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일상들

산청 지곡사지 /심적정사. 세진교. 지곡사. 추파당대사 · 한암대사 승탑및 탑비. 심적사. 선녀탕

정헌의 티스토리 2024. 2. 13. 22:56

■산청 지곡사지 / 심적정사, 세진교, 지곡사. 추파당대사 승탑 및 탑비, 한암대사(寒巖大師) 승탑 및 탑비,  심적사. 선녀탕

 

산청읍 내리, 산청군립공원 웅석봉에서 발원하는 깊은 골짜기에 통일신라시대 창건되었고, 고려시대 선종 5대 산문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찰이었던 지곡사지가 있다. 현재는 저수지와 농지로 변해 옛 지곡사를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고, 옛 모습과는 달리 지곡사. 심적사, 심적정사가 중건(없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것)? 창건?되어있다. 이들 지곡사와 심적사의 과거를 현지 안내문, 다음백과, 금강신문,  임병기님의 옛날의 숨결...티스토리 등 주변 인터넷 상에서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나름 정리해 보았다. 

 

 

 

▷가는 길

 

 

 

 

▷탐방코스(2024. 2. 9.)

  심적정사 - 세진교 - 지곡사 - 부도탑(추파당대사 및 한암대사(寒巖大師) 승탑 및 탑비) - 심적사- 선녀탕

 

 

 

 

▷탐방후에

 

  ▣심적정사

 

 

산청읍 지리에 위치한 심적정사이다.

 

이곳엔 옛 지곡사 나한전(?) 또는 심적사(?)에서 옮겨왔다는 22나한이 있다.

지곡사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되어 고려시대 전성기를 누린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명맥만 유지하다? 또는 번창?하다 일제시대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로 심적암, 나한암 등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

이곳 심적정사는  현지 안내문으로 추정해 보면 내리의 심적사가 6.25 전쟁으로(정확한지 모르겠다?) 훼철되었으므로 이보다는 이후에 건립되었다고 보면 된다.

 

 

 

 

 

 

우물에 지붕을 씌워 용왕각이라 이름했다.

 

 

 

 

 

 

주 불전은 대웅전이다.

 

 

 

 

 

 

측사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으로 방향은 북향이다.

 

 

 

 

 

 

대웅전을 앞에서 바라보았을때 우측에 삼성각과 응진전이 나란히 위치한다.

 

 

 

삼성각

 

 

 

 

 

 

응진전

 

 

 

 

 

 

심적정사 석조불상군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0호.

 

원래 심적사는 산청읍 내리에 있었던 절로서, 통일산라 말기인 929년(경순왕 3)에 세웠다고 하지만 세운 사람이나 그 이후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곳의 석조불상군은 원래 위의 심적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절이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동봉(東峰)스님이 이 불상을 삼봉산(三峯山) 동룡굴에 잠시 모셔두었다. 심적정사가 산청읍 지리에 재건되고 나한전을 세우면서 이 불상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원래 22기의 불상이 있었는데, 1기는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16나한상 등 21기의 불상 모두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은 달리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이곳의 신앙중심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보다 오히려 그 제자인 16나한이다.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나한 중에서도 부처의 열반(涅槃)후, 중생에게 그 복덕(福德)을 성취하게 하고 올바른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겠다는 바람을 세운 성자들이다. 이들은 일찍이 많은 영험담으로 인해 민간에서 나한신앙으로 신봉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과거 지곡사의 부속 암자로 심적암이 있었다고 하는데, 후대로 오면서 심적사는 명칭을 쓰니 참 헷길린다.

조선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던 지곡사와 심적암 등 부속암자가 일제시대 또는 6.25전쟁 기간에 훼철되었다고 보면 그 당시까지는 심적암이 지곡사의 부속 암자였을 가능성이 많다. 

6.25 전쟁 후에 산청읍 지리에 심적정사가 건립되고, 내리에 지곡사가 건립되었을 것이다. 현 내리의 심적사는 심적정사와 지곡사 보다 뒤에 건립되었다. 이들 3사찰은 과거 지곡사와 심적암의 맥을 잇는 사찰이라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22나한도 나한전에 있었다고도 하고, 심적사에 있었다고 하니 어느 곳이 옳은지 모르겠다.

지금의 지곡사는 당초 강덕이 보살이 사적으로 건립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현 심적사와는 별개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

 

 

 

 

 

 

아라한은 범어 아라하트(arahat)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 나한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한자로 응공(應供)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부파불교 당시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아라한이였다. 후에 부처님과 아라한이 구별돼 부처님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게 됐다. 넓은 의미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뜻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온갖 번뇌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중생의 몸에서 부처의 몸으로 향상된 것이니, 아라한 하면 바로 부처의 경지를 이룬 사람을 말한다.

 

불교에서 통상 16나한과 500나한을 자주 말한다. 16나한은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나한들을 말하는 것이고, 오백나한 역시 부처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를 말한다. <입대승론> <법화경> <사분율> 등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이들 16나한과 500나한은 실재했던 인물들이다.

