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암 정식선생과 산청의 무이구곡
산청에 살고 있으면서도 명암 선생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다,
근년에 명암선생의 글을 우연히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피상적이나마 선생에 대한 공부를 해 본다,
여기에 실려있는 글은 [지리산의 각자 - 주자의 '무이구곡'을 지리산에 경영한 명암 정식 / '지리 99 지종석]님의 글을 토대로 탐방하고 상당 부분 참고하였으며, 또 경남일보 강동욱 기자의 글도 명암선생을 잘 표현해 주어 게재하였다. 감사하다.
▷ 일정 (2019. 1. 4 )
무이정사 - 수홍교 - 옥녀봉 - 농월담 - 낙화담 - 대은병 - 광풍뢰 - 제월대 - 고루암 - 와룡폭 - 연화대 - 무이정사 터 - 도솔암.
▷ 탐방후에
▣ 무이정사
지리산대로 1723번길 36-7번지가 무이정사다.
위성지도상에는 무이정사 앞에 논으로 되어있지만 현재 조그만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무이구곡 (武夷九曲)
무이산은 중국 푸젠성(복건성/福建省)의 제일 명산으로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이 있는 경치 좋은 곳이다. 중국 남송 (南宋) 때 성리학의 대가 주자 (朱子 / 주희(朱熹)의 높임 명칭, 1130 ∼1200)는 그의 고향인 이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과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를 썼다.「무이구곡도가」는 약 8㎞의 계곡에 자리한 구곡은 각각 승진동(升眞洞),옥녀봉(玉女峯), 선기암(仙機巖) 금계암(金鷄巖), 철적정(鐵笛亭), 선장봉(仙掌峯),석당사(石唐寺),고루암(鼓樓巖), 신촌시(新村市)로. 첫 수를 제외하고는 무이구곡의 아홉구비(九曲) 경치를 읊은 것으로. 자연묘사를 주로 하면서 도학(道學:주자학 성리학)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이를 본받아 산 좋고 물맑은 곳에 무이구곡과 비슷한 이름을 붙이고 노래한 것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은 청량산에 청량정사를 짓고 도산구곡가를, 율곡 이이는 해주 석담천에 머물면서 은병정사를 짓고 고산구곡를 읊었으며, 우암 송시열은 화양구곡가를, 한강 정구선생은 무흘구곡가를 지었다.
지리산대로 1723번지 36-7
시천면 소재지를 통과하는 길과 시천면을 우회하는 4차선 도로가 중산리 방향에서 만나는 곳에 국동마을이 있다,
이정표에 명암 정식선생 무이정사 이정표가 있다.
한옥으로 된 집을 찾는다.
대문가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다.
현재(2022년) 는 진입로가 확장되어 있어 찾아가기가 더욱 쉬워졌다.
명암 정식(明菴 鄭栻:1683~1746)
명암은 진주 사람으로 19세때 합천의 시험장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중국 송나라 호전(1102~1180)이라는 사람이 지은 척화소(척화소/송나라가 오랭캐의 나라인 금나라와 화친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읽고, 병자호란(1636)으로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에 수모를 당하고 화친을 맺은 세상에 비분하여 "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차마 지금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겠는가"하고 돌아온 이후 평생 출사하지 않았다. 지조와 기개 넘치는 명암이 만년에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주자를 본받아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아홉구비에 무이구곡을 경영하였으니 바로 지금의 구곡산 무이구곡이다.
무이정사는 명암선생이 1728년 최초로 건립하여 18년간이나 지조있게 살다가 1746년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곳으로 구공산 와룡폭 윗쪽에 있었다 한다. 현 국동마을에 있는 무이정사는 1933년 후세의 관리문제를 숙고하여 원래 자리가 아닌 국동마을에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버리고 그 이후 다시 지은 것이다.
현 후손이 거주하는지 정사 앞 양쪽으로 조립식 건물과 저온저장고를 건립하여 미관상 별 볼 품이 없다.
▣ 제1곡, 수홍교
구곡산을 발원지로 하는 도솔암 계곡의 하류는 지도상 옥녀봉 좌측에서 관천대 앞으로 흘러 덕천강과 합류한다.
수홍교(垂虹橋)터,
서신마을
시천면 소재지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덕천서원을 지나면 이내 있는 마을이다.
무이구곡이 있는 구곡산 도솔암 계곡은 상당히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지만 하류로 내려오면 지형이 밋밋한 언덕을 이루고 있어 언듯 육안으로 보기에 계곡다움은 찾을 수 없고 어디에서 덕천강(시천천)과 합류되는지 잘 알기 어렵다.
서신마을에서 덕천강(시천천)과 합류하는 이곳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계곡의 폭도 좁고 흐르는 물도 거의 없어 구곡산 계곡이 이곳으로 내려온다고 믿기 어려운 지형을 하고 있다. 따라서 본인도 오늘에야 구곡계곡이 이곳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수홍교는 현 도로를 포함하여 보이는 곳 어디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수홍교 표지석 각자도 이곳에서 동쪽으로 30~40 m 떨어진 어느집 담장 아래 있다.
수횽교는 무지개 다리라고도 하는 홍예교를 말한다. 대표적인 홍예교로는 순천 선암사 입구의 승선교를 연상하면 되겠다.
