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의 산

보은 서원리 소나무, 우당고택, 선병우 고가, 선병묵 고가

정헌의 티스토리 2025. 8. 4. 21:56

 

■보은 서원리 소나무, 우당 선병국 고택, 선병우 고가, 선병묵 고가.

 

보은 속리산면의 정이품송과 주변, 세조길과 법주사를 둘러보고 장안면으로 이동합니다.

솔향공원이 쬐끔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마음은 장안면으로 향합니다. 장안면 서원리의 소나무와 서원계곡, 상현서원 앞을 거쳐 우당고택으로 왔습니다.우당고택은 자재부터 건축기술이 우수한 한옥으로 다른 곳과는 또 차별되는 것이 있습니다.

선병우 고가는 북해가든과 카페로 이용되고 있으며, 선병묵 고가는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분위기인데 안내문 등 표시는 보지 못했습니다.건축자재, 건축방법 등은 우당고택과 비슷하지만 규모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일정

장안면 서원리 소나무 - (서원계곡 - 상현서원) - 우당고택 - 선병우 고가(북해가든) - 선병묵 고가   / 2025. 8. 2 .

 

 

▷탐방후에

 

◐서원리 소나무

 

속리산 면소재지에서 갈목터널, 삼가터널을 지나 장안면소재지로 향하는 중 서원리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갑니다.

도로변에 이정표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주차장과 주변

 

 

 

 

 

보은 서원리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352호

 

보은 서원리 소나무는 높이 15.2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4.7m이며, 수령은 정이품송과 같이 600여 년 정도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정이품송과 약 7km 떨어져서 자라는 이 나무는 줄기가 지상 70cm 높이에서 2개로 갈라져 있습니다. 정이품송이 곧추 자란 데 비해서 이 나무는 밑에서 두 갈라로 갈라져 있고, 가지가 서로 얽혀 나무 모양이 아기자기하기 때문에 정이품송과 부부 사이라고 하여 <정부인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이 서낭나무(서낭신이 머물러 있다고 하는 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언듯 보면 두 나무가 합쳐져 한 나무가 된 것 같아보이기도 합니다.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는 길에 잠시 둘러보면 되겠습니다.

 

 

 

 

◐ 서원계곡, 상현서원

 

속리산면 만수계곡 등 몇 계곳에서 흘러내린 물이 삼가저수지를 거처 장안면 소재지로 흐르는 계곡이 서원계곡입니다.

서원계곡 자체는 뭐 크게 계곡다움이 없읍니다만 서원리 소나무 앞쪽과 서원리 마을(사회복무 연수센타가 있는 앞 마을) 앞 계곡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어 여름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자연발생 유원지가 되었습니다. 주차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은 보이지 않으며, 차도변이 주차장이 됩니다. 

상현서원은  아랫쪽 서원마을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 조그만 서원으로 구조는 일반서원과 비슷해 보입니다. 1549년(명종 4) 성제원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원건립을 시작하여 1555년(명종10)에 준공한 후 김정(金淨)을 봉안하고 삼년성서원이라 하였습니다. 1610년(광해군 2)  '상현(象賢)'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성운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1681년 성제원과 조헌을 , 1695년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고종8)년에 훼철된 뒤 강당은 보은향교로 옮겼습니다.1896년에 집례 김문희가 재건하여 장례원이라 하였다가 1919년에 중수하여 복원하였으나 시설이 미비한 상태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우당 고택

 

카카오 지도에서 우당고택을 검색해 보면 속리산 천왕봉 남쪽 만수계곡 등에서 발원한 삼가천이 장안면 개안리로 흘러내려와 배모양의 넓은 삼각주를 만들고 이 삼각주안에 우당고택이 있습니다.

입구에 조그만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옆에 문화관광해설사의 집도 있습니다.

 

참고로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인터넷 상의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면 우당고택 안채나 사랑채 모두 주인이 살림을 하고 있는 집으로 평일은 문이 잠겨있을 가능성이 많고 주말이나 공휴일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개방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안채 후문에 용무나 된장,고추장, 간장등 장류를 구입하는 사람외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문이 있습니다.

 

 

 

 

 

우측 배치도를 보면 넓은 담장안쪽에 사당구역, 안채구역, 사랑채구역이 별도로 담에 둘러져 있습니다. 안채는 앞쪽 상당부분 행랑채가 담 구실을 한다보 보면 되겠습니다.

