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주 암각화 박물관과 반구대, 대곡박물관, 언양읍성, 오영수문학관, 언양 고인돌, 언양성당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 금년 마지막 일정으로 울산 울주 일원을 찾았다. 바쁜 일정에도 안내해 전 일정을 안내해 주신 오광섭 박사님, 암각화박물관. 반구대 해설사님, 대곡박물관 해설사님, 오영수문학관의 이연옥관장님과 해설사님, 늦은 시간임에도 언양성당의 유물관을 둘러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성당 관계자분들.
오늘은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다.
▷가는 길
▷ 탐방코스
반구대와 암각화 박물관- 대곡박물관- 언양불고기 중식- 수제아이스크림 - 언양읍성 - 오영수문학관 - 언양 고인돌 - 언양성당 (2022. 11. 12.)
▷탐방후에
▣ 울산암각화박물관
암각화 박물관에 주차 후, 먼저 암각화박물관을 둘러본다.
주차료, 입장료 등은 없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은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따라서 박물관을 찾기위해서는 월요일 탐방은 피하는게 좋다.
암각화박물관에선 울산지역의 선사문화, 고대의 울산, 울산의 불교문화, 고려시대 울산, 조선시대 울산, 근대 울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울산 고대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해 주신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실 반구대 암각화는 강 건너편에서 봐야하기 때문에 거리가 있고 희미하여 볼 수 없다.
따라서 박물관에서 모조품을 보는게 더 실감난다.
반구대 암각화 주변 학술발굴조사 중 강바닥 깊은 곳에서 공룡박자국 화석과 수생파충류 코리스토테라발자국이 발견된다.
코리스토테라의 발자국 화석이 보고된 것은 아시아에서 처음, 세계에선 두번째라 한다.
▣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
박물관을 둘러보고 반구대 암각화를 보러 간다.
이곳 박물관 주차장에서 반구대 암각화 까지는 1.3km쯤 거리이다.
위 다리의 상부쪽,
이 방향으로 오르면 천전리 각석을 볼 수 있다.
위 다리를 건너면 이내 대곡박물관(천전리 각석)방향 갈림길이 있다.
대곡박물관(천전리 각석) 2.2km를 알린다.
이 거리는 대곡박물관까지를 말하는지 천전리 각석까지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대곡박물관에서 천전리각석까지 거리가 1km쯤 되는데 천전리 각석까지 거리일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든다.
선바위는 울산 법서읍에 위치하는데 대곡박물관 또는 천전리 각석에서 출발하여 이곳을 거쳐 하루 일정을 잡음도 좋을것 같다.
반구대쪽으로 간다.
반구대 전경이다.
역광으로 사진이 희미하고, 우측 높을 절벽은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절벽의 바위가 반구대가 아니라 이곳을 반구대라 하는 것 같다.
반구대에서 좌측 아래로 흐르는 야트막한 지능선.
대곡천 계곡은 1억 년 전 백악기시대, 선사시대, 청동기시대를 거쳐 역사시대의 흔적까지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자연사박물관이자 노천미술관이다. 대곡천 계곡의 중심에는 선조들이 신선골이라고 불렀던 천혜의 절경, 반구대가 있다.
반구대 아래, 위로 대곡천 결을 따라 국보 285호 반구대암각화와 국보147호 천전리암각화가 자리하고 있다. 반구대는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저술 활동을 한 반고사 터, 고려말 언양에 유배된 정몽주 선생을 기려 창건한 반고서원, 조선후기 수많은 선비들이 머물고 시를 짓던 집청정을 품고 있다.
반구대를 노래한 한시는 400수 이상 전해내려 오고 있지만 반구대의 비경을 그린 산수화는 지금까지 두 점 정도가 전부다. 겸재 정선의 <반구>도와 교남명승첩에 실린 <언양반구대>다. 겸재 정선의 <반구>도는 지난 2008년 권섭의 공회첩에서 발견되었으며 반구대의 기암절벽과 집청정, 대곡천 바닥의 바위를 묘사한 진경산수화다.
