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 반석리 석불좌상, 금남고택.당촌 별신당. 봉천리 오층석탑, 선다원, 문형식 가옥, 일월사. 태백산맥 문학비

정헌의 티스토리 2024. 7. 30. 15:35

■보성 안규홍, 박제현 가옥, 반석리 석불좌상, 금남고택.당촌 별신당. 봉천리 오층석탑, 선다원, 문형식 가옥, 일월사. 테백산맥 문학비.

 

순천 초연정원림을 둘러보고 보성으로 향한다. 중간 고인돌공원과 서재필 기념공원이 있지만 과거 둘러본 적이 있고, 오늘의 주 탐방코스는 문덕면, 복내면, 율어면 지역의 문화재 몇 곳을 둘러보는 일정이어서 시간상 여유가 많은 편은 아니다. 위 3개의 면 중에서는 복내면 소재지는 사통으로 길이 나 있고 크다. 따라서 음식점의 수도 상대적으로 많으나 소문난 맛집은 없는 듯 하다. 오늘 늦은 중식시간으로 인하여 복내면 봉천리 금남고택외 두 곳과 반석리 석불좌상의 탐방순서는 당초 계획과는 순서가 바뀌었으나 거리상 가까운 곳에 있다.

 

▷탐방코스  (2024. 7. 28.)

(초연정) - 보성 문덕면의 안규홍, 박제현가옥 - 복내면에서 중식, 반석리 석불좌상, 금남고택, 당촌별신당, 봉천리오층석탑 -  율어면의 선다원 - 문형식 가옥(율어리  고택) - 일월사 - 태백산맥 문학비. 

 

 

▷탐방후에

 

▣문덕면 안규홍. 박제현 가옥

 

카카오 내비가 제정신이 아니다.

능청스럽게 엉뚱한 이웃집 앞으로 안내한다.

박제현 가옥을 찾아 동네를 살피다가 휴대폰에서 지도를 확인하고 이곳으로 다시 찾아왔다.

마을 입구 갈림길에 조그만 이정표가 한 곳 있다.

 

 

 

 

  

문덕면 법화길 113-1

문패를 보니 조인덕으로 나와있다.

아닌가? 하고 되돌아 나오다 아무래도 이집인 것 같아 살짝 들어가 본다.

 

 

 

 

 

아랫채이자 사랑채

보수 중인지 장마철이어서인지 집 주위로 비닐을 둘렀다. 아랫채도 생각외로 축담이 높다.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安圭洪·朴濟鉉 家屋) / 등록문화재  699호

보성군 문덕면 법화길 113-1

 

한말 일제에 항거하고 구국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머슴과 주인이 함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것은 유일하다. 호남의병의 대표적 머슴 의병장이었던 안규홍(1879~1910, 건국훈장 독립장)과 안규홍 의병부대의 운량관이었던 박제현(1871~1909, 건국훈장 애족장)이 함께 살았던 집이다.

안규홍은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에서 안달환의 아들은봉 안방준의 10대손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자 이 집으로 이사 왔다. 안대장이 약 20여 년간 담살이머슴을 했던 사랑채와 주인이자 고종 사촌 형인 박제현의 안채가 원형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현지 안내문의 <안달환의 아들은봉 안방준의 10대손으로 태어났으나.......> 부분이 애매하다. 안규홍은 안달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랫채이자 사랑채를 안채쪽에서 본 모습이다.

집의 앞뒤가 없어보이며 차라리 안채를 바라보는 쪽이 앞쪽인것 같다.

 

보이는 방중 맨 오른쪽에는 주인 박중규와 (아들)박제현이 차례로 기거했고, 가운데 방에는 손님 숙소로 사용했으며, 마굿간 옆 협실에는 머슴과 일꾼들이 기거했다. 꼬마머슴이었던 안규홍은 반 칸 규모의 협실에서 생활하며 잔신부름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안규홍은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에 있었으나 현재 사라진 행랑채에서 기거하였으며 결혼 후에는 어머니, 처와 함께 대문채 안쪽에 별채를 짓고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구간에선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마구간은 창고로 바뀌었다. 의병활동 당시 안규홍은 마구간 지하에 숨어 일본군의 추적을 피했다고 한다.

 

 

 

 

 

안채.

가운데 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축담이 상당히 높다.

