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밀양 카페 엄마의 정원, 남전리 지석묘군, 초동면 참샘허브나라, 어변당과 적용지, 영산정사와 와불상, 사명대사 유적지와 생가.

정헌의 티스토리 2025. 2. 26. 22:38

■밀양 카페 엄마의 정원,  남전리 지석묘군, 초동면 참샘허브나라,  어변당과 적용지, 영산정사와 와불상, 사명대사 유적지와 생가. 

 

하남읍내에서 중식후 당말리공원과 수산제역사공원을 둘러보고 카페 엄마의 정원으로 왔다. 이곳은 농원을 겸하고 있어 넓은 면적의 정원을 가진 카페로 보면 되겠다. 특히 여러곳 화분에 수국을 심어 수국꽃 필무렵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남전리 지석묘군은 초동면으로 가는 도로변에 접하여 있으므로 잠시 둘러보면 되며, 참샘허브농원 또한 어느 농부의 수 십년 땀방울이 맺힌 곳이다.

어변당은 정자, 적용지는 어변당 앞의 연못이다. 영산정사는 세계최대?의 와불과 박물관에서의 각종 사리, 불상 등 특이한 볼거리가 있다. 사명대사의 출생지가 밀양 부안면이란 것도 금차 알았다.

무안면 소재지 옆으로 지나면서 소재지내 표충비각과 앞뜰의 향나무 등이 있음을 알지못하여 둘러보지 못함이 아쉽다.

 

 

▷일정

밀양 카페 엄마의 정원 - 남전리 지석묘군 -  초동면 참샘허브나라 - 어변당과 적용지 - 영산정사와 와불상 - 사명대사 유적지와 생가. (2025. 2.   .)

 

▷탐방후에

 

◐카페 엄마의 정원

 

(주)흥산조경

카페 엄마의 정원에 왔다.  민간정원 경남 14호 표시가 있다.

들어오는 들머리 길이 좁다. 마을 길을 지나 농로를 따르자니 더욱 그렇다.

 

 

 

 

 

아랫쪽에  주차장이 있지만 이곳에 주차했다.

카페 인근이다.

 

 

 

 

 

먼저 농원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대충 시계방향으로 이곳 저곳 빠짐없이 둘러볼 것이다.

 

 

 

 

 

 

 

 

 

 

 

 

 

 

 

 

 

 

 

 

 

 

 

 

 

 

 

 

 

 

 

 

 

 

 

 

 

 

 

 

 

이건 몇 층?

6층?  7층?

 

 

 

 

 

 

 

 

 

 

 

 

 

 

 

 

 

 

 

 

 

 

명예,

충성,

정의.

 

 

 

 

 

뒤로 보이는 건물이 카페이다.

 

 

 

 

 

 

 

 

 

 

 

 

 

 

 

 

 

출입금지

 

 

 

 

 

 

 

 

 

 

 

대충 한바퀴 돌아 카페 건물로 내려왔다.

 

 

 

 

 

 

 

 

 

 

 

카페에 들러 차한잔 한다.

 

 

 

 

 

 

 

 

 

 

 

 

 

 

 

 

 

 

 

 

 

 

 

차값은 대체로 7,000원 전후이다.

 

 

 

 

◐남전리 지석묘군 / 경상남도 기념물 제 48호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지석묘군에 왔다.

카페 엄마의 정원에서 초동면으로 넘어가는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支石墓(지석묘)는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가운데 하나로, 고인돌 또는 돌멘(Dolmen)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모양의 무덤은 한반도 전역은 물론 중국 동북 지방과 일본 큐슈지방에도 분포하고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로 길게 형성된 계곡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그 북쪽에는 대덕산(해발 600m)이 자리잡고 있다. 대덕산의 남쪽 기슭에는 7~10기씩의 석묘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전체 지석묘의 수는 30여기에 이른다. 원래는 이보다 많은 지석묘가 있었으나, 논이나 밭을 개간하면서 그 중 일부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 남전리에 있는 지석묘들은 굄돌을 갖춘 남방식과 굄돌이 없는 뚜껑식이 뒤섞여 있다.

