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고이동벽화고분, 장기리암각화, 안화리암각화, 김면장군유적, 반룡사, 개실마을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힛트를 치면서 영화 배경이 된 촬영지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고령 김면장군 유적지인 도암서원에서도 몇 컷 촬영한 곳이어서 알음알음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김면장군 유적지는 도암서원과 장군의 묘역, 위령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깨끗하고 정돈된 느낌과 노거수 배롱나무 몇 그루가 인상적입니다.
고령 이곳 저곳 웬만한 곳은 거의 다녀 보았습니다. 그동안 후순위로 밀렸던 고이동 벽화고분 모형관, 장기리와 안화리 암각화, 개실마을을 찾아보는 것으로 고령일정을 채워봅니다.
현 고령에는 대가야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일정
고령 고이동벽화고분, 상무사 기념관 - 녹원가 중식 - 장기리 암각화 - 안화리 암각화 - 김면장군 유적 - 반룡사 - 개실마을 (2026. 3. 22)
▷탐방후에
◐고이동 벽화고분, 상무사 기념관

大伽倻 造船소?址
대가야시대 배를 만들었던 곳임을 표시한 것 같은데, 여섯번째 글자를 모르겠습니다.
팔만대장경 이운길이 고령 개경포(낙동강변)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은 낙동강의 지류가 흐르는 곳으로 과연 낙동강을 거슬러 오고갈 배를 만들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옛 지형상 그럴만한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고아리 벽화고분 모형관 앞입니다.
과거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오후 늦은시간이라 모형관 내부에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가야시대 고분 중 벽화가 있는 고분은 흔치않아 고분군에 올라보고 모형관도 둘러보기로 합니다.

고아리 벽화고분 모형관 옆에 상무사기념관이 있습니다.

고령 상무사(商務社)
이 기념관은 조선시대 지방의 상업을 담당해 온 부보상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고령상무사란 이들 중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오던 상인단체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전국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던 부보상단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조직체계, 윤리규정 등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각 지역의 상업을 장악했다. 부상단은 특히 생선, 소금, 목기, 토기, 수철(水鐵) 등 다섯가지 물품의 판매를 독점했다. 그렇지만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점차 쇠락했고, 지금은 이 지역을 비롯한 경상남북도와 충청남도 몇 곳에서만 그 존재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고령군 지역의 시장을 장악했던 고령상무사는 부상단인 좌사계가 1866년, 보상단인 우사계가 1899년부터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매년 봄과 가을 우두머리인 반수와 접장의 덕을 기리는 제사(公文祭)를 지내며 조선 부보상단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고령상무사 좌사계에는 <선생안 先生案>, <契案>, <규약>, <고령군左社節目>, 물금장(勿禁杖), 인장, 나팔 등 전적(典籍)과 유물 17점이 전해오고 있으며, 1992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금은 대가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삼무사 기념관은 정문이 잠겨있어 담 너머로만 봅니다.

고아리 벽화고분 모형관 앞쪽에 고아리 벽화고분으로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가볍게 걸음을 걷고자 하시면 이 적색 길을 따라 대가야 박물관 및 고분군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원점회귀도 가능하겠습니다.

앞쪽 대형고분 2기, 뒷쪽으로 작은 고분들이 몇 기 보입니다.

고아리 벽화고분은 대가야읍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고아리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1963년 무덤 내에서 벽화가 발견된 가야지역 유일의 벽화고분이다.
시신을 넣어 두는 돌방 내부 현실(玄室)과 연결된 입구인 연도(羨道/부러워할 선, 무덤길 연) 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이 벗겨져 있다.
천장 돌에는 회칠을 얇게 하고, 벽면에는 굴 껍질은 섞은 회를 두텁게 바르고, 그 위에 분홍색. 녹색. 흑색. 갈색의 염료로 그림을 그렸다. 벽화는 주로 연꽃을 그렸는데, 현실 천장에는 1개의 연꽃 그림이, 연도 천장에는 11개의 연꽃 그림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다. 연꽃 주위에는 잎이나 줄기로 보이는 녹색 선과 갈색, 분홍색, 녹색으로 물결무늬 혹은 구름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다. 무덤의 구조와 형태를 보면 대가야 말기인 6세기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외형적으로 볼 때 정면이 아니라 약간 측면에서 발굴이 이루어졌나 봅니다.