 

전남 보성은 의병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보성군은 임진.정유재란부터 한말 일제강점기까지 777명의 의병이 활동한 곳이다. 구한말 보성 의병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집이 '보성 안규홍. 박제현 가옥'이다. 이곳은 최근까지 현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근대역사유적지였으나 문화재청이 2017년 12월 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받게되었다. 보성 안규홍, 박제현 가옥은 의병이었던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집이다. 안규홍은 머슴의 신분이었고 박제현은 주인이었다. 안규홍은 머슴츨신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32세의 짦은 생을 마쳤다. 부농이었던 박제현은 안규홍 의병부대의 운량관(運糧官)으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문덕면 동산리 대지주였던 박제현의 소유였던 이 집은 1872년 신축되고 1933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구한말 의병장의 주거지가 국내에 그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여서 그 역사적인 가치가 남다르다.

<세월의 흔적, 근대문화 역사유산에서>

 

 

 

 

 

찾아온 연유를 말씀드렸드니  이집 4대 종부님이 앞뒤 대청문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해 주시고 마음껏 둘러보라고 한다.

 

 

 

 

 

오늘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뒷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종부님이 거주하시는 방도 살짝 엿본다.

정갈한 찻방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안방인지도 모르겠다.

 

 

 

 

 

참 정겨운 상이다.

 

술떡과 갓 삶은 옥수수를 내어 놓는다.

맛도 있고 감사하다.

음식을 내오니 여러 마리의 고양이가 출현한다.

나도 달란다.

이 집에는 7마리의 고양이들이 같이 기거하고 있다

 

 

 

 

 

안채를 바라보았을때 좌측 상부.

사당이란다.

4대 선조를 모시고 있다한다.

가정집에 이런 재실이 있는 곳은 흔치않다.

 

 

 

 

 

우측엔 창고,

 

 

 

 

 

종부님께 감사하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축사를 본다. 이 주변에 과거 다른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안규홍은 아버지 안달환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서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까지 벼슬에 오른 양반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살림살이가 매우 궁핍했다. 안규홍이 4살때 그의 아버지가 타계했고, 어머니는 남편의 매부이자 부농이었던 박중규(박제현의 부친) 집에 몸을 의탁하고 살았다. 안규홍은 10살 때부터 꼬마머슴으로 주인 시중을 들고 소와 말에게 먹일 쇠죽 끓이는 일을 하며 성장했다. 안규홍은 이 집에서 20년 동안 머슴노릇을 하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퇴위하고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조직했다. 1908년 4월 보성군 동소산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 안규홍 의병부대는 보성을 중심으로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26회의 전투를 치렀다. 파청, 진산, 원봉 등지에서 승리하며 일본 순사와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명을 사살했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조선의병 토벌작전을 펼쳤다. 안규홍은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1910년 6월 22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7년 보성 사람들은 안규홍 선생을 기려 득량면 예당1리 파청에 '의사안공파청승첩비'를 세웠다. 안규홍이 벌교 장에서 일본 헌병을 맨주먹으로 살해한게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마라'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했다.

부농이었던 박제현은 안규홍의 의병부대 운량관으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박제현의 어머니가 안규홍의 고모였으므로 박제현과 안규홍은 사촌지간이다. 박제현의 아버지 박중규(안규홍의 고모부)는 안규홍이 어릴 때부터 그의 가족을 거두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박제현은 1908년 2월 안규홍 의병부대의 군수장이 되어 450여 의병의 보급품 지원에 이바지했으며 파정, 진산, 원봉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가 체포된 과정에 대해 서로 다른 설이 있다. 순천 병산사의 양가쟁이 고개에서 일본군과 교전끝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손발을 절단당하여 불구의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1909년 문덕면 병치마을에서 붙잡혀 일본 헌병에게 고문당해 불구로 고초를 겪다 63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설도 있다.

 

<세월의 흔적 근대문화 역사유산에서 발췌>

 

 

 

 

▣복내면 반석리 석불좌상 / 천연염색 공예관

 

복내면 소재지 어느 중국식당에서 중식후 반석리 석불좌상을 보러 왔다.

오늘 일정상 거리로 본다면 금남고택과 주변 별신당, 5층석탑을 보고 복내면 소재지로 이동하여 중식후 반석리 석불좌상을 둘러보는게 순서이지만 서로 거리가 가까운 곳이라 별 차이는 없다.

 

석불좌상 입구에 천연염색 공예관이 있고 주차장도 잘 마련되어 있다.