이곳 합수지점에는 조그만 언덕이 있어 이곳에 정자를 짓고 관천대라 이름 붙였다.
관천대에 올라본다,
사실 이 육각정자에 관천대란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정자 앞쪽에 몇 비석이 있다.
관천대라고 쓴 것인가?
만폭탄 (萬瀑灘)
지은이 관천 허모(許摸)
평생토록 쌓인 수많은 한탄은
백 가지 천 가지로 일 꾀해도 아무런 실마리 없네
지금 오십삼년 얻은 것이라곤
방장산(方丈山) 앞의 만폭탄이로다.
관천별업(觀天別業)
관천 허모선생(1876~1944)는 이곳 덕산에서 유학자로서 평생을 사신 분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 덕산에는 많이 알려진 세 분의 유학자가 있다. 한 분은 남명 조식선생으로 산천재가 있고, 또 한 분은 명암 정식선생으로 무이정사와 무이구곡이 있으며, 그리고 세번째로 관천 허모선생으로 관천대가 있다.
초정시비(艸丁詩碑)
뭐든지 가는 것은
다 흐르는 물과 같다.
관천대 옛터에 올라
가신 이를 생각느니
나 또한
여기 서 있어도
쉬엄 없이 가는 것을.
관천대에서 수홍교 옛터를 가늠해 보고 천평들을 바라본다.
상부쪽
수홍교 각자를 찾아본다,
서신마을 앞 버스승강장 인근에서 바라본 관천대 방향이다,
우측에 보이는 골목은 하천변에 접하여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포함하여 세번째 골목이다,
수홍교 각자는 차도변에 있지 않다,
참고로 차량 바로 앞쪽에 서신마을 회관으로 오르는 골목이 있다, (이 길로 옥녀봉으로 갈 수 있다.)
차도변에서 바라본 세번째 골목이다,
마을 안쪽으로 계속 오르는 길이 아닌, 보이는 저 집에서 골목은 끝난다,
위 골목으로 살짝 들어가다 우측 잔디가 있는 집 방향으로 90도,
사진상 우측 하단,
바위 위에 글자가 보인다,
반갑다.
이 각자를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바위가 제법 커서 일부러 바위를 이쪽으로 옮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여튼 현재의 하천과는 제법의 거리를 두고 있어 세월이 지나 하천이 옮겨갔을 수도 있겠다,
垂虹橋 詩 (수홍교 시)
一曲虹橋繫小船 (일곡홍교계소선) 첫째 구비 무지개 다리에 작은 배 매여 있고,
靈岑千疊發長天 (영잠천첩발장천) 천 겹 신묘한 봉우리 긴 강물 시발했도다.
源頭有路無人過 (원두유로무인과) 샘물의 근원에 길 있느나 지나는 사람 없고,
空使溪山入暮烟 (공사계산입모연) 쓸쓸한 계곡과 산에 저녁 연기 찾아드네.
조짐이 좋다,
오늘 일이 잘 풀릴것 같다,
▣ 재2곡, 옥녀봉
옥녀봉을 찾아 간다,
옥녀봉이 서신마을 뒷편 어디쯤 있는것으로 짐작되지만, 어느곳으로 올라야 될지 몰라 대충 짐작으로 관천대 좌측으로 보이는 도로를 따라 올랐다.
참고로 후답자분이 옥녀봉을 찾고자 한다면,
수홍교 각자를 찾을때 수홍교 터에서 인접한 집으로의 진입로를 포함하여 두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면 서신마을 회관이 있고, 회관 직전에서 우회전 하여 농로를 따라 오르든지. 아님 서신마을 입구의 음식점 바우덕이 좌측 골목을 따라 오르면 된다, 이 길은 중간 좌측으로 휘어 오르는 곳에 현 비포장 도로가 몇십미터 있어 이 길이 맞나? 싶을 수 있지만 이곳만 지나면 이내 서신마을 회관쪽으로 올라오는 농로와 만나 윗쪽으로 오르게 된다.
위 서신마을 회관 옆 또는 음식점 바우덕이 좌측 농로를 따라 오르면 비교적 근년에 신축한 주택 몇 채가 있다,
이 주택 뒷쪽에 접해 조그만 동산이 있다. 참나무 밤나등 키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왕릉만한 동산이 제법 볼록하게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옥녀봉이구나 하고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건물을 지나 조금 오르면 주변은 감나무 농장으로 출입금지? 표시가 있고, 적당한 곳에서 옥녀봉 북쪽 기슭으로 도보로 진입하면 된다.
본인은 지리를 정확히 몰라 서신마을 관천대 옆 도로를 따라 올랐다.
저만큼 옥녀봉인가 싶은 동산이 보이는 곳에서 농로는 끝이난다. 그리고 이곳에 주차했다.
윗 윗 사진의 주택 몇 채가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다.
이 주택 뒷편에 보이는 조그만 동산(큼직한 왕릉만 하다.)이 옥녀봉이구나 하는 직감이 온다.
비포장된 농로를 따라 약간 오른다.
주변 수풀이 무성할 곳이지만 길은 선명하다.
옥녀봉은 우측 계곡 건너편에 있다.
하천? 계곡?을 건넌다.
겨울이기도 하고, 수풀이 덜 우거진 곳을 골라 적당히 건너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계곡이 구곡산 도솔암에서 내려오는 계곡인줄 몰랐다.
