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제주 추사 유배지, 송악산

정헌의 티스토리 2024. 7. 3. 22:08

■제주 추사 유배지, 송악산, 중식, 강의1, 강의 2, 강의 3, 강의 4.

 

호텔 조식 후 잠시 바람쐬러 간다. 

대정읍성 동문 안쪽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 유배지와 기념관을 찾았으나 마침 월요일이어서 추사 기념관의 문은 닫혀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1840년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처음에는 포교 송재순의 집에서 여러 해 신세를 지다가 대정고을의 대지주인 강도순의 집으로 거쳐를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유배지의 거처는 당시 부자집인 셈이다.

대정읍에서 멀지않은 곳에 송악산이 있어 잠시 바닷바람을 쐬는 수준으로 30분여 둘러보았다.

오후 일정은 강의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일정(2024. 7. 1.)

호텔조식 - 대정읍 추사 유배지 - 송악산 - 중식.

강의1 : 우수 사례로 본 향교에서 하는 일(이대호 성균관총괄사업단당)

강의2 : 유림과 현대사회의 조화(이해준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강의3 : 문묘의례(서정택 성균관 전례위원장, 박광영 석전대제보존회 사무국장)

강의4 : 행정실무(신화철 성균관 총무부장)

 

 

▷탐방후에

 

▣펄리호텔 숙박

제주시  서남쪽 외곽에 위치한 펄리호텔에서 2박 했다.

3성급 호텔로 단체 손님들이 주로 이용 할 듯,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다.

 

 

 

 

 

로비

 

 

 

 

 

고급스럽운 호텔은 아니라서 레스토랑도 수수하며 나쁘지는 않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 서귀포 대정읍 추사 유배지(추사 적거지 기념관/ 제주 추사관)

 

서귀포 대정읍  

 

○대정현성 : 조신시대 제주도 3대 읍성 중 하나로, 조선 태종 18년(1418)에 대정현감 유신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성하였다.

○제주 추사관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 세계를 기리기 위해 2010년 5월 건립되었다.

○ 심의사비 : 삼의사비는  1901년 제주민란 당시에 사회적 폐단을 시정하고자 장두로 나섰던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등 세 사람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 두레물: 도레물이라고도 하며, 1417년(태종17)에 대정현 초대 현감인 유신에 의해 대정성이 축조될 당시 주민과 군인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대정현 유일의 우물터였다.

○ 동계선생유허비 : 동계 정온선생은 조선 중기 제주도에 유배된 문신으로, 유배될 때 사람들에게 학문과 예를 가르쳐 1668년(현종 9) 그의 덕을 추모하여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선생이 해배된 후 제주에 유배온 김정희가 당시 제주목사 이원조에게 부탁하여 동계의 적소가 있던 지금의 안성리에 송죽사와 유허비를 세웠다. 현재 비석은 보성초등학교로 옮겨져 있다.

○ 돌하르방(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2호) : 제주도의 3대 읍성인 제주성, 정의성, 대정성의 성문 입구에 세워져 있었던 석상이다. 성안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성을 지키는 수문장으로서의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 동문지, 서문지, 남문지에 각각 4기가 이설. 정비되었다.

 

 

 

 

 

대정성지(大靜城址)

대정성지는 조선 태종18년(1418)에 대정현감 유신(兪信)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읍성의 터이다. 성벽을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며, 보성, 인성, 안성 일대에 걸쳐있다. 동문, 서문, 남문 세개의 성문이 세워졌는데 문 위에는 누각이, 문 앞에는 돌하르방이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 등이 있었고, 십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이 성은 집과 밭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제주에서 흔히 보이는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성벽에서 당시의 축성법을 엿볼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제주 대정 삼현시 비

우축 옆에 성문앞에 세웠다는 돌하르방이 몇기 있다.

 

 

 

 

 

주차장에 주차 후 추사관으로 간다.

 

 

 

 

 

일직선으로 늘어선 돌담이 대단해 무슨 담장인가 했는데 대정성을 복원한 것인가 싶다.

대정성은 안내도를 보면 사각형 형태로 이것이 성벽이라면 남쪽 우측의 성벽에 해당한다.

대정성의 당초 높이는 약 5.1m 정도로, 이 성의 높이는그 정도는 되어보이지 않는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추사 김정희는 시.서.화 (詩.書.畵)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헌종6년(1840)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14년(1848)까지 약 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이곳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살면서 제주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 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차를 매우 좋아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 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제주 지역의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2010년에 세워진 추사관에는 김정희와 관련한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추사관

마침 월요일이라 이곳도 휴관이다.