카카오 위성 지도상에서 보면 이곳이 뭐하는 곳이지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보성군 천연염색공예관 문은 닫혀 있어 내부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창문으로 보니 탁자와 의자등이 비치되어 있으며 무슨 체험 프로그램운영하는 장소같다. 

 

 

 

 

 

보성군 천연염색공예관 상부쪽으로는  한옥관이 있다.

 

 

 

 

 

야외 체험실

수풀이 무성한 것으로 보아 현재 운영이 제대로 되고있지 않은 것 같다.

 

 

 

 

 

다른 각도에서 한컷 더.

반원형의 구조물은 일종의 그늘막으로 보면 되겠다.

 

 

 

 

 

석불좌상으로 간다.

이 도로의 끝에서 좌측편엔 천연염색 공예관의 한옥이 있고 우측편에 석불좌상이 위치한다

 

 

 

 

묘지와 석불좌상이 나란히 있다.

 

 

 

 

 

어느 안씨 집안의 묘,

 

 

 

 

 

옆에 반석리 석불좌상이 있다.

 

보성군 복내면 반석리 520-1

이 석불좌상은 자연석을 배 모양으로 다듬어 신광(身光, 불상의 뒤에 있는 빛의 모양)을 삼고 그 위에 불상을 새간 것이다.

둥굴고 큰 얼굴은 엄숙하면서도 토속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으며, 머리 뒤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있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서 왼쪽 어깨로 올라간 주름은 간략하면서 느슨하다. 큼직한 두 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와 손바닥이 왼손은 밖을, 오른손은 안을 향한 독특한 모습이다. 유신리 일월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갖고있다.

전체높이 222cm, 광배 너비 136cm규모이며, 조각 기법으로 볼 때 고려후기 토속적인 불상 양식의 하나로 보인다.

<현지 안내문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옥체험 숨> 건물을 둘러본다.

 

 

 

 

 

한옥 브랜드화 전통체험 프로그램

 

전통한옥에서 지내보며, 전통 규방공예 침구 만들기 체험과 휴양 

우리옷 시니어 모델 프로그랭

도자기 공예체험

전통삼베한지옷 만들기

길쌈놀이

산야초 족욕 차운명상,

민화와 한지 공예

 

보성군 천연염색공예관 / 한옥체험 프로그램

연락처 : 010-4613 - 5633

대  상  : 전국대상 한옥헤험을 원하는 고객

사업기간: 5월~12월

 

 

 

 

한옥체험관

 

 

 

 

 

해먹쉼터도 있으나 낡아 보인다.

 

 

 

 

▣복내면 봉천리 오층석탑

 

복내면 봉천리 오층석탑에 왔다.

 

마을 안길을 따라오르다 갈림길에서의  오층석탑 방향 진입로가 좁은 농로여서 차량 진입은 조금 곤란하다.

따라서 마을 적당한 곳에 주차함이 좋을 것 같다.

아님 금남고택의 주차장에 주차후 금남고택과 별신당을 차례로 둘러보고 계단길을 따라 내려선 후 도보로 이곳까지 이동하여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별신당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5분여 거리쯤 될 것 같다.

 

 

 

 

 

보성 봉천리 오층석탑 / 보물 제1115호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767-1

탑동마을 밭 가운데 있는 5층 석탑이다. 이곳은 오동사(梧桐寺)의 옛터로 고려 현종7년(1016)에 봉갑사의 말사인 오동사를 지으면서 이 탑도 세운 것으로 전한다,

탑의 형식은 2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모양이다. 기단은 아래층 기단이 너무 낮아 마치 바닥돌처럼 보인다. 위층 기단의 남쪽 면에는 승려의 모습이 돋을새김 되어 있어 흥미롭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쌓았는데, 1층몸 돌은 4장의 판판한 돌을 사방으로 세워 구성하였다.

 

 

 

 

 

각층의 몸돌마다 네 모서리에 기둥을 본 뜬 조각이 보이며,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은 눈에 띄게 작아져 있다.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두터워 보이며, 밑면의 받침을 3층까지는 5단을 유지하다가 4.5층은 4단으로 줄어들어 일정하지 않다.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어 시원스럽다.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서 위층 기단에서의 독특한 조각이 돋보이고, 전체적으로 좋은 상태로 남아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기단 4면 중 1면에만 돋을새김 되어 있다.

 

 

 

 

▣보성 금남고택

 

금남고택으로 왔다,

들머리 정원수 두 그루가 시선을 끈다.