흐르는 물은 그의 없지만 하천의 규모는 제법 있어 어떻게 이런 지형이 생겼지? 하고 의아심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감나무 농장 저쪽 볼록한 동산이 옥녀봉이구나 싶다.
`옥녀봉 서북쪽, 묘지있는 곳에서
(서지마을 회관쪽에서 올라도 몇 채의 주택 뒷편에서 이곳으로 옴이 편하겠다.)
옥녀봉 정상으로 오른다.
오르는 길은 없지만 적의 나무 사이로 오르면 된다.
봉우리가 큰 왕릉만 해 크게 오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옥녀봉 정상에서 하천쪽(남쪽)으로 10m쯤 아래,
이 바위 남쪽(하천쪽)에 옥녀봉 각자가 있다,
2곡인 옥녀봉도 쉽게 찾았다.
피사체와의 거리가 가까워 근접촬영을 할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玉女峯 詩 (옥녀봉 시)
二曲嬋姸玉女峯 (이곡선연옥녀봉) 둘째 구비 쳐다보니 옥녀봉이 아름답고
一溪流處?花容 (일계류처잠화용) 시냇물 흐르는 곳마다 꽃모습 잠겨있네
都消世慮探眞境 (도소세려탐진경) 아름다운 곳 없어질까 염려되어 이곳을 찾으니
無恙雲蘿鎖萬重 (무양운라쇄만중) 구름과 담쟁이 잠겼으니 걱정할 것 없도다,
옥녀봉 앞쪽을 흐르는 하천,
흐르는 물은 없지만 하천변 돌의 형태로 보아 실개천은 아니다,
▣제3곡 농월담
옥녀봉을 둘러보고 차량으로 도솔암 쪽으로 이동한다.
물론 서신마을에서 도보로 올라도 안 될 것은 없지만 거리도 있고하여 차량으로 오른다.
이곳은 비교적 근년에 신축한 불지사 옆을 지나 도솔암으로 오르는 중간 첫번째 건너는 무명교 상부이다,
다음 지도를 확대했을때 심하게 커브가 진 곳이다,
계곡 우측편에 조그만 굴이 있어 엿본다,
깊이는 2-3m쯤.
기도처쯤으로 보면 되겠다,
위 무명교를 지나 오르면,
도솔암 이정표 비스듬한 곳에 계곡을 건너는 길이 있다,
도솔암은 도로를 따라 계속 오르는 길이고, 건너편엔 조그만 농지가 있다,
도로를 따라 오르면 중간에 좌측으로 주차장이 있다,
왜 이곳에 주차장이 있지? 싶을수도 있는 곳으로, 승용차 7-8대쯤 주차 할 수 있다.
무이구곡을 탐방코자 한다면 이곳에 주차하면 된다.
위 주차장에서 30-40m쯤 도로를 따라 오르면,
우측으로 구곡사 갈림길이 있다.
구곡사 표지석은 저만큼 다리 가에 있어 오르는 도로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LG등 통신탑 전주를 기억하면 되겠다,
구곡사는 가 본적은 없지만
전통있는 사찰은 아닌곳으로 알고있다.
농월담은 이곳 구곡사 갈림길에서 계곡을 따라 20~30m쯤 아랫쪽에 있다.
가운데 보이는바위와 우측 나무 사이로 선명치는 않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건너편 산 기슭으로는 큰 운치는 없지만 제법의 암릉을 이루고 있다.
계곡으로 내려서면 아담한 웅덩이가 있고,
건너편 바위 위에 농월담 각자를 볼 수 있다
이 각자는 겨울철에는 자세히 내려다 보면 도로변에서도 보여 찾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주변을 둘러본다
사실 뛰어난 경관이 있는 곳은 아니다
어느 계곡 흔하디 흔하게 볼수 있는 그런정도 밖에는 되지않으나 주변에 비해 조금 나은 곳으로, 달을 희롱할만한 운치있는 곳으로 생각하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이 각자로 인해 의미가 있다고 할까?
농월담(弄月潭)각자는 명암선생의 막내아들相華(상화)의 글씨라 한다.
聾月潭 詩 (농월담 시)
三曲誰移壑底船 (삼곡수이학저선) 셋째 구비 살펴보니 골짜기 밑에 누가 배를 옮겨 두었고
松枯壁 老不知年 (송고벽로불지년) 절벽에 늙은 소나무 그 나이 알 수 없네
雙流亂瀑何時斷 (쌍류난폭하시단) 두 줄기 거센폭포 어느 때나 그치려나
白首遊人實可憐 (백수유인실가련) 늙어서 노는 이 참으로 가련하네.
농월담 상부의 산 중턱,
상당한 기암괴석을 농월담과 연계시켜 보지만 격찬할 정도는 아닌것 같다.
아랫쪽에서 올려다본 농월담
각자는 가운데 비스듬히 드러누운 바위 위에 새겨져 있다
농월담 아랫쪽.
▣ 명암정식 무이구곡
농월담을 찾아보고,
도로로 되돌아 올라와 도솔암 쪽으로 오른다
주차장 또는 구곡사 갈림길에서 100-200m 쯤
저만큼, 도솔교 30m쯤 직전이다
좌측에 보이는 녹색 펜스는 상수도 출입을 제한하는 시설이다
도로 우측 아랫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곳 바위 사면에 명암정식과 무이구곡이 각자되어 있다.
