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일상들

산청 삼매를 찾아서. 단속사지와 정당매. 남사예담촌과 원정매. 산천재와 남명매

정헌의 티스토리 2024. 3. 10. 00:27

■ 산청 삼매를 찾아서.  정당매와 단속사지, 원정매와 남사예담촌. 남명매와 산천재

 

예년보다 겨울이 따뜻하여 매화꽃 피는 시기가 조금 빨라졌다고들 한다.

산청 삼매의 개화시기도 볼 겸하여 집은 나선다. 산청삼매는 단속사지,  남사예담촌, 산천재에 위치하며 본 블로그에서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다.

오늘은 산청문화원 전문의원으로 계시는 이선생과 동행했다. 근래 산청읍지 편찬을 위한 많은 자료를 준비중에 있다.

 

 

▷가는 길

 

 

 

 

▷탐방코스 

단속사지와 정당매,  광제암문 - 남사예담촌과 원정매, 유림독립기념관, 곽재우생가 등 - 산천재 남명매

(2023. 3. 8.)

 

 

 

▷탐방후에

 

 

단속사지에 왔다.

산청에서 어천마을을 지나 한재를 넘으면  청계리, 다음이 운리이다.

단속사는 운리 탑동마을에 있다.

입구에 남명선생 시비가 있다.

 

 

 

 

 

 

南冥先生詩碑(남명선생시비)

 

贈山人惟政(증산인유정) /   유정산인에게 준다 

 

花落槽淵石(화락조연석)  / 꽃은 조연( 槽淵 /구유조, 깊을연)의 돌에 떨어지고 (조연 못 돌 위에 꽃 떨어지니)

春深古寺臺(춘심고사대)  /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오랜 절 축대에 봄이 깊었구나)

別時勤記取(별시근기취)  /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헤어질 때를 잘 기록해 두게)

靑子政堂梅(정자정당매) /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정당매 매실 푸르던 때라고)

 

남명선생이  사명당에게  위 증별시를 써 주었다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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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탑 / 보물

 

산청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과 서 삼층석탑은 단속사지 금당 터 앞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불탑이다. 기단, 몸돌과 지붕돌, 머리 장식이 남아 있는데,기단은 2단이고 몸돌과 지붕돌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리 장식은 일부만 남아 있다.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아래층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이 2개 있고 위층 가운데에는 1개만 있으며, 각 충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 돌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고, 모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쳐 두는 네모난 장식인 노반(露盤)과 연꽃 모양의 장식인 앙화(仰花)가 남아 있다.

장식이 많지않고 간략하다는 점에서 9세기 통일 신라 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문화재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단속사 창건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에 신라 경덕왕 22년(763)  대나마 이순(李純)이 홀연히 하루 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그기서 살았다는 창건설과 삼국유사의 동년 신충(信忠)이 두 友人(김옹과 이순)과 서로 약속을 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는데 두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고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종신토록 산속에 살면서 대왕의 복을 받기를 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는 설, 여기서  이순을 생략(탈루) 해 버림으로써 신충을 창건자로 오기한 것 같아 누가(신충, 이순) 창건했는지 모호한 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삼국유사 같은 곳 별기에  경덕왕 대에 직장 李俊(고승전에는 李純)이 천보7년(경덕왕 5년, 748)에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서 대찰로 만들고 단속사라 이름지었다. 자신이 또한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하고 절에 살기 20년에 졸하였다. 앞의 삼국사기 기록과 같지 않으므로 둘을 다 실어 의심을 덜고자 한다고 되어 있다. 

 

 

 

 

 

 

 

서탑

 

불전터 앞에 남향으로 동일한 양식과 구조로 조성된 동서의 쌍탑으로 기단(1층 기단은 4매의 석재)은 2층, 탑신은 3층, 탑신부에는 옥신과 옥개석을 별석으로 만들었으며 각층 옥개석은 엷고 수평선을 이룬 처마 밑에 5단의 받침(下小上大)이 있다. 지붕의 곡선은 부드럽고 상륜부의 일부가 남아있다. 각부분의 비례가 알맞고 치석의 수법도 정연 단정하여 균형감, 안정감을 주는 우아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다. 8세기 중엽 →9세기 초의 신라쌍탑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단속사의 유적으로 

1.신행선사비 : 신행선사는 704년(성덕왕 3년) 경주 어리 출생으로 오늘날 신행비는 없어졌으나 탁본과 비문은 전한다. 이 비는 주인공의 생졸년(704~779)과 건비년이 확실한 고승의 비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2.진정대사비: 한림학사 김은주가 찬하여 975년(광종26) 단속사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비문, 비석은 전하지 않는다.