 

 

 

 

 

작은 연못도 있다.

 

 

 

 

 

금남고택은 인터넷상에서 또는 보성군청 문화관광과에도 마땅한 자료가 없다.

근년에 전라남도 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현수막만 본 것 같다.

옆에 파쇄석으로 두군데의 주차장을 만들었다.

 

 

 

 

남으로 난 대문이 두군데다.

대문 밖에 우물이 있다.

 

 

 

 

문간채를 지나 안채 마당으로 들어선다.

 

 

 

 

 

안채

앞뜰에 예쁜 꽃을 심었다.

 

 

 

 

 

아랫채?

안채에서 마당을 바라보았을때 좌측편에 위치한 건물이다.

우측 2칸은 광같아 보인다.

 

 

 

 

 

안채 앞쪽의 돌확?

부잣집 안채 앞뜰에 이런 돌확이 있는 곳이 더러 있다.

고여있는 물이지만 항상 깨끗한 것으로 보아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셈이다.

손을 씻기위한 용도일까? 

 

 

 

 

안채 옆쪽 툇마루에 잠시 쉬어도 본다.

 

 

 

 

 

 

 

 

 

 

 

아랫채를 뒤로 돌아 방향을 달리하여 안채를 본다.

 

 

 

 

 

안채.

안채 좌측편에 수선중인듯한 건물이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았다.

 

 

 

 

 

안채 앞쪽에는 층을 달리하여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역시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다.

 

 

 

 

 

사랑채 옆의 이 건물은 화장실일까?

주변은 보수를 요한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사랑채

 

 

 

 

 

사랑채 측면이다

 

 

 

 

 

안채와 사당?, 아랫채, 사랑채 문간채 2동, 기타 헛간 등으로 건물의 수는 많지 않지만 건물의 체목이나 배치, 정원의 넓이 등으로 보아 상당한 재력가의 집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보성 당촌별신당. 천인정

 

금남고택쪽에서 남쪽 언덕을 바라보면 운치있는 노송이 몇 그루 보인다.

당촌 별신당으로 오르는 길은 마을에서 계단을 따라난 길이 있지만 이곳에서 바로 오르는 길이 있어 이 길을 따른다.(현재 탐방로에 제초가 되어 있지않아 오르기 쬐끔 곤란하다.)

 

 

 

 

 

별신당으로 오르면서 바라본 금남고택.

앞쪽의 회색지대는 주차장이다.

 

 

 

 

 

천인정 (天仞亭)

 

복내면 봉천리 당촌마을은 1664년쯤에 문씨, 송씨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그 뒤 광주 이씨 이중원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호구총수(1789)에서 마을 이름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유래가 오래된 마을이며, 예부터 보성군에서 '제일당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당촌마을은 복성현(福城縣)의 시직신을 모시는 당이 있다하여 당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국무속신앙사전>

 

 

 

 

1788년(정조12)에 건립된 이 정자는 광주이씨 가문에서 지역의 후진 교육을 위한 강학소의 목적으로건립하였으며, 정면 3칸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대칭형을 이루고 있으며, 천인정이라는 현판과 함께 26개의 기문과 시문이 걸려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람덕정(覽德亭/ 볼 람(남))이라 했다가 1841년(헌종7년)에 천인정이라 다시 이름지었다 한다.

 

 

 

 

 

천인정(天仞亭 )

인자가 낯설다.

길 인자라 한다, 길은 8척, 높이의 단위을 말한다는데 한길 두길 등 사람의 키를 가름하는 높이 또는 깊이를 재던 단위인것 같다.

 

천인(天仞)이란 '봉비천인 기불탁속(鳳飛天仞  飢不啄粟 /봉은 천길을 날며, 주려도 조 따위는 먹지않는다. 쫄 탁, 조 속)'의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한 것이며,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우국충절하며 시문을 즐기는 장소로 활용되어 오늘날 보성 정신문화의 본산으로 자리매김 하였다고 한다.

자세히 보지 못했으나 이 정자의 상량문에는 開國 534년 乙丑 四月 十日로 적혀있다고 한다. 이 날짜가 1788년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의 일본연호인 명치(明治)연기를 쓰지 않고 개국 연호를 쓴 것에서 자주성을 였볼수 있다고 한다.

 

 

 

 

 

 

 

 

 

 

 

좌측면에서 바라본 천인정.