 

16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아라한과를 증득한 열여섯 명의 부처님 제자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들은 부처의 경지에 오른 수행의 결실을 맺었지만, 제각기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으로 숭배되는 특별한 점이 있다. 그들이 깨달음을 완성하고도 중생계에 머물며 중상을 제도한다는 믿음 때문인 것 같다.<입대승론>에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16나한에게 부처님 입적 후 교단을 보호하고 지킬 것을 부촉하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의 16나한이 바로 부처님 수제자들이며, 삼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수행력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16나한이 신앙의 대상인 것처럼 500나한도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다. 500나한 역시 실재했던 부처님의 상수제자들임을 경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께서 500나한들을 위해 코살라국 사위성에서 설법하신 것을 전하고 있으며, 매월 16일에 부처님께서 친히 법을 설하셨다는 기록도 전한다. 500명의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는 장면 역시 <법화경> '500제자 수기품'에 나온다.

 

<불교신문에서 > 

 

 

 

 

 

심적정사를 둘러보고 산청읍 내리에 위치한 지곡사로 이동한다.

 

 

 

 

 

 ▣지곡사지  / 세진교

 

 

지곡마을을 막 지나면 길가 자연석 바위 위에 비석 한 기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세진교 비다.

지곡사 방향의 도로를 따라 지곡마을을 막 벗어나 한 필지의 농지(밭)을 지나면 우측편 길가에 위치하므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충분히 위치를 알 수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산음현감이었던 홍구채(洪九采가 지은 것이다.그능 휘릉(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묘소) 참봉을 시작으로  제용봉사 및 직장, 사평, 연기현감을 거쳐 한성판관,해주판관을 지냈다. 1715년 2월에 산음에 부임하여 이듬해 (1716)에 이 비문을 찬했고, 3년 뒤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의 전면에는 기문을, 뒷면에는 다리를 놓는데 협찬한 사람들을 기록해 두었다.

이 비문과 손명래가 쓴 글에 의하면, 이 다리는 1716년(丙申)에 지곡사에서 수도하던 처형(處泂/멀형)이란 스님이 주관하여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세진교가 선 4년 뒤인 1720년에 두번째 다리로 청심교(淸心橋)가 건립된 기록이 보인다.

<산청금석문총람/ 산청문화원 발행>

 

 

 

 

 

 

위 세진교 비 앞쪽 계곡이다.

당시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가운데 나무에 가려진 (약간 상부쪽) 건너편 암반에 礎石(초석)을 놓기위해  얕게 파낸 네모형태의 윤곽이 남아있다. 

 

 

 

 

 

암반 사면에 큼지막하게 세진교(洗塵橋)가 큼지막하게 음각되어 있다. 군내에서 발견된 여러 각자중 두번째로 크다고 한다.

 

 

 

 

 

 

세진교는 지곡사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셈이다.

지금은 상부에 저수지가 생기고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 옛 길을 가늠할 수 없지만 운치있었을 홍(예)교를 상상해 보는 것으로 대하여야 할 것 같다.

인터넷상에서 검색하다보면 세진교는1716년에 개설되어 1936년 대홍수로 유실되었으며, 일부 부재가 마을회관 등에 남아있다고 하나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또한 송병선 두류산기(1879년)에 세진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산청의 경계에 이르러 이군이 술을 마시고 작별하였다. 경호강을 건너고 세진교를 건너서 심적암으로 들어갔다."

 

 

 

 

 

주변은 암반계류를 이루고 있으며, 홍예교 건너편의 당시의 길을 상상해 본다.

많은 세월이 흘러 물길의 흐름이 바뀌었을 수 도 있겠지만 이곳은 변치 않았을 것 같다. 

 

 

 

 

 

 

 

 

 

 

 

 

 

 해서체로 단정하게 새긴 최지영(崔志永) 이름자가 보인다.

그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내리 저수지 둑으로 올랐다.

이 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주변 지형이 어떻게 생겼을까?

 

 

 

 

 

 

둑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보이는 소류지 좌측 끝 도로변에 세진교 탑비가 희미하게 가늠된다.

멀리는 황매산이 정상부만 빼꼼히 보인다.

저 아래 세진교가 있었다면  지형상으로 볼 때 사진상 계곡의 우측편으로 길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현재는 좌측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음) 그렇다면 저수지 또는 상부에 또다른 다리가 하나 더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세진교가 서고 4년 뒤인 1720년에 청심교가 건립된 기록이 있다한다.

 

 

 

 

 

저수지 둑에는 포토존을 만들었다.

 

 

 

 

 

 

새 순이 돋고 벛꽃 화사할때 반영과 어우러져 진사님들이 찾을만한 곳이다.

 

 

 

 

 

 

살짝 거리를 당겨본다.

저곳 주변이 옛 지곡사지인데.

저수지가 생기고, 주변은 농지로 변해 옛 사찰의 배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저곳 저수지변 비닐하우스 좌측편에 지곡사지의 잔재를 모아 두었다.

 

 

 

 

 

▣ 지곡사지 

 

 

지곡사 주차장이다.

 

뒷쪽으로 보이는 곳은 맑은산장농원이다. 주변의 농지(비닐하우스)를 포함하여 제법 넓은 면적이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

 

 

 

 

 

 

주차장에서 저수지쪽으로 바라보면 문화재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무심코 지나치면 잘 못 볼 수도 있다. 안내표지판 내용은 아래의 지곡사지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 옛 지곡사지의 흔적을 엿 볼 수 있다.

 

 

 

 

 

 

귀부(龜趺 / 趺:책상다리할 부, 받침, 거북머리 비석 받침대)를 비롯하여,

 

 

 

 

 

 

많은 수량은 아니지만 옛 지곡사의 잔재를 이많큼 모아두었다.