세로로 명암 정식, 가로로 무이구곡 글자가 각자되어 있다.
▣ 제4곡, 낙화담
저만큼 도솔교
불지사에서 도솔암으로 오르는 도중 두번째 다리이다.
이곳에서 부터 도솔암 앞을 거쳐 구곡산 등산로 갈림길이 잇는 곳까지 상수도 보호시설로 계곡 출입을 통제하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계곡으로 들어서면 중간에서는 탈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도솔교에서 바라본 계곡
앞쪽 상수도 시설이 있다.
낙화담은 이곳에서도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가운데 얼음 우측에 보이는 큰 바위 두개중 하나에 낙화암 각자가 있다.
이 계곡은 상수도 보호시설로 출입을 막고 있다.
도솔교 다리밑으로의 진입은 어렵고, 펜스 좌측 틈새로 들어서면 된다.
들머리 계곡으로 들어선다.
사실 바위에서 글자 찾기가 쉽지는 않다.
조심 조심 다른 곳보다 경관이 조금 좋다싶은 곳에 각자가 있나하고 이곳 저곳 시선이 바빠진다.
앞쪽 바위가 낙화암이다.
여름철이라면 몰라도 겨울이라면 이 바위를 윗쪽으로 돌아 바위 좌측면을 살펴아 한다,
사진상 바위 좌측면 약간 옴팍하게 들어간 면( 저 바위를 쌀에 비교하면 쌀눈이 있는 곳)에 낙화담 각자가 있다.
자연 경관으로 본다면 주변 경관이 기중 낫다.
落花潭 각자는 명암선생의 가운데 아들 상문(相文)의 글씨라 전한다.
落花潭 詩 (낙화담 시)
四曲屛圍十丈巖 (사곡병위십장암) 네째구비 돌아서니 열길 바위 병풍처럼 둘러있고
落花隨浪泛 ? ? (락화수람범람상) 낙화는 물결따라 길게 떠 있네
座來休歇忘辛苦 (좌래휴헐망신고) 외로움을 잊고 앉아 쉬고 있으니
惟見蟾光射碧潭 (유견섬광사벽담) 오직 달빛만이 푸른 못을 비추네
윗쪽으로 조그만 폭포를 이루고 있다.
윗쪽 바위에서 내려다 본 낙화담
계곡으로 오름은 이 주변이 가장 험하나 웬만한 사람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이후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큰 위험은 없다.
▣제5곡, 난가암 / 대은병(大隱屛 / 병풍병)
낙화담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른다,
겨울이어서 수량이 많지않고, 계곡 또한 큰 매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완만하여 쉬엄쉬엄 오르는데 지장이 없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약간 푸른빛? 회색?의 큰 바위가 있다.
계곡 한가운데 제법 큰 크기여서 한 눈에 띄고,
글자 또한 아래에서 올려다 보여 찾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로서 성행한 구곡문화는 주자가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을 경영한 것을 본받아 산수 좋은 곳에 전국에 무슨 구곡(九曲) 혹은 무슨 정사(亭舍)라는 이름을 지어 지내면서 구곡도(九曲圖)를 걸어 놓거나 구곡가(九曲歌)를 읊곤 하였다. 특히 구곡의 이름을 지으면서 주자의 무이구곡을 흉내 낸 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명암선생이 구곡산 무이구곡을 정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온 지명이 옥녀봉과 대은병이다. 그런데 제4곡인 낙화담을 지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대은병 각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명암선생이 [도암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나열한 9곡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던 난가암(爛柯嵒/빛날 난, 가지 가)이 나타난다. 이 수수께끼는 명암선생이 남긴 무이구곡가 중에 [대은병]에 그 답이 있다.
[대은병(大隱屛)
五曲雲山去去深 (오곡운산거거심) 다섯째 구비 구름 낀 산 갈수록 깊은데( 다섯째 구름산 멀리 그모습 감추고)
閒來無語倚楓林 (한래무어의풍림) 한가하게 말없이 단풍 숲에 기대섰노라 (말없이 몰래와서 단풍숲에 의지하네)
千秋一局爛柯處 (천추일국난가암) 천추 한판 바둑에 도끼자루 썩는 곳에 (이 곳에 오래 머무니 세월가는 줄 모르고)
移得箕山洗耳心 (이득기산세이심)기산에서 귀 씻던 마음을 옮겨와야지 (소부와 기산 '세이'를 알 것 같구나)
대은병 시에 등장하는 난가( 爛柯)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난가일몽( 爛柯一夢)]의 준말로써 나무꾼이 겪었던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설화에서 나온말이다. 명암선생이 주자의 대은병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5곡을 명명한 이후 [대은병] 시를 지어놓고 보니 문장에 들어있던 난가처가 신선놀음 하기 좋은 곳에 더욱 그럴듯하여 [난가암]각자를 남긴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윗쪽에서 내려다 본 반가암 바위
▣ 괴석담
괴석담은 무이구곡에서 언급이 없다.
난가암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느다.
바위들이 아주 크지는 않아 이곳 저곳으로 발에 물을 넣을 필요없이 충분히 다닐만 하다.