각도를 달리하여 바라본 고분군,
이곳 야자매트길을 따라 오르면 솔내음 숲길이 시작됩니다.

고아리 벽화고분을 둘러보고 내려와 모형관으로 들어갑니다.

입구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삼국의 연화문
연화문이지만 백제와 가야, 고구려의 모습이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백제미술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안정적인 분위기는 연화문에서도 엿보입니다. 능산리 동하총의 <비운연화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에서 연화문을 볼 수 있습니다.
가야의 연화문은 현존하는 수량은 적지만 다양한 형태를 보입니다. 고이리 벽화고분의 연화문은 넓고 둥근 꽃잎과 물방울형 꽃술 그리고 굵은 윤관선의 꽃잎 등 백제와 이어집니다.
고구려는 정치와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으며, 문화에서도 강인하고 굳센 민족성을 엿볼수 있습니다.

모형관 내부에는 석실의 모형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석실안으로 들어가면,

재현해 놓은 벽화의 모형을 희미하게나 볼 수 있습니다.
◐녹원가 식당

보쌈 먹으러 녹원가를 찾았습니다.
녹원가는 고령읍의 동쪽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는 나름 깔끔합니다.

은상 메뉴입니다.

지역 맛집으로 통하는 집으로 손님들이 많습니다.
보쌈등을 제외하면 반찬의 가지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만도 충분하며 음식 맛도 좋습니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

장기리 암각화를 보러 왔습니다.
고령읍내에서 회천교(고령수목원 앞)를 건너자 바로 우회전하면 2.5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 내비가 금산재를 넘어 7.6km로 우회하여 안내하는 바람에 조금 돌아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저기 지붕이 씌여진 곳의 크지않은 바위에 암각화가 있습니다.
광장도 제법 규모있게 조성하였고, 주변의 암각화의 모형을 새긴 인공바위를을 몇 만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암각화쪽으로 갑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이 바위가 전부입니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 / 보물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암각화 유적이다. 암각화란 바위그림아라고도 하며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염원을 신성시하던 바위에 새긴 것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모듬내에서 약 200m정도 떨어진 속칭 '알터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제방을 만들기 이전에는 유적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왔으며 발견 당시에는 앞쪽에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바위면의 규모는 높이 3m, 너비 6m가량으로 남서쪽으로 향하여 있다.
암각화의 문양은 30여점(36점)의 돌칼손잡이 형태의 문양(검파형 암각화)를 중심으로 4점의 동심원을 비롯해 정확하게 형상을 알 수 없는 것을 포함하여 대략 50여점이 조사되었다. 그 외 주변에 큰 규모의 바위구멍이 다수 분포한다. 제작기법은 먼저 쪼기로 형태를 만든 다음 구 위를 채차 갈아서 새겼으며, 표현물에 따라 갈았던 정도의 차이가 있다.
검파형암각화는 하늘 의 비를 부른다는 검의 상징성을 받아들여 손잡이에 선을 조각한 장식이 있는 이단병식석검의 손잡이를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암각화에서 계통성을 가지고 분포하고 있다, 그 성격은 농경에서 풍요를 기원하고 비를 부르는 기우의례를 위한 상징물로 이해된다. 동심원은 한가운데 홈을 중심으로 2~4겹의 원으로 구성되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으나, 물 또는 빗방울이 떨어진 모양을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유적은 상징성 있는 문양을 통하여 풍요와 다산,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와서 확산된 농경에서 필수적인 비를 부르기 위한 제사의례을 위한 곳이었다. 그것은 주변에 분포하는 고고학적 유적과 뮤물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장기리암각화는 한국 암각화에 있어 최초의 학술적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곳이며, 한국형 암각화를 대표하는유적으로서 중요한 가치를지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장기리 암각화를 둘러보고 안화리 암각화를 찾아갑니다.
◐안화리 암각화

내비에 안화리 암각화를 입력하면 이곳으로 안내해 줍니다.
카카오맵상에는 산중턱에 표시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는 하천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변이 농로 형태로 노폭이 좁은 편이나 승용차의 경우 차량 교행이 가능하므로 주차의 어려움은 없습니다.