 

 

 

 

 

 

 

 

 

 

 

 

 

사진상으로 보는 것보다는 상당한 크기의 비석을 세웠을것 같다.

참고로 이 귀부와 비슷한 또 다른 하나는 현 지곡사 아랫쪽(서쪽) 산기슭 아래에 있다.

 

 

 

 

 

 

지곡사 옛 잔재를 둘러보고,

 

 

 

 

 

 

지곡사로 간다.

도보로 걸어도 가까운 거리이다.

 

 

 

 

 

 

여러해 전 대웅전이 불타고 복원한 모습이 과거의 기억과는 다른 것 같다.

오랫만에 찾은 것도 있겠지만 무심코 지나쳐서일것 같다.

 

 

 

 

 

 

이 지곡사는 옛 지곡사지에서 조금 윗쪽(약 100m)에 신축한 절로 1958년 강덕이 스님이 중건?하여  옛 절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으나 옛 지곡사를 복원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며, 본래의 지곡사 배치와도 무관하다. 현재는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있다.

 

 

 

 

 

종각

 

 

 

 

 

 

지곡사 / 전통사찰 제 102호

 

지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영남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대찰이었다. 통일신라 법흥왕 때에 응진(應眞) 스님이 창건하여 절 이름을 국태사(國泰寺)라 하였다고 조선시대 후기에 지은 지곡사용화당기에 전한다. 고려 광종 때에 와서는 선종(禪宗) 5대 산문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사찰이었다. 전성기에는 30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였고, 물레방앗간이 12개나 되었다고 한다.

추파 홍유(1718~1774)스님이 지은 유산음현지곡사기(遊山陰縣智谷寺記)에 따르면 천왕문과 금강문이 있었고 회랑과 요사가 좌우로 늘어서 있어 영남의 으뜸가는 사찰로써 선객과 시인이 즐겨 찾던 가람이었다고 한다,

추파 홍유스님이 지곡사의 중흥을 도모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3년을 전후하여 폐사되었다가 1958년 옛 지곡사 산신각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지금까지 법등을 밝히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웅전 불상

 

 

 

 

 

 

대웅전 옆의 산신각? 

비구니자행중창공적비, 지곡사중건시주공덕비, 비각중건공덕비가 앞쪽에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산신각.

내부에는 산신령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절의 규모는 조그만하여 외형은 몇 분 정도면 둘러 볼 수 있다.

 

 

 

 

 

 

대웅전 앞 뜰.

 

 

 

 

 

 

몇 수조는 옛 지곡사지에서 사용되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올려본다,

 

 

 

 

 

 

어느분 글을 보니 지곡사지 윗쪽 도로 옆에 방치된 물레방아확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아닐까?

닮은 듯, 닮지않은 듯.

모르겠다.

 

 

 

 

 

 

지곡사 아랫쪽 농지건너편에 돌탑과 석탑이 보이고 둘레로 반송이 심어져 있다.

저곳에  저수지변에 이어 또다른 귀부가 있다.

 

 

山淸 智谷寺地 (경상남도 기념물 제225호)

 

산청읍 내리 772-5, 4 번지 일원에 절터만 남아있는 지곡사는 조선시대 후기에 기록된 <지곡사용화당기(智谷寺龍華堂記)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때 응진(應眞)스님이 창건하여 처음 절 이름을 국태사(國泰寺)라 하였다. 이후 고려 혜월선사에 이어  진관선사(912~964)이르러 절을 중건했다고 한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세울 때 기반이 된  5대 산문의 하나로 전성시에는 승려 수가 300여명에  달하는 대찰이었으나 1913년 전후로 폐사되었다.

 

절 입구에는 홍예다리를 놓아 오색무지개가 공중에 걸린 듯 하고 다리를 건너면 티끌 세상의 번뇌를 씻을 수 있다고 하여 세진교라 이름 붙였다. 지금은 홍교의 흔적만 남아있고, 길가에 세진교비가 홀로서서 옛 영화를 알려주고 있다.

 

이 사찰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천태종을 세울 때 기반이 된 선종 5대 산문 가운데 한 곳이다. 이 때문에 지곡사는 고려 불교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사찰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각종 지리서에 지곡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지역의 중심사찰로서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곡사의 전성기는 고려시대 혜월(慧月)스님과 진관석초(釋超 944-997)스님이 머물면서 불법을 널리 폈을 때다, 당시 승려가 300여명에 이르렀으며, 물레방앗간만도 12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융성했던 사찰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사세가 기울어 겨우 명맥만 유지해 왔다고 전한다,

 

지곡사와 관련된 옛 문헌은 그리 많지않다.

○지곡사용화당기( 智谷寺龍華堂記) 

○진관선사오공탑비(眞觀先師悟空塔碑) : 고려 광종(光宗)대에 고승인 진관 석초(眞觀釋超)스님이 지곡사의 주지로 임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절을 크게 중창하여 선종 5대 산문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찰이었다.

"서기981년(辛巳) 3월 어느 맑은 날, 고려 경종(景宗)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봄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었다. 그 날은 아주 맑았는데, 갑자기 불길한 운기가 동남쪽에서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왕은 그 연유를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어 태사(太史)를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태사는 보고하기를 "여기로부터 천리 남쪽에 비상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을 떠나 저승에 숨겨진 채 드러나지 않고 있어, 폐하의 덕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의 행적을 바위에 새겨 널리 알려지게 하면, 반드시 나라에 큰 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은 그 비상한 사람을 찾도록 하였다. 공덕사(功德使)가 두루 살펴보고 와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故 진관선사 탑묘에서 상서로운 빛이 쏟아져 나와 층한(層漢)에 높이 솟아 공중에 퍼져 있습니다."