천인정 바로 옆에 별신당이 있다.

 

 

 

 

 

보성 당촌 별신당 (當村 別神堂) / 전라남도 민속자료제34호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산 706.

별신당은 상량문에 따르면 1897년에 지었다. 이 당안의 돌들은 양근석(陽根石)모양이었으나 모두 도둑맞았다. 보성군 거주민들은 고목을 신체(神體)로 섬기고 있으며, 이곳처럼 양근석을 7개나 모신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이곳 주민들은 돌 일곱 개는 칠성님을 상징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칠성신체인 돌은 양근석을 닮아서인지 아기 못 낳는 여인들이 공을 들이는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 양근 귀두 부분은 여자들이 깎아가서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문에 자물쇠는 없지만 열리지는 않는다. 못을 박아 둔 듯 하다.

문 틈새로 내부를 본다. 당집안에는 나무시렁이 하나 놓였고 바닥은 흙으로 되어있다. 나무 시렁위에는 한지로 싸 놓은 다섯개의 돌이 있고, 시렁 아래쪽에는 한지로 싸놓은 두 개의 돌이 있다. 돌은 남근 모양을 하고 있으며, 모두 한지로 싸고 왼새끼로 둘러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 일곱 개의 돌을 칠성님이라고 부르면서 지극치성을 드리면 그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믿고 있다. 한편 아래의 두 개만 원래의 돌이고 나머지는 새로 마련한 돌이라고 한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돌이 사려져서 마을 어른인 이용기가 강에서 새 돌을 가져다가 모셔 두었다고 한다.

<한국무속신앙사전>

 

 

 

 

언제부터 제를 모시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별신제를 모시는 당집의 상량문을 보면  <龍 開國 五百六年 丁酉 丁月 二十四日 巳時  立柱 同月 二十六日 上樑手兼司 金弘伊 化主 金達天 龜>되어 있어 1897년에 당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으나 당집의 위치는 현 위치가 아니었다고 전한다. 옛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예날에는 당집이 마을에서 걸어서 20~30분 걸리는 마을 뒷산에 있어 한밤중에 제사를 모시러 오르기가 힘들고, 정월이어서 날씨도 매우 추워 지금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한국무속신앙사전>

 

 

 

 

 

천인정을  앞에서 바라봤을때 좌측에 당집이 있고,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노송이 10여그루가 있다.

노송도 형태가 기이하여 둘러봄직 하나 당일 수풀이 무성하여 다니기가 쉽지 않아 둘러보지 않았다.

마을 사람에 따르면 천인정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정자로 지어진 동기가 특별하다. 일제강점기때 당집 엪에 신사를 지으려고 한다는 계획을 알고 마을의 유지들이 먼저 천인정을 지어 신사를 짓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무속신앙사전>

 

 

 

 

 

앞쪽으로 조망이 좋다.

 

 

 

 

 

운동기구가 깨끗히 관리되고 있으나 현 농촌인구의 고령화를 감안하면 이곳 언덕으로 오를 분이 얼마나 될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내려가는 길

 

 

 

 

 

금남고택에 주차하고 동 주택을 둘러보고 앞쪽으로 난 길을 따라 별신당에 오른 후 천인정과 별신당을 거쳐 계단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조금 수월할 것 같다.

단지 현재 금남고택에서 오르는 길에 수풀이 무성하고 작은 가시가 달린 넝쿨식물이 많이 자라 다니가가 쉽지는 않지만 살살 다닐만 하다.

 

 

 

 

▣선다원

 

보성군 율어면 유어리 272번지

내비에는 선다원으로 입력하면 된다.

 

 

 

 

 

선다원 티하우스

주인장 어찌 왔냐길래 녹차밭을 둘러보러 왔다고 하니 뭔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기색이다.

둘러보고 들러란다. 차한잔 대접하겠다면서,....

 

 

 

 

 

티하우스 앞에 작은 연못이 있다.

 

 

 

 

 

주인이 거주하는 주택일 듯.

 

 

 

 

차밭을 둘러본다.

 

 

 

 

 

한쪽엔 상당한 규모의 태양광 발전시설이 들어서 있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속 오염원이 하나도 없는 곳이다.

 

 

 

 

 

 

 

 

 

 

 

 

 

 

 

 

 

 

 

 

 

 

 

 

 

한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편백나무 아래로 길이 있나 살펴보지만 없다.

