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거창 정온고택과 반구헌.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모리재. 황산마을

정헌의 티스토리 2022. 10. 11. 22:06

■ 거창 정온고택.반구헌.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모리재. 황산마을 

 

한달에 한번 각자 추천한 도서를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이란 제목으로 이상현님이 쓴 닮은 듯 다른 한옥에서 발견하는 즐거움 엮은 도서를 읽었다. 한옥을 또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내는 재주가 좋아 과거 건성으로 두어번 둘러보았던 정온 고택을 다시찾아 본다. 나선김에 모리재, 황산마을의 한옥도 둘러본다.

작가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감탄해야 할까? 

아님 젊잖은 지식 사기꾼?

하여튼 이 도서를 읽고 몇 군데 여행할 곳이 생겼다.

 

 

▷가는 길

 

 

 

▷탐방코스

동계 정온고택. 반구헌 -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 모리재 - 도감어가 중식 - 황산마을 (2022. 10. 7.)

 

 

▷ 탐방후에

 

동계 정온(1569~1641)선생은 조성 중기 문신으로 절개와 충절로 이름난 선비이다.

 

1569년(선조2) 경상도 안음현 역동리(지금의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초계, 호는 동계이며, 시호는 문강공이다. 부친은 진사 정유명이며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의 스승인 갈천 임훈, 퇴계 이황, 용주 조경, 미수 허목 등 여러 명현들을 만났다.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고,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도왔다.

1610년(광해군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1614년 부사직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의 참수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서 10년간 주거를 제한받으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제주도에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글공부를 가르치는 일에도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제주 오현 중 한 사람으로 추앙 받았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쫒겨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사간, 성균관직강, 남원도호부부사, 사간원대사간, 승정원도승지, 형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맞섰다. 1637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최명길 등이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정온은 이를 매국으로 보고 강력하게 척화를 주장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져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내려가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한 정온은 칼로 자신을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끝내 청나라에 항복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때(자결을 시도한 때)가 선생의 나이 68세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문.

 

정온 선생 고택 정문에 혹  건양다경, 입춘대길 방에  <감고 숭조정축후 379년 입춘 / 숭정 정축후 379번째 맞이하는 봄임을 감히 알림> 글자가 씌여 있다면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로 정온 선생이 배를 찌른 1637년이 숭정 정축년이라 한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땅의역사 중 정온선생의 글에서 발췌>

 

 

 

 

 

<문강공동계정온지문>편액이 걸려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문강공은 정온선생의 시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다.

 

정온 선생은 은퇴후 덕유산 모리에 은거하다가 여생을 마감했다. 돌아가신 후에는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광주 현절사, 제주 귤림서원, 함양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곳 동계 정온선생 종택은 후손들이 1820년(순조 20)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랫채, 곳간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우측의 노거수 매화나무 한 그루.

 

 

 

 

 

안채가 궁금하다.

 

 

 

 

 

중문채는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현 후손이 살고있는 집이라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문구가 있지만 책의 내용에 혹하여 어떻게 둘러볼 수 있을까 기웃거려 본다.

 

 

 

 

 

마침 아주머니 한분이 계셔서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니 둘러보라고 한다.

 

 

 

 

 

안채.

주인은 출타 중이시고, 아랫채에 90을 넘기신 노모님이 계시단다.

 

 

 

 

 

언듯

부엌이 2칸, 저쪽 대청마루도 안채에선 보기 어려운 곳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안채,

7칸 건물이다.

처마끝의 일직선에서 강직함을 찾아본다.

 

 

 

 

 

아랫채.

노모가 거주하고 계신단다.

 

 

 

 

 

마당 가운데 오래된 맷돌도 보인다.

 

 

 

 

 

안채에서 바라본 사랑채

즉 사랑채의 뒷편인 셈이다.

 

 

 

 

 

사랑채에서 안채 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문과 마루를 내었다.

 

 

 

 

 

곳간채

 

읽은 도서엔 반빗간채로 표시되어 있다.

반빗간(집에서 반찬을 만드는 곳)을 다음에서 검색해 보니 독립된 부엌전용 건물이라 한다.

벽을 나무로 한 것은 통풍 때문이라 한다.

 

 

 

 

 

반빗간 좌측 뒷쪽의 작은 건물,

화장실 같은데 지금은 사용하지는 않는 건물이다.

 

 

 

 

 

안채는 축담과 마루의 높이는 제법이다.

