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오봉서원과 강동구, 변계량 비각과 모선정, 이궁대와 곡강정, 당말리공원과 수덕사, 수산제 역사공원
밀양시 서남쪽으로 위치한 초동면에서 시작하여 인근 하남읍, 무안면을 한바퀴 돌아보는 일정이다.
초동면에는 우봉서원과 강동구, 변계량 비각과 모선정, 이궁대와 곡강정을 차례로 둘러보고, 하남읍으로 이동하여 중식후 당말리공원과 수덕사, 수산제 역사공원, 카페 엄마의 정원, 남전리 지석묘군을 지나 초동면으로 한바퀴 돌아와 참샘허브나라, 이어 무안면으로 접어들어 밀양 적용지와 어 각, 영산정사와 와불상, 사명대사 유적지와 생가지를 둘러보니 어둠이 내린다.
귀가길 창녕 도천면소재지에 위치한 도천진짜순대집에서 저녁 식사후 귀가하는 일정이다.
▷일정
초동면 우봉서원, 강동구 - 변계량비각 - 모선정 - 이궁대 - 곡강정 - 하남읍 중식- 당말리 공원과 수덕사 - 수산제역사공원 - 카페 엄마의 정원 - 남전리 지석묘 군 - 초동면 참샘허브나라 - 무안면 밀양 적용지, 정 - 영산정사와 와불상 - 사명대사 유적지와 생가지 (2025. 2.
▷탐방후에
◐오봉서원
밀양 초동면 오방리에 위치한 오봉서원에 왔다.
들머리에 강동구가 있다.
외삼문
대문은 닫혀있다. 따라서 좌측 관리사로 들어가면 샛문이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오봉서원
취원당 조광익과 정우당 조치우를 제향하며, 지역 유자(儒者)를 양성하고 수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후기 서원이다. 1780년 조광익의 후손들이 조광익을 독향 하기 위하여 오봉사로 창건하였다. 1790뇬 취원당의 증조할아버지 조치우의 병향이 윤허되어 청효사로 개칭하였고, 1796졎 밀앵 사림이 추추 사향을 청원하여 오봉서원으로 승호하였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편액을 오봉서당으로 고쳤다.
<다음백과에서>
실학당 편액이 보인다.
일반적인 서원의 형태로 보면 서재인 셈이나 동재는 없다.
실학당 우측 뒷편에 사당이 있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오봉서원을 둘러보고 주차장에서 바라본 오봉서원이다.
◐ 강동구
오봉서원 들머리,
도로(차도)에서 위 오봉서원으로 진입하는 갈림길 주변에 위치하여 조금만 신경쓰면 금새 알 수 있다.
강동구 옆에 비각이 있다.
주변 비각에 대한 안내문은 없다.
밀양 강동구(江東邱) / 경상남도 기념물
강동구는 평안도 도사를 지낸 조광익(趙光益, 1537~1578)을 조문하려고 평안도 강동현 사람들이 가지고 온 흙으로 쌓은 작은 둔적이다. '강동의 언덕'이란 뜻으로 오방리와 범평리 사이의 길 양쪽에 마주 보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인 1575년 경상도 도사(都事/ 조선시대 관찰사를 보좌하던 관원) 최황이 조광익의 동색 조호익에게 군적(軍籍)에 올랐으면서도 병역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호익은 아버지 상(喪)을 이유로 거부했다가 강동현으로 유배됐다. 형 조광익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1578년 평안도 도사의 직책을 얻어 갔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그를 오방리에 장사할 때 형제의 우애에 감복한 강동의 선비와 백성들이 흙을 걸머지고 조문을 와 묘위에 뿌리고 남은 흙으로 둔덕을 만반들었다고 한다. 선조 임금도 이들의 우애를 가상히 여겨 <삼강행실도>에 싣도록 했다. 1834년 형제의 우래를 기리는 비각이 둔덕 옆에 세워졌다. 조광익을 기리는 정려각과 그를 모시는 오봉서원이 근처에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각도를 달리하여 바라본 강동구와 비각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한곳씩 있다.
◐변계량 비각
모선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변계량 비각이 있다.