따라서 올라온 길을 따라 되돌아 가야한다.

 

 

 

 

차밭을 둘러보고 티하우스로 왔다.

 

 

 

 

 

내부

주인장께서 얼음 송송 띄운 시원한 녹차를 내어 주신다.

그 맛에 녹차 한통 구입했다.

 

 

 

 

유기농 보성 녹차 선다원의 제품들

 

판매는 주로 홈페이지를 통한 전자상거래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홈페이지는 선다원으로 검색하면 된다.

가까운 곳에 있다면 다원구경도 할 겸 이집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다.

작은 주인마님 친절하고 인성이 참 고와 보인다.

 

 

 

 

 

주인장

지형으로 보면 천국같은 곳에 살고 계시지만 특이 여름철 해야 할 일 쳐다보니 걱정이 태산이다.

 

 

 

 

▣율어면 문형식 가옥(율어리 고택)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144

문형식 고택을 찾아간다.

 

 

 

 

 

마을 가운데 우물을 깨끗이 정비했지만 물이까가 많아 음용은 부적합해 보인다.

 

 

 

 

 

문형식 가옥

 

 

 

 

 

"사랑채는 양 측면 한가운데에 기둥을 박아서 칸을 나눌 수 있게 하였다. 동쪽부터 광, 옆에는 나뭇간, 뒤에는 부엌, 아랫사랑, 윗사랑, 맨 끝에는 누에를 치는 방이 있는데 이것은 이후에 바뀐 모습이다."

현지 안내문의 내용중 일부이나 뭔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보성 율어리 고택 / 국가민속문화재 제156호

소재지 : 보성 율어면 진천길 34-15(율어리)

 

 

 

 

 

이 집은 1890~1900년대 지어진 것으로, 안채· 사랑채 · 아래채로 구성된 남도 내륙지역의 전형적인 주택이다. 부엌 ·안방 ·대청이 일(一)자형로 배치되는 남도 방식의 간살이를 기본으로 하며 많은 민속자료가 잘 보존되어 당시 일반 백성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건축 연대가 떨어재고 형태가 많이 바뀌었고, 아랫채는 사당을 고쳐서 다시지은 것이다.

동쪽부터 작은방. 2칸의 대청·큰방·부엌이 있다. 큰방부터 작은방까지는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작은 방 앞은 아궁이를 만들기 위해 약간 높은 마루를 놓았다. 대청과 툇마루 사이에는 세살문이 있는데 이것은 남도의 일반적인 특색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돌확

할머니께 용도를 물어볼려 했으나 귀가 어두우신것 같아 여쭤보지 않았다.

금남고택에도, 이집에도 물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아래채는 일종의 안사랑채로 작은 사랑에 해당된다 남쪽애 아랫방 · 대청, 북쪽에 광이 있으며, 앞쪽과 오른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집 주위에는 감나무가 우거져 있고, 뒤로는 대나무 숲으로 가는 길이 있다.

 

 

 

 

 

헛간

화장실도 이곳에 있다.

 

 

 

 

 

두지(표준말로는 뭐라는지 모르겠다.)

벼 저장용이다.

뒷쪽으로 녹차나무가 제법 심겨져 있다.

 

 

 

 

 

 부엌 옆에도 있다.

이곳에는 보리를 저장하였다고 한다.

 

 

 

 

 

사랑채

 

현지 안내문의 사랑채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워 사랑채 사진의 뒷편을 본다.

본채 마당보다는 한 층계 낮은 곳에 위치하며 굴뚝 등으로 보아 뒷면으로의 출입은 어려워 보인다.

 

 

 

 

마을 가운데 작은 공원도 만들었다.

 

 

 

▣존제산 일월사

 

두개의 안내도 중 이것이 더 정확하다.

이웃한 다른 안내도는 현 불사의 배치와 맞지않은 걸로 보아 앞으로 조성할 조감도인가 싶다.

주차장에서 우측 상부, 좌측 상부, 좌측 하단으로, 즉 반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둘러보았다.

 

 

 

 

 

먼저 설법전으로 왔다,

절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어떻게 둘러볼까 하다가 상부로 이어지는 도로를 중심으로 먼저 우측편 지역을 찾아보고, 좌측 대웅보전으로 이동하여 적의 사찰을 둘러보기로 한다.

설법전 뒷편으로도 2개의 건물이 있다. 봉안당, 정토원 건물이다.