3.동서 삼층석탑: 위 탑이다.

4.대감국사비: 1172년(명종2) 문하시랑평장사 이지무가 찬하고 석기준이 유려한 행서체로 쓴 비로 단속사에 세웠으나 비석은 없어지고 탁본은 문경 금룡사에 소장되어 있고 조동의 <금석청완>에 수록되어 있다.

5.정당매.

<산청향토사 / 오규환 저 에서>

 

 

 

 

 

 

이곳 정당매는 통정공 회백(通政公 淮伯) 선생과 통계공 회중(通溪公 淮仲) 형제분께서 사월리 오룡골에서 출생하시어 유년시절 지리산 자락 신라고찰 단속사에서 수학하실때 수식(手植)한 매화나무다.

그 후 통정선생께서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겸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하여 후대인들과 승려들로부터 정당매라 불리면서 630여년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던중 1982년 10월 10일부로 경남도 보호수 12-41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원정공 하즙(楫)선생께서 수식한 원정매, 통정공(원정공 하즙의 외손자)께서 수식한 정당매, 남명 曹植선생께서 수식한 남명매와 같이 山淸三梅라 불리운다.

<현지 안내문에서>

 

 

 

 

 

 

후계목 식재

정당매가 노거수로 수세가 좋지않아 2013년 가지의 일부를 접목으로 번식하여 2014년 완전 고사된 정당매 옆에 후계곡을 식재하여 관리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산청 출신으로 고려 우왕때 정당문학을 지낸 강희백(1357~1402)이 소년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 할 때 매화 한그루를 심고 시를 지었다고 손자 강희안(1419~1464)에 의해 알려졌다. 훗날 후손들이 선조의 벼슬을 따서 '정당매비각'을 세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매화는 역사성을 지닌 다음 세가지 점에서 인구에 회자되고 방문자의 발길을 끌고있다.

 

1.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는 한매(寒梅) 중 최고 수령의 보호수 매화라는 점이다.

2강회백의 헌면(政堂文學 / 종2품)과 결부된 정당매라는 자랑스러운 명명이다.

3.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한매를 심은 주인공이 끝내 지조를 굽혔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강회백(호 通亭)이 대간 김진양 등과 함께 조준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기도 하였으나 1392년 역성혁명이 성공하자 도리어 진양으로 유배당한 여말의 충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1398년 이성계로부터 "등북면도순문사"를 제수받아 정헌대부에 이르고 1402년 7월(태종 2) 참판승추부사 경상도 도관찰사가 내렸으나 그 해 11월 46세로 병몰하였다.

자랑스러이 정당문학만을 부각시키던 "단속사정당매"에 남명선생이  꼭 같은 시제로 "어제(고려) 꽃 피우더니 오늘(조선)도 꽃피우누나"라고 주인공의 실절(失節)을 풍자했다.

 

단속사정당매(斷俗寺政堂梅) 

 

사파승리산불고 (寺破僧羸山不古/여윌 리) 절은 부서지고 스님은 파리하며 산은 옛날 같지 않은데

전왕자시미감가(前王自是未堪家 / 견딜 감) 앞의 임금들이 스스로 나라를 감당하지 못하였네

화공정오한매사(化工正誤寒梅事) 하느님이 매화의 일을 바로 그르쳐

작일개화금일화(昨日開花今日花) 어제도 꽃이피고 오늘도 꽃이 피었다네,

<오규환 저 산청향토사에서>

 

 

 

 

 

 

정당매각엔 2개의 비석이 나란히 있다.

 

 

 

 

 

 

우측, 정당문학통정강선생수식

 

 

 

 

 

 

좌측, 통정강선생수식정당매비

 

 

 

 

 

 

단속사가 선종 사찰로 자리잡은 후 선종은 840~950년 경에 전성하였으나 고려 초기부터 화엄교종에 밀리다가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에 과반의 선승이 흡수당하자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무신집권 직전 선종이 교세 만회기를 맞이 했을때 중앙에서 왕사로 존숭받던 탄연(1070~1159)이 1148년 부터 1159년 입적할 때까지 단속사 주지가 되어 능엄선 중심의 선종 부흥에 헌신하게 되자 본사도 선종대찰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지무가 찬한 대감국사비가 세워졌으나 비석은 없어지고 현재 비문만 전한다.

