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의 산

경주박물관, 석굴암, 불국사

정헌의 티스토리 2026. 5. 25. 22:48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석굴암, 불국사

 

근년에 경주지역을 몇 군데 둘러보았습니만 그래도 아직 남산 칠불암 주변과 경주시내 변두리 쪽으로 찾아볼 곳이 많이 남았습니다.

모임 등불회에서 국립경주박물관과 석굴암  등 경주일원 몇 군데를 둘러봅니다. 그동안 몇 번 경주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박물관은 걸음걷는 범위가 적어 은근 뒤로 미뤄진 곳인데, 오늘 부처님 오신날 전후 연휴로 인해 많은 인파들 속에 대충 둘러보았습니다. 석굴암 또한 오래전에 들런적이 있는 곳인데 후에 토함산과 풍력단지를 찾았을때는 보수중이어서 개방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다시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불국사는 근년 두어번 다녀간 곳이고 며칠 후면 다시 찾을 곳이어서 살짝 변두리쪽으로도 방향을 둘러보았습니다.

 

 

▷일정

국립 경주박물관 - 중식 - 석굴암 - 불국사 - 귀가.

 

 

▷탐방후에

 

◐국립 경주박물관

 

국립 경주박물관에 왔습니다/

넓게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주차료는 받지 않습니다.

 

 

 

 

 

입장료 또한 무료입니다.

 

 

 

 

 

먼저 본관(신라관)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우측 근거리에 성덕대왕신종이 있습니다.

 

 

 

 

 

신라관부터 둘러봅니다.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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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가 들어서고,

지배자가 나타나다.

 

 

 

 

 

 

 

 

 

 

 

 

 

 

 

 

 

 

 

 

 

 

 

 

 

 

 

 

 

 

 

 

 

 

 

 

 

 

 

 

 

 

 

 

 

 

 

 

 

 

 

 

 

 

신라의 번영 

 

503년 지증 마립간은 나라의 이름을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을 아우른다'는 뜻의 신라로 정하고 신라 최고 통치자의 호칭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습니다. 법흥왕은 520년 율령(헌법과 행정법규)을 반포하고 17관등제와 관리들의 공복(관리가 조정에서 입던 제복)을 정해 귀족들을 체계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습니다. 법흥왕이 다진 중앙 집권의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진흥왕은 영토를 사방으로 넓혔습니다.

이후 무열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해 정치 제도와 복식(옷과 장신구)을 받아들이고 군사 지원을 이끌어내 통일 전쟁을 꾀했습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660년에 백제,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676년에는 당나라를 물리쳐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룩했습니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왕권을 강화라려고 정치제도와 지방 조직을 개편했으며 넓어진 영토에 걸맞는 군사 제도를 갖추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을 포용하고 그 문화도 받아들여 아름답고 조화로운 통일신라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현지 자료에서>

 

 

 

 

 

포항 중성리 신리비

 

중성리 신라비는 재물 소송과 판결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비석에는 과거에 모단벌이라는 사람의 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았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여 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비석의 제작 시기는 첫 머리에 적힌 신사(辛巳)라는 간지와 비문 내용, 표기법 등으로 볼 때 지증왕 2년(501)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보다 2년 앞선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입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매우 단순해 보입니다.

서체로 본다면 전서체 비슷해 보입니다. 

 

 

 

 

 

금관가야를 병합하다.

우리지역에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전)구형왕릉이 있어 참고삼아 박물관 자료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금관가야(지금의 김해)는 중국과 왜로 이어지는 바닷길 무역을 통하여 성장하였으며, 4세기 대까지 백제, 왜와의 연합해 신라를 공격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국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5세기 대 이후에는 국가의 명맥만 겨우 유지했을 뿐, 가야의 주도권은 대가야로 넘어갔습니다.

법흥왕은 금관가야의 땅을 차지하려고 국왕 구해를 설득해 532년에 마침내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남쪽 지역의 위협을 없애고 금관가야의 중개 무역을 차지하였습니다. 훗날 금관가야 국왕이었던 구해의 셋째 아들 김무력과 증손자 김유신은 신라 장군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대가야를 정복하다.