계곡 속이어서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개소리 요란하고, 저만큼이 도솔암이다.
계곡을 따라 오른다.
계곡 우측편 가장자리
괴석담으로 표시되어 있다.
괴석담의 위치를 특정짓기 어렵다,
제법의 연륜을 보이는 노간주 나무가 있는 곳 인근이다.
가운데 나무 뒷편에 보이는 바위에 괴석담 각자가 있다.
▣ 광풍뢰
괴석담을 지나 조금 오르면,
계곡 중간쯤 네모난 바위 위에 광풍뢰 각자가 있다.
광풍뢰란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이란 뜻으로 낙화담과 함께 가야산 홍류동 소리길에도 같은 이름이 있다.
光風瀨 詩 (광풍뢰 시)
六曲蒼巖枕曲灣 (육곡창암침곡만) 여섯 굽이 푸른 바위 베개 삼아 굽은 물굽이
雲扉無客晝常關 (운비무객주상관) 구름문짝 종일 다져 손님 없구나
光風瀨氣盈襟夜(광풍뢰기영금야) 맑은 바람 맑은 기운 밤 옷깃 가득찬데
任得人間分外閑 (임득인간부외한) 사람들은 분수밖에 큰 것을 마음에 가지려 하네.
광풍뢰(光風瀨 / 여울 뢰) 각자
명암선생의 가운데 아들 상문(相文)의 글씨라 한다,
▣ 제월대
현 위치는 어디쯤일까?
도솔암에서 구곡산으로 가는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되돌아 보니 이런 바위도 보인다.
우측 보이는 철제 펜스는 어디까지?
낯익은 곳이다.
구곡산 두 계곡이 합수되는 곳으로, 구곡산 등산로 갈림길이 있다.
아래 도솔교에서 펜스사이를 지나 계곡을 따라 이곳까지 올라오는데 천천히 35분쯤 소요되었다.
이곳에 제월대 각자가 있다.
광풍뢰 다음의 제7곡에 제월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광풍제월] 혹은 [제월광풍]이 한 쌍으로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송나라의 명필이자 송 4대가의 한사람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 송나라 유학자인 주무숙(周戊叔 1017~1073)의 인간됨을 말하면서, 광풍제월(光風霽月, 비 온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과도 같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또한 무이구곡의 창시자인 주자가 남긴 문장도 있으니 " 靑雲白石聊同趣 霽月光風更別傳 / 청운백석료동취 제월광풍갱별전 : 푸른 구름과 흰 돌은 애오라지 같은 정취힌데 제월광풍이 다시 따로 전해오네"
이후, 주자를 따르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광풍과 제월 혹은 광풍제월을 합하여 정자 등의 이름에 사용하였으니, 소쇄원의 제월당과 광풍각,
안동의 제월대와 광풍정이 짝으로 서 있고, 창덕궁의 정자 제월광풍관을 비롯하여 동봉산에 있는 도암(陶庵)의 각자 광풍제월 둥 부지기수이다.
霽月臺 詩 (제월대 시)
七曲 ? 吟霽月灘 (칠곡침음제월탄) 일곱구비 달 밝은 여울가 생각에 잠겨,
分流層瀑獨耽看 (분류증폭독탐간) 흐르는 층층 폭포 혼자 즐기네.
거然睡裏羲皇近 (거연수리희황근) 복희씨(복희씨) 좋아서 즐거이 졸면서
松韻泉聲入夢寒 (송운천성입몽한) 솔소리 물소리 들으며 꿈속으로 들어가네.
이곳 제월대에서 30분여 때늦은 점심시간을 갖는다.
중식후 오르는 방향에서 볼때 좌측(도솔능쪽) 구곡산 정상방향으로 향한다.
정상 2.37km로 표시되어 있으며, 작은 이정표엔 도솔능 1.5km로 표시되어 있다.
이변엔 계곡이 아닌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제월대 이후의 도솔능쪽 계곡은 급속히 적어지고 볼 품도 없다.
계곡의 규모도 구곡산 정상으로 바로 오르는 쪽보다 작다.
아래 제월대에서 6-7분,
등산로와 접하여 좌측으로 집채만한 바위가 있다.
올라가는 입장에서 볼때는 좌측으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고루암 각자를 볼 수 있다.
고루암 각자는 바위 위로 올라서 저곳 낙엽쌓인 곳으로 내려서면 근접해 볼수 있다.
고루암은 수홍교와 옥녀봉과 함께 주자의 무이구곡에 나오는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명암선생은 [도암에게 드린 서신]에서 선생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일부 구곡의 이름이 남아 전해진다고 하였다.
"제가 사는 주산은 이름을 무이산(武夷山)이라고 하는바, 바로 두류산을 돌문 안에 있는 흘러온 기슭입니다. 그 아래는 구곡(九曲)이 있는데, 대개 옛날부터 그 이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사람들의 입헤 흘러 전해 오는 것으로는 수홍교(垂紅橋), 옥녀봉(玉女峯), 고루암(鼓樓巖), 와룡암(臥龍巖) 등입니다. 구비 가운데서 이름이 없는 것은 저가 이름을 지어 붙였습니다."
아랫쪽에서도 산죽을 헤치고 조금만 들어서면 선명히 볼 수 있다.
