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의 산

전주 한옥마을

정헌의 티스토리 2024. 10. 29. 22:49

■전주 한옥마을 

 

한옥마을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전주국악방송, 한옥마을 도서관, 대한왕실 송광재, 전주전통술박물관, 전주공예품전시관, 최명희문학관, 전주부채문화관, 교동미술관, 경기전,  전주 성당, 한국집, 전라감영지, 카페 행원, 풍남문, 오목대,  한옥마을 선비문화관이 오늘의 주요 일정이 되었다.

이 중 경기전은 입장료(어른 3,000원)이 있으나 나머지는 입장료 등은 없으며  몇 목적지를 정하고 가면서 이골목 저골목 다니면 되겠다.

 

 

▷가는 길

 

 

▷탐방코스

전주 한옥마을

 

▷탐방후에 

 

한옥마을 1. 2 공영주차장이 이웃해 있다. 

몇 시간 주차하면 주차료가 조금 비싼게 흠이지만 주차시설은 양호하다.(1일 약 15,000원)

 

 

 

 

 

좌측 보이는 건물이 라한호텔,

공영주차장에서 남쪽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대식이고 높이와 규모가 있어 멀리서 방향 가늠이 가능하여 등대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전주 국악방송 앞을 살짝 엿보고,

 

 

 

 

 

솔광재 샛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내 한옥마을 도서관이 있다.

 

 

 

 

 

한옥마을 도서관

 

 

 

 

 

일반 가정집 같은 한옥을 개조하여 작은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3채가 있다.

 

 

 

 

 

이곳도 한옥마을 도서관이다.

 

 

 

 

 

승광재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로3가 42-10번지

 

승광재는 대원군의 증손자이자. 대한제국을 선포(1897)하신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직계 손자이신 황손 이석님이 사시는 곳이다.

승광재(承光齋)는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빛 '광'자와 뜻을 이어간다는 이을 '승'자를 따서 고종황제의 뜻을 이어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전주는 조선 황실의 발상지이자 태조 고황제 이성계 장군 선친들의 본향으로써, 2003년 8월에 제34, 35대 김완주 전 시장님과 전주 시민들의 의지에 따라 황손 이석님을 모셔, 2004년 10월 15일에 이곳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승광재는 마지막 황손 이석님께서 황실에 대한 전통, 문화, 역사에 대한 강연을 하시는 등 다양하고 특별한 문화공간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오늘은 대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주변 골목

 

 

 

 

 

 

 

 

 

 

 

전주 전통술 박물관(수을관)으로 왔다

라한호텔 앞쪽에 있다.

 

 

 

 

 

 

 

 

 

 

 

유상곡수

 

 

 

 

 

조선왕조술록

본 전시는 전주전통술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왕의 술 프로젝트 제1막으로 조선 태조, 예종, 인조 등과 관련된 궁중 술 이야기로 구성되었습니다.

 

 

 

 

 

각종 술의 재료들

 

 

 

 

 

가양주의 지문, 누룩

 

누룩은 가양주를 빚을 때 쓰이는 전통 발효제입니다. 누룩은 주로 통밀, 보리, 쌀, 찹쌀, 메밀, 녹두, 옥수수, 조, 수수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전통방식으로 누룩을 만들고 숙성시키면 누룩에 자연적으로 미생물이 배양됩니다. 그래서 누룩으로 빚은 술은 보다 풍부한 맛과 향기를 자랑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지역별로 누룩 틀을 사용해 사시사철 다양한 모양의 누룩을 빚어 개성 있는 술을 빚었습니다. 술마다 개성 있는 맛과 향기를 내뿜게 만드는 일등공신, 누룩 !  누룩은 가양주임을 입증하는 지문과 같습니다.

 

 

 

 

 

술은 백약의 우두머리요 바로 천하에 아름다운 녹으로서 노쇠하여 병든 몸을 붙들어 길러주고 근심을 잊고 반드시 복을 누리게 한다네,

-소재집에서-

 

 

 

 

 

양주 방법

 

 

 

 

 

술에 대하여.

목은 선생도 상당한 애주가이셨나 보다.

 

 

 

 

술박물관을 둘러보고, 다른 골묵길을 따라 전주 공예품 전시관으로 간다.