조그만 대문은 잠겨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변계량 비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과 형 변중랑, 아버지 변옥란의 행적을 기록한 비를 1946년에 후손과 유림(유학을 신봉하는 무리)이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변계량은 문신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로 여기는 대제학(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벼슬로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의 문형(文衡)이라고도 불렸다. 정승이나 판서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을 20년간 맡았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세종 대에는 <태조실록>을 편찬하고 <고려사> 수정 작업에 참여했다. 변중량은 우부승지(고려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를 지냈고, 변옥란은 고려말 판서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에도 공을 세웠다.
이곳은 변계량의 7대조 할아버지 변고적이 처음 들어와 터를 잡았다. 비석은 높이 186cm,너비76cm, 두께 34cm이고 바각은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비각이다.
◐모선정
모선정에 왔다.
이곳은 특별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아 주변 도로에 적의 주차하면 된다.
앞쪽에 비각이 있다.
정문이다.
이곳도 문이 잠겨있다.
앞쪽의 비각
모선정을 바라보았을때 우측으로 조금 돌아오르면,
모선정과 뒷편 사당(덕남사)과의 사이로 담이 아니어서 들어갈 수 있다.
덕남사.
덕남사는 충숙공 송은 박익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순조 33년에 향도유림의 공의로 덕남서원을 창건하여 송은선생을 주벽으로 장자 우당공과 차자 인당공(박소 선생)을 배향으로 춘추에 봉사해 왔다.
모선정으로 들어왔다.
모선정(慕先亭)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모선정은 조선조 중종때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학행이 높았던 모선재 박수견(송은선생의 현손이며, 인당선생의 증손) 선생이 모친상을 당하여 시료 3년을 마친 후에도 귀가하지 않고 여묘실을 지어 수신영모하며 평생토록 곡읍(哭泣)하던 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선생의 효성에 감복하여 이 여묘실을 모선정이라 칭하고 산천방리(山川方里)를 모선(慕先)으로 일컬었다는 것이 모선정실기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모선정 건물은 중종3년(1508) 처음 창건 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저서 및 문헌 일체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그 후 150년이 지난 영조연간(1742`~1776)에 후손들이 성력을 모아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형 지붕으로 중건한 것인데 영남지방 사족(士族)가문의 전형적인 정자건물이다.
모선정 후원에는 1833년 창건하여 1868년(고종10)에 훼철된 덕남서원의 후신인 덕남사(德南祠)를 1933년 사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선생의 고조인 고려말 8은(八隱)으로 칭하는 두문동 72현인 충숙공 송은 박익선생의 정정을 봉안하여 사림봉사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좌측에서부터 마루, 방, 대청마루, 방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모선정이다.
측면의 마루가 넓다. 좁은 툇마루가 있는 건물은 종종 보지만 이렇게 마루를 만든 건물은 흔치않다.
마루와 방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개방할 수 있다.
가운데 대청마루,
방은 삼면으로 개방성을 보이고 있다.
숭앙재
일반 서원이나 향교로 보면 동재에 해당하나 규모가 일반적인 동재보다 크다.
모선정의 좌측(모선정에서 볼 때) 좌측 언덕에는 일련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곳과 관련된 선조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궁대
밀양 초동면 검암리,
이궁대로 가는 마을 안길은 대체로 좁은 편이나 승용차로 충분히 오를 수 있지만 마을회관 인근에 주차하고 도보로 찾아간다.
대충 방향을 잡아 오르면 이궁대 표지목이 보인다.
근데 이 이정목이 애매하다. 보이는 집의 문페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있는지 모를 이궁대를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역주민에게 이궁대가 어디있는지 물어보니 저기 보이는 야산에 있다고 한다.
찾아가는 길의 어려움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길이 없고, 대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는 설명을 조금만 해 주었어도 헤매지는 않았을 것이데, 그게 경상도 사람들의 스타일이다.
카카오 지도상에 나오는 곳이니 선명한 이 길을 따르면 당연히 도착할 것이라 믿고 출발한다.
10~20m정도 사이를 두고 두 곳의 묘지에서 길은 끝난다.
조금 당황스럽다.