고령 안화리 암각화 / 경상북도 기념물
이 유적은 장기리 암각화로 부터 약 3km 떨어진 쌍림면 안화리의 안림장터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안림장터 부근이 맞나 모르겠다. 앞은 강이다) 너비 1.15m, 높이 0.9m 바위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청동기에서 초기철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내용은 4개의 검파형 암각화와 1개의 동심원 문양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좌측의 위쪽 바위면에서도 비슷한 그림 10여개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그림은 장기리 암각화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그의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문화를 소유한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의 신앙 의례를 행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근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비슷한 문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암각화 도면이 있습니다만 이것 또한 별 도움이 되지않습니다.

한 곳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암각화는 찾지못하고 이곳의 위치만 확인한 꼴이 되었습니다.
◐김면장군 유적지

남면장군 유적지에 왔습니다.

김면장군 유적 / 경상북도 기념물
이 유적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송암 김면(1541~1593)장군과 관련된 곳이다. 김면 장군의 묘소.신도비, 도암사, 도암재, 도암서당 등으로 구성된 사적지로서 1988년에 경상북도 기념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김면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호는 송림, 본관은 고령이고 평생을 고령에서 보냈다. 성리학자이며 의병 도대장이었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 거창 등의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의병 대장이라는 교서를 받았다. 1593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의병의 관군화로 경상도의 의병을 총괄하는 위치까지 올라간다. 선산 전투을 앞두고 충청도, 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 개령(현재의 김천지역)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병을 얻어 병사했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고 1593. 3. 13일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숨을 거뒀다,
"오로지(다만) 나라만이 있는 줄 알았고,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只知有國 不知有身/지지유국 부지유신)"
만석꾼이라고 불릴 정도이 많은 재산을 의병 활동에 기울이는 바람에 남은 가족들은 문전걸식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면은 죽기 전까지 전장에 머물며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가족들을 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현종 7년(1666)에 유학자들이 장군을 그리며 생각하는 사당을 대가야읍에 세웠다. 이후 정조 12년(1789)애 사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신도비를 세워 그의 높은 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과 나무위키에서 발췌>

외삼문, 지심문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입구 우측에 장군이 남긴 충절의 말씀을 바위에 새겼습니다.
只知有國 不知有身/지지유국 부지유신 (나라 있는 줄 알고, 내 몸은 몰랐노라.)

외삼문을 들어서면 상평루 아래를 통과하게 됩니다.
목재의 재질이 고색미가 나면서도 정갈합니다.

맞은 편에 도암서원이 있습니다.

상평루에 올라봅니다.


취죽헌 (翠竹軒 /물총새취 또는 푸를 취)
맞나 모르겠네요,

유일헌(幽逸軒/그윽할 유, 편안할 일)

상평루 원문
대가야 성스런 이곳 우리 해동의 으뜸이요, 운집한 선비들의 소박한 뜻 매한가지로다.
아름다운 마룻대 밝은 달빛 비추는데 화려한 난간에서 즐거이 풍월 읇조리고 미숭산 깊은 곳엔 서광이 깃드는데 도암서원 푸른솔은 의기는 충전하고 우뚝솟은 높은 누각엔 화창한 날 영원한데 상평의 진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 이 통하네.
주)
상평창 : 곡가 조절을 위한 곡물 비축창고
상평곡 : 한나라 선제때 시행함
동곡 신재규 짓고 쓰다.
<옆 한글 해설본에서>

상평루에서 바라본 도암서원

도암서원 마당앞에 형틀이 놓여있습니다.
영화 (왕과사는 남자) 촬영 소품인가 싶습니다.


묵일당(默一堂 / 잠잠할 묵)



동재
경묵재(敬默齋) 편액을 달았습니다.

역시 동재입니다.
형틀을 넣어서 촬영한 모습입니다.

서재
수의재(修義齋)라 이름했습니다.