 

 

창건설화

이곳에 불우를 지어 부처님을 모시겠노리

 

수지리에 능통한 신라 말의 승려 도선국사(7827~898)가 존자산(현 존제산)을 다니다가 완벽한 배산임수의 위치와 제석천왕이 내려앉은 형세와 봉우리가 병풍처럼 터를 둘러싸고 있는 연화지 형국인 지금의 일월사 터의 지세에 놀라 감탄하였습니다.

그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채 감상하고 있는 사이 해가 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낮의 모습보더 더 놀라온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것은 하늘 아래 해와 달아 동시에 떠 있는 신비한 광경이었습니다. 도선국사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이곳을 발견한 것은 부처의 뜻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빛이 나는 집채 만한 바위를 찾아 지금의 보물 제944호 마애여래좌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다는 뜻에서 일월사의 창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월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 <범우고, 1799>, <조선호남지 권1, 1933>에 등장합니다.

<일월사홈페이지에서>

도선국사가 마애여래좌상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지 마애여래좌상 안내표지판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알리고 있다.

 

 

 

 

설법전 내부

화려하고 밝다.

 

 

 

 

설법전 앞 정자

뒷편 두 비석에 시를 새겼다.

 

비문 

 

육신이 맑고 고운데 버리고 가니 슬프도다.

집이 깨끗하고 널찍한데 버리고 가니 슬프도다

진리의 북소리(법고)는 다시는 들리지 않으니 슬프도다

목탁소리 또한 다시 들리지 아니하니 슬프도다.

연꽃이 만개한 정토는 어디메뇨 슬프도다.

-구담당 보정 대화상-

 

놀다가네

 

꽃 놀고 바람 놀던 곳

결결이 비단 구름 산길을 돌아

천상에 부르는 사랑가

춤추며 놀다가네

 

꽃으로 왔다 별빛으로 돌아 가리니

존제산 구름 옷 입어 밤하늘 수 놓고

산새소리 다정하여 꽃방에 들었더니

아. 참으로 한 생이 잠결이네

 - 존제산 일월사에서 두우 -

 

 

 

 

위에서 부터

산왕전

봉안당. 설법전, 정토원

보타전, 일월당

무량수전, 지장전

대웅보전, 대적광전

화장실

 

 

 

 

일월당으로 간다.

 

 

 

 

 

커다란 바위에 喝자를 새겼다.(갈/ 꾸짖을 갈)

 

 

 

 

 

 

 

 

 

 

 

보타전

 

 

 

 

 

보타전 내부

 

 

 

 

 

보타전 외벽과 주변

 

 

 

 

 

보타전 뒷편이다.

 

 

 

 

 

대적광전으로 왔다.

대적광전 내부 또한 여타 절보다 화려하지만 규모에 있어 큰 차이는 없다.

 

 

 

 

범종루와 뒷편은 미륵전.

 

 

 

 

 

대웅보전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일월사는 1978년 마애여래좌상 인근 폐사지에 터를 잡이 대웅전과 요사채 등 건물 2동을 마련하여 미륵사란 이름으로 산문을 열었다.

2004년1월 문화관광부로부터 전통사찰로 지정돼 동년 12월 사찰명을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문헌에 의거 일월사(일월사)로 개칭하고 중창을 계획했다. 보물 제944호 마애여래좌상 관리사찰인 일월사는 2005년 7월 마애불보호를 위한 전각을 낙성하기도 했다.<2005년 법보신문에서>

그러고 보면 현 일월사는 비교적 근년에 비약적인 사세가 확장된 절이라 할 수 있겠다. 

 

 

 

 

 

대웅보전은 걷보기와는 달리 내부로 들어가면 깊이가 있다.

 

 

 

 

 

현지에서 만난 스님께 물어본다.

우리나라 사찰의 종파를 조계종, 화엄종, 천태종 등등으로 분류하는데 일월사는 어느 종파에 속합니까?

자세히 알아듣지는 못했는데 위 종파는 아닌것 같다.

 

 

 

 

 

 

 

 

 

 

 

 

 

 

 

 

내용을 떠나 이런 대웅전은 여태껏 보지못했다.

 

 

 

 

 

대웅보전 뒷편의 산왕전으로 왔다.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도 내용은 산왕전이나 다름 없다.

시원스럽고 스케일이 있는 산신령님이 거주하고 계신다

 

 

 

산왕전을 둘러보고 대웅보전 앞 범종루로 되돌아 내려왔다.