휴대폰으로 이궁대를 검색하니 어느본 소개에서 길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좌측의 묘지 뒷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궁대는 이곳 야산의 정상부위에서 낙동강변쪽으로 살짝 벗어나 절벽?을 이루는 곳에 있다.
묵은 묘지?가 있고,
이궁대 안내표지가 있다.
이궁대는 신라 지증왕 때 낙동강 건너 금관가야를 정벌하기 위해서 이사부에게 명하여 진을 쳤던 곳인데, 임금의 순행 시에는 행재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라고 전해지며,
법흥왕 19년 (532)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이 그의 비와 세 아들 등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고 전해진다로 기록되어 있다.
이궁대 표지판이 있는 주변이다.
역시 같은 곳이다.
이궁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역시 주변이다.
이궁대에서 희미한 옛 길을 따라 내려간다.
주변 잡목은 없지만 낙엽이 많이 쌓여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고 나뭇잎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내려선 곳이다.
길 좌측편의 대충 삼각형으로 보이는 밭의 뒷편 중간쯤(고사목 소나무 좌측편)으로 내려섰다.
만약 이궁대를 찾고 꼭 찾아보고 싶다면 보이는 길을 따라 끝까지 올라선 다음 좌픅편 묘지에서 좌측으로 대체로 수풀이 들한곳으로 들어가면(길은 없음) 찾을 수 있다.
내려올때 이 길을 따르면 된다.
조망도 별로고 크게 볼것은 없다.
◐곡강정
곡강정으로 들어가는 곳에 펜스를 설치했다.
사유지여서 그런지 조금 이해안되는 곳이다. 안쪽까지 차량을 진입하도록 하여도 좋을 곳이다.
펜스의 대문이 잠겨있지는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겠다.
화장실이든가?
정자 뒷편의 노거수.
성산군사패지(星山君賜牌地) 비석이 있다.
성산군은 중종반정떼 공신이었던 이식의 시호이며, 사패지란 임금이 하사한 토지를 말한다.
팔문각(八門閣) 편액을 달고있다.
밀양곡강정(曲江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상주 판관을 지낸 이덕창이 아버지 이식을 기리기 위해 1545년에 지은 정자이다. 이식은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사건인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군대를 거느리고 가담해 공신이 되었고, 삼포왜란 진압 등에 공을 세웠다. 그러다 중앙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동강이 잘 보이는 이곳 사패지(賜牌地 / 임금이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준 땅)로 내려와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다. 정자 이름을 처음엔 고강정(高江亭) 이라 했으나 1806년 중건하면서 '강물이 감돌아 흐르는' 형세를 반영해 곡강정으로 바꾸었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이고 가운데 방 한 칸을 뒀다.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보다 공부하는 공간으로서 기능이 강조된 조선 후기 정자이다. 화려함보다는 단순하고 질박한 별채의 유형을 보여준다. 곡강정 풍경을 노래한 '곡강정십육경'등의 글을 통해 당시 이곳을 무대로 전개되던 지역 문화계의 단면을 앍을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면에서 바라본 곡강정
곡가암을과 뒷편 언덕위에 이궁대가 있다.
노거수 팽나무
낙동강
◐하남읍 당말리 공원
하남읍내 북쪽 아트막한 산위에 당말리공원이 있다.
웬 사당?
넓은 광장과,
전망데크
당말리공원과 접하여 수덕사가 있다.
들머리 삼성각
대웅전
대웅전 내부
마당 가운데 아담한 삼층석탑이 눈길을 끈다.
아담하고 깨끗한 비구니 사찰이다.
◐수산제 역사공원
하남읍 동쪽 근거리에 수산제 역사공원이 있다.
수산제를 만나다.
삼한시대 미리미동국이라는 부족국가로 추정되고 변한의 땅에 소속
삼국시대: 신라 지증왕(505년) 가락 정변후 신라영역으로 추화군을 둠, 경덕왕 16(757년) 밀성군으로 개칭
고려시대 : 성종 14(995년) 밀주군으로 개칭, 충렬왕11(1285)밀성군으로 승격, 조천의 반란으로 귀하부곡으로 강등, 후에 밀성현으로 승격
조선시대 : 태조1(1392) 밀성군으로 칭했고, 1896년8월 밀양군으로 개칭
밀양의 옛이름 미리미동국
밀양은 삼한시대에는 변진 24개국 중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로 추정되며 변한 12소국 중 하나였습니다.