도암서원을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담장 우측의 건물입니다.
추념재와 관리사가 있습니다.
관리사에는 관리인이 주거를 하는 듯 합니다.

추념재(追念齋)
향사의 준비나 문중 회의등이 개최될 듯 합니다.

도암서원 뒷쪽에 도암서당과 도암사가 있습니다.

노거수 배롱나무가 한 운치 합니다.

도암서원쪽 문입니다.
이곳의 샛문들은 그의가 규모면에서 작고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배롱나무 꽃 피는 철에 찾으면 장관일 것 같습니다.




도암사쪽

사당 도암사



도암서당에서 바라본 장판각과 화장실 건물

도암서당과 도암사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상평루 앞으로 왔습니다.


좌측 샛문을 나서면 김면장군 묘역이 있습니다.

김면장군 묘역에 왔습니다.

김면장군 신도비
김면장군 신도비는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의병장 김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김면 장군의 휘는 면(沔 / 내이름 면),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책력 암)이다. 장군이 52새 되던 선조 25년(158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종, 친족과 함께 고령, 거창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게 대항하여 싸우다가 1593년 3월 11일에 순국하였다,
감면 장군이 죽고 칠십여년 후인 현종7년(1866)에 유학자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정조 13년(1789)에 사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은 대광보국숭록대부(조선시대 정일품의 종친, 의빈, 문무관에게 주던 으뜸 품계) 의정부 영의정 겸 연경연 홍문관제학 세자 사부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有明朝鮮國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折衝將軍 行 慶尙右道 兵馬節度使 宋菴先生 金公 神道碑
유명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절충장군 행 경상우도 병마저도사 송암선생 김공 신도비

묘역


묘역인근에서 바라본 김면장군 유적지

좌로부터 큰 건물 도암서원 (도암서원 뒷편에 작은 건물 도암서당과 도암사 사당 있음), 동서재, 상평루, 외삼문이 가늠되며 뒷편으로 추념사와 관리사가 보입니다.

김면장군 유적지는 건물의 체목 자체뿐만 아니라 고색미가 나면서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느낌이 참 편하다 싶습니다.

도암서당구역, 관리사 구역, 묘역구역을 둘러보고 주차으로 내려왔습니다.

김면장군 유적지 우측편에 위령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근년에 건립하였는지 깨끗합니다.


壬亂 倡義 高靈 金氏 親族 八義士 起義 (임란 창의 고령 김씨 친족 팔의사 기의)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1년(1598)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침입한 전쟁이다.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는데,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군들이 병선 칠백여 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왜군이 좌. 중. 우 삼로(三路)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낙동강 좌우의 인근 지역이 왜군의 주 진로가 되어 짓밟히고 많은 백성이 죄없이 쓰러지며 관군이 연패하였다. 이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백성이 의병 봉기를 시작하자 김면은 고령의 낙동강 연안을 방어하고 왜군의 경상우도 진입을 막기 위하여 창의하고 기병하였다.
이에 비분강개한 고령 김씨 족친 김급, 김함, 김연, 김회, 김양, 김성, 김홍한, 김홍원, 여덟 명이 분격하여 용감히 떨쳐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전투에 몸을 던졌다.
<현지 비문에서>

김면장군 유적지를 둘러보고 반룡사로 향합니다.
◐반룡사

과거 찾아본 적이 있는 사찰입니다.
오늘은 당초 계획에 없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어 둘러보기로 합니다.

주 불전은 대적광전입니다.

건물의 배치가 향교나 서원의 경우 동재에 해당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쪽은 서재건물,

반룡사 다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반룡사는 고령군 쌍림면 용리의 미숭산 기슭에 위치하며,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는유서 깊은 사찰이다.
탑의 전체 높이는 2.4m 정도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일반적인 석탑과는 달리 흑색의 점판암으로 제작되었다. 석탑의 모양도 남작한 옥개석만을 층층이 포개어 놓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양식의 석탑은 통일신라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다. 반룡사다층석탑은 해인사 원당암의 다층석탑과 흡사하여 제작 시기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원래 지장전 앞에 있던 것을 반룡사 동종(銅鍾) 조선 영조 29년(1759) 제작과 함께 대가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2010년에 복원하여 이곳에 세웠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적광전