 

최충헌의 진양후 봉작으로부터 최의의 주살 때까지 약 반세기간(1218~1258)으로, 집권 최씨 식읍인 진양의 대표적 사찰이었다는 점과 진각국사 혜심(탄연과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을 주지로 맞이하여 더욱 번성했다.

 

고려 귀족사회의 기반이 되었는 불교는 세속화되어 번영을 누리기도 하였으나 도리어 고려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조선조 억불책의 개혁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으나 단속사도 15세기에는 비록 퇴락의 모습은 없지않았으나 아직도 선종대찰로서의 모습은 유지되고 있었다.

 

1489년(성종20)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을 보면 "고려 평장사 이지무가 찬한 대감국사비(탄연)가 현존했으며, 문을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이 있는데 퇴락이 심했다. 웅장한 누각은 기둥과 대들보 부식이 심하였고,뜰에 정당매라 불리우는 매화가 있었다. 북문 밖에는 신행선사 비가 있고, 집이 넓어서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이나 되었고 행랑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석불이 500개나 있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말까지도 퇴락은 하였으나 옛 고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리학의 전성기인 16세기가 되면 억불숭유정잭의 영향은 사찰의 퇴락→폐사화와 유교적 도량화로 변질되어 갔다. 점차 유생들의 수학처로 이용되던 단속사는 1561년  남명의 덕산 산천재 낙성을 전후하여 유생들의 강론장화 되었다가 마침내 파손 당하는 과정을 겪게된다.

산천재 짓기 전 두류산 왕래가 잦았다는 조식은 길초의 단속사에 자주 들렀다. 젊은 산승 유정(사명당)을 만나 증별시를 써주고 "단속사정당매"(위 입구 비석에 새긴 시)란 시를 읊은 것도 단속사에 들렀을때 일이다. 서울에서 귀향한 어건이 조식선생을 모시고 1565년 10월에 열었던 강론회와 이듬해(1566.2) 이정. 조종도 등이 조식을 모시고 열었던 강론회의 장소도 모두 단속사였다.

<산청향토사에서>

 

 

 

 

 

 

유가의 강론장화 한 단속사는 유.불이 공생하는 듯 보였으나, 마침내 1568년 젊은 유생 성여신(成汝信)에 의해 파손을 입었다. 동료들과 공부하러 왔던 그는 승려들이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저술한 <삼가귀감.三家龜鑑>에  <유가귀감>을 맨 끝에  둔 사실을 알고서 분개한 나머지 <삼가귀감>의 경판 및 인출물, 500나한과 사천왕상 등 이 절의 보존물들을 승려로 하여금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고서 즉시 종장 조식에게 사실을 아뢰어 양해를 얻고 이것을 계기로 문하생이 되었다. 문화재의 파손이 있었는데도 관가에서도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았던 사실로 미루어 숭유억불이라는 사회정치적 시대상황의 단속사적 반영이라 이해된다.

이 사건은 기록상으로 단속사 파손의 시초였다. 조식이 "부서진 절에 중 몇 남고 산도 예대로 아닌데" 라고 읊었듯이 이미 황량해져 가던 단속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그 잔영마저 소진되고 복구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산청향토사에서 발췌>

 

 

 

 

 

 

단속사지 주변은 몇 발굴조사 후 펜스를 둘렀다.

서산의 보원사지 처럼 빈 절터로 남겨둠도 명승지가 될 수 있음을 볼 때 주변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곳은 전에 보지 못한 곳이다. 단속사 금륜대(태고종) 표찰을 달고 있다.

언듯 보면 옛 단속사의 대웅전이 위치했음직한 곳이다......

 

 

 

 

 

 

단속사지 조금 아랫쪽에 당간지주가 있다.

지금은 도로변에 차량 3~4대 주차할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산청단속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636호.

 

사찰에는 사찰의 영역을 알리거나 법회 의식과 중요한 행사가 있을때 절의 문 앞에 깃발을 걸어 알렸다. 이때 사용한 깃발을 당이라 하며 당을 묶어놓는 기둥을 당간이라 하는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산청 단속사지 당간지주는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106m 떨어진 위치에 있는데 과거 단속사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이다. 2개 기둥 모두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4년 1개를 완전 복원하였고 1개는 일부만 복원하였다. 이후 근처에 있는 정당매각 보호벽의 문주석(門柱石,문짝을 달기 위해 문의 양쪽에 세우는 기둥)으로 사용되던 당간지주 일부를 찾아 붙여 1996년에 온전히 복원하였다.