미리는 우리밀 미리, 밀의 한자 표기이고 미동은 물둑이라는 뜻으로 미리미동은 지금의 밀상시 지방에 있던 나라 이름으로 추정된ㅂ니다. 위치는 수산제라는 제방이 있던 밀양시에 비정됩니다.
수산제 수문
1986년 향토사학자 손정태 씨에 의해 수산제 수문이 발견되면서 수산제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산제 수문은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수문지 기초조사와 발굴조사도 진행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제방 남쪽 용진강 상면에 수문시설의 남쪽 부분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남쪽 수문은 용진강 강바닥에서 발견되었고, 북쪽 수문지는 경작지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구조
팔용산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암반을 터널형식으로 굴착하여 터널형 수로로 조성
평면상 길이는 약 29.357m, 폭은 약 1.58m, 높이 약 1.6m, 양 수문간의 길이는 19.6m로 시설
평면 모양 입수구 부분에서 20도로 굴절되어 직선으로 굴착하여 약간 휘어진 형태
남북 각각 내외 이중 수문 사이에 토사를 채워 형성한 복합식 수문으로 추정
특징
수문은 북쪽과 남쪽에 각각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남과 북에 각각 내외 이중으로 물을 막을 수 있는 구조로, 북쪽 수문의 구조는 물을 차단하기 용이하게 시설됨
해발고도는 북쪽이 남쪽보다 약 30cm가 높아 북에서 남으로 물이 흐름
북쪽 수문 제방 내측에 수량 조절기능 보유
입구에서 160cm 정도 떨어진 곳에 동일한 형태의 수문 시설 발견
역할
국둔전에 관개하기 위해 낙동강의 물을 지천인 용진강을 통해 수산제 내부로 유입
홍수 시 하천 수위가 상승하므로 배수시설을 통햐 역류로 인한 제내지의 침수 방지
수문이 닫혀 있으면 내수가 빠져나가지 못해 제내지가 침수했다가, 하천 수위가 제내지의 내수위보다 낮아지면 수문을 열어 자연 배수
역사공원을 둘러본다.
수산제 수문 / 경상남도 기념물
수산제는 삼한시대의 농사용 저수지로서 김제의 벽굘제, 제천의 의림지와 더불어 고대에 만들어진 3대 저수지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제방의 전체길이는 약 4km로 이는 세조 13년 제방을 증축한 후, 이를 기념하여 지은 점필재 김종직의 수산회축(守山會軸)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저수지는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 귀명리 지역과 인근 초동면의 검암리, 금포리에 걸쳐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20리이며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위한 식량확보 목적으로 김방경이 제방을 쌓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신라왕이 이곳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사가 나타나고, 주변에는 삼한. 삼국시대의 각종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 이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도면과 기록에는 황토로 된 제방이 약 1km정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고 저수지는 논으로 바뀌었다. 이곳의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이 범람하는 것을 막고 이를 이용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며, 물을 조절하기 위해 자연 암반을 굴착하여 수문을 내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수산제는 삼한시대 오래 오랜 역사를 지닌 농경문화유적으로 감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3대 저수지(國屯田)으로 꼽힌다.
벼농사를 위하여 만들어진 관계용 저수지와 둔전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둔전내 수위를 조절하는 제방의 길이는 728보(步 :약 1,040m)이고 둔전의 둘레는 20여리이며 농지의 면적은 약 200결(結 : 306,000㎡)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신등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후대에도 여러번 제방을 고쳐쌓은 기록이 나타나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황폐하여 제대로 이용하지는 못하엿다고 전한다, 1928년까지 황토흙으로 된 제방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신수리시설을 하여 훼철되어 없어지고 저수지도 모두 논으로 변하였다.
수산제 제방은 국둔전으로 모여드는 안수(內水)를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으로 빼내주거나 가뭄으로 국둔전에 물부족이 현상이 있으면 용진강 강물을 끌어들여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수문을 설치하여 양배수용으로 이용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수산당(守山堂)
청룡과 황룡
짚으로 만들었다.
이 소나무 농원은 개인농장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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