 

 

 

 

 

부엌은 2칸이다.

각각의 창문살도 유심히 보니 운치가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부엌

현재는 겉만 옛부엌이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부엌 좌측에 우물이 있고,

 

 

 

 

 

뒷쪽에 장독대가 있다.

 

 

 

 

 

장독대 옆에, 안채 뒷쪽에 사당이 있다.

 

정희량은 정온선생의 현손(손자의 손자)이다. 이인좌의 난으로 잘 알려진 무신의 난의 주역이다.

역도를 꾀했으니 가문이 온전할 리 없다. 집안을 살려낸 것은 죽은 정온이었다. 세상은 정온을 잊지않았다. 정희량의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충신 정온의 제사를 끊기게 할 수 없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충절이 인정되어 훗날 1764년 영조는 정온의 후손에게 불천위 제사를 허용했다. 5대가 지나도 영원토록 제사를 지낼 지위를 얻은 것이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땅의 역사에서 발췌>

 

 

 

 

 

정면에서 바라본 사당.

 

 

 

 

 

 

 

 

 

 

 

 

사당 가운데 문이다.

 

 

 

 

 

안채와 사당을 둘러보고 중문을 통해 사랑채로 되돌아 나간다.

 

 

 

 

 

사랑채

 

 

 

 

 

정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각종 편액

이 충신당(충신이 사는 집) 현판은 제주도로 유배갔던 추사 김정희가 정온선생을 기려 훗날 적어주었다 한다. 

 

 

 

 

 

 <모와 / 아무개가 사는 집> 현판은 나라를 빼앗긴 불우한 왕족 이강이 썼다고 한다.

현 이 현판은 서울 경운박물관 <의친황과 황실의 독립운동> 전시에 2023년 1월 20일까지 대여 중이라  실물을 볼 수 없다.

 

 

 

 

 

 

 

 

 

 

 

누마루와 차양.

 

 

 

 

 

 

 

 

 

 

 

둘보의 휘어진 정도가 비슷한 목재를 썼다.

 

 

 

 

 

계자난간(난간 기둥이 닭다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

 

 

 

 

 

용마루에서 큰 특징을 찾지못하고, 이곳 기와에서 숫자. 용의 모습. 무궁화 등 문양을 본다.

 

 

 

 

 

사랑채 앞 마당가의 이 건물은 ?

아랫채가 노모가 거주하시는 건물이라면, 이 건물에 대한 현지 안내문 또는 읽은 도서에 언급이 없다.

일부 보수가 이루어졌지만 비교적 오래된 건물이다.

 

 

 

 

 

정온 종택의 앞 들판

한 필지의 논을 건너 개울이 흐르고 있다.

 

 

 

 

 

바로 동계 정온 고택과 접하여 반구헌이 있다.

 

 

 

 

 

반구헌은 조선 헌종.철종년간에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 선생이 기거했던 집이다.

야옹선생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재산과 거처가 없을 정도로 그의 목민관 생활은 청렴하였으며, 안의 현감의 도움으로 이 반구헌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반구(반구)는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 보고 반성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 곳에는 현재 대문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으며, 사랑채 상량문에 의하면 이 건물이 창건 혹은 중건된 시기는 187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정면5칸, 측면5칸으로 사대부가의 품격이 드러나는 비교적 큰 규모의 팔작지붕 민도리 건물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대청이 가운데 있지 않고 1칸 크기인데 반해 방이 3칸이며 측면에 난간을 두룬 누마루 1칸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방 2개를 동시에 난방할 수 있게 건물 뒷편 중앙에 아궁이를 설치한 것도 특이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좌측(사랑채를 앞에서 바라보았을때) 에서 바라본 사랑채

 

 

 

 

 

사랑채 뒷편에 안채가 있다.

 

 

 

 

 

가운데 대청마루는 층을 두었다.

 

 

 

 

 

안채 뒤편엔 유난히 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안채의 뒷편이다.

 

 

 

 

 

안채 측면에도 툇마루가 있다.

 

 

 

 

 

이 반구헌은 비어있어 조심스레 방안을 둘러본다,

 

 

 

 

 

저 창의 용도도 궁금하다,

 

 

 

 

 

그래도 당시 잘 지은 집이라 구조가 오밀조밀 짜임새 있다.

 

 

 

 

 

 

 

 

 

 

 

 

안채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사랑채 뒷모습

가운데 아궁이를 볼 수 있다.