 

 

 

 

전주 공예품 전시관

 

 

 

 

 

공예품 전시관의 규모는 한옥마을에서는 상당히 큰 편이며,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을 전시 판매한다.

 

 

 

 

 

 

 

 

 

 

 

 

 

 

 

 

 

전주 공예품전시관을 둘러보고 최명희 문학관으로 간다.

 

 

 

 

 

최명희 문학관으로 왔다.

경기전과 담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위치한다.

 

 

 

 

 

입구이 밀짚모자를 쓴 조형물

 

 

 

 

 

탐방객이 많다.

 

 

 

 

 

전시관엔 독락재 편액이 걸려있다.

보통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기록해 나가는데  이곳 편액엔 좌측에서 우측으로 썼다.

 

 

 

 

 

소설가 최명희(1947~1998)

 

1947.10.10.전주시 풍남동에서 일본 와세대 대학 법학부로 유학한 당대의 지식인 최성무와 한학자 허환의 딸인 허묘순의 2남 4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적은 남원군 사매면 서도리 560번지, 본관은 삭녕

1963. 03.전주 기전여고에 입학했다. 고교시설 작가는 청소년 문사들이 모이는 전국 단위의 굵직한 백일장과 문학 콩쿠르에서 장원을 도맡아 공포의 자주색(당시 기전여고 교복 색)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천재 문사로 이름을 날렸다.

1970.03.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단편소설 <정옥이> <탈공>, 수필 <냇물>등 수상하며 문학의 재능을 인정받는다.

1980. 01. 중앙일보 신춘문예애 단편소설 <쓰러지는 빛>이 당선됐다.

1980. 05. 단편소설 <정옥이>와 <탈공>을 수정 후 다시 발표했고, 만종을 발표했다.

1985. 09. 월간<전통문화>애 장편소설 제망매가 연재를 시작했다. 

1996. 12. 대하예술소설 혼불이 전5부 10권으로 출간됐다. 책이 출간되자 일부 언론에서는 완간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작가는 "이 작품은 아직 완간이 아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해방공간 이후 6.25, 4.19, 5.16등 가까운 현대사까지 이어져 한국사의 격동기를 그리게 될 것"이며 "쓰면 쓸수록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나와 20권이 될지 30권이 될지 짐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98.12.11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했다.

 

 

 

 

나는 <혼불>을 통해 순결한 모국어를 재생해보고 싶었다. 전아하고   ㅇ드러지면서 아름답고 정확한 모국어의 뼈와 살, 그리고 미묘한 우리말 우리혼의 무늬를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늘 나를 사로잡는 명제였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해외활동

17년 동안 한 작품에 물두했던 작가는 작업 틈틈이 많은 강연을 했다.

글쓰기 못지않게 말솜씨도 달변이었던 작가는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 강연으로도 이름 높았다.

작가는 혼불의 연재가 마무리 되어 갈 무렵인 1994년에서 1995년 까지 매우 활발한 강연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뉴욕, 시카고, 일리노이 등 미주 지역 독자들과의 조우는 감동적이었다.

해외에서 모국어에 목말라 있던 교포들은 작가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재차 초청 강연회를 열 만큼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강연 당시 사용한 교재는 대학교에서 고급 한국어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며칠 전, 수유리에서 사는 친척 아이가, 오랫만에 찾아 오면서 배꽃 한 아름을 꽃아 놓고 갔습니다, 밤 사이 저혼자 벌어, 아침에 눈을 뜨니, 처연하게 호젓한 빛깔로 몇 송이 피어나 있었지요. 오늘 아침에는 차를 마시려고, 꽃 가지 아래 탁자에 앉았는데, 소리도 없이 흰 꽃잎 하나 찻잔에 날아 와 내립니다. 그리고 또 지는 꽃 잎, 이윽고 마루는 절(寺)의 뜰처럼, 저 꽆잎들로 적막하게 아름다우리라. 햇살은 목이 메일만큼 화창한데, 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었습니다. 저 홀로 피었다가 지는 꽃잎이나, 바다속의 손톱 게, 그저 무심히 떠 있는 구름, 겨울 새벽 유리창의 성에, 물소리, 그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목숨들로 여기어져서 숨 쉬면 그것들은 나의 폐부로 스며들어, 사람이나 한 가지로 간절하고, 두렵고, 사무칩니다. 하다 못해 빛깔까지도. 이것이 나의, 단순한 호사(毫奢/터럭호, 사치할 사)일까요, 열해(熱海)의 벚꽃을 보았으면, 나는 울었을 것입니다.