 당간지주의 전체 높이는 3.73m이고 두 기둥의 간격은 50cm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넓어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둥에 3개의 사이구멍(간공)이 있는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위.아래에는 네모 모양, 중간에는 둥근 모양의 사이 구멍이 뚫려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일반 사찰에서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크다.

 

 

 

 

 

 

당간지주 앞쪽엔 소나무 숲이 좋다.

 

 

 

 

▣광제암문

 

 

이곳은 낙서재,

용두마을 뒷편 동산아래에 위치한 곳이다.

 

 

 

 

 

 

낙서재는 개인 주택이다.

 

 

 

 

 

 

낙서재 앞 강가 절벽이다.

 

 

 

 

 

 

 

 

 

 

 

 

 

이곳에 광제암문 각자가 있다.

 

 

 

 

 

 

광제암문.

 

 

 

 

 

 

 

 

 

 

 

 

 

광제암문 각자 좌측에 여러 이름이 적인 각자가 있다.

이 이름 각자는 예전보다 많이 희미해진 것 같다. 

 

 

 

 

▣남사예담촌 

 

 

먼저 매화집으로 왔다.

평소 대문이 닫혀있는데 오늘보니 활짝 열려있다.

 

 

 

 

 

 

이곳 원정매의 개화상태는 만개로 봄이 좋겠다.

살짝 시들어 가는 꽃이 있는 반면 아직 망울로 있는 꽃도 있다.

 

 

 

 

 

 

 

 

 

 

 

 

 

원정공 영매시(元正公 詠梅詩)

 

사북증재독수매(舍北曾栽獨樹梅 / 일찍 증,)    집 양지 일찍 심은 한그루 메화

납천방염위오개(臘天芳艶爲吾開/섣달랍(납),납향랍(납),고울염)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명창독이분향좌(明窓讀易焚香坐)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피우고 앉았으니

미유진애일점래(未有塵埃一點來/티끌진,티끌(먼지)애)   한점 티끌로 오는 것이 없어라

 

참고로,

원정공 하즙: 선생의 집안 대대로 고려의 관리를 역임했으며, 1347년(충목왕) 2월에 전민의 겸병사태를 바로잡기 위하여 설치된 정치도감의 정치관으로 활동하였다. 원나라 기황후의 남동생 기삼만의 불법적인 토지겸병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기삼만이 옥사하게 되자 그해 10월 원나라로부터 온 사신에 의하여 백문보, 신군평 등의 정치관들과 함께 국문당하였다. 뒤에 찬성사로 치사하고 진주군으로 책봉되었다. 시호는 원정이다.

 

하윤원 : 하즙의 자. 원주와 상주 목사, 대사헌의 

 

하자종: 하윤원의 자, 이색. 정몽주. 길재 등과 교유했던 학자이자 문신, 고려 멸망과 조선이 창건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아들 하연이 1396년(태조5) 신년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녹사에 제수된 뒤 조정에서 중용되자 마음을 바꾸어 1407년(태종7)에  공조참의로 조정에 출사했다.

 

하연(河演, 1376(고려우왕2년) ~1453) : 원정공 하즙의 증손자.  호는 경재. 원정공 마당가에 감나무를 심었다는 분이다.

구례 외산리에 하연 유적비(경재 하상공 석애시 이각비 라는 명칭으로 1811년 건립)가 있으며,

시흥시 신청동에 있는 소산서원 앞의 소산서원기실비에 하연선생의 일대기와 소산서원에 대한 기록이 적혀져 있는데 내용을 보면 하연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21살에 벼슬에 올라 이조판서, 대제학,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의 벼슬을 두루 거친 인물로 황희, 허조와 함께 세종때의 명재상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효자정각에는 하연의 세째아들 하우명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걱이 있다.

 

하연의 출사에는 아버지의 고종사촌 강회백 (1357~1402)의 영향이 매우 컸다. 손자 강희맹의 글에 따르면 강회백은 하연에게 "공은 좋은 벼슬을 하여 나라에 큰 정승이 될 것이니 향곡에서 늙을 사람이 아니다" 라면서 새 나라의 수도 한양으로 가라고 권했다고 한다.