주차장에서 들어서면 바로 후문쪽이 가깝기 때문에 사당, 내당(안채), 사랑채를 둘러보고 정문으로 나와 비각, 장독대, 한옥체험건물 쪽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처음엔 이곳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섬인줄은 몰랐습니다. 주변에 넓은 소나무 숲이 있습니다만 농기계, 퇴비 등 농자재가 쌓여있어 공원같은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입구 한쪽 비닐하우스 안에  대추나무를 재배하고 있는데 찟어진 비닐과 어수선한 자재들어 엉켜 미관상 단정한 느낌은 없습니다.

 

 

 

 

 

입구 주차장의 안내도를 자세히 보고 왔으면 이해가 될 건데, 건성으로 보고 이곳으로 오니 대문이 작습니다.

이게 정문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가까운 곳이기에 이 문으로 들어섭니다.

배치도에 '사주문'으로 표시된 문입니다.

 

 

 

 

 

먼저 사당구역을 만납니다.

대문이 닫혀있고 담 또한 키보다 높아 내부는 볼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보니 좌측 담 너머로 안쪽을 볼 수 있을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사당

사당채는 다시 안마당에서 축을 직각으로 꺽어서 행랑채의 북쪽에 사랑채와 축을 나란히 해서 배치되었다. 3칸의 솟을 삼문을 전면으로 하고 뒤로 3칸의 사당채가 놓였다. 사당 마당 소쪽은 3칸의 제수채로 구성되는데 체수채에서 사당채까지 '아르(r)'자로 꺽어진 복도채가 연결된다. 전면 삼문을 가운데로 하여 담장이 둘러쳐졌다.

<현지 안내문에서>

 

 

 

 

 

안채 후문인 셈입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사당구역에서 안채구역으로 들어섭니다.

입구 안내문에 주인이 기거하는 곳이라 출입을 자제해 달라며 용무가 있어 방문하는 분이나, 전통방식의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구입하고자 하시는 분은  043) 543- 7177로 연락하신후 안내를 받으라는 안내문입니다.

멀리서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이 집을 둘러 볼 용무가 있다고 보고 들어갔습니다.

 

 

보은 우당 고택 / 국가민속문화재

보은 우당 고택은 1919~1921년 사이에 보성 선씨 선정훈이 당대의 제일가는 대목들을 불러 지은 집이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의 세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 사당을 배치하고, 그 앞에 안채와 사랑채를 나란히 배치하여 전통적인 양반 주택의 배치와는 전혀 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안채 앞과 사랑채 사이에는 행랑채를  'ㄷ'자 모양으로 크게 둘러서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공(工)'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대청이 있고 양쪽에 방을 두었다. 대청 앞뒤 툇마루를 통하여 어떤 방으로도 갈 수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소로수장집이다. 옆으로는 3칸의 'ㄴ'자형 재실이 붙어있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앞의 마당이 마당이 넓고 개방되었으며, 폭이 넓은 큰 교창(분합(分閤)위에 가로로 길게 짜서 끼우는 채광창)을 두었다. 또한 기둥의 간격을 넓게 배치하였으며, 높은 기단, 정교하게 가공한 창살 문양 등이 특징적이다. 이 고택은 개화을 물결을 타고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한 것으로,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로수장집(小櫨修粧/ 두공 로(노), 닥을 수, 단장할 장) : 기둥 상부에 창방(한식 나무 구조 건물의 기둥 위에 건너질러 장여나 소로, 화반을 받는 가로재)을 걸고, 창방과 장여(도리 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길고 모진 나무) 사이에 '소로'라는 치장재를 일정 간격으로 끼워 넣은 집

<현지 안내문에서>

 

 

 

 

 

안채의 좌측 측면인 셈입니다.

몇칸이야? 싶을 정도로 여러 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 H' 자 형태여서 더욱 그렇습니다.

 

 

 

 

 

안채 앞쪽으론 'ㄷ'자 형으로 안채를 감싸듯이 행랑채가 있습니다.