 

대가야는 4새기 후반 이후 백제의 지원으로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합니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는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때는 영남 서부 지역과 호남 동부 지역까지 영역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554년에 백제 성왕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고 대가야의 도움을 받아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관산성에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백제가 크게 패했고 이에 대가야의 세력도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562년,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신라는 현재의 영남 지역 모두를 차지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임신 서기석

 

비석의 첫 머리에 임신(壬申)아라는 간지와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보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 터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임신년이라는 간지가 어느 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문 내용 중에는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이 등장하는 점이니 화랑도의 근본정신을 강조한 점 등을 들어 화랑도가 융성하였던 시기의 임신년인 552년 또는 612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신라 융성기에 청소년들의 강렬한 유교도덕 실천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비석의 내용 번역본을 보면 임신년 6월 16일에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하기를,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실한 도(道)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잃으면 하늘에게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하는 것을 용납함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이전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경>, <상서>,<예기>, <춘추 전> 등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를 맹세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사지모양 석수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 위엄을 나타냅니다.

이 사자상은 원래 어디에 세워졌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발견된 곳이 교동이기 때문에 신라 궁성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동 근처의 춘양교터, 월정교터에서도 사자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장방형의 받침 위에 앉아 있는 형태이며, 고개를 꼿꽃이 들고 전체적으로 경직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신라에는 종묘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도가 있었으며 제사는 중요한 국가 행사였습니다. 종묘에서는 왕과 왕비의 제사를 일 년에 여섯 번 지냈고, 왕경(서라벌) 주변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삼산오악을 비롯한 산천에서도 크고 작은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는 왕권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호국 산신에게 나라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고, 풍요와 번영을 비는 것이었습니다. 가뭄이 들면 하천이나 연못가 주변이나 우물에서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공간이 아니라 신에게 안정적인 물 공급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제사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이다.

 

복식은 사람이 걸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복은 몸과 팔다리를 가리는 옷이고, 식은 모자와 관, 신발이나 허리띠 등의 장식입니다. 복식은 그것을 입은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 어떤 지위에 잇는지를 나타냅니다. 법흥왕 7년(520)에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복식과 등급을 정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진덕여왕 2년(648)에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나라 복식을 따르겠다고 한 다음 해부터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는 남성에게만 한정했으나, 문무왕 4년(664)에는 여성의 옷도 당나라 복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복식의 변화는 신라의 흙 인형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현지 내용입니다.>

 

 

 

 

 

화장이 성행하다.

 

통일신라 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주검을 불에 태워 장례를 치르는 화장이 유행했습니다. 최초의 화장은 7세기 중반 자장율사의 기록에서 획인됩니다. 문무왕도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화장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화장 방식으로는 뼛가루를 바다나 산에 뿌리는 산골, 땅에 묻은 뒤 부도를 세우는 승탑, 용기에 담아 땅에 묻는 화장묘 등이 있었습니다. 화장묘는 유골을 담는 용기에 따라 이중형과 단일형으로 구분됩니다. 이중형 뼈항아리는 뻐를 담은 장골기와 이를 보호하는 석관, 석함, 석혈, 토기로 구성됩니다. 이것들은 주로 왕경 주변에서 발견되며, 화려한 도장무늬 토기나 연유 도기가 사용된 상위층의 화장묘입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얼굴무늬 수막새의 미소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얼굴무늬 수막새는 장인이 흙을 손으로 빚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와범(瓦范/기와 와, 풀이름 범)이라는 틀에 흙을 눌러 찍어내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와범은 같은 모양을 여러 번 찍어낼 수 있는 도구인데, 기와 표면에 남아 있는 나무결 자국을 통해 나무로 된 틀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나무틀에 흙을 채워 얼굴 모양을 찍고, 표정을 정리했습니다. 그 위에는 둥근 기와(수키와)를 덧붙여 지붕 끝에 단단히 붙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때는 기와를 겹쳐 이어 붙이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지붕 위에서도 쉽게 떨어지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었습니다.

 

 

 

 

 

간 돌검

 

 

 

 

 

금속공예

 

우리나라 금속 문화는 고조선의 대표 표지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요령식동검(비파형청동검)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서 청동기를 제작하고 사용한 것은 약 기원전 3~2세기경의 초기철기시대입니다. 정교하게 새겨진 가는 무늬 청동거울이나 청동방울, 가는 몸체의 한국식 동검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청동기는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도 널리 사용되며 실제 사용된 실용기라기보다는 당시 사회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종교적 성격을 띤 의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청동에 더하여 금, 은, 동, 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여러 종류의 금속공예품이 제작되었고, 이것을 거푸집에 녹여 붓거나 두드려서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음각, 양각, 투각, 도금, 금은입사 등으로 장식한 것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번창하고 사찰의 건립이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불교 공예품이 활발히 제작됩니다. 범종이나 요령, 쇠북, 향로와 정병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각종 사리장엄구 등이 대표적입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청동요령