고령반룡사 목조비로자나 삼존불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이 불상은 지권인(智拳印,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을 의미하는 손 모양)을 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설법인(說法印, 부처가 설법 교화함을 보이는 손 모양)을 한 협시보살상을 배치한 모습이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곡면을 중시한 제작 기법과 단아한 얼굴, 역동적인 옷주름 표현 등이 특징적이다. 특히 여러 나무 조각을 연결하여 만들었다는 점과 흙을 덧대어 옷 주름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였다는 점이 독특하다.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기에서 조선 인조 20년(1642) 조각승(불상은 만드는 승려) 혜희(惠熙)가 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조각의 시대적 특징을 따르면서도 균형미와 사실성, 부드러움과 힘이 공존하는 혜희의 독창적인 조각 기법을 볼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지장암 쪽으로 갑니다.


지장암과 약사전



부도탑

간단하게 반룡사를 둘러보았습니다.
◐개실마을


개실마을로 이동하였습니다.
마을회관 앞 도로 건너편에 주차하였습니다.

마을의 구조가 대체로 앞쪽 도로변에서 뒷쪽 야산쪽으로 골목이 나 있는 형태입니다.
따라서 앞쪽 큰 도로변에서 뒷쪽으로 갔다가 약간 돌아서 마을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마을 앞으로 왔습니다.

축구꿈나무家

도연재(道淵齋)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이 건물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고종 원년(1886)에 건립하여 유생울 가르치고 제사를 모시던 재실이다.
김종직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익히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성종 때 관직에 올라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관직이 삭탈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었다.
점필재 종택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거리를 두고 있으며, 정면 5칸, 측면2칸의 맛배지붕 집이다.

랑스튜디오
숙박, 카페, 도자기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문의 : 010 - 2518 - 2205.

이숙랑 / 도예가
현, 랑 스튜디오 대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학교 예술 강사
2006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도예과 졸업,
.................
.................
조용하고, 아늑하고 쉬어가기에 충분히 분위기 있는 집입니다.










점필재 종택에 왔습니다.
이 건물은 선산 김씨 문충공파의 종택으로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181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1431 ~ 1492)은 고려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익히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조선 성종때에는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관직이 삭탈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었다. 건물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터에 남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개실마을은 영남 사림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터를 잡고 350년째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선산(일선)김씨 집성촌입니다.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의미로 개실이라 하였다 합니다.
경북민속문화제 제62호인 점필재 종택에는 현재 선생의 18대손이 살고 있습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밀양에서 노후를 보냈으므로 이곳 개실마을에 살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곳 종택은 선생의 몇 대 후손이 이곳에 들어와 건립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채

사랑채엔
문충세가(文忠世家) 편액을 걸려있습니다.

사랑채를 우측으로 돌아 안채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련이 걸려있는 건물이 중사랑채인가 싶습니다.
특징중 하나는 주련이 있는 칸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안채 방향으로는 벽으로 둘러져 있어 마주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안채.

마당에서 바라본 중사랑채
맨 우측칸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습니다만 안채에서는 보이지 않게 벽면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방채

우측 뒷편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당이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동쪽으로 샛문이 있습니다.