보이는 곳은 방인것 같고, 맞은편에는 광도 있습니다. 어느분 자료를 보면 이곳 행랑채는 대문채를 포함하여 32칸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 99칸집으로 청송 송소고택, 강릉 선교장, 보은 우당고택이 있다고 하는데,  하여튼 이 집 전체는 99칸이라고도 하고, 사랑채에 거주하시는 분의 이야기로는 99칸을 넘어 100몇칸이라고 합니다.  어느 자료엔 3만평의 대지에 134칸이었지만 현 110칸 이상된다고 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재 그렇게 까지 많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안채를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H자 구조니까 안채 양쪽의 튀어나온 부분만큼 뒷쪽에도 있다고 보셔야 합니다.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 인상 고우신 안주인에게 집안을 둘러보러 왔다며 양해를 구하고 조용히 조심스레 둘러봅니다.

 

안채.

안채는 몸채가 정면 4칸, 보간(측면) 2.5칸이고 날개채가 정면 4컨, 측면 6칸으로 해서 앞은 1.5칸, 뒤는 2칸을 몸채보대 내밀도록 지었다. 몸채에는 가운데 대청을 두었고 오른쪽에 안방,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뒤쪽에는 쪽마를 놓아 오른쪽 날개 뒤까지 연결하여 부엌마루, 부엌방과 동선을 이어 주었다,

오른쪽 날개에는 부엌 앞에 모방과 툇마루, 부엌 마루와 부엌방을 만들었다. 왼쪽 날개에는 몸채 마루와 연결해서 마루방과 곳간, 갓방을 두고, 가운데에는 뒤뜰과 연결되는 상하 2칸 크기의 부엌을 만들었으며 위쪽에는 부엌을 포함한 널따란 다락을 설치하여 뒷의 툇마루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안채의 구조는 대체로 사랑채와 비숫하나 상하 중도리 사이에 홍예보를 써서 2중보를 둔 것이 특이하고,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둥근기둥을 쓴 반면 안채는 전면만 등근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등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무량수각(无量壽閣)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절에서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 무량수전 또는 무량수락이라 하며 극락보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가정집인데 다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無자나 无자는 모두 '없을 무'자 입니다.

 

 

 

 

 

위선최락(爲善最樂)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액자는 사랑채에도 걸려있습니다.

 

 

 

 

 

사면에서 바라본 안채입니다.

 

전남 고훙에서 중국과의 해산물 무역으로 거부가 된 선정훈 님이 1920년 전후(구한말 일제시대)해 지은 최고의 자재와 목수를 동원해 지은 집이라 합니다.

참고로 이 집을 선병국 가옥이라고도 하는데 선처흠(?~1921, 부인 경주김씨) - 우당 선영홍 - 선정훈(1878~1963) - 선병국 이렇게 대를 이어가는 것 같습니다. 집을 선정훈이 지었으면 본인의 호를 쓸만도 한데 우당고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당선생이 번 돈이 많았는지, 아니면 선조를 우대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자료들을 참고해보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선처흠, 선영홍 두분은 전남 고흥 일원에 상당한 토지를 보유하신것 같고, 선정훈님이 이곳 보은에 집을 짓고 관선정 서숙을 열어 전국의 500여 유생을 무료로 공부시킨 것 같습니다. 선병국, 선병우, 선병묵은 형제같은 생각이 드는데 친형제인지 촌수가 있는 형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위 내용은 생각이므로 추후 정확한 내용을 알게되면 수정하겠습니다.

 

 

 

 

 

마당은 잔디밭입니다.

좌측으로(안채 맞은편) 담 두르듯이 행랑채가 있습니다.

 

 

 

 

 

내당 편액을 달았습니다.

후문으로 들어가 다른쪽 문(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자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안채가 양쪽 두 곳의 문을 두고 행랑채로 둘러쌓여 있어 자연 담장의 역할을 하며, 밖으로 넓게 집안을 감쓰는 담이 또다시 둘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당과 안채, 사랑채가 별도의 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이들 전체를 다시 담으로 둘렀습니다.

 

 

 

 

 

밖에서 바라본 행랑채와 안채쪽입니다.

뒷벽면에 수많은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놓았고, 초가의 재래식 화장실 우측에  골목처럼 보이는 이중, 삼중의 담 사이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습니다.

 

 

 

 

 

사랑채는 안채와 별도로 떨어져 있습니다.

처음엔 저곳이 정자인가 했는데 재래식 화장실일 것 같습니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은 안채의 문보다 문턱이 높고 좁아보입니다.

