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청 차탄리 비석군
산청읍 차탄리 산청농공단지 정문 조금 못미쳐 도로변에 4기의 비석군이 있다.
지금의 차탄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는 산청· 함양간 4차선 길이 생김으로 인해 구도로가 되었다. 산청에 살고 있으면서도 비교적 근래 이곳에 몇 비석이 있음을 알았다. 이 비석이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기 보다는 산청농공단지 조성시 옮겨 함께 모은 것으로 비석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아 소개해 본다. 안내표지판도 없고, 비석의 내용 또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것이 아니고 비문에 '현감의 공적비' 정도로만 음각되어 있다.
이곳저곳 이 비에 대해 자료를 찾던 중 오규환님이 저술한 산청향토사 420페이지에 수령들의 치적비 또는 선정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읍지나 현존 비석 중에는 수령들의 치적을 찬양하는 각종 기념비가 있다. 그 중에는 진실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향민들이 자진하여 영세불망비를 세운 경우도 있다. 그것은 재임시의 치적과 비문내용이 일치할 때의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전거에 의하여 선정을 베푼 수령의 선정비는 없는 반면 도리어 학정을 베푼 자의 선정비가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산음에선 학정자 정릉이란 자의 선정비가 (산청초등학교에) 잔존하고 있고, 표v-13(A)에서 (v-13. 최상.최하급으로 평가된 수령, v-14(A) 산음의 수령, v-13(A)는 없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말 고종때의 현감 중에 볼만한 치적이 없는데도 빠짐없이 치적비가 있었다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 글을 읽고 곰곰 생각하니 아래의 비석에 대해 한결같이 좋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는 길
산청농공단지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하여 찾기에 어려움은 없다.
▷탐방후에
산청읍 차탄리 산청농공단지 입구 도로변에 있다.
차탄(車灘)은 수레골이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산청향교가 있던 곳으로 구향기(舊鄕基/구생기)라고도 하였다. 일설에는 가락국 말 구형왕의 피난 행렬이 산청방면에서 이곳에 이르러 차마로 강을 건너려고 머물던 곳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라 하기도 하나 이는 후세에 지어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산청향교는 조선조 세종22년(1440)산청군 차탄리에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4년 선조 37에 중건하였다. 그 후 1755년 (영조 31)에 현 위치(산청읍 지리)로 이건하였으며 이건 후 현재에 이르기 까지 중.보수를 가하여 왔다.
오규환님의 산청향토사 423페이지에 보면 세종조1440년 현 위치(지리)에 창건하였고, 정유재란때 소실되었으며, 김대현(金大賢, 재임 선조 34(1601) ~재임)이 차탄리에 新建, 약 30년 후 다시 소실되고 인조 조에 현 위치에 중건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믿음이 간다.
참고로
김대현 현감은 선조34년(1601) 부터 선조35년(1602) 이보명 현감이 재임하기 직전까지 재임하였으며 승훈랑(承訓郞), 향교를 차탄리에 新建, 감사 李時發이 포상한 淸白吏. 公館에서 壽衣도 없이 죽자 士族들이 수의를 마련하여 치상(治喪) (龍湖先生集)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김대현 현감이 재임한 시기가 1601~1602년 이보명 현감 재임 직전까지로 보면 향교 자료 1604년과는 차이가 있다.
김대현, 이보명(임란후 재건도 못하고 성질도 포악하여 사헌부 계파(啓罷/열계, 파할파)), 홍희를 거처 선조37년에는 권순이 부임한다. 권순의 재임기간은 선조37년(1604) ~ 박천서(선조41/1608~) 직전까지 재임하였으며 임란 때 소실된 환아정 복원, 丙午산음호적대장 작성, 서계서원 창건협조(1606)등 사적이 있다.
맨 우측에 철제로 된 비석이 있다.
철로 만든 비석은 근대에 만든 것이겠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일반인들에겐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은 전남 나주의 금성관 비석군과 경북 성주 가천면의 만귀정에서 본 것 외에는 철제 비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다.
어느 자료를 보니 현 우리나라에 약 95개쯤 조사되어 있다.
무위 도제조 민겸호 영세불망비 (武衛 都提調 閔謙鎬 永世不忘碑)
우측 세목정봉(稅木精捧/ 정할 정, 받들봉) /세목을 정확히 징수하고, 정비엄칙(情費嚴飭/뜻정, 신칙할칙(신칙하다.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다) /정비(조세를 바칠때 관행으로 세리에게 주는 목)를 배제하고, 애민휼구(愛民桖救?/불쌍할 휼(규휼하다), 구원할 구) 백성을 사랑하고 규휼하였으며. 지주일국(砥株一國)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지녔다.
좌측상단 하외소읍(遐外小邑/멀하) 멀리 벽지 산청 고을에, 편몽은덕(偏蒙恩德/치우칠편,어릴몽) 특별히 은덕을 베풀었다. 만구성비(萬口成碑) 여러 사람이 송덕비를 세워, 계산생색(稽?山生色/상고할 계) 머리 조아려 은공을 갚고저 한다.