 

강회백(호 통정)은 권근의 문인이었지만 이성계 일파의 건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정몽주가 살해된 후 가족을 이끌고 진주로 낙향했다. 그 후 하륜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했는데, 하연과 자신의 처제인 이존성의 딸의 혼사를 성사시켜 동서지간이 되었다. 그의 아들 강석덕은 또 당대의 실권자였던 세종의 징인 심온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처럼 왕실과 중첩된 혼맥 덕택에 하연은 복잡다단한 정계에서 순항 할 수 있었다;

 

강회백은 1376년(우왕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 부사. 첨서사사를 역임하였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 , 윤사덕과 함께 부고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 둥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 강릉도도관찰출척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 등이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막내아우인 강회계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7) 동북면도순문사가 되었다. 

 

<이상 다음백과에서>

 

 

 

 

 

 

 

 

 

 

 

 

 

 

 

 

 

 

 

 

 

 

 

 

 

 

 

원정구려

 

 

 

 

 

 

예전에 비해 조금 바뀌었다.

 

 

 

 

 

 

 

 

 

 

 

 

 

이(니)민재? 이문재?

전에도 있었나? 본 기억이 나지않는다.

 

 

 

 

 

 

원정구려의 뒷채 아니 안채?

 

 

 

 

 

 

옆 감나무 밭으로 들어가면 수령 620여년의 감나무를 볼 수 있다.

 

 

 

 

 

 

원정공 하즙의 증손자 하연이 어릴때 어머니에게 홍시를 드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라 한다.

토종 반시감으로, 산청곶감의 원종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리고 있다.

 

 

 

 

 

 

이 감나무 옆 담을 튀어 작은 문을 만들어 사양정사와 연결된다,

 

 

 

 

 

 

사양정사를 둘러본다.

 

 

 

 

 

 

산청사양정사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사정정사는 구한말 유학자 계제 정제용의 손자인 정종화가 남사로 이전한 후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하여 1920년대 지은 재실이다. 정제용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구한말 유학자인 허유와 파리장서를 작성한 곽종석의 문인이다. 사양정사란 사수(공자가 태어난 곡부현의 강 이름, 남사마을 뒤에 있는 개울을 공자를 흠모하는뜻을 담아 사수라고 부름) 남쪽의 학문을 배우고 익하는 집이라는 의미로, 자식들을 교육하고 지인과 교류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사양정사는 앞면 7칸, 옆면 2칸 규모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2칸의 온돌방, 왼쪽에는 1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건물 각 끝에는 마루가 1칸식 설치되어 있다. 높은 천장, 튼실하고 정교하게 손질된 부재, 다락과 벽장 등 풍부한 수납공간, 유리의 사용 등 20세기초 근대 한옥의 특징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사 앞쪽에 위치한 대문채는 4칸의 광을 설치한 7칸 규모의 큰 건물로 당시 경제력을 확인 할 수 있다. 가운데 1칸은 충절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과 삼지창이 설치된 솟을대문으로 구성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측면에서 바라본 사양정사

 

 

 

 

 

 

사양정사에서 선명당으로 들어서는 대문가에 노거수 배롱나무가 있다.

 

 

 

 

 

 

선명당의 당단풍나무.

가을이면 고운 단풍을 볼 수 있다.

 

 

 

 

 

 

선명당.

 

 

 

 

 

 

선명당의 매화나무(정씨매)

수령 약 150년

정씨매는 남사예담촌에서 가장 늦게 꽇을 피우는 매화나무답게 아직 꽃몽우리만 몇 맺혀있다.

 

남사예담촌엔 원정매와 이곳 정씨매에 이어  남호정사(순이진이 공방)의 이씨매. 최씨고가의 최씨매, 이사재의 박씨매와 함께 남사 5매로 불리운다. 외형상으로는 꽃 피는 시기도 미묘하게 다르고, 수형 또한 크게 볼품은 없다.

여기에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의 면우매,  영모재의 경모매, 기산국악당의 기산매를 더하여 남사8매로 차츰 알리고 있다.

 

 

 

 

 

선명당 정문으로 나선다.

남사 예담촌이 전보다 많이 개방된 것 같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으로 왔다.

과거 이 기념관을  개관할 당시 둘러보았으니, 오랫만에 다시 왔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

 

 

 

 

 

 

마당가 매화나무의 꽃이 화사하다.

수많은 꽃송이에서 벗꽃같은 느낌이 든다.

면우 곽종석 선생의 호를 따 면우매로 이름붙였다.

 

 

 

 

 

 

꽃이 화사하다.

이렇게 많은 꽃을 다는 매화도 흔치않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을 둘러본다.

 

 

 

 

 

 

 

 

 

 

 

 

 

 

 

 

 

 

 

 

 

 

 

 

 

 

 

 

 

파리장서

 

 

 

 

 

 이곳은 유림독립기념관 옆의 이동서당이다.