 

 

 

 

 

아래서 올려다 본 범종루.

종에 새겨진 일월사신종의 금빛 글씨가 선명하다.

 

 

 

 

 

옆에 무량수전 건물이다.

 

 

 

 

지장전으로 내려왔다.

지장전 내부 또한 나름 화려? 하다.

 

 

 

 

 

용왕각

 

 

 

 

 

보문전

 

 

 

 

 

보문전 내부

 

 

 

 

 

해수관음보살

 

 

 

 

 

남순동자

용왕전을 향하고 있다.

 

 

 

 

용왕님

뒤로 보이는 바위가 소원성취바위이다.

 

 

 

 

복돼지바위

존제루 옆에 있다.  

 

 

 

 

현장에서는 아니다 싶더니만 사진으로 보니 조금 닯은 듯도 싶다.

 

 

 

 

 

존제루

 

 

 

 

 

소원성취바위로 간다.

이쪽에서 보니 거북이를 닮은 듯도 한 바위로 옛 5명의 도인들이 득도했다는 곳이다.

 

 

 

 

소원성취바위의 다른 쪽이다.

 

 

 

 

 

용앙각 인근에서 부터 아랫쪽으로 일련의 바위지대다.

이 구역에 복돼지바위, 소원성취바위(거북이바위), 두꺼비바위,  토끼바위, 황소바위, 와불바위 등이 있다.

 

 

 

 

 

마애여래좌상으로 간다.

 

 

 

 

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보성 유신리 마애여래좌상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유신리 125

고려시대 존제사(尊帝寺)로 알려진 이곳에는 세로 5m, 가로 4.3m 정도의 큰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눈, 코, 입이 뚜렷한 얼굴과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이 새겨진 대좌(臺座: 불상을 앉히는 단)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엄지와 검지로 둥근 원을 만든 설법인(說法印)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손 모양은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서는 흔치 않다. 불상의 법의(法衣:부처님이 입는 옷)는 두 어깨를 감싼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두광(頭光:부처의 머리 뒤에 표현된 둥근 빛의 모양)과 신광(身光:부처의 몸 뒤에 표현된 둥근 빛의 모양)이 분리되어 있으며, 둘 다 둥근모양이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인 안정감과 부드러우면서 생동감이 있는 고려 초기의 우수한 작품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토끼바위

마애불 좌측편에 위치한다.

 

 

 

 

 

 

 

 

 

 

 

 

 

 

 

 

마애불 아랫쪽으로 데크를 설치했다.

좌측으로 보이는 큰 바위가 황소바위, 계속 데크길을 따라 내려가면 와불이 있다.

와불까지는 가지않았다. 몰라서.

 

 

 

 

마애불을 둘러보고 종무소(입구)쪽으로 간다.

 

 

 

 

 

종무소

 

 

 

 

 

이곳은?

 

 

 

 

 

표시는 없지만 공양간이지 싶다.

 

일월사는 고찰이지만 흔히 보는 사찰과는 특히 내부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여태껏 웬만한 전라지역의 사찰명은 일고있는데 일월사는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절이었디. 지나는 걸음이면 아님 일부러라도 한번쯤 찾아보면 느낌이 다를 것 같다.

 

 

 

 

▣태백산맥 문학비

 

일월사에서 귀가 길 진주와 보성읍내는 서로 반대방향이다,

웬만하면 보성읍내에 위치한 춘옥서옥을 염두에 두었지만 오늘 일정상 맞지않는다.

벌교로 향하는 길에 호남정맥상의 고개 주릿재를 넘게 된다. 이곳 주릿재에 존제산 표지석이 있다.

왼쪽에 등 존제산(존제산에 오르다. 한학자 담곡 이병년)시비, 우측에는 주릿재 길(시인 윤귀례)시비가 있다.

웬 고개에 존제산 표시석이 있지? 하고 의아해 했는데 이곳 주릿재에서 존제산으로 가는 도로가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존제산 정상 인근까지 길이 나 있는 것 같다. 길의 상태가 궁금하다.

 

 

 

 

 

테백산맥 문학비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문학비다.

 

 

 

 

뒤쪽의 정자

 

벌교를 거쳐 진주로 향한다.

진주에 도착하니 오후 8시경이다. 집 이웃하여 강원도손두부집이 있다. 순두부로 많은 분들이 찾는 집이다.

순두부 맛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