 

 

 

 

 

 

건통 9년 글자가 새긴 쇠북과 청동다리미(아레)

쇠북은 징과 같이 소리를 내어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릴 때 사용하였습니다. 얇은 북 모양이고 무늬는 가운데의 연꽃을 중심으로 몇 겹의 동심원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습니다. 앞면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귀로 보아 고려 예종 4년(1109)에 중림사의 주지였던 현의대사 충조가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출구는 본 건물의 좌측편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구쪽으로 나오면 마주 보이는 곳에 특별전시관이 있습니다.

현 금줄이 쳐져 있고 개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관(신라관) 뒷편인 셈입니다.

양쪽에 석가탑과 다보탑 모양의 탑이 조성되어 있고, 전시관이 있습니다만 이곳도 개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래 내용은 석가탑에 대한 현지의 안내문 내용입니다.

 

토함산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 서쪽에 있는 삼층석탑(석가탑)을 그대로 만든 것으로, 1975년 이곳으로 박물관을 옮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석가탑의 정식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인데, 다보탑과 마찬기지로 <법화경> <건보탑품>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탑입니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를 형상화한 것이 바로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인 것입니다.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탑 중 가장 아름다운 비례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주 감은사 터 삼층석탑, 고선사 터 삼층석탑과 같은 초기 탑의 육중한 모습은 점차 변화하여 석가탑에서 비례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석가탑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탑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탑구라고 하는 구조물입니다.  탑구의 네 모서리와 각 변의 중앙에는 각기 모양이 다른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두 합해 여덟 개의 연꽃이 있어, 이른바 팔방금강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에 새겨진 연꽃은 석가모니가 설법할 때 그 둘레에 앉았던 다른 불국토에서 오신 부처님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탑을 부르는 이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무영탑입니다아. 백제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푼 사랑 이야기에서 나온 것인데, 영지라는 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가 못에 빠져 죽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신라미술관으로 갑니다.

 

 

 

 

 

신라미술관으로 들어왔습니다.

 

 

 

 

 

 

 

 

 

 

 

 

신라의 불교조각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삼국시대인 4세기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고구려, 백제에 이어 신라에도 일찍이 불교가 알려졌지만 전통적 신앙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반대로 쉽게 자리 잡지 못했다. 6세기 전반이 되어서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불교 사상과 신앙은 신라 사람들의 삶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불교조각은 불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입체적 형상으로 표현한 미술 분야로, 묘사된 대상을 실제로 만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부처의 모습을 담은 불상은 경전과 함께 불교 전래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신라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요구와 취향에 맟춰 다양한 상을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는 불법과 신라를 수호한 신장, 산라사람들과 삶을 함께한 부처요 보살, 청정한 유리광세계의 백률사 역사여래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

 

 

 

 

 

신라 왕경 불상의 재료와 크기

 

신라 왕경이었던 경주의 절에는 돌, 흙, 청동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불상이 모셔졌다.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하는 불상은 거의 없지만 남아 있는 조각만으로 당시 불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경주 능지탑터에서 나온 소조불은 발만 일부 남아 있는데, 발의 크기로 보아 높이 2m가 넘는 대형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황룡사 터에서 발견된 청동 나발편은 크기로 보아 574년에 만들어진 장육상의 일부로 생각된다,

 

 

 

 

 

 

 

 

 

 

 

 

 

 

 

 

 

 

 

비로자나불

 

 

 

 

 

 

약사불 / 통일신라 800년 무렵 경주 백률사,  국보

 

약사불은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며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에 이익을 주는 부처로 여겨졌다. 이 약사불은 높이가 180cm에 가까은 큰 체구에 조형미가 뛰어나다, 통일산라 시기에 따로 만들어 끼웠던 두 손은 현재 없지만 팔을 든 자세와 <조선고적도보> 사진에 있는 후대에 만든 약단지를 든 왼손으로 보아 약사불로 추정된다. 가슴에는 내의을 묶은 띠 매듭이 보이며, 몸 전체를 덮은 법의는 자연스러운 옷 주름으로 몸의 입체감을 잘 보여준다. 뒷면 위아래두 곳에는 광배를 꽂았던 촉이 달려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전설이 된 신라의 부처와 보살