 

 

 

 

 

윤상도는 영조44년에(1768)에 경기도 양주목(현  양주시)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정, 본관은 파평으로, 180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부사과에 올랐다.

1830년 호조판서 박종훈, 유수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을 탐관오리라고 비난하여 탄핵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고문당한 다음 추자도에 유배되었다가 1840년(향년 72세) 유배지에서 의금부로 끌려와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문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 세도가의 좌장인 경주김문의 김노경을 지목했던 바, 바로 김정희의 아버지였다. 이에 김노경은 전라도 절해고도 고금도로 유배가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추사 김정희는 윤상도가 제출한 탄핵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죄로 뒤늦게 잡혀갔는데, 안동김문은 그의 죄가 아비 김노경보다 더 깊다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문과정에서 관련된 증인들이 모두 고문치사하는 바람에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김정희는 6차례 고문을 당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사형만 면죄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그때가 1840년(헌종6) 쉰다섯의 나이였다.

36대의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오른 김정희가 전주, 남원, 나주, 해남, 강진을 거쳐 도착한 곳은 제주도 북쪽의 화북 포구로서, 그곳에서 대정현으로 이송된 그는 무려  9년간을 제주도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다행히 1848년 풀려났으나, 다시 1851년(철종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데 대한 예론문제에 얽혀 이번에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영의정 권돈인과 친했던지라 그의 편을 들었던 것인데, 그가 실각하자 곧바로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2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유배지에서 죽지않고 돌아와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살며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

서울 봉은사 판전(불경 경판을 모아 놓은 전각) 현판은 그가 죽기 3일 전에 쓴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왼쪽에 '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쓴 작품'이란 첨구가 붙어있다한다.

 

 

 

 

 

추사관 측면,

 

 

 

 

 

추사관 맞은편에 추사선생 동상이 있다.

 

 

 

 

 

김정희 유배지로 간다.

 

 

 

 

 

의문당(疑問堂)

추사 김정의가 대정향교에 써 준 현판이다. 1846년11월에 제자 강사공이 추사에게 청하여 추사가 쓰고 향원 오재복이 새겼다. 1928년 봄에 동재를 중건한 후 다시 걸었다고 현판 위에 쓰여 있다. 대정향교 학생들의 공부방인 동재에 걸려 있었다.

 

은광연세(恩光衍世/넘칠 연)

제주로 유배 온 추사는 의녀 김만덕의 선행에 대해 전해 듣고 감명을 받아 그의 후손인 김종주에게 <은광연세>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은헤의 빛이 온 세상에 뻗어나간다'라는 뜻이다.

 

일로향실(一爐香室)

추사가 초의선사의 일지암에 써준 현판으로, '화로 하나가 있는 다실'이라는 뜻이다. 추사 현판 중 명품으로 손꼽히는데, 제주시절 작품이다.

1843년 봄 일지암의 초의선사는 아내를 잃은 추사를 위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훗날 <완당김공제문(祭文)>애서 "제주에서 반년을 한 지붕에서 지냈다."고 밝혔다.

초의선사는 추사와 신분을 초월하여 가장 가깝게 지낸 벗이자, 교감을 나누는 동지였다. 둘의 나이 또한 같았다. 초의는 제주 유배시절 세 차례 제주를 방문하여 추사를 위로하였고, 유배지의 추사를 걱정하여 해마다 햇차를 보내주었다.

 

세한도

추사 나이 59세 되던 1844년, 제주도에 유배 온지 5년이 되었을 때, 추사는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 歲寒圖>를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 주었다. 제자인 역관 우선 이상적은 스승 추사가 귀양살이 하는 동안 연경에서 구해온 귀중한 책을 정성으로 보내주었다. 추사는 그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1847년 봄, 소치 혀련이 스승인 추사를 모시러 제주로 왔을 때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나막신 극>에 착안하여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을 그렸다.

소치는 추사의 서울 집에 머물며 그림과 글씨를 직접 배웠던 수제자로 초의선사가 소개해 주었다. 그는 세 차례 유배지의 스승을 방문하였다.

 

수선화부(수선화부)

수선화 그림 한 폭이 실려 있는 목탄 탁본이다. 추사 김정희는 수선화를 무척이나 아꼈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겻다.

유배생활 중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섬 곳곳에 수선화가 피어 있어서 기쁘나 섬사람들이 소와 말의 먹이로 삼는것이 단지 애석하다.'는 내용이 있다.

 

 

 

 

 

유배지 강도순의 집이다.