 

 

 

 

최명희 문학관 후문이다.

 

 

 

 

 

후문 맞은편의 양반가

음식점인가 보다. 좁은 골목의 정원이 정겹다.

 

 

 

 

 

최명희 문학관과 접하고 있는  교동미술관 다음이  경기전으로,

저만큼 깅기전이 가늠된다.

 

 

 

 

 

전주부채문화관으로 왔다.

최명희 문학관 입구에 접하고 있다.

 

 

 

 

 

전주부채문화관

 

 

 

 

 

단선(團扇/둥글단, 부채선)

부채는 크게 단선(둥근부채, 방구부채)와 접선(접부채) 두 종류로 갈린다. 그 가운데에는 새의 깃털로 만든 우선, 모양이나 용도가 다른 별선도 있다.

 

 

 

 

 

 

 

 

 

 

 

 

 

 

 

 

 

 

 

 

 

 

 

 

 

 

 

 

 

 

 

 

 

 

 

 

 

 

 

 

 

 판소리와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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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무대에서 부채가 없이 소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리꾼이 춘향이가 되었을 때 부채는 이몽용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가 되었다가, 홍부가 되어 박을 탈 때는 톱이되고, 심봉사가 되면 지팡이가 된다. 문모두(소리꾼 이름) 에게 부채는 판소리 무대에서 전투에 나간 군인에게 꼭 필요한 총과 같은 존재다. 전투에 나간 군인의 목숨을 지키는 총처럼 무대 위에서 소리꾼 문모두와 함께하는 부채는 한 몸이 되어 신명나는 판소리 마당을 만들어 낸다.

<전주부채문화관 기획팀장 고형숙>

 

 

 

 

교동미술관에 왔다.

 

교동미술관이 위치한 이 곳 일대는 내의류 제조 생산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생산활동을 하던 공장터였다. 내의류 생산관련 편직, 염색, 봉제시설을 갖추었고 한때 전국 내의류 시장의 80%를 점유하며 500여명의 근로자가 종사하던 일터였다.

옛 공장터는 교동미술관 본관 및 2관을 포함한 일대 약 2,500평이었으나 현재는 그 터에 최명희문학관, 부채문화관, 그리고 중앙초등학교 일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교동미술관은 옛 공장의 추억과 정취를 유지하고자 1960년대에 건축한 봉제공장 일부를 원형 그대로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하여 2007년 4월에 교동아트센터로 개관하였고, 2018냔 교동미술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조숙

색~ 물리적, 심리적, 생리적 현상의 결합.

 

"물리적 개념인 빛과 심리적 영역인 색이 만드는 세상을 색채로 표현해 간다. 세상의 색은 그 사물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색이 아니기에 그날의 심리적, 생리석 상태에 따라 다른 색채를 느낀다,"

이론적 바탕도, 자의식도 없이 '그리는 행위'자체를 즐기던 나의 작업에 빛이 들어왔다. 이 빛은 점점 지루해셔 가는 나에게 커다란 희망과 무한한 소재를 던져주었다. 일조량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사물을 소재로 작업하는 것은 찰나의 빛을 포착한 인상주의와 지금까지 해오던 사실주의를 혼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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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인상만큼이나 화사한 느낌이다.

 

 

 

 

 

 

 

 

 

 

 

 

 

 

 

 

 

haven, 그 곳에  머물다.

 

한옥이라는 공간은 오랜 세월 동안 묻어 나온 손때 묻은 흔적과 그 안에서 있었을 삶의 다양한 감정들이 녹아 들어있는 장소일 것이고, 안식처는 외부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장소를 초월한 내면적 집약체이지 않나 싶다.

캔버스에 물감을 중첩적으로 바르며 자연스럽게 색이 스며들며 이루는 우연의 효과를 만들었으며, 중첩적인 부분을 파내고, 다시 덮으며, 찍기도 하면서 반복되는 화면에 리듬의 변화를 주었다. 찍어내는 과정은 꽉 짜인 틀 속에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으로 다양한 패턴과 질감 표현을 위해 태피스트리 섬유와 같은 다층적인 효과를 주려고도 하고 있다. 혹은 오래된 흙벽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대나무, 지푸라기, 황토 등이 어우러지고 떨어져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이 보이게도 하고, 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벽 속의 상처를 파내고 다시 어루만지며 소멸시키고, 덮어져 가는 작업은 마치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슴속 깊은 상처를 숨기기만 하면 마음의 병이 생기듯이 그 상처를 도리어  밖으로 드러내어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보듬고 따뜻하게 안아주면 상처가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의 작업이다.