 

 

 

 

 

좌측 누마루 밑에도 아궁이가 있다.

 

 

 

 

 

반구헌을 둘러보고,

몇 년 전 탐방한 적이 있는 수승대트레킹길 들머리를 확인해 보기위해 강변쪽으로 나왔다.

 

 

 

 

 

주변 안내표지판과 이정표가 있어 충분히 알 수 있다.

말목고개까지는 길이 괜찮았는데 말목고개에서 모리재로의 산길은 잘 모르겠다.

 

 

 

 

 

인근에서 바라본 정온 종택쪽,

바로 뒷편 조그만 야산이 북쪽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다.

 

 

 

 

 

강변쪽으로 나서면 연륜과 크기가 상당한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다.

주변 강변쪽으로 같은 수종이 몇 그루 더 있지만 유독 이 나무가 크다.

주변을 정비하고 깨끗이 정리하면 좋을 곳이지만 개인 사유지인로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은행나무 뒷쪽에 정자가 있다.

문은 잠겨있다.

 

 

 

 

 

위 정자는 수승대트레킹길 쪽으로 돌아서 조금 올라가면 들어가 볼 수 있다.

주변 꽃을 가꾼 흔적으로 보면 주인이 한번씩 오는 곳 같은데 손길이 많이 모자란다.

 

 

 

 

 

 

 

 

 

 

 

 

무슨 글자?

 

 

 

 

▣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도로변에 농산리 석조여래불상을 알리는 이정표가 하나쯤 있었음 싶은데 없다,

차량 몇대의 주차공간과 내비상 위치를 보고 적당히 판단해야 할 듯,

 

 

 

 

 

이곳은 과거 수승대 트레킹길을 걸으면서 다녀간 적이 있는 곳이다.

 

 

 

 

 

주변에 절터의 흔적에 대한 소개는 없다.

 

 

 

 

 

 

 

 

 

 

 

 

이 불상은 (보물 1436호)은 광배와 받침대를 모두 갖춘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석불이다.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서 높고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알맞은 이목구비를 갖춘 둥근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당당한 가슴과 함께 부드러운 경사를 이룬 유연한 어깨. 잘록한 허리와 날씬한 다리, 얇은 옷자락(법의)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는 불상의 뛰어난 입체감을 더해준다. 여기에 양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통견)은 가슴위에 몇 갈래의 U 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다가 허리부분에서는 Y자형으로 갈라지고 두 다리에 살짝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렸다가, 종아리부분에서 큰V자로 마무리 되었다.

이러한 옷자락의 표현법을 인도의 우드야나(Udyana)왕 여래상 형식이라 부른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가 성불한 후 한때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왕생) 어머니에게 설법하였는데, 그때 밧사(Batsa)국의 우드야나왕이 부처가 잠시라도 지상에 없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cm크기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때은 불상이 최초의 부처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여래상의 옷자락의 조각 형식이 이 석조여래상 같은 형태였다고 한다, 이 같은 옷자락의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몸 전체를 감싼 공배에는 불꽃무늬를 새겼고,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받침대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면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입상.

 

 

 

▣ 모리재

 

모리재로 가는 길이다.

모리재는 북상면 농산리 마을 뒷편에 있다.

 

 

 

 

 

농산리 마을 입구에 강선대가 있다. '허브팜 민들레올' 건너편이다.

 

 

 

 

 

강선대 

 

 

 

 

 

화엽루(꽃 화, 잎 엽)

 

강선대 입구에서 약 2km,

조금은 좁은 농로를 따라 산중턱으로 올라야 한다.

 

 

 

 

 

1638년(인조 16) 덕유산이 모리(북상면 농산리)에 은거하였다. 모리는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이곳에 풀을 엮어 집을 만들고 흙을 쌓아 침상을 만든 뒤 '모리구소'라 이름 붙였다. 또한 산밭을 개간하여 기장과 조를 심어 자급자족하다 164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유림들이 정온선생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재사를 지어 모리재라 이름지었다.

 

'모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어딘지 모른다는 뜻이다. 정온은 모리재를 엉성하고 볼품없는 집이란 뜻으로 구소(비둘기 구, 새집 소)라고 하였다. 또한 이곳은 고사리를 캐어 먹고 굶어죽었다는 고사를 생각하여 채미헌이라고도 불렀다.