겸재 정선이 경상도 하양(지금의 경산)과 청하(지금의 포항) 현감을 8년 간 지내면서 반구대를 방문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장헌)세자는 반구대 현장을 방문한 기록은 없지만 겸재의 그림을 보고 능허관만고에 반구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언양 반구대> 그림은 실경산수화로 교남명승첩(간송미술관 소장)의 1권 23면에 실려 있다. 교남명승첩은 상하 2권 58쪽으로 구성돼 있고 영남지방의 34개 지역 58개 명소가 이름을 올렸다. <언양반구대> 그림은 반구대암각화 발견 당시부터 소개 되었지만 최근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화폭에 담긴 풍경은 지금의 반구서원 주변에서 본 반구대 일원 풍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정몽주와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올라가 시를 짓고 여흥을 즐겼다고 전해지는 반구대 너럭바위 위에 갓을 쓴 선비들이 묘사돼 있다. 그림의 왼쪽 하단부에 있는 집들은 옛 반고서원으로 추정되고, 오른쪽 산기슭에는 집청정과 반구암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남명승첩은 작품에 낙관이 없어 제작 시기와 작가에 대한 논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보고 있는 반면, 일부 전문가는 겸재 정선이 아닌 정선의 손자인 정황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반구'와 겸재 또는 그의 손자 정황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언양반구대'에도 집청정으로 보이는 정자가 묘사되어 있다.
집청정(집청정)
집청정은 경주최씨 정무공파 파조 청백리 병조판서 최진립 장군의 증손 운암 최신기(1673~1737)가 세운 정자다.
집청정은 맑음을 모은다는 뜻이며 오른쪽에 청류헌(물흐르는 소리를 듣다), 왼쪽에 대치루(서로 마주함)를 두고 있다.
집청정은 반구대를 찾는 시인 묵객의 소통의 장이 되었으며, 조선후기부터 구한말까지 284명의 시인이 4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그 작품들은 운암의 후손 최준식이 정리하여 한권의 책(집청정시집)으로 묶었다, 집청정시집에는 숙종과 영.정조 때의 문신, 학자, 경상도 관찰사, 인근지역 수령들이 이름을 올렸으며, 숙종 때의 문신 권해의 반구제영(반구제영)도 실려있다.
지금도 집청정은 옛 정신을 살려 지역 문인의 창작과 소통의 장소로, 예와 도를 배우는 공간으로 상용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집청정 정문
집청정을 지나면 이내 반고서원이 있다.
반고서원 정문
문이 닫혀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반고서원 건너편이다.
사진상 잘 보이지 않지만 저만큼 어디쯤 반고대가 있고, 주변 경관이 좋다,
대곡마을 입구.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망성교(선바위)는 대곡마을 쪽으로,
천전리 각석에서 출발한다면 대략 14km쯤, 하루 코스로 좋을것 같다.
건너편 어디쯤에 유허비가 있나 보다.
육안으로 잘 보이지는 않는다.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이 비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1년(1375)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정책에 반대하다가 언양에서 1년 넘게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자주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 감회"라는 시를 짓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그 후 지역인들은 선생을 추모하며 반구대를 '포은대'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조선 숙종38년(1712) 언양지역 유생들이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분을 추앙하여 반고서원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그러나 고종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고서원유허비(1901) 3기의 비석을 차례로 세웠으며, 196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주변으로 경관이 수려하다.
공룡발자국 화석
이곳에서 그동안 가지고 다녔던 니콘 7100 카메라를 물에 빠트렸다.
따라서 오늘 사진은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이다.
발자국은 희미하여 언듯 보면 발자국인지 아닌지 잘 모를수 있겠다.
반구대 암각화 쪽으로 간다.
평소에는 암각화가 건너다 보이는 강변쪽으로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다.
오늘은 특별 배려?
강가 가까이 접근하여도 암각화는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리가 있고, 자연 마모되어 희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같이한 일행들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둘러보고 되돌아 나간다.
▣ 울산 대곡박물관
대곡박물관으로 왔다.
태화강 상류 대곡천 유역에 대곡댐이 건설되면서 편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모두 1만3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을 전시하고 서부 울산권의 문화를 조사. 연구하기 위해 2009년 6월 개관하였다.
상설전시장에는 대곡댐 편입부지 발굴성과와 이주민 이야기, 대곡천 유역의 역사문화. 나아가 서부 울산지역 언양문화권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대곡박물관에서 근 거리에 울주 천전리 각석이 있다.
천전리 각석(국보 제1047호)은 태화강 상류 대곡천 가에 있는 바위로, 선사시대부터 신라 말에 이르는 많은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암각화 유적이며 울산에서 최초호 지정된 국보로 의미가 깊다.
녹문 각석
녹문은 본래 중국 호북성 양양에 있는 산 이름인데, 후한 때 방덕이 녹문산에 은거한 이후부터 은둔의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때 맹호연도 녹문에 은둔했다.
대곡천 유역의 방리에 백련정을 건립하고 백련구곡을 걍영한 도와 최남복은 본라 '사자목'이라 불렀던 그곳 이름을 녹문이라 고치고, 바위면에 그 글자를 새겼다.