1.부친에게 전수받은 道脈, 다정다함한 어린시절 (출생~15세)
점필재선생은1431년(세종 14년) 밀양 부북면 대동리에서 강호 김숙자 선생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부친에게 <동몽수지>, <유학자설>, <정속편> 부터 시작하여 소학, 효경 및 사서삼경을 직접 배워 정몽주, 길재, 김숙자로 이어져내려 온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하는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백성의 가난에 가슴아파하면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꿈을 키워가던 젊은 시인이기도 했다. 20대 후반까지의 시를 모아놓은 시집 <회당고>는 이런 꿈 많던 다정다감한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을 오롯이 담아놓고 있다.
2.시재(詩才)에 대한 자부와 낙방의 아픔(16세 ~25세)
선생이 16세 되던 세종 28년(1446), 서울에서 소과에 응시했으나 낙방의 쓴맛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 지은 <백룡부,白龍賦>라는 시를 본 김수온은 뒷날 문형(文衡)을 잡을 만한 솜씨라며 극찬을 하였다. 세종도 선생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영산훈도에 제수했다. 선생은 이처럼 젊은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시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뒷날 벼슬길에 나아갔을때 당시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어세겸도 "나 정도의 실력으로는그의 말을 모는 마부가 된다 하더라도 달갑게 여기겠다."며 선생의 시재(詩才)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낙방해서 돌아오는 길 제천정에 걸어둔 선생의 시는 다음과 같다.
雪裏寒梅雨後山 눈 속의 찬 매화와 비온 뒤에 산 경치
看時容易畵時難 보기는 쉽더니 그림 그리려니 어렵네
早知不入時入眼 사람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일찍이 알았더라
寧把臙脂寫牧丹 차라리 연지 가져다 모란이나 그릴 것을
3.부친의 죽음과 지극한 효성(26 ~28세)
선생은 26세 되던 세조 2년(1456), 부친의 상을 당하자 죽만 먹으며 곡읍을 했다. 부친의 뜻에 따라 밀양부 서쪽 6리쯤에 있는 고암산 분저곡에서 장사를 지냈다. 선생은 두 형과 함께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지극한 효성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동할 정도였다. 그때 그곳에서 여묘살이를하며 자기 집안의 가계, 부친의 연보, 사우관계, 공업, 제사의 절차 등을 정리한 <이준록>을 편찬하였다. 선생과 두 형제가 함께 3년간 여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의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강행실도>를 보면 이런 행위를 효자로 인정하여 포상을 하고 있다.
4. 단종의 비극적 소식을 듣고 <弔義帝文,조의제문>을 짓다 (27세)
선생이 27세 되던 세조 3년(1457),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가 있던 단종이 마침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때, 선생은 그 비극적 소식을 전해 들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해 강에 버려진 초(楚) 의제(義帝)의 일에 빗댄 글 <조의제문>에 충분(忠憤)의 뜻을 담아 세조의 불의를 풍자했다. 뒷날 연산군 시절, 이 글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라는 악형을 당하게 된다. <조의제문>의 서문은 이러하다,
정축년(세조3년) 10월 어느날 내가 밀양에서 경산(지금의 성주)으로 가던 길에 답계역에서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어떤 신인이 일곱 가지 문채가 있는 제왕의 의복을 입고 훤칠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의 손자로 이름은 심(心)이라고 하는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시해되어 침강에 던져진 사람이다."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나는 잠을 깨어 생각해 보았다. 회왕은 남방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쪽 나라 사람이다. 땅이 만 리가 넘게 떨어져 있고, 시대도 천년이나 뒤져있는데 꿈속에 나와 감응하게 되니, 이것은 무슨 조짐일까? 또한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죽여 그 시체를 강물에 던진 것일까? 마침내 글을 지어 의제의 혼령을 위로한다.
<조의제문> 서문에서
선생의 연보를 작성한 손자 김유는 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선생이 27세 때인 세조 3년이라면 여묘실이를 하고 있었으니, 그 먼 답계역으로 출입했을리 없다는 점을 들어 이때 지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뒷날 지었으면서도 단종이 죽었던 해에 지은 것으로 설정한 것인지, 아니면 상주(喪主)가 아닌 막내였기 때문에 불기피한 일로 성주에 나아갔던 것인지 분명치 않다,
5.과거급제와 관직에 첫발을 내디딤 (29세)
선생은 29세이던 세조 5년(1459) 봄 과거에 급제했다. 그해 11월, 큰형과 함께 조정에 하직인사를 드리고 어머니가 계신 고향 밀양으로 내려와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밀양부사 강숙경, 청도군수 이약동, 영산현감 최계동, 교수관 유효담 등이 관아에서 큰 연회를 베풀어주자 온 고을이 영광으로 생각했다. 선생은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의 부정자에 임명되어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6.서울에서의 관직생활, 문장으로 명성을 얻음 (30세~40세)