鼓樓巖 각자는 명암선생의 큰아들 상협(相協)의 글씨라 한다.
鼓樓巖 詩
八曲身安眼豁開 (팔곡신안안활개) 여덟구비 몸이 편안하고 눈앞이 넓게 열려,
鼓樓巖上笑忘回 (고루암상소망회) 고루암 위 '고누'는 회전을 잊고 웃고 있구나.
人間樂處舞如此 (인간악처무여차) 사람들은 이와 같은 즐거운 곳을 모르고
未見高朋自遠來 (미견고붕자원래) 먼데서 와서 높은 '누대'를 보지 못하네.
고루암은 이곳 나무를 의지해 오를수 있겠다.
▣와룡폭
고루암을 지나오르면 이내 좌측편에 와룡폭을 볼 수 있다.
우기가 아니면 수량이 적은 곳이라서 그렇치, 비라도 쏟어져 수량이 늘어나면 멋진 풍경을 보여주겠다.
와룡폭 상부로 들어가 본다,
와룡폭 건너편 상단에 각자가 있다.
龍瀑 詩 (용폭 시)
九曲龍巖勢屹然 (구곡용암세흘연) 아홉구비 용바위 우뚝 솟아 그 기세당당하고,
瀑流千丈落成川 (폭유천장락성천) 천길 폭포 떨어져 냇물 이루네.
探源莫道藏종僻 (탐원막도장종벽) 숨겨진 근원 찾으려 가지마오.
獨閉明窓作一天 (독폐명창작일천) 밝은 창가 홀로앉아 자연소재 시짓노라.
와룡폭 (臥龍瀑) 각자는 명암선생의 큰아들 상협(相協)의 글씨라 한다.
▣ 연화대 (蓮花臺)
와룡폭 상단에 연화대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연화대는 바위 뒷쪽에서,등산로와 상부로 서로 연결된다,
연화대 상부,
오르고 할 것도 없다.
무이구곡은 제9곡 와룡폭에서 끝아지만, 명암선생은 다음과 같이 무이구곡의 설명을 마무리 하였다.
"폭포 위에는 자연적으로 된 돌대가 있는데, 그 이름은 연화대 (蓮花臺)입니다. 그 높이는 거의 수백여 길이나 되는데 그 위가 평평하여 이십여명 정도 앉을 수 있습니다. 이곳이 구곡 가운데서 제일가는 경치입니다."
와룡폭 위에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비행선처럼 웅장하게 서 있는 자연석의 대가 있는데 바로 연화대이다. 와룡폭은 이 연화대가 있음으로 더욱 신비감을 자아낼 뿐 아니라, 와룡폭의 감상은 연화대에 올라 바라볼 때 제대로 볼 수 있다.
▣ 무이정사 터
연화대 뒷편에서 부터 대밭이 이루어져 있다.
현 연화대에서 상부쪽으로 60~70m정도까지 대밭이다.
돌무덤처럼 보이는 이곳까지 올라본다.
정확히 어느 곳인지 몰라도 이 인근에 축대가 쌓여있고,평평한 공터로 되어 있어 이곳이 무이정사터가 아닌가 추측해 본다.
와룡폭, 연화대 조금 상부지만 주변 지형이 좁아 집 한채와 약간의 텃밭 정도 가꿀 수 있겠다.
무이정사는 명암선생이 1728년 최초로 건립하여 깊은 지리산중 이곳에서 18년간이나 지조 있게 살다가 1746년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곳이다.
◈ 137. 명암 정식(상)
“일생토록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으로써 제일 가는 일로 삼았다. 사람들이 ‘명(明)나라의 천지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명나라의 천지라고 여겼다. 사람들이 ‘명나라 시대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명나라 시대라고 여겼다. 사람들이 ‘명나라의 산수(山水)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명나라의 산수라고 여겼다. 사람들이 ‘명나라의 백성들이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명나라의 백성이라고 여겼다. 말이 명나라에 미치면 피눈물을 흘러 내렸다.” 그는 평생동안 의리를 숭상하던 조선이 오랑캐에게 짓밟힌 것을 원통해 하며 임란때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9세 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합천의 시험장으로 갔다가 우연히 중국 송나라때 호전(胡銓)이라는 사람이 지은 ‘척화소’를 읽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 때 오랑캐와 화의한 것도 오히려 차마 할 수 없는데 지금 천하는 결국 어떤 세상인가. 천지가 뒤집히고 갓이 밑에 가고 신발이 위로 가듯 법도가 무너지고 질서가 어지러운 때이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어찌 차마 지금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 나라는 명나라에 대해서 의리상 군신관계이고 은혜는 부자관계이다. 어찌 차마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 수 있겠는가”라고 비분강개했다. 그리고 유건을 찢어버리고 돌아와 명암거사(明庵居士)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명암은 해주 정씨로 증조부 진사 문익(文益)은 임란 때 나라를 구한 의병장 충의공 농포 정문부의 동생이다. 명문가의 핏줄을 이은 명암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났다. 7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8세 때 글을 지을 줄 알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일찍이 새로 지은 적삼을 입고 있었는데, 헐벗은 아이를 보고는 벗어서 입혀주었다. 10세 때 누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겨울철 고개 위의 외로운 소나무를 두고 시를 짓기를 “너는 태고의 마음이 있어 눈 속에 서서도 봄을 잃지 않았네(爾有太古心 雪立不失春)”이라고 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3세 때 족형(族兄)인 노정헌(露頂軒) 정구(鄭構)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이로부터 말과 행동이 모두 법도를 따라 마을의 덕있는 어른들이 “ 하늘이 낳은 참된 선비””라고 칭찬하였고, 명암을 대하는 사람들은 다 감히 태만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명암 역시 자신을 단속하는데는 매우 엄격했다. 비록 해가 지고 어두워져 사람이 없을 때나 이름난 운치있는 깊숙한 산수 속에 있을때도 갓을 바로 쓰고 정신을 집중하였다. 본래 술은 좋아했지만, 심하게 취하여 체면을 잃은 적은 없었다. “공(公)은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른다. 그 이름자도 모른다. 대개 그 조상(祖上)은 수양산(首陽山)에서 와서 대를 이어갔다. 그 성벽(性癖)이 보통이 아니라서, 착한 것을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기를 원수처럼 했다. 