 

 

 

 

 

 

일직문 편액을 달고있다.

 

 

 

 

 

 

이동서당/경상남도 문화재자로 제196호

 

산청 이동서당은 면우 곽종석(면우 곽종석, 1846~1919)을 기리기 위하여 유학자들과 제자들이 지은 서당이다. 곽종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힉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9년 조선 독립을 위해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전달하다 경찰에 붙잡혀 체포되었다. 체포 후 두 달 만에 병으로 풀려났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이동서당은 1920년에 건립되었으며 1984년 앞뜰에 유허비(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를 세우고 1991년에는 강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처음에는 서당이 아닌 서원으로 지으려 하였으나, 건축에 사용할 목재를 구하기 어렵고 기존에 있던 집의 재료로 필요한 건물을 다 지을 수 없어 서당을 세웠다고 한다,

파리장서(巴里長書):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들이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냈는데 이때 보낸 청원서를 파라장서라 부른다.

 

 

 

 

 

 

면우 곽종석선생 유허비

 

 

 

 

 

 

이곳은 초포정사

새로 복원한 면우 곽종석 선생 생가지 가까이에 있다.

 

 

 

 

 

 

면우 곽종석 생가와 주변 몇 한옥을 지었다.

 

 

 

 

 

 

 

 

 

 

 

 

 

 

 

 

 

 

 

 

 

 

곽종석생가

 

 

 

 

 

 

 

 

 

 

 

 

 

가운데 파리장서.

 

 

 

 

 

 

생가 동쪽편 건물이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 이동서당, 면우 곽재우 생가를 둘러보고 이사재쪽으로 강변을 따라 올라간다.

 

 

 

 

 

 

 

 

 

 

 

 

 

 

 

 

 

 

 

 

 

이 집은 ?

남사예담촌 안내도를 보면  채남정이 있는데 이곳인가?

어찌보면 민가인것 같기도 하고.

 

 

 

 

 

 

 

 

 

 

 

 

 

이사재,

이사재에도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어 남사 5매에  속한다.

오늘은 일정상 시간이 부족하여  둘러보지 않았다.

 

 

 

 

 

 

기산국악당 쪽을 멀리서 본다.

입구쪽 화사하게 피어있는 곳이 매화나무이다.

남사마을에 기존의 5매에서  3곳을 더하여 남사팔매로 소개될 예정이다.

 

 

 

 

 

 

이 골목은 남사마을에서 담장으로 치면 명동거리다.

 

 

 

 

 

 

 

 

 

 

 

 

 

 

 

 

 

 

 

 

 

 

 

 

 

 

 

 

 

 

예담원,

이지역 맛집이다.

남사예담촌 마을 중앙 주차장 뒷편에 있다.

 

 

 

 

▣산천재

 

 

남사마을 몇군데(사효재, 영묘재, 이씨고가 주변과 최씨고가 등)를 더 둘러보려 했으나 다른 일정이 생겨 생략하고 시천면 소재 산천재로 왔다.

 

 

 

 

 

 

산천재 매화도 만개이다.

 

 

 

 

 

 

님명매

이 매화나무는 님명조식(1501~1572)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뜰에다 심을 것이라 전한다. 기품있는 모습은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인 이를 남명매라 부른다,

 

우음(偶吟) 우연히 읋다

주점소매하(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고성독제요(高聲讀帝堯)  큰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창명성두근(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활수운유(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있네

 

 

 

 

 

 

 

 

 

 

 

 

 

 

 

 

 

 

 

 

 

 

 

 

 

 

 

 

 

 

 

 

 

 

조식(1501~1572)은 연산군7년 합천 삼수현 토동(외가)에서 창녕조씨 판교공 언형의 3남 5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건중이오 호는 남명이며 시호는 문정공이다.

그는 고향 합천(삼가)에서 자랐지만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1504)하여 관직생활을 하게되자 서울로 올라가 25년(1505~1530)을 보내고,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15년(1530~1572)을 보낸 후, 합천 삼가로 옮겨 20년(1501~1505(출생기), 1545~1560)을 보내게 된다. 선생의 나이 61세에 덕산으로 이주하여12년 (1561~1572 /당시 덕산은 진주 땅이었다)을 보내게 된다.

 

 

 

 

 

 

 

 

 

 

 

 

 

 

 

 

 

 

 

 

 

 

 

 

 

 

 

 

 

 

 

 

 

 

산천재를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친다.

산청 삼매는 지금이 한창 때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