<작가 노트 중>

 

 

 

 

 

 

 

 

 

 

 

 

 

 

 

 

 

교동미술관을 둘러보고 경기전으로 간다.

 

 

 

 

 

경기전 가는 길

 

 

 

 

 

 

 

 

 

 

 

 

 

 

 

 

 

 

 

 

 

 

 

경기전에 왔다.

 

매표소

어른 개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무료관럄 만 65세 이상 내국인, 국가유공자증 소유자 등.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

 

 

 

 

 

경기전 정전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이 모셔져 있던 곳으로, 건물의 안정된 구조와 조형 비례, 섬세한 조각과 아름다운 단청은 왕실의 권위와 품격을 잘 보여 준다.

 

 

 

 

 

두 할머니, 

 

 

 

 

 

 

 

 

 

 

 

 

 

 

 

 

 

정전은 건물 한가운데에 높에 있으며, 어진을 모신 침실이 있고, 그 앞으로 정자각이 있다. 정전 좌우로는 지붕을 낮게 한 익랑(문의 앵옆에 이어서 지은 행랑)이 있고, 익랑 아래 동서에는 지붕이 있는 복도식 형태의 월랑(궁궐이나 사찰과 같이 규모가 큰 건물에서 앞이나 양옆에 줄지어 만든 건물)이 있다. 정전의 안마당은 익랑과 월랑이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제례를 지내는 엄숙한 공간이다.

 

 

 

 

 

정자각 정면 기와지붕 아래 붉은 널판지에는 화재를 막아 준다는 의미로 거북이 암수 한 쌍이 조각되어 있고, 정전 뜰 양옆에는 화재에 대비해 물을 담아 두는 그릇인 드므가 있다. 정전의 동쪽에 임시로 어진을 모시던 별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전주사고가 복원되어 있다.

현재 태조 어진은 경기전 안의 어진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암수 거북이 한 쌍.

 

 

 

 

 

 

 

 

 

 

 

 

 

 

 

 

 

매화나무

 

 

 

 

 

실록각

 

전주사고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부터 1413년(태종 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세종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실록 각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는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1부씩 분장하였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5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재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경묘

 

'조경(肇慶/비롯할 조)은 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조선 왕실의 시조 사당이다. 이한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의주로 옮겨갈 때까지 전주 이싸가 대대로 살던 곳이다.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경기전 북쪽에 세워, 영조가 세손(정조)에게 쓰게 한 전주 이씨 시조 내외의 위패를 모셨다. 

조경묘는 태조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경기전, 이한의 묘역인 조경댄, 태조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가 살던 이목대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어진박물관

증축공사가 그의 마무리 되었다.

 

 

 

 

 

현 지하의 어진박물관을 개방하고 있다.

 

 

 

 

 

 

 

 

 

 

 

 

 

 

 

 

 

영상으로 보는 태조어진 봉안행렬

 

 

 

 

 

한쪽 벽면에는 태조어진 봉안행렬을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했다.

300여명이 태조언진 봉안행렬에 참여하엿으며, 한양에서 전주로 태조어진을 모셔오는데 7박 8일이 소요되었다.

 

 

 

 

가교

조선시대 고관의 행차 때 사용하던 가마이다.

 

 

 

 

 

부속 건물로 어정(御井)

 

 

 

 

 

 

 

 

 

 

 

경기전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경기전 하마비

이 하마비는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을 고쳐 지을 때 처음 세웠고, 철종 7년(1856)에 고쳐서 다시 세웠다. 비석의 앞면에는 '지채개하마 잡인부득입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라고 적혀있다.

하마비는 일반적으로 사각의 받침돌과 비석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경기전 하마비는 사자(혹은 해치) 암수 두 마리가 작사각형 받침돌에 세운 비석 뭄체를 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이며, 말에서 내리도록 안내하는 기능뿐 아니라 경기전을 수호하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동성당

여러번 이곳에 왔지만 내부을 둘러보는 일은 번번히 막히고 만다.