이면에는 辛巳 四月 日 立 (1881년 4월 세움)
상납색리 오재기(上納色吏 吳在基), 감동색리 조광원 (監董色吏 曺光元)
(감동은 감독과 비슷한 말이고, 색리는 조선후기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말단 향리를 색리라 하기도 하였다.)
위 글은 ' <옛님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서> by 임병기님의 티스토리'에 소개된 내용으로 개인적인 해석임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셨으며, 도제조 민겸호가 산청에서 어떤 연유로 세금을 감면해준 것을 기리는 불망비로 해석된다고 한다.
어느카페(후손인 듯 싶음)에서 보니 차탄리 모시골 옛 한양 도보길섶에 오씨와 조씨 두 성씨분들께서 비각을 지어 논3마지기를 수호답으로 보존하여 왔으나 일제강점기, 6.25동란을 겪은 후 논은 팔아버리고 관리인은 흔적을 감춰 비각은 허물어지고 비석만 녹슨 채 방치되어 오다 농공단지 조성으로 이곳에 옮겨져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터넷상에서 민겸호를 검색하니 나무위키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민겸호(閔謙鎬 1838~1882. 향년 44세 死), 여흥민씨, 자는 윤익이고 시호는 충숙공이다.
조선 말기 척신이자 간신, 민세 세도가의 일원으로 전형적인 권신에 탐관오리, 매국노.
명성왕후와 자신의 가문인 여흥 민씨만을 믿고 온갖 비리와 탐욕을 부렸으며 조선판 군납비리를 자행하다 임오군란의 시발점이 되어 결국 살해당했고, 그로 인해 시작된 임오군란 이후 조선 왕조가 파국으로 치닫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본인이 초래한 행동으로 국가를 수호하는 중앙 정규군을 공중분해 당하게 만들고 외세의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으니 사실상 매국노로 봐도 무방하다.
판돈령부사 민치구의 셋째 아들(큰아들 민태호, 둘째 민승호)이고, 명성황후의 친척오라버니이며, 흥선대원군의 처남이고, 고종의 외삼촌이다. 민영환(閔泳煥1861~1905. 큰형 민태호에게 입적됨), 민영찬 형제의 아버지였다.
주요경력은 성균관대사성, 한성부좌윤, 군무사 경리당상, 형조판서, 이조판서,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선혜청 제조 겸 병조판서로 재직 중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도를 초빙해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차별대우 받던 구식 군인의 급료 지급을 13개월 동안 미루다가 지급했는데 모래섞인 쌀을 급여로 지급하여 군인들의 불만을 야기, 임오군란(1882)때 난병에 의해 살해됐다.
이 철비의 주인공이 위 (선혜청 도)제조 민겸호인것 같다.
1880년 흉년이 들었고, 1881년에 철비를 세웠으니 한창 정치적 소용돌이 시기에 이곳 산골(산청)까지 다녀가면서 세금을 탕감해 줬는지 모르지만, 별로 유쾌한 비는 아닌 것 같다. 옆에 안내문을 세워줌이 좋겠다.
철제비석 옆으로 3기의 비가 더 있다.
산청향교지에서 역대 현감의 재임기간을 찾으니 아래와 같으나 산청향토사와 차이가 많이 난다.
1.현감 조병길(순조32년.1832~순조34년.1834 / 향토사고종29년.1892 ~ ) : 사진상 가운데 비
2.현감 정밀(복)원(순조34년.1834~헌종 2년. 1836 / 향토사. 고종31년.1894~ ) : 맨 좌측 비
3.군수 김희원(헌종 7년.1841~헌종 8년.1842 / 향토사. 광무 5. 1901년) : 맨 우측 비
4.도제주 민겸호(1880년 흉년? / 1881년 세움) : 철비
참고로 산청향교지를 보면(이 자료 역시 어느 믿을 만한 자료를 참고로 했을 것이다.)
산청군 1대 군수는 1945.10.24~1946.5.14 까지 재임한 노구현으로 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 비석 중 김희원 비석은 군수로 표시되어 있으며 김희원 군수 이후 일제시대 말까지 13명의 군수가 더 있다. 현감 또는 수령이란 명칭에서 군수로 부르게 된것은 년도로 따지면 정밀(복)원 현감이 부임한 다음해(1837년)부터라 한다.
그리고, 한일합방이 1910년이므로 위 비석은 모두 조선시대 말에 세워진 것이다. 또한 산청향교의 차탄에서 지리마을 현 위치로 이건도 1755년(영조31)에 하였으므로 산청향교와는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행현감정공밀원거사비(行縣監鄭公密原去思碑)
鄭宓原 의 宓 자는 성 복, 성씨의 하나 또는 잠잠할 밀자로 나온다.
정밀원으로 표기된 곳도 있고, 정복원(산청향토사/오규환 저)으로 표시된 곳도 있어 어느것이 맞는지 정확히모르겠다. 성자가 성으로 쓰일 경우 '복'자이고, 그외 '밀'자로 보면 정밀원이 맞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밀원 현감은 산청향교지를 보면 순조34년(1834)~헌종2년(1836) 기간에 산청현감을 지낸 분이다.