 

 

 

 

 

사랑채

사랑채는 안채 동남 쪽에 안채와 직각 축으로 남동쪽 방향에 있다. 사량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2량가로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평면 구성은 동쪽이 1칸 부엌이고, 사랑방이 2칸, 사랑방 서쪽으로 1칸의 대청과 작은 사랑방이 이어진다. 부엌 위쪽에는 다락을 설치하였으며, 부엌 앞 퇴에는 골방을 두어 사랑방 앞 툇마루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다.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 안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설치하고 쌍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대청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였다. 가구 형식은 2고주 5량가이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원의 소나무

 

 

 

 

 

나이 지긋하신 정갈하고 곧은 품위있는 안 주인이 안채와 별도로 거주하고 계십니다.

누구라고 이야기는 하셨는데 이 집을 지은 선정훈님의 며느님으로 들은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외관으로 보기에는 안채에 거주하시는 며느님 보다는 연세가 많습니다.

옛 집이어서 집으로 오르는 계단이 상당히 높다.

 

 

 

 

 

안채에와 같이 이곳 사랑채에도 같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爲善最樂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는 뜻으로 이미 밝힌바 있습니다.

 

 

 

 

 

아주 정갈해 보이고 곧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계시는 나이 상당해 보이는 안주인님이 환대해 줍니다.

진진런 하오, 파룬파파 하오(파룬궁) 글씨가 있는 연꽃 모양의 악세사리를 하나를 선물로 주시며 둘러보라 하십니다.(집 뒷쪽은 사적 공간이라 금지)

 

 

 

 

 

사진은  집 주인이 직접 촬영해 주셨습니다.

 

우당 선생이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이야기

왕궁을 짓는,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들이 이 집을 지은 이야기,

이조 말 어느 왕(순조? 잊어먹었음)의 장레식 비용을 대 준 이야기,

99칸이 넘은 1백 몇 칸으로 지은 이야기,

사각이 아닌 둥근 기둥 이야기,

틈하나 보이지 않은 이 집이 수침당하고 난 뒤 틈이 벌어진 이야기(이 집의 집터가 연꽃이 물에 뜬  형국으로 연화부수형 명당이라 함, 1980년 대홍수때 이 집이 수침당했다 함)

대들보가 처마끝까지? 통채로 이어진 모습이  귀하고 무척 아름답다는 이야기

문의 문양이 각 방문마다 다른 이야기 등등.............

그러나 제일 오랫동안 이야기 하신것이 파룬궁 이야기입니다.

 

 

 

 

 

이집 주인에게서 들은 법륜대법 (法輪大法, 파룬따파, 파룬궁)

 

파룬궁은 1992년 중국이세 리흥쯔(李洪志) 선생에 의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진정한 생명쌍수 공법으로 다섯가지 동작으로 신체를 연마하고 우주 최고의 특성인 眞, 善, 忍에 따라 심성을 닦는 수양법으로,

1992년년과 1993년 리선생은 베이징 동방건강박랍회에서 2년 연속 영예상과 최고인기 기공사상을 수상했고, 1998년 중국 국가체육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인구는 7천만명 이상이었다고 함.

리선생은 중국에서 54회의 파룬파파 학습반을 개최한 이후 세계 곳곳에서도 강연회를 열었고, 세계인의 건강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부터 4년 연속 노벨평화상 최종 후보에 오른 바 있다고 함.

1998년 중국 정부에서 파룬궁 수련인이 1억명에 달하자 공산당 보다 큰 단체로 조직이 커지고, 이념 또한 다르자 장쩌민 총서기는 국가조직을 총동원하여 파룬궁 탄압을 시작.

2000년대 중국에 가면 쉽게 장기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짐. 중국공산당원은 파룬궁 수련인을 체포 감금하고 이들로 부터 장기를 적추하여 제공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함.

 

한적한 시골에 사시는 분이 이런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물었더니 말끝을 살짝 돌려 관련 이야기만 계속하십니다.

곧추선 똑바른 자세에서의 느낌은 아마 파룬궁을 수련하시는 분인것 같습니다.

나올때 파룬궁 관련 조그만 안내책자를 주길래 집에와 읽어보니 할머니 이야기가 그의 들어있었습니다. 

 

 

 

 

이 솟을 대문이 이집의 정문입이다.

우당 고택의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온 셈입니다.

집의 남쪽에 위치하나 현 주변 여건상 북쪽 샛문을 이용하는게 가깝고 편하게 되어 있어 차량이 아니라면 이 문을 사용할 일이 많지 않겠습니다.