 

 

 

 

 

안거리

안거리(안채)는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강도순은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강도순네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전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처마 아래의 또다른 처마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

 

 

 

 

 

밖거리(바깥채)

밖거리는 김정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김정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제주 유배 시절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마주보이는 곳, 모거리(별채)

모거리는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다.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의 형을 받은 김정희는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다. 그의 추사체는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았다.

<현지 안내문에서>

 

 

 

 

 

물팡과 물허벅

식수로 이용할 물을 길어올 때 사용했던 옹기를 물허벅이라 하고, 이것을 올려놓는 곳을 물팡이라 한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바닷가의 샘물이나 고인 빗물을 물허벅에 길어와 식수로 사용했다.

<현지 안내문에서>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 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쌓아 놓은 것을 눌이라고 하며, 이를 만드는 행위를 '눌을 눈다'고 했다.

 

 

 

 

 

안채 부엌 쪽 장독대.

 

 

 

 

돗통시

제주의 가정마다 하나씩 있던 돗통시는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놓은 공간이다. 돼지를 돗통시에 키워 인분을 처리하고 그곳에서 나온 퇴비를 다시 밭에 뿌려 이용하는 방법은 제주만의 지혜로운 농법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말방에(연자방아)

말방에는 소나 말을 이용해서 곡식의 이삭을 찧거나 빻는 일에 이용되었다. 보리와 조가 주식인 제주에서 꼭 필요한 말방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었는데, 이 집에는 개인 소유의 말방에가 있었다.

 

 

 

 

 

밖거리(바깥채)의 뒷편인 셈이다.

 

 

 

 

 

출입문이자 쉐막

소를 기르는 외양간을 쉐막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대문 옆에 두었다. 

대문이 없는 제주 전통 민가와는 달리 이 집처럼 부잣집에는 이와 같은 대문이 있었다.

 

 

 

 

 

 

 

 

 

 

 

 

은주(酒)식당

사람이 살지 않는 둣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대정교회

순교자 이도종 목사 성지

대정교회는 제주교회사에 제주출신 1호 목사요, 1호 순교자가 되시는 이도종(1892~1948)목사의 유해와 순교기념비가 봉안되어 있는 제주 기독교 순교성지이다.

주차장 옆에 있어 둘러보았다.

 

 

 

 

대정교회 정문

 

 

 

 

▣송악산

 

송악산주변 제주 올레길 일부를 걸으러 왔다.

 

 

 

 

 

다크투어리즘

전쟁.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제주 셋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 제주 셋알오름 일제 동굴 진지,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 비행기 격납고, 제주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일제 지하벙커를 잇는 길로 올레길 10코스와 일치하거나 이웃에 있다.

 

 

 

 

 

제주 송악산해안 일제동굴진지 / 국가등록문화유산

 

이 시설물은 일제강점기 말 패전에 직면한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연합군 함대를 향해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구축한 군사 시설이다. 그 형태는 ㅡ자형,  H자형, ㄷ자형 등으로 되어  있으며 제주도의 남동쪽에 있는 송악산 해안 절벽을 따라 17기가 만들어졋다. 제주도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해안 절벽을 뜷어 만든 이 시설물은 일제 침략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함과 더불어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이 강요되는 전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송악산 일제 동굴진지

송악산 외부 능선 해안에 있는 이 시설물은 당시 일본군의 군사시설로서 1943~194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송악산에는 이처럼 크고 작은 진지동굴이 60여개소나 되며,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로서, 주변에는 섯알오름 고사포 동굴진지와 해안동굴 진지, 알뜨르비행장. 비행기격납고. 지하벙커. 이교동 군사시설. 모슬봉 군시시설 등이 있다.

 

 

 

 

 

 

 

 

 

 

 

 

갈림길

해안길은 공사중 표시가 있으나 공사중이지 않다.

오늘 탐방코스가 짧아 도로를 따라 깄다가 해안 산책길로 되돌아 올 것이다.

 

 

 

 

 

송악산 등산로 갈림길을 지나,

 

 

 

 

 

저만큼 송악산 갈림길이 한 곳 더 있다.

저곳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다닌다.

 

 

 

 

 

 

 

 

 

 

 

 

저곳

바람의 언덕?까지 가야 제대로 왔다 가는 길인데 시간이 부족하여 되돌아 간다.

 

 

 

 

 

 

 

 

 

 

 

 

 

 

 

 

 

 

 

 

 

 

 

 

 

 

 

 

 

 

 

 

 

 

 

 

 

 

 

 

 

 

 

 

 

 

 

왕복 30분여  짧은 탐방으로 해안 경관만 잠시 둘러본 셈이다.

오후 강의시간 때문에 잠시 바람씌운 제주 송악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