이농원으로 표시된 곳이 도양서원이고,
지도 하단 가운데에 보이는 건물군이 이택당이다,
신등면 평지리 법물마을에서 삼가쪽 도로를 따라 조금 진행하면 진입하면 농로를 포함한 사거리가 있다,
보이는 자전거 우측 옆 검게 보이는 표지석이 있는 이택당 입구로, 자전거 방향으로 보이는 도로가 이택당과 물산영당 들머리이다,
사실 이 이정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렵다,
한문으로 되어있는데다가 글자까지 또렸하지 않다,
임도 비슷한 농로를 따라 몇백미터 오르면 이택당이 있다,
주소는 산청군 신등면 황매산로 178번갈 45-31.
관리사쯤이라고 해야하나?
솟을대문으로 들어서기 전, 담장 밖에있는 건물이다,
주변에 농기구 등 여럿이 흩어져 있어 단정한 느낌은 들지않는다,
집터 같은 장방형의 넓지않은 이 터 또한 타인의 소유인가?
역시 담장 밖에 있다,
대문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다,
이곳은 성재 허전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운 곳이다,
5칸 건물로 방문은 작은 편이며 맨 우측 방문은 더 작고, 양쪽으로 달아낸 듯한 곳엔 군불을 땔수 있도록 하였다,
우측 기둥을 보면 제법 불에 탄 흔적이 보이고 있다,
麗 자를 한자사전에 찾아보니 '려'자로 나오고 '이'자라는 독음은 없다, 澤자는 못택이다,
麗澤을 여택으로 읽지 않고 이택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면 '이'자로도 읽나 보다,
이택과 여택
굳이 구분하자면 여택으로 읽으면 고운 연못이란 뜻이고 이택으로 읽으면 이어져 짝을 이룬 두 개의 연못이란 뜻이다.
두 개의 잇닿은 연못은 '주역'에 그 연원이 있다.
태괘(兌卦)의 풀이는 이렇다.
"두 개의 못이 잇닿은 것이 태(兌)다. 군자가 이것을 보고 붕우와 더불어 강습한다."
무슨 말인가? 두 연못이 이어져 있으면 서로 물을 대주어 어느 한 쪽만 마르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붕우는 늘 서로 절차탁마하여 상대에게 자극과 각성을 주어 함께 발전하고 성장한다.
이렇게 서로 이어진 두 개의 못이 이택(麗澤)이다. 이때 이(麗)는 '붙어있다' 또는 '짝'이란 의미다.
고려시대 국학(國學)에 이택관(麗澤館)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이택당(麗澤堂)이니 이택계(麗澤契)니 하는 명칭이 여럿 보인다.
< 이상은 정민 교수(한양대·고전문학)의 "[정민의 세설신어] [53] 이택(麗澤)"에서 >
허전(許傳, 797~1886))선생의 본관은 양천, 자는 이노(而老 일부 以老로 쓴 곳도 있다,), 호는 성제(性齊), 시호는 문헌(文憲) 이다,
1835년(헌종1) 39세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1840년 기린도찰방, 1844년 전적, 지평을 거쳐 1847년 함평현감이 되었고, 1850년(철종1) 교리.경연시독관.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경연에 참가해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였다 한다,
1855년 당상관에 오르면서 벼슬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고, 1862년 진주 민란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들끓자 그 해소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1) 김해 대도호부사로 부임해 향음주례를 향하고 향악을 강론하는 한편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고,재임시 영남과 인연이 두터워 졌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좌윤 예문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돈영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주로 경연에서 경의(經義)와 관련하여 항상 실심(實心)과 실정(實政)을 강조하였고, 현실에 바탕한 구체적 개혁안도 제시하였다,
저서에 문집 38권 외에 이상적 군주상을 그린 종요록(宗堯錄)과 철명편(哲命編)이 있으며,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 한 사의(士儀)는 오백년 조선 예학의 결산이라 평가한다,
여기 선생의 영정은 생전에 어명(御名)으로 도형하여 본가에 보존하였으나, 1891년에 문집 본판이 완성되고 이어 이택당(麗澤堂)과 장판각(藏板閣)이 완공되며 1916년에는 영당(影堂)이 이룩되니 이안 (移安)하게 되었는데 매년 3월 3일에 사우(祀宇)에서 석채례(釋采禮)를 봉행한다
우측 뒷편에 샛문이 있고,
앞쪽으로 창고같은 건물도 있다,
옆쪽에 장판각이 있다,
이택당의 주요 자료는 이곳에 없다.
1891년 성재 허전선생 문집 본판을 완성하고 이어 이택당과 장판각은 완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선생이 이곳에서 강학을 한 곳은 아니고 후손 또는 유림에서 문집을 판각하고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했나 보다,
사당.