선생은 과거에 급제한 이듬해인 30세(세조 6년), 승문원 저작에 승진하면서 40세(성종 원년)까지 10년 가까이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33세 때인 세조 9년 사헌부감찰로 있을 때 佛事에 관해 간언을 올렸다가 잠시 파직되기도 했다. 그 즈음 시로 이름을 날리던 어세겸이 선생의 시를 보고서는 "나 같은 사람은 말채찍을 잡고 그의 말을 모는 종이 된다하여도 달게 받겠다."고 감탄했을 정도로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 글재주를 인정받아 선생은 왕명을 받들어 왕세자빈 한씨의 애책문(哀冊文), 인수대비의 옥책문(玉冊文), 예종의 시책문(諡冊文/시호 시)등 주요한 글을 지었다.
7.함양군수 시절 교육과 선정으로 이름을 날림(41세~45세)
선생은 40세 되던 성종 원년(1470), 예문관 수찬지제교에 제수되었는데 71세된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이에, 성종이 함양군수를 제수하여 모친을 모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임소인 함양에 이르러 고을의 젊은이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소문을 듣고 많은 젊은이기 찾아왔다. 정여창, 김굉필과 같은 뛰어난 제자를 처음 만났던 것도 이때였다. 선생은 이처럼 학문을 진작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물론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을 목민관으로서의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함양군민은 뒷날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선생의 덕을 기렸다.
8.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잃어버렸던, 어느 해의 슬픔(44세)
선생이 44세 되던 1474년(성종5년) 봄, 함양 군수로 있을 때 막내아들 목아가 다섯살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죽었다. 뿐만 아니다. 그해 여름에는 딸이 죽고, 가을에는 맏아들마져 죽고 말았다. 한 해에 아둘 둘과 딸 하나를 잃었던 것이다. 선생은 매우 큰 슬픔에 빠졌다. 마침내 시름을 견디기 어려워 경상감사에게 사직서를 올리고, 금산(金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강희맹은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고 속히 직무를 수행하라고 간곡하게 권유하여 하는 수 없이 다시 함양으로 돌아갔다.
9.선산부사 시절, 풍속 교화와 제자 교육(46세 ~49세)
선생은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지방의 인재를 양성하고 고을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려 정사(政事)의 성적이 으뜸이었다.
성종 임금은 "김모(金某)는 고을 잘 다스려 명성이 높으니 영전시키라"고 하여 45세 때 승문원사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5년만에 서울로 올라갔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기를 청하자 이번에는 선산부사에 제수하였다. 선산은 부친 김숙자 선생의 고향이었기에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그 고을에서도 어진 풍속으로 교화시키는 한편, 김굉필, 이승언, 원개, 이철균, 곽승화, 주윤창과 같은 젊은 제자들과 향교에서 옛글을 함께 강론하였다.
10.모친의 죽음, 그럼에도 멈추지 않던 제자 교육(49세~52세)
선생이 49세 되던 성종 10년(1478), 어머님이 병환으로 누웠다. 선생은 청송에 있던 둘째형님, 거창에 있던 조카, 그리고 밀양에 있던 누이동생을 모두 불러 모았다. 평소 사랑하던 가족들을 보면 혹 기쁨으로 병환이 나을 수 있을까 기대한 것이었지만, 끝내 12월 21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향년 80세였다. 선생은 부친 때와 마찬가지로 묘의 아래 여막을 짓고 예를 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모두 감동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양준. 양침 형제가 홍유순을 따라 천리 길을 도보로 걸어와 배움을 청하고, 초계의 안우, 청도의 김기손. 김일손 형제가 찾아와서 배웠던 때도 어머니 여묘살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선생은 이처럼 효성이 깊은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
11. 부인 조씨의 죽음, 아내를 그리워하는 애절함(52세)
선생이 52세 되던 성종 13년(1482), 모친의 상을 마쳤다.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 금산에 경렴당(景濓堂/내이름 렴)을 짓고, 서당 옆에 못을 파서 연을 심었는데 주렴계의 삶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3월 11일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병을 이유로 간곡히 사직을 청했으나 상이 운허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그 뒤 보름만인 4월 30일 부인 조씨가 작고하였다. 어렵게 휴가를 얻어 11월 20일 조씨 부인을 금산의 미곡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부인을 그리는 절절한 뜻을 담은 제문을 지어 바쳤다.
12.가족사의 시련 뒤, 혁혁한 사대부로서의 삶 (53세~59세)
