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 문학기행 / 제승당, 박경리문학관, 해저터널, 윤이상기념공원, 시립박물관, 충렬사, 서피랑, 세병관
인제대학교 인문도시 지원사업의 하나로 우리나라 남부지역 여러 문학관을 다녔다.
단순한 관광을 넘어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오늘 통영 박경리문학관을 끝으로 이 사업이 마무리를 짓는다.
이순신과는 구국충정이외에 난중일기, 한산도가, 한산도 야음 등에서 문학성을, 서피랑은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되는 등, 통영 또한 문학과 연계지을 수 있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한산도 제승당 - 박경리문학관 - 중식 - 해저터널 - 윤이상기념공원 - 통영 시립박물관 - 충렬사 - 서포루 - 세병관. (2021. 10. 2. )
▷ 탐방후에
▣ 한산도 제승당
한산도 가는 배편은 2군데 있다.
일반적으로 통영연안여객선 터미널에서 제승당으로 운행하는 배편이 있고(배삯 왕복 11,000원)
도남동 유람선 선착장에서 운항하는 유람선이 있다( 배삯 16,000원)
우리 일행은 유람선을 이용했다.
유람선의 경우 위 안내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루방바위, 복바위, 군함바위, 소혈도쪽으로 돌아서 한산도 제승당으로 간다.
우측 하단의 바위가 하루방바위이다.
저곳은 군함바위라 이름붙였다.
이곳은 소혈도.
제승당 입구의 거북등대
용머리 아랫쪽의 돼지머리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유람선은 통영 외항쪽으로 약간 돌아서 제승당으로 간다.
한산도는 초행은 아니다.
과거 몇 번 제승당을 둘러본 적이 있으며 후에는 한산도 망산 등산위주로 탐방하였기에 제승당은 제법 오랫만에 찾아본다.
제승당 입장료는 없어졌다.
수개월간 진을 같이했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다. <난중일기> 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를 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이순신은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랴며 시가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 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 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 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의 전란 내용이 들어있다.
난중일기는 진중일기로서의 그 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난중일기는 그 친필 원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원본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순신의 문필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있어 그의 문재(文才)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권1에는 <수사 선거이와 작별하는 시> <무제육운> <한산도야음> 그리고 말미에 24자로 한역된 <한산도가>가 수록되어 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한산도의 작품이 20수나 있었는데 그중 "바다에 맹세함에 고기와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1937년 간행된 조윤제의 <조선시가사강 조선시가사강>은 조선 중기의 시조문학발휘 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제승당으로 가는 중간에 '한산도야음'과 '한산도가' 시비가 있다.
閑山島夜吟 / 한산도야음
水國秋光暮 驚寒雁陳高 (수국추광모 경한안진고)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우심전전야 잔월조궁도)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대첩문
대첩문 앞에 우물이 있다.
물이 깨끗하다.
제승당(制勝堂)
제승당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부하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현재의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 기능을 담당했다.
이순신은 선조26년(1593) 7월 부터 한양으로 압송되어 갔던 해인 선조 30년(1597) 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서 주둔했다. '승리를 만드는 집'이라는 이름의 제승당에서 이충무공은 화약을 사용한 신무기인 총통의 제작과 보급에도 힘썼으며, 1,491일 동안의 일을 기록한 <난중일기>중 1,029일의 일기와 많은 시가 쓰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이순신이 기거했던 운주당(運籌堂)의 터이다. 이순신은 운주당을 집으로 사용하는 한편 집무실로도 사용하였다. 당시의 운주당은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조선 수군이 칠천향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영조15년(1739)에 통제사 조경(조경)이 다시 세우고 이름을 제승당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제승당은 1976년 다시 지은 것이다.
운주(運籌) : 지혜로 계책을 수립한다는 뜻
<현지 안내문에서>
제승당 내부에는 한산대첩도를 비롯하여 애국충정도, 진중생활도, 노량해전도 등이 걸려있고 좌측 바닥에 총통과 우측 벽면 아래 제승당 대형 현판(제140대 통제사 김영수의 친필)이 있다.