모리재(유형문화재 제307호)는 병자호란(1637)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정온이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숨어서 살던 곳에 세운 서원 형태의 재실로, 정온선생이 죽자 인조 23년(1645)에 이 자리에 영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냈으나 숙종30년(1704)에 불타 없어졌고, 숙종 33년(1707)에 모리재를 지었다. 1758년에는 유허비를, 1806년에는 화엽루를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21년에 대대적으로 손보고 고쳤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전국 유림의 탐방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누각의 하단부 기둥이 두개는 돌로 되어 있고, 다른 한 곳엔 아주 자연 그대로의 나무기둥으로 보수?했다.

 

 

 

 

 

누각에 올라본다.

 

 

 

 

 

 

 

 

 

 

 

 

양쪽으로 용의 모습이 제법 대단하다.

 

 

 

 

 

백세청풍루 현판을 걸었다.

바깥쪽엔 화엽루 현판이 걸려있다.

 

 

 

 

 

다른쪽 용의 모습

 

 

 

 

 

마루엔 이런 놀이도 있다.

눈에 익숙한 것(꼰 놀이)으로 보아 근년에 그렸을 것 같다.

 

 

 

 

 

처마 끝 또한 대단하다.

 

 

 

 

 

누각에 잠시 쉰 후 모리재를 둘러본다.

 

 

 

 

 

모리재

 

 

 

 

 

채미헌

 

 

 

 

 

구소(비둘기 집)

 

 

 

 

 

 

 

 

 

 

 

 

숭조기원후 5신유 7월 26일 사시 입주 8월초2일 유시 상량

숭조는 명나라 연호다.

 

 

 

 

 

 

 

 

 

 

 

 

마루에도 잠시 걸터앉아 본다.

 

 

 

 

 

모리재 마루에서 내려다 본 화엽루이자 백세청풍루,

 

 

 

 

 

동재?

 

 

 

 

 

저곳 보이는 비석이 유허비인가?

 

 

 

 

 

서재?

 

 

 

 

 

뒷편의 사당.

 

 

 

 

 

사당앞 전나무?의 연륜도 상당하다.

 

 

 

▣ 도감어가 식당

 

이곳 도감어가는 위천면소재지에서 금원산 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오른면  도로변에 있다.

명함으로 보아 도감은 이집 주인장 이름이다.

 

 

 

 

 

신축된 집이라 깨끗하고 음식은 단일 메뉴(19,000원)로 정갈하다.

 

 

 

 

▣ 황산마을

 

황산마을 옛 담장 / 국가등록문화재 제259호

 

황산마을 옛 담장은 황산마을 25여 채 기와집을 둘러쌓고 있는 토석담이다.

황산마을은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촌이다. 마을 안의 고가들은 대부분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지방 사대부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마을의 담장은 활처럼 흰 담장 길이 고가들과 어우러져 고즈넉하면서도 절제된 풍경을 이룬다. 담장 아래에는 물을 잘 빠지게 하려고 60~90cm정도를 커다란 돌로 쌓고 그 위에 황토와 작은 돌을 번갈아 질서 있게 쌓아 올렸다, 담장 위에는 대부분 한식 기와를 올렸다.

황산마을 옛 담장은 마을 안에 있는 신씨고가, 황강고택 등의 지정문화재와 어울려 마을 전체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전통 마을로 보존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황강고택은 보수중이다,

 

 

 

 

 

 

 

 

 

 

 

 

 

 

 

 

 

 

 

 

 

 

 

 

 

 

 

 

 

 

 

 

 

취한당 인근의 노거수 탱자나무

 

 

 

 

 

담장에 샛문을 내었다.

 

 

 

 

 

 

 

 

 

 

 

 

이곳은 장관댁

 

 

 

 

 

장관댁이 제일 규모가 클 것 같다,

 

 

 

 

 

 

 

 

 

 

 

 

 

 

 

 

 

 

 

 

 

 

 

 

 

 

 

 

 

 

 

 

 

 

 

 

 

 

 

 

 

 

 

 

 

 

 

돌담사이로

농촌진흥청지정 농가 맛집

 

향토음식 / 고가 민박

055 - 943 - 0009.

 

 

 

 

 

황산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아래 잠시 쉬었다 간다.

 

 

 

 

 

밑둥치로 보았을 때 대단하다.

이로써 거창 위천면, 북상면 일원의 고택 몇 군데를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한다.

귀가길은 수망령을 넘어서 왔다.혹 내계폭포 이정표를 볼 수 있을려나 했는데 못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