이 기사는 고려 경종6년(981)병부령을 지낸 왕륭이 왕명을 받아 쓴 지곡사진관선사오공탑비 비문 서두에 나오는 내용이다. 진관선사는 고려 광종의 명으로 산청 지곡사에서 불법을 펴며, 대중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때가 949년(己酉)인데 선사는 여러 이적(異蹟)을 보였다고기록에 나와있다. 10년 뒤 광종은 다시 귀산선사를 지어 진관선사를 그쪽으로 옮기도록 명하였고, 얼마 후 다시 광통보제선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선사는 그기서 주석을 하다가 964년 입적한 것으로 되어있다.<산청금석문총람>

또한 오공탑비 비문에 의하면 진관선사는 어머니 유씨에 의하여 912년(건화 2년)10월15일에 태어났다. 928년 법천사 헌권 율사에게 나가 구족계를 받고 출가를 한다. 법천사에서 법상학 특히 유식학을 익히고 중국으로 건너가 절강성 서쪽의 용책사에서 용책 지용 선사에게 인가 받고 돌아와 법안선을 이 땅에 퍼트린다. 이곳에는 진관 선사가 당시 심었다고 전하는 야생 차나무가 지금도 재배되고 있다.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의 유산음현지곡사기(遊山陰縣 智谷寺記)에 따르면 지금의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있었고, 왼편에는 약사전, 오른편에 극락전이 있었으며, 앞에는 큰 누각, 누각 밖에는 천왕문과 금강문이 있었다. 회랑과 요사가 좌우로 늘어서 있어 영남의 으뜸가는 사찰로 손객과 시인들이 즐겨 찾던 가람이었다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산음현 조에는 고려 예부상서 손몽주(孫夢周)가 쓴(지은) 혜월스님과 진관스님의 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귀부 2기만 남아있고, (이들 귀부는 혜월과 (진관) 석초의 비를 세울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이 비문은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한암 성안(寒巖性眼)과 추파 홍유스님이 사찰을 중창했다. 20세기에 들어 일제의 침략으로 폐사되었다고 한다. 한암대사비와 추파당대사의 탑비는 절 위쪽 300m 지점에 있다.

 

추파당 석파대사의 비는 1836년1774년(현종2)(1774년이 맞는 근거는 숭정기원후 삼병신, 추파대사가1774년(졍조50) 5.13일  57세로 입적. 부도글씨는 남원부사 서무수가 썼으며 서무수의 남원부사 재직시기는 1774.9~1777.1)에 제작되었으며, 한암대사비는1845년(헌종11)에 조성되었다,.

지곡사 터에는 당시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건물지 초석을 비롯해 세진교 각자. 우물 배례석편, 수조4기, 귀부2기, 물방아확(수조), 부도, 장대석, 축대 등이 남아있다. 부도 2기는 모두 석종형으로 조선 후기의 유물이다.

 

지곡사지에서 100여m 윗쪽에는 옛 지곡사의 이름을 그대로 딴 지곡사가 있다. 이 사찰은 1958년에  (강)덕이(德伊) 스님이 중건했다. 옛 지곡사의 가람 배치와는 무관하지만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있다.

 

지곡사 밭을 경계로 위쪽은(맞는지 모르겠다. 현 지곡사 아랫쪽이다.) 일반인의 사유지인데, 이곳에 귀부 한 기가 있다. 이 귀부는 원래 그곳에 자리했는지 아니면 누군가 현재의 자리로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천태법향도, 도량의 향내음도 사라진지 오래된 옛 지곡사. 바로 앞의 저수지를 연못 삼아 멀리 동쪽으로 뻗어있는 부처님이 누운 모습을 한 황매산을 바라보고 묵묵히 서 있는 옛 흔적들이 서럽기만 하다.

옛 영화를 지금 당장은 다시 누릴 수 없지만 지금의 모습이라도 간직해 후세에 인연을 만나 천태법향이 다시 피어오르길 기원한다.


출처 : 금강신문 (https://www.ggbn.co.kr)에서 

옛 천태 성지를 찾아서 ⑥ 산청 지곡사지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 2023. 12. 27.

현지 안내문도 위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머리부분이 없이진 귀부가 있다.

들어가는 길은 맑은산장농원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겨울철이어서 논두렁길을 따라 들어왔다.

 

 

<다음백과>에 지곡사 금당지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 옮겨본다.

 

발굴조사결과 지곡사의 실체를 확인케 하는 지곡사명 막새(처마 끝 부분을 예쁘게 마무리해 주는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정면과 측면이 모두 세칸 규모인 금당지에서는 불상대좌와 조소불상편이 노출되었다.

 

금당지는 조사구역의 북동편에 자리하며 해발 200m정도의 비교적 가파른 산야의 남동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유구가 확인되고 있는 범위는 대체로 길이 70m, 너비 5m로 길게 조성된 평지인데, 이곳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1m에 가까운 대형 암석을 수직상으로 쌓아 만든 높이 3.5m 규모의 거대한 축대가 동서방향으로 직선을 이루며 약 50여m 정도 길게 이어진 상태이다. 따라서 금당과 관련이 있는 유구의 흔적은 축대의 상부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다.