사당 내부,
이택당 물산 영장긱 (麗澤堂 勿山 影幀閣)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4호
조선후기의 학자 성재 허선선생의 영정을 모신 건물이다,
허전(1797~1886)은 안정복에서서 이익의 학문을 사숙한 황덕길의 문인으로 성호 이익의 학맥을 이은 기호(畿湖)의 남인 학자로 당대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과 쌍벽을 이루었다,
선생의 영정은 생전에 이미 왕명으로 그리게 하여 본가에 보존하고 있었다,
1891년(고종 28)에 문집 목판이 완성되고, 이어 이택당과 장판각이 세워졌다, 1919년에 영당을 지어 영정을 이곳으로 옯겨 모시게 되었고, 매년 3월 3일에 사우에서 척채례를 봉행한다,
영정을 걸었던 자리?
선생의 영정은 비단 재질로 가로 71.5cm, 세로 136cm의 크기로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어느분 글을 보니 2007년 TV쇼 진품명품에서 감정가 2억5천만원으로 평가되었다 한다,) 이곳에 모조품이 걸려 있었다 하는데 오늘 보니 아무것도 없다,
장판각 앞쪽에서 바라본 이택당.
정료대(庭燎臺)도 보인다,
정료대는 햇불을 피워놓기 위해여 뜰에 세운 기둥모양의 대를 말한다,
한옥에서 이런 지붕은
맛배지붕이라 해야하나 팔작지붕이라 해야하나.
이택당 바로 옆에 있는 이 비석엔
小塘先生商山金公事蹟碑(소당선생상산김공사적비)라 라 적혀있다,
이택당과는 관련이 없나보다,
앞쪽 저곳은 ?
이택당에서 되돌아 나와 황매산로 178번길을 따라 평지마을 앞을 지나 관이마을 쪽으로 향하면 상산김씨 김후 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주소는 신등면 평지리 산40-6.
차량으로 찾아가다가 농로 중간에서 공사중인 포크레인과 트럭이 도로를 막고있어 300m 직전에서 되돌아 왔다,
김후는 두문동 72인중 한 사람으로 고려말 포은 정몽주에게서 사사했다한다,
평지리에서 장천마을 상부를 거쳐 율곡사로 넘어가는 샛길이 있다.
산청군청 문화관광과 자료에 상산김씨 고문서를 장천로 205번길 133-6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문서를 보관하는 건물이 있나하고 위 번지를 찾아본다,
위 번지는 평지리 법서마을에 있다, 위 사진상의 건물은 장천로 205번길 133-8번지 건물로 이 건물 뒷편에 - 6번지가 있으나 고문서를 보관할 그런 집은 아니다.
장천리 도요지는 장천로 205번길 72 - 25번지로 표시되어 있다,
역시 이곳에서 율곡사로 넘아가는 샛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주변에 축사가 보이고 찾아봤자 별 볼일 없을 것 같아 대충 위치만 가늠하고 통과.
▣ 율곡사.
산청군 신등면 율현리에 율곡사가 있다,
절 바로 아래쪽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간혹 대형버스가 이곳 율곡사 바로 아래까지 오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빠듯하다,
율현마을에서 이곳까지는 약 1.7km, 간혹 정수산과 새신바위를 찾는 등산객들이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오르기도하지만 율곡사를 참배하는 분들은 거의 승용차로 오르게 된다.
절 어귀에 정수산 등산안내도가 있다,
굳이 정수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새신바위 및 719봉 까지만 올라도 좋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719봉에서 율곡사 뒷편 능선을 따라 등산로가 있어 원점회귀 산행이 가능하다,
날씨는 조금 쌀쌀하지만
그래도 바람이 잔잔하고, 봄기운이 조금씩 녹아있어 두 분의 웃음만큼이나 탐방하기에는 좋은 날씨다,
더우기 미세먼지도 없다,
신라시대에 유명한 승려들이 많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승려로 원효, 혜공, 자장, 의상 등을 들 수 있다,
어떨땐 이분들이 수행보다는 평생 절 짓는 분들이 아닌지 싶을 때가 있다,
전국에 이들이 지은 절들이 몇개나 되는지 한번쯤 조사해 보고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맛이 좋다,
대웅전 앞 마당가 지하에도 샘이 있다,
양지바른 곳,
홍매화가 망울을 터뜨렸다.
아직은 때가 조금 이를때인데,
전체가 활짝 핀 것은 아니지만,
벌써! 라는 감탄이 나온다,
율곡사는 651(신라 진덕여왕 5)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930(경순왕 4)년에 감악(感岳)조사가 중창하였다.