이 지석묘 가운데 정식으로 발굴된 것은 없으며, 1974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돌칼과 돌화살촉, 붉은 간토기(丹塗磨硏土器,단도마연토기/질할 도또는 진흙 도, 갈 연)등의 유물이 우연히 발견된 적이 있었다. 1979년에 발견된 지석묘는 윗돌(上石) 아래에 굄돌(支石)은 없었고 판자돌(板石)로 네 벽과 바닥 및 뚜껑을 만든 돌널(石棺)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돌널의 한쪽에는 유물을 넣기 위해 조그만 방을 따로 만들었으며, 그 주위에 다시 돌덧널(石槨)을 쌓은 특이한 구조였다. 돌널 안에서는 돌칼과 화살촉이 출토되었으며, 작은 방에서는 붉은 간토기가 출도퇴었다. 돌칼이나 붉은 간토기의 특징으로 보이 이들 지석묘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만들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참샘 허브랜드

 

참샘허브랜드에 왔다.

 

 

 

 

 

눈썰매장 개장 현수막이 있어 이곳이 눈썰매장 입구인줄 알았다.

 

 

 

 

 

입장료 10,000원

처음엔 눈썰매장 입장료인줄 알았으나 이곳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받는 것 같다.

 

 

 

 

 

참샘허브나라의 달과 별 사랑이야기

 

할 거리 : 허브비누, 허브 심기, 나무간판 만들기, 장작 모닥불체험

쉴 거리 : 황토펜션

참샘의 사계절: 봄 야생화축제, 여름 수영장, 가을 단감따기, 겨울 눈썰매장

볼 거리 : 허브하우스, 예쁜 다육이, 7층소원돌탑, 기찻길, 야생화와 분재 등등

 

 

 

 

 

앞쪽의 넓은 도로를 따라 오른다.

중간  참샘허브농원으로 진입하는 길과 대문이 있으나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있고, 아랫쪽 매표소를 이용해 달라고 한다.

 

 

 

 

큰 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참샘허브농원은 사진상 도로 좌측편에 있는 셈이다. 

 

 

 

 

 

앞쪽의 넓은 도로를 따라 오른다.

중간  참샘허브농원으로 진입하는 길과 대문이 있으나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있고, 아랫쪽 매표소를 이용해 달라고 한다.

 

 

 

 

 

두어곳 출입문이 있느나 잠겨있다.

 

 

 

 

 

7층 석탑일까?

 

 

 

 

 

관계자외 출입금지와 아랫쪽 매표소를 이용해 달라는 안내문이 있다.

아래 입구에서 50m 쯤 거리로 허브농원의 상부쯤 되는 것 같다.

 

 

 

 

 

참샘허브농원의 상부.

 

 

 

 

 

되돌아 내려간다.

 

 

 

 

 

철길

 

 

 

 

 

중간 출입문,

 

 

 

 

 

정문으로 내려왔다.

 

 

 

 

 

참샘 허브나라는 꽃새미 마을에서 나고 자란 농부가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하나하나 일구어 가는 농원입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면서 3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많은 자본을 투자하기보다 오직 일념으로 돌탑을 쌓으면서 농원은 손으로 손으로 직접 가꾸고 있어요.

흙 뭍은 바지와 눌러쓴 모자가 잘 어울리는 투박스런 농부는 오늘도 어딘가에 흙과 돌을 만지면서 농원을 가꾸고 있을 것입니다.

부족한 점 채워가겠습니다.

먼곳까지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항상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참샘허브나라 농부 드림 -

 

 

 

 

 

허브농원 입구로 들어간다.

 

 

 

 

 

 

 

 

 

 

 

 

 

 

 

 

 

 

 

 

 

 

 

 

 

 

 

 

 

 

 

 

 

 

 

 

 

 

 

 

 

 

 

 

 

 

 

 

 

 

 

 

 

 

 

 

 

 

 

이곳은 카페,

 

 

 

 

 

 

 

 

 

 

 

 

 

 

 

 

 

 

 

 

 

 

 

까페 앞쪽의 중심을 이루는 곳만 둘러보았다.

 

 

 

 

◐덕연서원, 어변당, 밀양 적용지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394번지

어변당을 보러 왔다.

 

 

 

 

 

시간이 늦어 혹시 대문을 닫을까봐 덕연서원과 충효사(어변당, 적용지 등)를 먼저 둘러보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덕연서원

 

 

 

 

 

쌍전당

 

 

 

 

 

굳이 따진다면 서재쯤 될 것 같다.

 

 

 

 

 

충효사로 연결되는 샛문이 있다.