부유해도 즐거워하지 않고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고,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름난 경치 좋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구애받지 않고 바로 갔다. 해동의 산수에 공의 발자취가 거의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명암이 자신을 두고 말한 대목이다. 일찍이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꼭대기에 외로이 있는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에서 도를 닦는 승려 둘을 보니 양식은 떨어졌는데 면벽(面壁)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과 함께 말없이 앉아서 삼일 동안 일어나지도 않고 눕지도 않았는데,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두 승려가 함께 일어나 절을 하고서 기이하다고 탄복하고는, 솔잎 죽을 끓여서 바쳤다고 한다. 가야산, 태백산, 소백산, 오대산, 금강산, 묘향산, 금산, 월출산, 천관산 등에 발길이 두루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랑캐를 섬기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기 싫어 했던 명암은 우리나라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며 자연을 완상하고 시를 남겼다. 왕희지와 위부인의 글씨를 배워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 구곡산 무이구곡, 거창 수승대, 함안 의상대, 남해 금산 등에 명암의 필적이 많이 남아있다. 명암은 주자와 제갈량을 자신이 본받을만한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주자는 오랑캐인 거란족이 세운 금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북쪽의 잃어버린 강토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 인물이고, 제갈량은 위나라가 차지한 중원을 회복하여 한나라 황실을 옛날 도읍지인 낙양으로 옮겨가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명암의 지향점과 일치하는 측면이 많은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만년에 두류산에 들어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얻어, 주자(朱子) 및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초상을 걸고 아침 저녁으로 마주하고서 마치 살아 계신 분을 스승으로 섬기듯이 했다. 서가에는 ‘시경’‘서경’ 등의 책이 있고, 뜰에는 매화, 대, 난초, 계수나무, 소나무, 국화가 있었고, 또 두 마리 학 모양의 돌을 소나무와 계수나무 사이에 두고서 스스로 즐겼다. 찬양하는 글을 이렇게 붙인다. “명(明)나라 세월, 명나라 천지. 무이산(武夷山) 아홉 구비의 물,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있으니 어떤 거사(居士)인지? 거사에게 스승이 있으니, 회암부자(晦菴夫子 : 朱子)라네” 명암이 직접 쓴 자신의 전기 끝부분이다. 명암은 세속의 명예나 이익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참된 마음과 곧은 기운으로 산수간을 소요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그가 좋아했던 나무들도 모두 절개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명암은 진주사람이다. 비록 세상 일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진주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촉석루 중건기를 쓰고, 의암사적비를 세워 ‘진주기생 논개’를 ‘의기논개’로 불리게 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계속) |
138. 명암 정식(하)
경치가 남쪽지역의 고을에서 제일가는 곳 천년 슬픈 원한에 강의 물결은 목이 메이고 만고의 꽃다운 이름 돌 위에 머물러 있네 고요한 외로운 성 굽이엔 구름이 서려 있고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에 달빛 어린 가을이라 바람 앞에 서서 가장 슬퍼하는 바는 미녀가 어렴풋이 나루 어귀에 서 있는 듯 하기에 명암이 진주의‘의암(義巖)’을 두고 읊은 시이다. 명암은 평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신의 회포를 드러낸 시를 많이 지었다. 대개 감회와 마음속 울분을 드러낸 내용으로 효와 충이 녹아 있다. 의암을 바라보며 의기 논개의 충절을 생각하는 것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서 논개의 충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명암 정식이 어떤 선비인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암이 지은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때문이다. ‘명암집(明庵集)’에는 ‘의암비기(義巖碑記)’로 되어 있는 의암사적비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고 7만 민 관 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의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현판이 붙은 비각 안에 있는 의암사적비는 1722년(경종 2년)에 진주 사람들이 의기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명암이 글을 지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 1593년을 맞이하여 의병을 일으킨 선비인 김천일이 진주로 들어와 왜적에게 대항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대는 흩어지고 백성들은 다 죽었다. 논개는 짙게 화장을 하고 예쁘게 차려 입고서 촉석루 아래 뾰족한 바위 위에 서 있었다.