대곡댐 건설로 이 일대가 수몰되면서 글자가 있는 바위면을 떼어 옮겨왔다.
포은 정몽주와 반구대.
대곡천 유역에 있는 반구대는 그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75년(우왕1) 언양현으로 귀양왔다. 그는 반구대를 찾아 스름을 달랬다고 하며, 이 때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반구대는 포은대라고 불렸으며, 정몽주는 울산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반구대는 서부 울산 최고의 명소로 알려졌으며, 많은 관리. 선부들이 찾아와 시를 지었다. 반구대 북쪽면의 바위에는 '반구'라는 글씨와 학 그림 등이 있는데, 이것은 집청정을 지은 최시기(1673~1737)가 새겼다고 한다.
회재 이언적(1673~1737)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반구대를 찾은 적이 있었고, 한강 정구(1543~1620)는 반구대 부근에 살고 싶어했다고 한다. 언양의 유학자들은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를 추앙하여 1712년(숙종38) 반구대에 반고서원을 창건했다.반고서원은 반구서원으로도 불렸으며, 고종 땨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문알 닫았다. 반구대 일원은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경치를 감상하고 문화를 꽃 피웠던 명소였다. 2008년에 겸재 정선이 그린 반구대 그림이 발견되었다. 반구대 건너 편에 반구서원이 새로 건립되어 있다. 이곳에는 포은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현지 전시 내용 중에서,
대곡댐 편입부지의 옹기가마. 삼정리의 상삼정유적 백자가마, 고지평유정 분청사기 가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1전시실엔 서부울산지역의 역사와 문화로 언양문화권을 소개하고 대곡천 유역의 구곡문화와 불교문화를 볼 수 있고,
제2전시실엔 대곡천 유역의 생산과 유통으로 토지. 분청사기. 백자, 옹기, 숲, 철, 기와 등 대단한 생산활동을 볼 수 있다.
제3전시실에는 대곡천 유역의 고분군과 사람들이란 주제로
삼정리 하삼정고분군에서는 2~7세기의 무덤 1천기가 조사되었다 한다. 조사지역의 동쪽에는 하삼정유적이 있다. 신라시대 이 저역은 왕경, 그 중에서도 사량부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실에는 나무널무덤,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이어지는 신라 고분의 변천사와 주요 출토유물을 살펴 볼 수 있다.
삼정리 마을을 조사하다 보니 마을 아래엔 거대한 무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거대한 무덤 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형이상학정 드로잉
하삼정고분군 '가' 지구 목곽묘에 오리모양의 토기를 모티브로 대곡박물관의 공간적 상징성과 역사성을 고려하여 제작한 추상조각이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면 야철작업을 했던 흔적과,
고분을 재현해 놓은 것을 볼 수 았다.
▣ 언양불고기 식당
지역 맛집으로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집이다.
BON MILK / 유진목장
옆에는 봄봄 까페가 있고, 언양읍성 남문에서 멀지않은 곳이다.
이곳 수제 아이스크림을 꼭 맛봐야 한다며 잠시 들렀다.
▣ 울주 언양읍성
언양읍성은 새로 복원한 남문 주변이 될 것이나 주차등 성을 대략적으로 둘러보기엔 북문에 주차하는 것이 더 편할 수 있다.
넓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교적 한적하고 주차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북문으로 왔다.
북문 주변
언양읍성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에 세워졌던 읍성은 객사와 동헌을 핵심시설로 각 군현의 주민과 관리를 보호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언양읍성은 1390년 (공양왕2)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된 것을 , 1500년(연산군6)에 현감 이담룡이 석성으로 고쳐 쌓으면서 확장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의 둘러는 3,064척(약 1,500m), 높이는 13척(6.3m) 이었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의 일반적인 형태로 하부는 비교적 큰 돌을 세워 쌓거나 눞혀 쌓되 성돌 사이의 빈 공간에는 잔돌로 채운 형태이며 상부로 갈수록 작을 돌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4면에는 각각 문을 내었으며, 성문 위에는 정문인 영화루(남문) ,망월루(동문)등의 누각을 두었다, 성벽 모서리에는 보초병이 망을 보던 각루를 세웠고 성문 주위에는 문을 보호하기 위한 반원형 옹성을 쌓았다.