오랫동안 숭배되고 사랑받은 부처와 보살은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와 역사가 되고 전설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부처와 보살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한 관음보살은 신라의 왕경 경주에 있는 중생사, 백률사, 민장사 세 곳에 나타나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후백제 병사로부터 지켰고, 효소왕  때는 잃어버린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을 되찾아 주었다. 또한 경덕왕 때 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인 보개의 아들 장춘을 해난사고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었다. 미륵은 644년(선덕왕13) 생의스님 꿈속에 찾아와 남산 삼화령 생의사에 머물렀다.  709년(성덕왕 8)신라의 성인 둘은 관음의 도움으로 미륵과 아미타여래가 되었다. 선덕여왕은 <약사겅>의 힘으로 병이 나았다. 755년(경덕왕14) 장인 강고는 구리 30만 6,700근으로 분황사 약사여래를 만들었다. 이 전시실에서도 신라 사람들과 함께하며 위로와 안식을 주었을 여러 부처와 보살을 만날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미륵삼존 / 신라 7세기 경주 남산 장창곡, 보물

 

1924년 경주 남산 장창곡의 돌방(석실)에서 발견된 불상과 보살상 두 구이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부드러운 조형미를 표현한 신라 조각의 대표작이다. 본존불상은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큰 신체 비례와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은 7세기 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오른손은 살짝 구부려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불상 양 옆의 보살상은 손의 위치나 장식이 다를 뿐 불상과 조각 수법이 거의 같다. 이들은 사랑스럽고 친근한 모습 때문에 '아기부처'로도 불린다.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에 등장하는 삼화령 미륵으로 추정된다.

 

 

 

 

 

 

약사불 / 경주 남산, 통일신라, 높이 305.5cm

 

왼손에 약을 담은 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불로 여겨지는 불상입니다. 약사불은 여러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을 고쳐주고 나아가 다양한 현세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신앙되었습니다. 오른손은 통일신라시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촉지인, 즉 땅을 짚은 손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촉지인을 취한 약사불이 특히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약사불은 남산 용장골에서 파편으로 전하던 것을 옮겨온 것이며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동부동에서 인왕동으로 이전할 때 머리와 광배의 일부를 접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 비바람에 표면이 깎여나갔으나 머리 위의 육계와 통통한 얼굴은 여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측 어깨만 드러낸 옷을 입은 편단우견의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표현되었으며 광배 안쪽에는 넝쿨무늬를 , 그 바깥에는 불꽃무늬를 돋을새김했습니다. 연꽃대좌도 매우 화려합니다. 석굴암 본존불에 비해 신체의 탄력성이 줄어든 점과 장식성이 강조된 광배의 문양 등으로 보아 8세기 말 내지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책상다리 가) . 경주 송화산, 신라, 높이 125cm

 

한쪽 다리를 내리고 다른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린 반가 자세와 한쪽 손을 뺨에 대고 생각에 잠긴 사유자세를 결합한 반가사유상 형식은 인도에서 창안되었습니다. 인도에서는 특정 존상에 한정하지 않고 싯다르타 태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보살과 마왕을 표현할 때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5~6세기에 활발히 제작되었으며, 한국에 이르러서는 미룩보살 신앙과의 관련 속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베대칭의 미학과 생각에 잠긴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에서 6~7세기에 꽃피우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일본에도 전해져 7~8세기에 일본에서 많은 반가사유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불상을 커다란 돌 하나로 조각한 반가사유상입니다. 머리와 두 팔은 파손되었지만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로 보아 건장한 성인 남자의 신체에 가깝습니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은 왼 무릎 위에 올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잇습니다. 하체게 걸친 치맛자락은 서로 겹치어 주름지고 끝자락에 물결을 이룹니다. 발가락과 발톱까지 정성 들여 표현한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습니다. 조각하기 까다로운 화강암에 신라 징인의 불심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없어진 머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이처럼 훌륭한 작품을 조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잠시 이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사유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신라의 불교사원

 

5세기에 묵호자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법흥왕 대(514~540)에 공인되었다. 6세기 전반에  흥륜사를 시작으로 큰 절이 수도 왕경에 세워졌고, 7세기 후반부터는 왕경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절이 많이 세워졌다.