(중략) 논개는 드디어 왜적을 끌어안고 떨어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 관기 가운데서 왜적을 만나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 논개 한사람에 그치지 않으나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저 관기는 음란한 창녀니 정렬로써 일컬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여 왜적에게 더렵혀지지 않았으니 그 역시 성스러운 임금의 교화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다(이하 생략)” 유몽인의 ‘어우야담’을 참고로 명암이 지은 이 글은 ‘관기논개’가 ‘의기논개’로 불려지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의암사적비’를 세우기 1년전, 당시 경상우병사인 최진한이 진주사람들의 뜻을 모아 논개의 충절을 조정에 보고 했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선 미천한 관기에게 포상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다시 경상 우병사에게 논개 순국사실을 증명할 자료를 요구했다. 당시 진주에는 아무런 증거물이 없었다. 하지만 진주 사람들은 민과 관이 뜻을 합쳐 금품을 모으고 의암 사적비를 건립해 이를 증거물로제출하려고 경종 2년(1722) 4월, 진주 선비 명암 정식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했던 것이다. 명암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문을 짓고 말미에“이 내용은 당시 실록(實錄)에서 나온 것이니 비문에 거듭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이를 그대로 새기고…”라고 하여 어우야담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경상우병사 최진한은 진주에 의암사적비를 세운 뒤 비변사에 “논개순국을 진주사람들이 비석에 새겨 온 나라에 알리고자 하였는데 어찌 사실이 아니겠습니까?”라는 취지로 장계를 올려 마침내 천추에 길이 남을 의기사(義妓祠)가 진주에 서게 된 것있다. 명암 정식은 당시 명리를 따르지 않고 대의만을 추구하던 선비로, 임란 의병장 농포 정문부가 종증조부이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에 의암을 새긴 정대륭은 농포의 조카이다. 진주사람들이 명암으로 하여금 의암사적비문을 짓게 한 것은, 그의 명망 뿐만이 아니라 집안 내력도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명암은 당시 경상우병사 최진한과 시를 주고 받을 만큼 친분도 있었다. 명암문집에 ‘정최병사구화(呈崔兵使求和)’‘차최병사촉석운(次崔兵使矗石韻)’이란 시가 전하는데, ‘최병사에게 주어 화답해 주기를 바라는 시’와 ‘병사 최진한의 촉석루 운자를 따라서 지은 시’인 것이다. “파르스름한 바위는 구르지 않고 촉석루는 위태로운데/삼장사와 선녀같은 여인 지난 자취 기이한데/한이 긴강에 들어 층층 물결 푸르런데/지금까지도 석양 때가 되면 목이 메인다네” 최병사의 운자를 따라 지은 시로, 삼장사와 논개의 충절을 생각하면 목이 매인다는 내용이다. 명암은 진주에 ‘봉곡정사(鳳谷精舍)’를 지어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비봉산 밑에서 봉황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면서 진주의 경치를 읊기도 했다. 8수가 전하는데 2수만 소개한다. 먼저 의곡사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지은 시(義谷晨鍾)를 보자. “산의 나무는 짙게 우거지고 밤빛은 어두운데/저 멀리 몇겹의 구름속에 조그만 암자 있구나/발 내리고 책 읽기 끝내고 혼자 자려 하는데/때때로 은은한 종소리 문안으로 들어와 들리네”봉곡정사에서 새벽까지 글을 읽다가 의곡사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종소리를 듣고 지은 시로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다음은 망진산 저녁봉화(望陣夕烽)를 보고 읊은 시이다. “고래 등 같은 파도 치지 않고 바다는 고요한데/상황 알리는 봉화는 항상 국경 지방의 안전 전하네/시인이 시 읊고 즐기는 일을 하도록 해주어/해질녘 구름 사이에서 밝아졌다 꺼졌다 하는 것 누워서 보네” 최근에 다시 세운 망진산 봉수대가 명암이 살았던 시절에 나라의 안전을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다. 명암은 진주의 대표적 명승 촉석루 중건기를 짓기도 했다. 지금 촉석루엔 그의 중건기가 걸려 있는데, 그 첫머리는 “영남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인데 촉석루는 홀로 제일가는 누각으로서 동남지방의 명승으로 그 이름을 독차지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돌 절벽이 높고 강가 언덕의 대밭은 시원스럽고 두 갈래의 물이 가운데로 갈라져 기이한 바위가 층층으로 펼쳐져 있다”로 시작된다. 명암은 1746년 5월 15일 향년 64세로 무이정사(武夷精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종때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을 했을 때, 자신이 어찌 모르겠는가. 내 일생을 가만히 헤아려 보니,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백세청풍(百世淸風)이나 만고강상(萬古綱常)등의 말을 나에게 적용한다 해도 내가 크게 사양할 것은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대명처사(大明處士)로 나의 명정을 쓰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처럼 명암은 진주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진주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명암을 거론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설명]의암사적비. 1722년 명암이 진주사람들의 뜻을 모아 지은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 의암 내려가는 길목에 있다. |
오늘 무이구곡을 다 둘러본 셈이다.
각자 찾기가 어려울 것 아닌가 하는 염려는 우려였다. 모두 찾을 수 있었다.
제월대를 거쳐 이번엔 등산로를 따라 도솔암으로 내려간다.
도솔암 입구
도솔암도 둘러본다.
도솔암까지는 중소형 차량은 오를 수 있다. 주차 시설은 협소한 편으로 승용차 몇 대 정도는 가능하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오늘 탐방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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