 

축대 위에 설치된 금당지 이외에 모두 5기의 건물지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와편을 비롯한 고려, 조선시대의 와전류 및 자기류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의 출토양상과 가람배치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응진에 의해 국태사로 창건되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적으나,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지곡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유구의 중복양상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유물이 시간적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그 중에는 연호 및 간지 등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기와가 다수 있어 지곡사가 조선후기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이 대충의 시각으로 둘러본다면 금당지의 축대 등 흔적은 찾기 어렵다.

 

 

 

 

 

 

저수지변의 귀부와 비슷한 모양새다

고려 혜월스님과 진관스님의 탑비 귀부일까? 추파 홍유스님의 유산음지곡사기로 추정하면 1774년까지는 훼손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발행한 <남명과 지리산 / 최석기 지음>에서 지곡사에 관련된 부분이 있어 발췌하여 실어본다,

 

지곡사는 산청읍 웅석봉 밑에 있다. <편년>에는 1565년 (10월 10일) 덕계 오건, 매촌 정복현, 양성재 도희령 등과 지곡사에서 만났다는 기록만 있다. 그런데 정복현의 매촌실기에는 1564년 9월에도 도희령 등과 지곡사에서 남명을 만나 며칠간 유람하였다고 되어있다. 

또한 남명은 1566년 정월 제자들을 지곡사로 불러 강회를 마련하였는데(명종20년 1565년 4월 문정황후 승하하자  8월까지 요승 보우와 외척 윤형원의 축출을 위한 성균관 유생과 삼사합계가 계속되고 그와 관련 벼슬을 그만두고 덕계선생은 귀향함. 후 1566년 정초에 성균관 학정을 제수받아 상경을 앞두고 오건이 남명선생을 모시고 지곡사에서 5일간 열린 강독으로 산청향토사에 기술되어 있음), 유림이 운집하여 절에 수용할 수 없어 산음분들은 밤에 집으로 돌아갔다. 5일동안 강학을 하다가 돌아갔다고 한다(덕계선생 년보/ 일주일은 산청향토사)

이를 종합해 보면 대체로 1564년부터 1566년 사이에 남명이 지곡사를 몇 차례 찾았던 것을 알 수 있으나 절의 구조나 규모에 대한 언급은 없다.

 

 

뒤 조선시대 남명 조식 선생 등이 이곳에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19세기 중반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20세기가 되어 일제에 의해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전국사찰등록시 지곡사의 말사인 심적암이 심적사로 등재되어 있고 지곡사란 이름은 빠저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경에 어떤 이유에서인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란때 학봉 김성일의 지휘하에 이곳 지곡사에서 염초를 구워 화약을 만든 기록이 전한다. 당시 산음 수령은 김락이 맡아 감독하였다. 학봉이 초유사로 활동한 시기를 고려하면 1592년 경이다.<산청금석문총람 / 이로 송암집 제 4권>

 

영남읍지 산청현 조에 보면 현 남쪽 13리  유산 아래 심적암이 있다는 기록

영남읍지(1895년 고종32) 필사본 산청현 조에 지곡사는 현남쪽 10리 유산 아래있다. 新羅重新於高麗今即殘敗

영남읍지1871(고종8) 필사본에 지곡사, 화림암(在縣西 30리 필봉산하), 심적암(在縣南13리 楡山下), 나한암(在縣南 12? 15?리 유산하)

등의 기록으로 보아 심적암, 나한암 등의 부속 암자를 가졌을 것 같다.

 

 

 

 

 

 

각도를 달리하여,

 

 

추파 홍유의 유산음현지곡사기(遊山陰智谷寺記) / 국사편찬위원회연구위원 하혜정님 번역

 

"회계현 남쪽 10리 땅에 높고 험한 산이 있다. 바라보면 하늘 속으로 들어간 듯한 이 산은 방장산으로 선경에서 말하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산에 사는 사람은 처음에는 어리석었더라도 오래 살다보면 지혜로워지는 이변이 있는 까닭에 지리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지리산 한 줄기가 구불구불 동쪽으로 흐르다가 일어나 봉우리를 이룬 것이 취봉(鷲峰)과 국사봉(國師峰)인데, 두 봉우리 아래 지은 절이 국태사(國泰寺)이다 또 지곡사(智谷寺)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그곳의 토박이들이 그 골자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절의 애초 창건은 신라때에 응진(應眞)이 하였고, 중간에는 고려 때 혜월(慧月)이, 마지막으로 진관(眞觀)이 또 새로 수리하였는데, 진관도 고려 때 사람이다. 이 세 분 대사들은 다 덕이 중하여 당세에 왕의 스승이 되어 국가를 도운 분들이니, 그 뛰어나고 훌륭한 공훈은 비문에 실려서 절의 동서쪽에 짝으로 세워졌다. 법당 앞에는 돌을 다듬어 섬돌을 만들고 그 면에 이렇게 글을 새겼다. "곡성군수가 철물(鐵物)을 감독하고 함안군수가 섬돌을 쌓았다." 그 자획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니, 당시에 부처님의 도를 숭상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 분 대사가 건립하였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전각과 누각의 체계는 대웅전이 가운데 서고 약사전이 왼쪽에 자리하며 극락전이 오른쪽에 있다. 앞에는 큰 누각이 있으며 누각 밖에는 천왕문과 금강문 두 문이 있다. 앙실(鴦室/원앙앙)과 회랑 요사채가 기러기처럼 좌우로 펼쳐져 다 법전을 호위하여 지키니, 황상(皇上)이 조정에 임할 때에 신료들이 앞에 시립한 것과 같은 형상이다. 이것이 영남의 여러 사찰 중에 으뜸인 까닭이고, 선객(禪客)과 시인들이 오로지 국태사를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속의 많은 선암(仙庵)도 때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하였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여섯이다. 심적암(深寂庵)과 영당(影堂)은 강백(講伯)이 불법을 천명하는 곳이며, 적조암과 나한암, 태자암과 서운암은 진실로 참선하는 지들이 마음을 밝히는 자리이다.