 

 

 

 

 

솟을 삼문 앞쪽 공터에 이런 비석과 건물이 있습니다.

안내문에 보면 선처흠 효열각으로 되어있습니다. 선처흠은 선병국의 증조할아버지 이지 싶습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선처흠 효열각이고,  비석들은 선처흠, 선영홍, 선정훈과 관련 된 것일 겁니다. 비석들 중 철비는 선영홍 시혜비로 고흥 점암등 4개면 소작인들이 선영홍의 은혜를 베풀어 준 것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철비라 합니다. 

 

 

 

 

 

전통방식의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제조 판매하기도 하시나 봅니다.

 

뒷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외형상 관선정을 복원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현 한옥스테이로 운영되는 비교적 근년에 신축한 건물입니다.

관선정은 선처음의 손자인 선정훈(1878~1963)이 건립한 서숙으로 1950년대 초까지 전국각지 약500명의 젊은이들에게 음식과 잠자리 등을 제공하고, 영남에서 홍치유라는 유능한 선생을 모셔다 가르쳐 많은 인물을 배출시켰다 합니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등등  전국 8도의 지역별 옹기를 구분하여 모아 두었습니다.

 

 

 

 

 

참 대단한 집인데

농촌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니 이 집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선병우 고택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보은 선병우 고가에 왔습니다.

 

 

 

 

 

솟을 삼문 옆에 작은 문이 있습니다.

이 집은 현재 음식점으로 이용하고 있기에 이 문이 더 정문이 되었습니다.

솟을 삼문으로 들어서도, 이곳으로 들어서도  두 문다 안채로 이어집니다.

 

 

 

 

 

이집 배치도입니다.

우당 고택에 비하면 간단한 집입니다.

 

 

 

 

 

선병우 고가는 현재 북해가든 이란 이름으로 음식점과 안채는 카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식당은 예약제로 운영된다고 합니다.

제일 바깥쪽 이 건물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사랑채인지 행랑채인지 모르겠습니다.

 

 

 

 

 

안채와의 사이에 있는 이 건물은 규모가 작고 긴데.....

사랑채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행랑채도 아닌것 같고..........

 

 

 

 

 

이 건물은 안채입니다. 현 카페로 운영중이라 합니다.

 

 

 

 

 

선병우 고가는 1940년대에 지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을 고루 갖춘 전통적인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각 채가 독립하고 있는 남부 지방의 가옥 배치와 유사하며, 간살을 넓게 잡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당시대의 변화된 양식 기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라고 하겠다.

이웃하고 있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34호인 선병국의 가옥(우당 고택)과 선병묵 고가와 함께 건축양식과 수법이 동일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된 이 건물이 사랑채인가 싶습니다만, 그렇다면 현 식당으로 운영되는 건물이 행랑채가 되는 셈인데 건물이 너무 좋습니다.

 

 

 

 

 

솟을 삼문으로 나왔습니다.

이곳에 음식이 맛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집에서 저녁을 먹을까도 생각했는데 시간이 어중간하여 다음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보은 선병묵 고가.

 

현 위치가 정문인데 행랑채쪽 문으로 들러가 정문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았습니다.

 

 

 

 

 

대문이 세군데나 있어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헷갈립니다.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설치한 연못이라고 안내표지판이 있습니다.

이 집의 후원 역할을 할듯 싶습니다. 

 

 

 

 

 

행랑채에서 사랑채로 이어지는 문으로 들어섭니다.

 

 

 

 

 

선병묵고가 / 충청북도 문화재자로

1940년대에 지은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대문 등 전통적인 구성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장방형의 마당 가운데에 사랑채가 있으며, 중문을 거쳐 그 후면의 안채에 이르게 된다,. 담장 왼쪽으로 도로에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대문을 각각 내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웃하고 있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34호인 선병국 가옥과 충북도 문화재자료 제5호인 선병우 고가와 함게 건축양식과 수법이 동일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역시 안채입니다.

 

 

 

 

 

사랑채의 뒷면인 셈입니다.

좌측 저쪽에 보이는 건물은 광채가 되겠습니다.

 

 

 

 

 

이곳은 사랑채 입니다.

사랑채 양쪽에서 안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사랑채에서 밖으로 나와 골목을 따라 선병묵 고택의 정문으로 왔습니다.

정문옆에 이 집에 대한 안내문을 읽어보고 오늘 일정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