 

 

 

 

 

충효사

 

 

 

 

 

향토사료관

 

어변당소장 고문서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이곳 어변당에는 조선 시대 행정 문서의 양식을 알려주는 3종의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부산포진 해유 문서"는 1887년(고종24)에 부산포진의 첨사 박기우가 근무지를 옮길 때 작성한 것으로, 부산포진에 소속된 건물과 시설물, 병선과 병기의 종류 및 수량, 군대 편성, 군사 수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박기우는 1887년 10월 8일에 부임하였으나 같은 헤 12월에 교체되었다. 해유 문서란 조선 시대에 관리를 면직시키거나 전직시킬 때 인수인계 상황을 기록한 문서이다.

"안동진영 민장초개"는 박기우가 안동 진영에서 근무한 1년 2개월 동안 백성들의 제반 소송에 대하여 판결 처리한 내용일 일자별로 정리한 책자이다. 모두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따로 영장 박기우에 대한 안동 지역 사대부들의 송별시가 실려 있다.

"안동진영 상중기"는 안동진영 관할 내 군현의 군사관련 기물의 목록 및 수량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로, 당시 지방 군현의 군비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역사 자료이다,

 

 

 

 

 

 

 

 

 

 

 

 

 

 

 

 

 

어변당

 

어변당은 조선조 초기에 많은 무용담과 설화를 남긴 비룡장군 박곤(朴坤)이 무예와 학문 연마를 하던 유적지이다. 본래 이 곳은 박곤 장군의 거주지로서 상당곡(속칭 고자곡)이라 하는데 효성이 지극한 박곤 장군이 양친을 봉양하기 위해 초당 앞에 연못 적룡지(또는 효도지라도도 일컬어진다.)를 만들어 이 곳에 물고기를 기르던 중 물고기가 그 효성에 감동하여 붉은 비늘을 남기고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박곤 장군은 이 일을 계기로 남해안 일대의 왜구와 북방의 오랑캐를 토벌하는 등 많은 공훈을 세우며 비룡장군이라는 별명과 함께 한성판윤에 올랐다. 어변당은 박곤 장군이 명나라 황제의 초청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어릴 적 학문을 연마하던 초당에 머물여 스스로 당호를 어변당이라 칭하며 여생을 보낸 것이 창건유래이다. 따라서 어변당 창건시기는 박곤 장군이 생존해 있을 때인 조선조 초기로 보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온마을이 모두 불타 버렸으나 어변당과 연못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는 박곤 장군의 충효와 신물의 감응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어변당은 1979년 12월29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190호로 지정되었고, 적룡지는 1998년에 지방기념물 제 166호로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어변당(漁變堂)

 

 

 

 

 

적용지는 어변당 앞의 연못이다.

 

 

 

 

 

 

 

 

 

 

 

 

 

 

 

 

 

 

 

 

 

 

 

 

어변당과 연상마을

 

 

 

 

저수지변에 효자각이 있어 둘러본다.

 

 

 

 

 

안내문이 없어 누구의 효자각인지는 모르겠다.

 

 

 

 

 

이곳은 개인 주택인것 같다.

 

 

 

 

 

마을입구이자 덕연서원 옆에 이런 비각이 있다.

 

 

 

 

 

 

 

 

 

 

 

 

 

 

 

 

 

 

 

 

 

 

 

◐ 영산산정사, 와불

 

영산정사에 왔다.

별 신도도 아니면서 절 안으로 차량진입은 예의가 아닌 듯 하여 입구 도로변에 주차했는데 경내가 주차장이다.

 

 

 

 

범종각

 

 

 

 

 

영산정사 세계최대 와불

종무소, 요사를 겸하는 것 같다.

 

 

 

 

성보박물관

 

 

 

 

 

대웅전

 

 

 

 

 

 

 

 

 

 

 

 

 

 

 

 

 

부도

 

 

 

 

 

대웅전 내부이다.

 

 

 

 

 

대웅전과 지장전 사이에 거대한 옥석이 있다.

 

 

 

 

 

하나의 바위에 여려 모양을 새겼다.

 

 

 

 

 

 

 

 

 

 

 

성보 박물관쪽에서 바라본 지장전

 

 

 

 

 

성보박물관을 둘러본다.

 

 

 

 

 

입장료 2,000원을 자율 납부해 달라는 안내문이 있다.

둘러보는 방법을 4층으로 오른 후 한층씩 내려오면서 둘러보도록 안내한다.

 

 

 

 

4층엔 수많은 여러 경전들을 볼 수 있다.

 

 

 

 

 

3층엔 사리들을 모아두었다.

양이 엄청나다.

 

 

 

 

 

2층엔 다양한 불상을 만날 수 있다.