 

골짜기에는 돌을 깎아 만든 세진교가 공중에 걸린  무지개 처럼 놓여서 장마가 여러 달을 그치지 않아 성난 파도가 계곡 어귀에 넘쳐나도 행인들이 물 건너기를 걱정하며 탄식하는 일은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일 것 같으면 물빛과 하늘 빛이 아래위로 서로 이어지고 게다가 무성한 수풀과 긴 대나무까지 좌우에서 비추니, 6월 폭염이라도 이 다리에만 오르면 열기를 씻기에 충분하다. 또한 유람객이 이 다리에 서면 속세의 근심을 씻을 수 있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 그 산수의 기이함과 화초의 아름다움으로 말하면 사계절의 경치가 같지 않으니, 이것은 보고 즐기는 자가 어떤가에 달려 있으므로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겠노라."

 

 

 

 

 

 

이 주변이 옛 지곡사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 축대 등을 유심히 살펴보나 알 수가 없다.

 

 

 

 

 

 

이 농원은 펜션을 겸하고 있으며 고교동창이 운영하는 곳이다.

 

 

 

 

 

 

살림집외 여러동의 건물을 아기자기하게 배치했다.

 

 

 

 

 

 

맑은산장농원 입구로 나왔다.

 

 

 

 

 

▣ 지곡사 부도 2기 / 추파당대사 승탑 및 탑비, 한암대사(寒巖大師) 승탑 및 탑비,

 

 

지곡사 주 계곡에서 심적사 이정표(0.5km)를 따라 급하게 오르면  100~200m쯤 도로 우측편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주차장 뒷편에 몇 부도탑이 보인다.

 

 

 

 

 

 

부도2, 비석 2.

 

 

 

 

 

 

산청 심적사 추파당대사 승탑 및 탑비(秋波堂大師 僧塔 및 塔碑) /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88호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서, 조선시대 후기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종형 부도와 석비로 석비의 비문 내용이 뚜렷하여 조선후기 경남지역의 석조물과 금석문 연구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부도는 구연탑(九淵塔)이라고 각자(刻字)하고 부도 상단에는 연봉오리형의 보주가 반원형으로 돌출되어 있고 그 아래쪽에는 첨형의 단파계앙련 형식의 13판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그 위쪽으로는 판 끝이 둥근 5판 연화문을 배치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구연탑은 부도의 다른 명칭이다.

 

 

 

 

 

 추파당대사 승탑 및 탑비(秋波堂大師 僧塔 및 塔碑) / 崇禎紀元後三丙申 1776

 

추파 홍유(1716(숙종44)~1774(영조50))

 

조선 후기의 승려, 성은 李, 호는 秋波, 본관은 全州,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10세에 이미 수백 권의 책을 읽어 천재라고 일컬어졌으며, 19세에 방장산(지리산) 백련암에서 가사를 입었다. 처음에는 편양문파(鞭羊門派) 조관에게서 수업하였으며, 그 뒤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았고, 나중에는 벽암문파에 속하는 성안(性眼)의 법을 이었다. 선종. 교종에 모두 통했으나 만년에는 주로 염불에 귀의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유교에도 밝았으며, 빼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다.

 

산청의 청암사(淸巖寺) 심적암(深寂庵)에서 입적한 후, 제자들이 영정을 심적암에 안치하고, 탑을 옥류동(玉流洞)에 건립하였다. 법맥은 선수- 각성- 진언- 정혜- 성안- 홍유로 이어진다. 제자로는 문연, 천제, 관식 등이 있다. 저서로 추파집 3권과 편지글을 모은 추파수간 1권이 있다.

 

참고)

"추파당 홍유의 부도와 비는 1836년(헌종2)에 건립되었다. 호가 추파 또는 경암(鏡巖)인 홍유는 불교선종과 교종 모두에 능통했는데 만년에 선종에 귀의했다 ........... "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 있다.

 

1836년은 1774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지곡사지>에 사족을 달아놓았다.

경암은 추파스님의 제자로 스승의 부도탑과 탑비 건립, 문집 발간을 주도혀며 명사들의 서문, 발문, 비문을 받으러 쫓아다닌 제자 관식(慣拭, 나중 법명을 응윤(應允)으로 바꿈)의 호라 한다. 스승과 제자의 호가 같을 리가 전혀 없으므로 오류가 아닌가 하는 지적이다.