이순신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공덕비
오른쪽부터 이태상, 이한창, 이태권, 이승권, 이규석, 이규안***의 이순신 후손으로 삼도수군통제사나 부사**의 벼슬을 지낸 이들 중 어진 정치로 칭송을 받은 6명의 비석이다.
수루(戍樓 / 지킬 수)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망루이다.
閑山島歌 (한산도가)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 撫大刀 (한산도 월명야 상수로 무대도), 지킬 戍, 어루만질 撫.
深愁時 何處 一聲羌笛 更添愁 (삼수시 하처 일성강적 갱첨수) 종족이룰 강,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찰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胡笳(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한산대첩은 선조25년(1592)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정예 수군을 무찌른 전투이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7월 8일과 10일에 각각 한산도 앞바다와 안골포(진해 웅동에 있었던 포구)에서 왜군을 크게 이겼다.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이 큰 승리를 거둔 데는 학익진과 거북선, 판옥선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전투에서 왜적의 배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빼았아씅며 20여척을 불태웠다. 조선 수군은 한산대첩의 승리로 왜군의 보굽로를 차단하여 북진을 막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켰다.
한산대첩은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고 있으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4대 해전에 속하는 유명한 해전이다.
한산정
이충무공이 부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45m 정도로 활터와 과녁시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와는 달리 주변 수풀이 많이 우거저 바다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충무사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정은 종이품 통제사의 관복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제승당 유허비는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 박경리 기념관
박경리 기념관 : 통영시 산양읍 산양중앙로 173번지
도로변에 위치하여 주차시설이 열악하다.
박경리 문학공원 : 원주시 토지길 1
박경리 문학관 :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79
박경리 생가 : 통영시 충렬1길 76-38
▣ 해저터널
용문달양 (龍門達陽)
▣ 윤이상 기념관
▣ 통영시립박물관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우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하며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陣)에 머문 일이 있는 고상안(1553~1623, 당시 삼가 현감)이 그의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肥福將也)'/ (순신은)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상(像)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복이 있는 얼굴은 아니구나"로 느꼈다는 기록이 있다.
▣ 충렬사
충렬사는 다른 편에서 다룬 적이 있다.
통영 명정(統營 明井)
통영 명정은 출렬사 아래에 있는 2기의 우물을 일컫는 말이다. 윗쪽 샘인 일정(日井)과 아랫쪽 샘인 월정(月井)의 이름을 합쳐 명정이라 하였다.
1670년 김경이 제51댜 통제사를 지낼 때 이 두 우물을 팠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우물을 하나만 팠더니 물이 탁하고 양이 적었다. 그래서 하나를 더 팠더니 비로소 물이 맑아지고 양도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 기록에도 명정리, 명정동과 같이 우물 이름과 관련된 마을 이름이 나타나므로 우룰을 처음 설치한 때는 167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대대로 이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은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만큼 신성시되었다. 일정의 물은 충무공 이순신의 제사에 사용하고, 월정의 물은 일반 민가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한때 일정과 월정을 합하여 팔각정으로 다시 지었더니 돌림병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팔각정을 허물고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명정의 모습은 여러 문학작품에서도 묘사되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백석의 시 <통영>. 김춘수의 시 <명정리>에 통영의 명정이 등장한다.
▣ 서피랑
▣ 세병관
세병관으로 왔다.
입장료는 어른 1인당 3,000원,
운주당
운주당은 통제사가 업부를 보던 영역이다.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하며 세병관 동쪽에 위치한다.
내아군 내에는 운주당과 이순신 장군의 영당이자 관사인 경무당이 자리하고, 그 우측으로 살림채인 내아가 자리한다. 중앙의 관아와 달리 지방의 관아에서는 관리들의 식구들이 살림하는 내아가 있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공존하는 특징이 있는 곳이다.
백화당(百和堂)
세병관 좌측(서쪽) 일련의 건축물중 상부쪽에 위치한다.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도 맡았으며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 이외 여러 건물, 통제사비석군, 석인, 기삽석통 등이 있다.
세병관을 끝으로 통영 일정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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