 

 

 

 

 

오늘도 외관만 본다,

 

 

 

 

 

한국집

오늘 점심메뉴는 육회비빔밥이다.

전라감영지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감영지 내삼문(외삼문 아님)

중식후 천라 감영으로 왔다.

 

전라감영은 조선 초부터 1896년까지 약 500년 동안 지금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를 관할하던 감사(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전라감영은 정문인 포정문(布政門), 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 감사의 주거공간인 연신당(燕申堂), 감사의 가족의 처소인 내아(內衙/마을아), 누각인 관풍각(觀風閣) 등 건물이 모두 40여채가 있었다.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라감영은 전라북도 도청의 행정업무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감영 건물 대부분은 근대화 과정에서 없어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화당도 1951년에 폭발 사고로 불타버렸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라도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894년 동학농만혁명 당시 농민군 자치 기구인 집강소의 총본부 대도서(大都所)가 설치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2015년에 옛 도청 건물을 철거하고, 2017년부터 전라감영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선화당, 연신당, 내아, 관풍각 등을 복원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가석과 폐석

 

가석(嘉石)은 섬돌 아래 왼쪽 (동편,사진상 우측돌)에 설치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뒤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肺石)은 오른쪽(서편)에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억울함을 하소연 하게 하는 신문고 같은 표석이다.

가석과  폐석은 감영의 사법적 기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을 덕으로 교화하여 깨우치게 하고 재판을 공정히 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법을 다루는 형조의 섬돌 아래에도 개석과 폐석이 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가석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돌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이를 보고 뉘우치고, 폐석은 붉은 돌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이 동 옆에 서 있으면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준다고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선화당

 

선화당은 전라감사의 집무처이다. 선화당이라는 당호는 '왕면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나온 말이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때 소실되어 그 이듬해 1598년 전라감사 황신이 중건하였으며. 1771년애 전라감사 윤동승이 개건하였다, 아후 1792년(정조15)에 화재로 소실되어 전라감사 정민사가 다시 중건하였더. 선화당은 광복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1951년 경찰청 무기고로 쓰이던 도청 문서고에 초케트탄이 폭발하여 도청 본관과 함께 소실되었다.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큰 건물이며, 전주 부성내에서 객사 다음으로 컷다.

<현지 안내문에서>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정부에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를 수용한 조선정부는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하여 전봉준과 이곳 선화당에서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후 전라도 일대에 동학농민군 자치조직인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이를 총체적으로 관리. 감독하기 위햔 대도소가 선화당에 세워졌다. 선화당은 민관상화의 기치를 내걸고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최초로 실현된 상징적인 곳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선화당 앞 계단아래 색깔이 다른 두 보도블럭

당시의 블록이 출되된 것을 근거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곳 계단앞 색깔이 다른 6개도 마찬가지다.

 

 

 

 

 

 

측우기와 측우대

측우기는 비가 내린 양을 측정하는 기구로 세종 때 처음 만들었다. 각 도의 감영과 군현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강우량을 재고 농사에 활용하였다. 이 측우기는 충청감영에서 사용했던 측우기를 재현한 것이다. 측우기를 받치고 있는 측우대는 경상감영의 것을 본떠 만들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비장청

비장청은 전라감사의 사적 보좌관인 비장들의 집무소이다. 비장은 그 업무상 감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비장청은 감사의 영역과 가깝게 배치되었다, <완산부지도>애 비장청은 감영의 내아 평면과 유사한 ㄷ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발굴조사 결과 비장청과 관련된 적심시설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하지 않고 터만 표기하였다.

 

 

 

 

 

구 전라북도 청사의 흔적

 

이곳은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1921년 신축된 도청사.  1952년에 신축되어 2005년 신도심으로 이전할 때까지 전북도청이 자리했던 공간이다. 고려시대 전주목, 객사 명문 파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치소(治所,관아가 있는 곳)도 여기에 자리했을 개연성이 크다. 여기에서 통일산라때 건물터와 유물들도 발굴되었다. 전라감영지는 통일신라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치소로서의 역사가 중첩된 역사성 깊은 곳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외행랑

 

 

 

 

 