 

 

 

 

 

1층엔 불화 등

 

 

 

 

 

 

 

 

 

 

 

영산정사를 대충 둘러보고,

 

 

 

 

 

와불앞쪽 주차장으로 왔다.

 

 

 

 

 

와불로 가는 길은 위험한 공사현장이란 이유로 출입금지 시켰다.

공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주차장에서 건너다 본 와불

대단하다.

 

 

 

 

◐사명대사 유적지와 생가

 

사명대사 유적지를 성역화 하였다.

 

 

 

 

 

오후 6시가 다되어 문을 닫을려나 하고 조급히 왔으나 문은 열려있다.

 

 

 

 

 

불교의 범종

 

범종이란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또는 의식을 행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종으로 범종의 소리를 들으면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까지 구제받아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불교 의식 법구 중 하나이다.

범종의 외형은 위가 좁고 중간 부분은 볼록하다가 종구 부분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양이다. 범종의 꼭대기 부분은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종을 물어 올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용뉴(龍鈕)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잇는 대롱 형태의 기다란 관이 부착되어 있다. 또한 종의 윗부분부터 아랫부분까지 다양한 문양을 새겨넣어 한국의 전통미를 느낄 수 있다.

범종은 아름다운 외형만큼이나 울림소리 역사 장업하고 청명해 든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며, 마음을 깨끗이 참회토록 하는 역할을 한다.

 

 

 

 

 

 

 

 

 

 

 

 

 

 

 

 

 

문은 잠겨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어린이 놀이터

 

 

 

 

 

한쪽에 사명대사 수행의 길을 조성해 놓았다.

 

 

 

 

 

 

 

 

 

 

 

사명대사 생가지로 왔다.

유적지 입구여서 자연스레 둘러볼 수 있다.

 

 

 

 

 

사명대사 응규마당

 

사명대사(1544~1610)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속명은 응규, 법명은 유정, 당호는 사명이고 송운이라 불리기도 하며, 별호는 중봉이다.

사명대사는 1544년(중종39) 10월 17일 밀양시 무안면 상강동에서 아버지 임수성과 어머니 달성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풍천 임씨의 가문으로 증조할아버지인 효곤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의 관직을 

을 지냈으며, 대구의 수령을 지낸 이후 밀양으로 내려왔다. 할아버지인 종원은 아들 수성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 서씨와 결혼하여, 맏아들 응기, 둘째아들 응규를 낳았다. 맏아들 응기는 나중에 진사가 되었고, 아들 재존을 낳아 임씨의 가문을 이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응규가 출가하니 곧 사명대사이다.

 

 

 

 

 

사명대사의 어린시절 일화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밤을 주워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고기 잡는 사람이 큰 자라를 잡은 것을 보고 어린 응규규는 몹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밤을 주고 자라를 사서 못에 도로 놓아주었다. 이를 본 아이들이 감동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밤을 모아 응규애개 가지라고 주었다. 하지만 응규는 밤들을 다시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자신은 빈손으로 돌아가니 동네의 노인들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사당

 

 

 

 

 

사명대사 생가

대문이 닫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랑채

 

 

 

 

 

역시 사랑채

 

 

 

 

 

사명대사 생가지 / 경상남도 기념물

 

사명대사 생가지는 임진왜란때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크게 물리친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이 태어난 곳이다. 사명대사는 부모가 죽자 열다섯에 직지사에서 출가하였으며 묘향산 보현사에서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산 유점사에서 승병을 모은 뒤 평안도 순안으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세해 왜적과 싸웠다. 평양성 탈환 전투 등에서도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왜군 진영에 들어가 휴전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인 160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오는 등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사명대사는 모든 공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갔고, 1610년 해인사에서 설법하던 중 입적했다. 그가 죽자 친분이 깊었던 허균은 '자통홍제존자'라는 사시를 올렸다. 사시는 나라에서 시호(죽은 사람의 공덕을 기려 나라에서 내려주는 특별한 이름)를 내리지 않을 때 제자니 지인이 죽은 이를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이다. 생가터에는 사랑채, 안채, 대문채가 복원돼 있다.

<현지 안내무에서>

 

 

 

 

 

안채이다.

 

무안면 소재지 내 표충비각이 있는 줄 알지못했다. 앞 마당에 향나무 또는 유명한데 둘러보지 못함이 조금 아쉽다.

귀가길 창녕 도천면 소재지에 위치한 도천진짜순대집에 들렀다. 아주 오래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 다시 찾은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