신라에서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염원하며 절을 세웠다. 왕실은 성전사원을 두어 절을 수리하거나 감독하게 하고 국가 의례도 맡겼다. 통일 이후에 불교가 더욱 대중화되고 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왕실, 귀족 이외에 지방 호족, 일반인도 절을 세우는데 참여했다. 8세기 이후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중시되어 탑 조성과 신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 불교사원은 정치, 종교, 문화, 예술의 힘이 집중된 곳이었다. 절의 건축물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발굴된 춭토품을 보면 당시 절의 규모, 장식하는 법, 신앙 활동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황룡사구층목탑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절로 삼국유사에서 말한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두 가지인 장육존상과 구층목합이 있었다. 553(진흥왕 14)에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나자 계획을 바꾸어 절을 세우고 황룡사라고 이름 붙였다. 진흥왕 대에 기초 공사를 하고 담장을 세웠으며 장육존상을 만들었다. 진평왕 대에 3금당을, 선덕여왕 대에 구층목탑을 만들었다. 1238년에 몽골이 침입하여 절이 다 타버릴 때가지 구층목탑은 여러 번 기울거나 불이 났고, 여섯번을 고쳐 세웠다.

탑을 여러 번 고쳐 세우면서 목탑 심초석 윗면에 사리를 넣는 사리공에는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넣었다. 사리장엄구 중에서 사리 내함에는 구층목탑을 세우고 872년(경문왕 12)에 수리한 내용을 담은 <황룡사찰주본기>가 안팎에 새겨져 있어서 주목을 끈다. 심초석 아래쪽에서 발견된 공양품은 탑을 세울때 넣은 것이다. 조개껍데기를 담은 백자 항아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그릇, 금속으로 만든 장식구, 구슬 등이 발견되어/ㅆ다,

<현지 안내문에서>

 

 

 

 

 

 

 

 

 

 

 

 

1,2층으로 이루어진 신라미술관을 둘러보았습니다.

 

 

 

 

 

미술관 앞 마당쪽을 둘러봅니다.

오른쪽 뒷편에 보이는 삼층석탑이 고선사터 삼층석탑입니다.

 

 

 

 

 

 

 

 

 

 

 

 

이곳 다리를 건너면 수장고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 박물관에서의 소요예상시간이 1시간이어셔 수장고 쪽으로 갈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이디아 커피숍도 있습니다.

 

 

 

 

 

고청지

 

 

 

 

 

수묵당과 고청지

전통 기와집인 수묵당과 그 앞의 연못인 고청지는 2007년부터 우리 박물관 교육 시설로 쓰입니다. 수묵당과 고청지는 수묵 진홍섭 선생과 고청 윤경렬 선생을 기리고자 두 분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습니다, 진홍섭 선생은 1952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인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입니다. 윤경렬 선생은 1948년부터 경주에 살며 평생을 경주와 신라 문화를 사랑하고 가꾼 자랑스러운 경주 사람입니다.

이 두 선생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1954년에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열었습니다.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는 윤경렬 선생의 헌신과 경주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지금끼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묵당과 고청지에는 우리나라 박물관 교육의 선구자였던 두 분의 높은 뜻이 오롯이 깃들어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월지관으로 갑니다.

 

 

 

 

 

월지관은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이끈 궁궐의 불교 미술품

 

 

 

 

 

광배

 

 

 

 

 

 

 

 

 

 

 

 

 

十石入瓮(십석입옹/ 독 옹)

지금의 한자와 무엇이 다를까여?

당시에는 한자의 모양이 완전히 고착되지 않아 지금과 드른 서체를 흔히 사용헸습니다.

 

항아리 목 부분에 십석입옹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10섬(석)만큼의 양이 들어갈 수 잇는 항이리라는 뜻입니다. 이 항아리는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으로 10섬은 200말(두)이며 1머ㅏㅇ은 10되입니다. 월지에서 나온 四斗五刀(사두오도)를 새긴 매병 모양 토기를 통해 1되는 350ml였음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이 항이리의 용량은 10섬=200말=2,000되=700,000ml, 약 700리터일 가능성이 큽니다.실제 이 항아리는 700l를 탐을 수 있습니다.

 

 

 

 

 

 

월지에서 나온 건축 부재가 중요한 이유

 

부재(部材)는 건물을 지을 때 뼈대가 되는 중요한 재료를 말합니다. 전통 건축에서 지붕을 받치는 나무 구조물이나 기와가 대표적인 부재입니다. 신라 유적 가운데 나무 부재와 가와가 가장 많이 발굴된 곳이 월지입니다.