 

경암은 옛 산행기방에 지리산기, 대원암기, 무주암기, 불일암기 등 스님의 글이 많이 소개되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관식이 나중에 법명을 응윤으로 바꾸었는데 바로 그 응윤이 경암이다. 산청 출신으로 그의 집이 경호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경암(鏡巖)이라 불렀다고 그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출처 : 지리99에서 발췌)

 

 

산음심적암기 /추파 홍유

 

대저 절을 짓는 것은 화려함을 자랑하려고 토목의 일을 일삼는게 아니라 부처님을 받들고 천수를 축원하여 국가의 복을 빌려는 까닭이니 그 관계하는 바가 중하다고 하겠다. 요사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들 경전을 강독하거나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을 잘 하는 것으로 여겨서 집이 무너지는데도 팔짱을 낀 채 수리하지 않으면서 "이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만 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

이 암자는 현종(顯宗) 경술년(1670)에 비구 운일(雲日)이라는 자가 자기 땅을 정해 집을 지어 향을 태우고 도를 닦는 도량으로 만들었지만 正堂과 익각(翼閣) 뿐이어서 살기에 좁았다.

 

갑자년에 강씨 선비가 우뚝하게 正樓를 세우고 갑술년에 설암(雪巖)대사가 靜聽을 세웠으며, 경술년에 임자취(林自翠)가 조실을 다시 보수하였고 계묘년에 이암대사가 익각을 수리하여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며 누울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으나 아직 넓지는 못했다.

 

성상 즉위 22년 을축년에 설봉화상이 중수의 뜻을 가지고 대중들과 의논하여 우선 나무를 베어다 기와를 구웠으나 마치지 못하고 떠났다. 그 다음해 의수가 관동과 성열 두 상인과 마음을 모아 소임을 맡고 그 서까래를 모아 지붕을 이으니 규모가 다 새로워졌다. 다만 기술자를 잘못 구해서 들보와 용마루가 갑자기 기울어 다들 근심하였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기사년 여름에 우리 한암(寒巖)스님께서 화림사에서 오셔서 몇 달을 살면서 갑자기 한숨을 쉬며 개탄하며 말하였다. 선암(禪庵)이 다 쓰러져 가는데 어째서 성인의 교화를 보수하지 않는가? 청명절은 시절이 온화하고 수확이 풍성한 때라 힘을 합쳐 다시 수리하기엔 딱 좋은 때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나와 뜻을 같이 하겠는가?

 

한(閒)아! 자네는 마음이 밝고 믿음직하니 재화를 맡도록 해라.

천(天)아! 자네는 중후한 데다 주지를 오래 했으니 여러 가지로 사무를 자네가 감독하도록 해라

종과 현아! 대중의 일이 심히 고달프니 자네들이 가서 달래 주도록 해라

흘!  자와 칼과 톱은 자네가 다 지휘하여 새기는 일을 해라.

수야!  자네는 아주 부지런하고 근신하니 나를 도와 일을 완성하라.

다음해 봄에 강도(講徒)를 해산시키고 친히 힘써 수고를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투어 시주를 하였는데 전 통상(統相) 이언상이 수십관의 돈을 내었고, 계봉(鷄峯) 원은 볍씨 여러 말을 심을 수 있는 논을 바쳐 완성을 도왔다.

이 때에 여러 소임을 받은 자들과 대중들이 다 그 마음을 다하였다.

터는 그 옛터가 좁다하여 축대를 보충하여 넓혔으니, 정당은  5가(칸)로 짓고, 정청은 3가로 지었으며, 익각과 뒷방은 각각 2가로 지었다. 그해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완성하였으니 그 규모의 융성함은 옛날보다 조금 못하였지만 창문과 칸살의 크기는 오히려 나았다.

 

건물에 기대어 서면 마음이 황홀함을 느끼게 되고 당에 오르면 몸이 편안한 즐거움이 있다. 좌선하는 자들이나 경전을 잡은 자들이 동서에 섞여있고 새벽과 밤에 향으로 사르며 성상의 천수가 만세를 누리도록 축원하니, 팔짱을 낀 채 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비해 도움이 만 배는 되리라.

 

아! 암자를 세우는 일은 운일(雲日)이 시작하였고, 운일의 뒤로 두 세 사람이 힘을 보태어 보수를 하였다. 아직 그 규모를 얻지 못하였을 때 우리 스님이 계셔서 집이 비로소 제대로 완성이 되었다. 이로써 집이 이루어지려면 또한 사람과 때를 기다려야 함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한암(寒巖) 노스님께서 성열을 보내어 나에게 일의 전말를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내가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성열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은 오랫동안 한암스님 문하에 있었으면서, 스님께서 이처럼 특별한 공훈을 세우셨는데 어찌 기록으로 드러내어 광채를 드날리지 않으시렵니까? 또 여러 사람들이 힘쓴 공로를 목판에 기록해 나중 사람들이 이를 보고 흥기해서 이 암자가 오래도록 썩거나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스님께서 다시 지으신 공이 어찌 오늘에 그치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참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대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기록하였다.

 

<옛남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 https://12977705.tistory.com /8725517   by 김병기 님>

이 분의 티스토리는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산청 심적사 한암대사(寒巖大師) 승탑 및 탑비 /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89호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서, 조선시대 후기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종형 부도와 석비로 석비의 비문 내용이 뚜렷하여 조선 후기 경남지역의 석조물과 금석문 연구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동체부의 뒤쪽 한면이 일부 훼손되었으나 석비 등 나머지 내용은 양호한 상태이다. 석비의 내용에는 심적사에 진영을 모셔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한암대사(寒巖大師)  탑비

 

한암대사에 관한기록은 없으나 추파 홍유스님의 산음심적암기(산음심적암기)에 등장한다. 당시에 노스님으로 칭힌 것으로 보아 홍유스님(1718~1744)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홍유스님 입적 11년 뒤인 1785년에 열반에 드셨다.