산청향토사(오규환)를 보면 고종31년, 갑오, 1894년 부터 재임한 것으로 나오며. 후임 서상빈(광무1, 정유, 1897~)이전까지 재임하였다.
개국 504년(紀年사용),1896년 건양 년호사용, 이후 산음현감은 군수로 승격됨 (1895년 군수)
좌측비는 현감 조후 병길 청덕선정비(縣監 趙侯 秉吉淸德善政碑)
우측비는 군수 김후 희원영세불망비.(郡守 金侯 熙元永世不忘碑)
성 다음의 후(侯/ 정자로 쓴 '후'자와는 조금 다르다)자는 과거 관직(현감 정도)을 나타내는 명칭이라 한다.
이분들의 비는 <교남지>에 실려있나 보다.
현감조후병길청덕선정비(縣監 趙侯 秉吉 淸德 善政碑)
<산청향교지>의 역대 현감 명단을 보면 조병길 현감은 순조32년(1832) ~ 순조34년(1834년)사이에 산청에 근무했다. 조병길 현감 후임으로 정밀원(순조34년(1834) ~ 헌종2년(1836))이 역임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래는 <산청금석문 총람>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사람은 같은 것 같은데 년도가 다르다,.
조병길은 본관이 풍양이다. 1851년 신해(신해. 철종2년)출생했고, 아버지 조문화는 이조참의를 지냈다. 청산(靑山, 현 충북 옥천지역)에서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修學 등 성장 과정에 대해 자세히 밝혀진 것은 없다.
고종22년(1855 / 위 출생년도가 1851년으로 되어 있어, 4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출생 또는 이 년도 중 하나는 오류일 것이다) 을유 식년시에 생원 3등으로 240명 중 35위 성적으로 입격하였는데 그가 35세 때였다. 이후 문과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승정원일기에서 그에 대한 첫 기록은 생원시에 합격한 후(1855) 고종 앞에 나가 여럿이 함께 4배를 드리는 내용이다.
이듬해 영릉참봉(효종과 비 인선왕후를 모신 능), 1887년 동몽교관(생원시 합격 후 37년 후이다. 35세+37세=72세가 된다 오류일 가능성은?), 1889년 중부도사, 1890년(고종27) 형조좌랑, 1892년(고종29년) 산청현감. 종6품. 그가 외직 현감으로 처음 발령을 받은 곳이 이곳 산청이다. 이곳 근무 중에 그가 남긴 흔적은 많지않다. 문헌기록으로는 간취(磵翠, 劉錫正/산골물 간, 물총새 취)의 행장과 교남지 산청군의 관안(官案)에 그의 이름이 실려있는 정도다. 금석문으로 본 각자(묵곡나루 마애비)와 산청읍 농공단지 구 도로변 옆에 서 있는 그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매촌리에 불망비가 있다. 청덕선정비는 원래 경호강에 있던 것인데, 다른 비가 서 있는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1894년(고종31년) 3월에 창녕현감, 1895년(고종32) 청도군수, 1898년(고종35) 신천군수, 1900년(고종37)에 신천군수를 사임, 1901년(고종38년) 청산(靑山)군수에 임용되었다.
1902년 (고종39) 충청도 청안군(지금의 괴산군 일대) 홍문리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내용은 군청 사령으로 일하는 차동훈이 같은 마을에 사는 김선문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 김선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용의자 김선문의 시신은 있는데 피살당한 차동훈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수사가 거듭되면서 김선문의 시신을 다시 검안하게 되고 김선문의 머리 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것이 밝혀진다. 김선문의 시신은 차동훈의 것이고 김선문은 도망을 간 것이 밝혀진다.
이 사건의 처음 지휘관은 청안군수 이범학이었고, 진천군수 최문한이 복검(재조사), 마지막으로 청산군수 조병길이 마지막 확인과 검증을 거치고 사건처결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사건발생 한달만에 해결을 보게 되었다. 살인사건은 고금을 막론하고 중대한 범죄로 여겨 사건 처리에 신중을 기했다. 당시 지방관으로 고위직이라 할 수 있는 세사람의 군수가 책임을 맡아 세 차례의 검증 과증을 거치고 있다. 맨 마지막 사건을 마무리하는 관리를 명사관이라 부른다. 도의 최고 책임자 감사가 특별히 임명하는 임시직인데 위의 사건에서는 당시 청산군의 군수 조병길이 맏고 있다. 그는 일찍이 산청 현감을 거친 인물이다.
군수 김후희원 영세 불망비.(縣監金侯熙元永世不忘碑)
김희원 군수는 이조 헌종7년(1841년)~헌종8년(1842)년 사이 근무한 분이다. 산청향토사에는 광무5년(辛丑) 1901~ 후임 조유승(1902년~재임) 전까지 재임한 것으로 나온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이래저래 위 3분의 군수 및 현감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본 결과는 산청에서 특별한 치적을 찾을 수 없으며, 민겸호 비와 더불어 크게 자랑할 만한 비석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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