고려시대의 연혁에 관한 기록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대웅전 기단 앞에 당시의 유물로 생각되는 석조 팔각불 대좌(石造八角佛臺座)가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며, 조선 성종 때 간행된『동국여지승람』단성현조에 ‘栗谷寺 在尺旨山’ 즉‘율곡사는 척지산에 있다’라고 쓰여진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도 율곡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왕문 등 당우가 많았던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는 대웅전, 칠성각, 관심당(觀心堂), 요채만 남아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지어진 건물이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수되었다 현 대웅전은 1963년 보물 제 37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골 깊은 산속에 자리잡은 건물답게 상승감을 강조하여 잘 다듬은 돌로 3층의 기단을 만들었으며, 처마 끝 활주가 시원한 느낌을 더해 준다. 대웅전은 단층팔작지붕의 다포계 건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정면과 측면 길이의 비가 황금비를 이루는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정면 3칸 중 가운데 1칸은 문짝이 4짝인 사분합문을, 좌우에는 문짝이 3짝인 삼분합문을 달아 손길이 많이 갔음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는 평방 (平枋)을 얹고 사면을 돌아가면서 처마 밑에는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의 공포를 받쳤으나, 첨차에는 쇠서는 달리지 않았다. 대들보의 앞뒤 기둥의 공포에 통보가 걸렸고 그로부터 좌우 측면의 중앙기둥에 걸쳐서는 충량을 배치하였는데, 대들보 위에 걸친 충량의 뒤끝은 용두형(龍頭形)으로 조각되어 있다. 내부는 여러번의 보수를 거치면서 많은 장식을 한 흔적이 보인다.
<산청군청 문화관광과>
오늘 무슨 법회가 있는지 대웅전에 신도가 많다,
내부의 건축미와 아비타삼존불좌상, 전설에 얽인 내용을 둘러보러 했으나 법회에 방해가 될듯 하여 그냥 발길을 돌린다,
대웅(大雄)은 마하비라를 번역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한 존칭의 하나라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보통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지혜를 상징, 석가모니물 왼쪽에서 보좌)과 보현보살(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행원(行願)을 상징, 석가모니불 우측에서 보좌)을 모신다하며 본존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협시보살이라 한다,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할때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을 모시고 다시 각각의 좌우에 보좌하는 보살을 모신다 한다,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아미타불은 극락전에,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원통보전에는 관(세)음 보살상을 주불로 모신다 한다,지장보살은 주로 명부전에 본존하며 석가모니불이 업멸하고 미륵보살이 성불 때까지 곧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대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다. 지혜와 광명으로 중생구제하는 힘이 크다한다,
이곳 율곡사의 대웅전에는 목조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 이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대웅전 앞 당간지주가 아담하다,
율곡사에 관심을 가지고 볼 유물 가운데 눈여겨봐야 할 것중 하나가 탱화이다,
보물 제 1316호로 지정된 이 탱화를 아무때나 볼 수는 없다,
매년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초파일인가? 한번씩 이 탱화를 대웅전 앞에서 잠시동안 펼쳐 보인다한다, 이 때는 탱화의 크기가 있어 크레인까지 동원된다 한다, 본인도 이 탱화를 본 적이 없이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러와야겠다고 생각해 보며 안내문과 산청군청 문화관광과 홈피자료를 옮겨 본다,
화면 가득 보살형의 인물만을 단독으로 그린 그림으로, 가로 475㎝, 세로 827㎝ 의 크기이다.
이 보살형 인물은 머리에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의 중앙에는 5구의 작은 화불이 모셔져 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치켜뜬 듯한 눈썹과 긴 코, 작은 입, 적당히 큰 귀 등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옷은 부처가 입는 법의 형태로 속옷의 끝단과 소매자락, 윗 부분 등에 걸쳐 여러 형태의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겉옷의 왼쪽아래 끝자락을 황금색실을 이용하여 처리한것이 특징이다.
조선 숙종 10년(1684)에 그려진 이 그림은 화면 아랫쪽에 화기(畵記)가 마련되어 있어, 이 그림을 그린 사람과 조선 영조 5년 (1729) 중수된 기록까지 확실히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인물의 두 발 사이에 왕과 왕비와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이 있는데, 이는 다른 괘불탱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반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단정하고 세련된 필선과 우아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 호화로우면서도 안정감 있고 조화로운 색채, 다양하고 섬세한 문양 표현 등이 매우 뛰어나 17세기 불화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
템플스테이를 하기도 하였는데,
요즘도 하나 모르겠다,
칠성각?
대웅전 좌측편의 배롱나무 한그루가 늘씬하다,
현당(玄堂)
스님이 거쳐하는 집으로 보면 되겠다,
지붕도 특이하다,
보통 양쪽 균형을 맞추는데 왜 저렇게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율곡사에서의 조망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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