 

 

 

 

▣ 심적사

 

 

종각.

이곳 심적암 또한 수 십년 전에 신축한 것이다.

 

 

 

 

 

 

대웅보전

 

심적사는 신라 경순왕  3년에 국태사(현 지곡사)의 암자로 지어졌고 (추파 홍유스님의 산음 심적암기에는 운일스님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나옴) 1610년(광해군2) 운일스님의 심적암 창건 이후 설암. 설봉스님 등이 중건과 중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적사냐 심적암이냐 궁금하여 절과 암자의 차이를 인터넷상에서 검색하니 아래와 같이 도움을 준다.

통상적으로 큰 절은 사, 작은 절은 암이란 이름을 붙인다. 암자는 큰 절(寺)에 딸린 작은 절을 의미한다. 명산에 큰 절이 세워지고 사세를 넓혀가다 보면 자스연스럽게 큰 절 주변으로 작은 절이 생기게 마련이다. 본찰인 사(寺)와 구별하기 위해 작은 절에는 암(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암의 본래의 의미는 마을과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 나무와 풀을 엮어 만든 임시 움막이다. 어쩌면 庵보다는 菴(암자,초막 /蓭 : 암자, 초막)이란 글자가 본래의 의미에 더욱 값한다. 자(子)는 주전자, 액자 따위의 낱말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접미사다.

절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명칭이 정사(精舍)다. 최초의 불교사찰은 죽림정사이며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법한 장소는 기원정사다. 절 '寺'자가 아니라 집'舍'를 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 그대로 '수행자가 정진하는 집'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규모가 작고 스님이 혼자서 운영하는 사찰을 보통 정사라고 부르는 편이다. 특히 도심포교당에서 정사라는 이름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선원 강원 율원 등의 원(院/집원)은 큰 절 안에 있는 별채로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선원(禪院)은 선을 수행하는 곳이고, 강원(講院)은  학인(예비승)들을 가르키는 곳이며, 율원(律院)은 계율을 공부하는 곳이다.

한편 선학원은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비구승들이 설립한 단체다. 원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함이다.

가람(伽藍)은 사찰과 같은 뜻이다. 스님들이 한데 모여 수행하는 장소라는 승가람마(僧伽藍摩/절가,쪽람, 갈마)의 줄임말이다.

총림(叢林)은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가장 큰 사찰이다.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을 모두 갖춘 종합수행도량이다.

本寺와 末寺는  행정단위에 따른 구분이다. 조계종은 25개의 교구본사로 구성되며 말사는 본사가 관할한다 

 

<불교신문 3151호 / 2015.11.7>

 

 

 

 

 

 

심적사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

 

 

 

 

 

 

요사

 

 

 

 

 

 

설선당

 

 

 

 

 

 

산신각과 칠성각

대웅전 좌측 뒷편에 위치한다.

 

 

 

 

 

 

심적사에서 바라본 경관이다.

좌측 지붕의 용마루처럼 평평한 능선을 보이는 곳이 정수산, 우측 암봉처럼 보이는 곳이 둔철산이다.

 

 

 

 

 

 

심적사 아랫쪽 나한전.

 

 

 

 

 

 

3층 석탑 뒤편으로 나한전이 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따를 수),  입처개진(入處皆眞)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드는 곳마다 모두 진리의 세계이다.

隨處作主 : 나 라는 존재가 항상 주인임을 알면 어느 곳에 가든 내가 주인임을 잃지 않는다. 入處皆眞 : 내가 드는 곳마다 진실. 참이 된다. 외부에서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 박우성

 

○당나라 임제선사의 어록 시중편에 나오는 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주인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 자리가 모두 진리의 세계가 된다. / 전민일보. 조용신 전주고등학교 수석교사

 

○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놓여도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 진리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말 / 장경식

 

 

 

 

 

오백나한전

 

○ 도불원인(道不遠人) : 도는 인간의 삶과 멀리있지 않다는 뜻으로 행복도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이르는 말. 도불원인은 중용에나오는 말로, 공자는 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道를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道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 도불원인, 인자원의 (道不遠人 , 人自遠矣) / 도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도를 멀리한다.

○중용 13장에  "자왈 도불원인 (道不遠人)하니 인지위 도이원인(道以遠人)이면 불가이위도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도가 사람에게서 멀리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이 도를 행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멀리한다면(사람과 관계를 먼 것을 행한다면) 도를 행한다고 할 수 없다.

같은 道不遠人 이지만 뜻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과거 심적암에 나한을 모셨기 때문에 새로이 500나한전 불사를 했나 싶다.

 

 

 

 

 

 

나한전 앞쪽으로 저곳은 수행도장으로 부처님전 참배객 외에는 출입을 금한다고 되어 있어 들어가 보지 않았다.

 

 

 

 

 

▣ 선녀탕

 

 

지곡사 계곡은 지리산 둘레길 6코스(수철~성심원)지선이 지나는 구간이다.

호젓한 임도, 계곡 주변으로 신설중인 데크길,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여름철이면 알음알음 많은 분들이 찾는다.

이 계곡 상부에 선녀탕이 있다. 임도변과 접하고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선녀탕의 정확한 위치가 두 계곡이 합수되는 곳인지 아님 이곳 암반 상의 욕조를 말함인지 모르겠다.

지곡사를 찾는다면 잠시 발품을 팔아 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