선생이 53세 되던 성종 14년 (1483)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된 뒤, 우부승지, 도승지 등으로 계속 승진 임명되었다. 그때마다 선생은 병으로 사양하였다. 하지만 임금께서는 "경의 문장과 정사로 보아 충분히 감당할 만하니, 사양하지 말라." 며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4세 때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용렬한 관리들을 도태시키고 어진 선비들을 많이 천거하여 등용시키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그 뒤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어 <여지승람>을 수정하고 전라감사, 한성부좌윤, 병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거쳐 마침내 59세 때 형조판서에 올랐다.
자식을 모두 잃는 아품, 그리고 연이은 모친상과 부인상의 시련을 겪고 난 50대 중. 후반이 선생의 삶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혁혁했던 기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성종은 그런 선생을 늘 칭찬하였다.
13.어린신부, 그리고 만년에 아들을 얻은 기쁨(55세 ~56세)
선생 나이 21세때인 1451년(문종 원년) 울진 현령을 지낸 창녕인 조계문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선생이 52세때 부인 조씨를 잃고 혼자 지내던 선생은 55세 되던 성종 16년1485). 남평인 문극정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때 부인의 나이 18세였으니, 선생보다 무려 37살이나 어렸다. 하지만 부인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도(婦道)를 매우 잘 닦아서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칙이 있었고, 집안을 화목하게 만들어 나갔다. 특히 아랫사람들에게 "전조(銓曹/저울질할 전, 마을 조)는 권세가 있는 곳 이기에 청렴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비방이 생겨나기 쉽다." 면서 항상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보내오는 물품이라든가 직접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 결혼한 이듬해, 56세가 되던 7월 22일 늦둥이 아들 숭년을 얻는 큰 기쁨을 얻었다. 선생은 시를 지어 만년에 자식을 얻은 기쁨을 드러냈다.
14. 밀양으로 낙향, (59세~62세)
도덕과 덕행과 정사에 뛰어났던 생애
선생은 59세 되던 성종20년(1489) 병을 핑게로 사직하고 고향 밀양으로 내려갔다. 성종의 은총이 두터워지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종이 여러 차례 올라오도록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렀다. 그러자 원근의 젊은 제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선생은 반드시 성리학의 본뜻에 합치하도록 힘쓸 것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 스스로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처럼 도학을 밝하는 것을 사업으로 삼던 중 위중한 병이 들었다. 임금이 내의에게 명하여 약을 가지고 역말로 달려가서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명발와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62세였다. 부음을 전해들은 임금을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예관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밀양 남쪽 무량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15.무오사화의 비극, 그리고 뒷날의 복권
숙정 15년(1689)에 7대손 김시락이 상소하여 선생의 증직과 복시(復諡)를 청했다. 이때 예조판서로 있던 남용익이 입계하여 찬성을 추증하도록 청했다. 하지만 임금이 특별히 영의증에 추증했다. 그리고 숙종 34년(1709) 예조판서 조상우라 여러 사람의 공론으로 주청하여 문강공에서 문충공으로 시호를 되돌려받았다. 그리하여 연산조의 무오사화(1498)때 관직삭탈은 물론 부관참시라는 형언키 어려운 참화를 겪었던 선생의 삶은 뒤늦게나마 온전하게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16.지금도 기려지고 있는 선생의 정신, 예림서원
명종 22년(1567) 밀양지역 유림들이 공론을 모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중동면 자시산 아래에 덕성서원을 세워 선생의 위패를 처음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도 했는데 복원하였는가 하면, 인조 12년(1634)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그리고 서원의 이름을 예림서원으로 바꾸어, 역시 밀양지역의 선현인 오졸재 박한주 선생과 송당 신례성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이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었다. 그 뒤 1874년에 강당을 복구하고, 1921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마을의 맨 우측 끝에 마을 뒷산으로의 산책로가 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 산책로 탐방도 좋을 것 같습니다. 들머리 상태로 보아서는 탐방로가 관리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개평마을을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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