관풍각

관풍각은 선화당에 이어 감사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2의 정청이며, 감사가 쉬기도 하고 연회의 장소로도 사용했다. 관풍각이라는 이름은 감사의 직무인 '풍속과 민정을 샆핀다'는 관풍찰속(觀風察俗)에서 유래하였다. 선화당과 관풍각 당호는 감사의 직무를 상징적이고 참축적으로 담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선정비

선정비란 선정을 베 푼 관리들의 덕을 기리가 위하여 세운 비이다. 그렇지만 조선말에는 선정비들이 으레 세워졌고 억지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조선말에는 전라감영 건너편에 선정비가 세워졌 있다가 다가공원쪽으로 옮겨졌으며, 2020년 감영을 복원하면서 감영 경내로 이전하였다. 관찰사 18기. 판관 5기, 중영장, 별장, 영의정, 암행어사 각1기로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우물

1928년 및 1937년 일제강점기 도청사 도면에 표기된 우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우물의 평면은 원형이며, 20~30cm 내외의 석재로 쌓아올렸다. 우물의 뮤모는 직졍 150cm내외로 확인되었다.

 

 

 

 

 

연신당으로 간다.

 

 

 

 

 

연신당

연신당은 전라감사의 처소이다. 1688년(숙종 14)에 전라감사 이유가 창건하였다. 연신당아리는 이름은 논어 술이편에 '공자께서 집에서 쉬고 계실 때는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줄거운신 듯 보였다. /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에서 나온 것이다. 감사가 편히 쉬는 처소임을 의미한다, 경상감영은 징청각(澄淸閣/맑을 징)이라고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전라감영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흔히 선비나무, 학자수라고 부른다, 나무 가지가 선비의 기상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뻗어나기 때문이다. 이 회화나무는 수명이 150여년이 된 나무로 현존하는 전라감영의 유일한 흔적이다. 구 도청사 건물 철거 전에 회화나무가 의화동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내아로 간다.

 

 

 

 

 

내아와 행랑

내아는 전라감사 가족들이 거쳐하는 안채로 선화당 북쪽에 위치하였다. 19세기 <완산부지도>애 내어거 ㄷ자형 건물로 그려져 있다. 발굴조사에서 3동의 건물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3차례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전라감영 건물터로 현 공터로 남아있다.

 

 

 

 

 

카페 행원으로 간다.

 

 

 

 

 

행원

풍남문을 등에 지고 복원된 전라감영 방향으로 스무 발자국 걷다 오른쪽으로 꺽어들면 행원(杏園/살구나무행)이 있다. 1920년대 전주에 일본인들의 상권이 형성되면서 1928년 조선요리전문점 '식도원'이 문을 연다. 이후 낙원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남전 허산옥이 인수하면서 행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1961~1978)했다.

이곳은 당대의 국악인이나 문화예술인들이 예능을 전수하여 이어오던 문화예술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풍남문

 

 

 

 

 

풍남문을 한바퀴 돌아보고,

 

 

 

 

 

 

오목대로 왔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잔치를 벌인 곳이다. 잔치에서 이성계는 한고조 유방이 불렀더는 대풍가을 욾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보였고, 이를 눈치 챈 정몽주가 남고산성의 만경대에서 고려를 걱정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발산 자락에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실의 뿌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1900년에 고종황제의 친필을 새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태조고황제주필유지 비'를 오목대에, '목조대왕구거유지 /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 비'를 이목대에 세웠다, 이목대 비각은 길을 넓히는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오목대에서 전주시내 조망은 나무로 인해 좋자않다,

이곳은 오목대로 오르는 중간 데크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쪽이다.

 

 

 

 

 

주차장으로 되돌아 가는 길에 안옥마을 선비문화관이 있어 잠시 들러보았다.

 

 

 

 

 

선비문화관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거장 간재 전우와 그의 제자 호남 삼재 등 한옥마을 선비들이 삶과 사상, 예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 간재 전우(1841~1922)

 

조선이 망하자 많은 선비들은 목숨을 끊거나 독립을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러나 전주 교동에서 태어나 조선 유학사상을 집대성한 간재 선생은 이들과 달랐다.

그는 인간다움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으로 여겨 나라를 되찾고 이를 영원히 지카기 위해 의와 예를 교육하였다,

간제ㅔ 선생은 도를 깨달아 지키고 후세에 전하는 것을 선비의 책무로 삼았다.

 

 

 

 

 

선비의 길을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