성문과 각루 사이에는 총 12개의 치성을 두었다. 치성은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병을 쏘기 위해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성벽에서 7m정도 바깥으로는 너비 3~5m 정도의 방어용 도량인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 바닥에는 목긱(뽀족한 꼬챙이)이 촘촘히 박혀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성 안네는 각종 관아가 있었으며, 동쪽에 동헌이, 서쪽에 객사(구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다.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의 동문과 서문을 가로지르는 수로, 그리고 성내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현 성내는 논, 미나리꽝, 주거지 등이 산재헤 있으며 일부 복원공사 중이나 전체 복원될려면 아직 많은 세월이 지나야 할 것 같다.
남문인 영화루로 왔다.
영화루
언양읍성을 둘러보고 오영수 문학관으로 이동한다.
▣오영수 문학관
오영수 문학관, 언양 지석묘, 언양 성당은 서로 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난계 오영수(1909~1979)선생은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의 건강한 삶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필치로 묘사한 작가로 소개되고 있다.
화장산 기슭에 자리잡은 오영수문학관은 작가의 Death Mask(제작 : 오윤)를 포함해 육필원고, 만돌린, 저서 등 900여점의 문학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실, 문화사랑방, 난계홀, 야외공연장 등을 갖추고 있다.
난계 오영수와의 만남
선생의 흉상을 연출하고 선생에 대한 소개가 있다.
벼루와 먹, 연적,
생의 마지막 순간
Death Mask / 석고, 1970, 오윤
만돌린
작가 오영수는
고향의 서정을 읊은 한국단편문학의 대표주자
오영수 선생은 한국의 정서와 원형적 심상을 단편소설의 미학에 충실하게 담아낸 대표적인 서정소설 작가이다.
1927년 5월25일자 동아일보에 동시 '병아리'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지속적으로 동시를 발표하며 문학성을 인정받은 선생은 1945년 12월 3일 경남공림고등어학교(현 경남여자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이후' 낙동강', '오뉘' 등 수많은 시를 발표했다.
이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1949년 신천지 9월호에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본격 문단에 데뷔했다.
특히 1954년10월 현대문학 초대편집장의 소임을 맡으면서 우리나라 현대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선생은 1979년 5월 15일 타계할 때 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문학의 이상은 전체 인류의 구원에 있다'고 강조한 선생의 작품은 근대적 도시문명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농촌, 산골, 어촌 등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소설가로서 활동한 30여년동안 갯마을, 머루, 명암, 메아리, 후조, 은냇골이야기, 잃어버런 도원 등 주옥같은 단편소설 200여편을 남겼다.
<오영수문학관 안내 팜플릿에서>
주요 저서로 창작집 머루, 갯마을, 명암, 메아리, 수련, 황혼, 잃어버린 도원 등등
관장님이 특별히 소책자와 엽서를 기념품으로 주셨다.
또한 찻잔에 차를 대접해 주셨다.
찻잔은 직접 구입한 것도 있지만 일부 성의있는 분들이 기중해 주신것이라 한다.
참 성의있으신 관장님으로 기억될 것 같다.
▣ 언양 지석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불린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궈력을 가진 지배층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양 지석묘는 커다란 덮개돌 밑에 작은 받침돌을 세운 바둑판식 고인돌로 덮개돌은 영남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인근 주매늗ㄹ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는데, 예전에는 민속 신안의 대상으로 삼아 시성을 드렸다고 한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에 대해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보존 상태가 양호가호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 울산 언양성당 본관 및 사제관
우산 언양성당 본관 및 사제관(등록문화재 103호)
울주군 언양읍 구교동 1길 11에 위치한다,
1936년 10월 16일에 울산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건립돤 언양성당은 부산교구내에서는 두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며, 13곳의 성지 및 천주교 사적지와 16곳의 공소가 있었던 영남지역 천주교 신앙의 출발지이다.
본당은 맞배지붕을 가진 고딕 형식의 석조 2층 건물로서 울산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서구에서 유입된 종교 건축의 수용 및 정착과정도 잘 보여주는 등 건축사적으로도 의미있는 건물이다.
사제관은 본당을 건축하면서 같은 형태로 지은 석조 슬레이트 건물이며 경사지에 지어져 반지하층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곳은 현재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지붕에는3개의 돌출 창과 굴뚝이 있다.
출입은 뒤쪽으로부터 앞으로 돌아서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내부는 큰 보수 없이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제관 내부.
현재 언양지역의 200년 천주교 신앙 역사를 보여주는 신앙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안팎이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종교적,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사진상 보이는 안내문에서>
언양성당을 끝으로 오늘 울산지역 탐방을 마무리 한다.
귀가길 고속도로 양산 주변이 많이 막힌다. 남해안 고속도로 상에는 교통사고로 정체가 심한 구간도 있다.
산청읍 내리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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