동궁은 679년에 지었고, 월지 서쪽에 있던 임해전은 804년, 847년, 867년에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월지 일대에서 발굴된 기와는 7세기 후반부터 9세기 까지 신라 기와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재료로 활용됩니다. 나무 부재는 나무의 종류와 다듬는 방식, 조립 방법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지금껏 본 적이 없는 화려한 장식

다른 유적에서 보기 어려운 금속 장식이 월지에서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금속 장식은 문고리부터 난간까지, 건물 안팎을 위엄 있게 꾸미는 데 쓰였습니다.

화려한 무늬를 정교하게 새긴 문고리와 난간대 장식은 신라의 높은 공예 수준을 알려줍니다. 난간의 끝부분도 맞새김(투조)한 금속판으로 마감했습니다. 이에 더해 벽걸이 장식과 장막이나 발을 걸던 장식도 궁궐의 품격을 더해주었습니다. 월지 주변 건물은 서까래 끝부분도 금속판으로 마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통일산리의 서까래 기와가 월지에서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으로 도금한 화려한 금속 장식이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화려한 풍경이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을 겁니다. 

<안내문에서>

 

 

 

 

 

 

 

 

 

 

 

 

신라 정치의 중심 공간, 월지궁

 

 

 

 

 

월지가 간직한 보물들, 그때 그 시절

 

 

 

 

 

성덕대왕 신종

 

 

 

 

 

약 1시간여 급하게 둘러본 국립경주박물관이었습니다.

 

 

 

 

◐고색창연 식당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식당입니다.

 

 

 

 

 

한옥 건물에 분위기는 괜찮은 곳입니다.

 

 

 

 

 

반반떡갈비 정식을 시켰습니다.(12,000원?)

경주에는 맛집들이 많습니다. 이 집은 가격이 저렴한 만큼 큰 기대는 않하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석굴암

 

석굴암 주차장

이곳 석굴암 또한 주차료, 입장료가 없습니다.

 

 

 

 

 

들머리 종각

 

 

 

 

 

불교용품점

참고로 석굴암  주차장 주변에는 음식점이 한곳도 없습니다.

 

 

 

 

 

 

 

 

 

 

 

일주문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는 0.6km거리입니다.

 

 

 

 

 

들어가는 길은 평탄하여 걷기좋습니다.

 

 

 

 

 

 

 

 

 

 

 

 

 

 

 

 

 

 

 

과거 토함산 등산 내지는 이곳을 찾았을때 공사중으로 개방하지 않았는데 오랫만에 이곳에 다시 온 셈입니다.

 

 

 

 

 

 

 

 

 

 

 

 

 

 

 

 

 

 

 

이 석조물들은 석굴암 수리(1913~1915, 1962~1964)할 때 교체된 구부재들과 기타 주변 석물들로 신라인들의 손길이 스며있는 귀중한 유물들입니다.

 

 

 

 

 

 

 

 

 

 

 

 

석굴암 석굴

 

이 석굴은 신라 경덕왕 재위 당시 재상 김대성이 처음 건립하였는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때에는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황룡사 대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만들어져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석굴의 평면 구조는 앞쪽이 네모나고 뒤쪽은 둥글다, 석굴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 거사상, 사천왕상, 인왕상, 팔부신중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과는 달리 화강암을 인공으로 다등어 조립힌 이 석굴은 불교 세계의 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세련된 조각 솜씨가 어우러진 걸작이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둥근형태의 주실 천장을 정교하게 축조한 것이다. 이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뛰어난 기술이다.

삭국유사에 김대성이 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건립했다고 전하는 석굴암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석굴내 사진촬영 금지라고 해서 사진은 없습니다.

 

 

 

 

 

 

 

 

 

 

 

 

 

 

 

 

 

 

 

 

 

 

 

 

 

 

 

 

 

 

 

 

 

 

 

 

 

 

 

 

 

 

 

 

 

 

 

 

 

 

 

 

 

 

 

 

 

 

 

 

 

석굴암을 둘러보고 불국사로 향합니다.

 

 

 

 

 

◐불국사

 

지난달 농특회 회원들과 이곳을 찾았고, 금차 등불회 회원들과 이곳을 찾았습니다. 며칠 후면 경남 유도회에서 이곳을 또 찾을 것이니 두어달 사이에 3번이나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천왕문

 

 

 

 

 

들어가면서 우측의 산천왕 두분입니다.

 

 

 

 

 

불국사 박물관에 왔습니다.

입구에 입장료 2,000원을 내는 함이 설치되어 있는데  잔돈이 없어 며칠후 이곳을 유도회원들과 찾을때 둘러보기로 합니다.

(며칠 후 유도회원들과 찾았을때는 화요일인데 월요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자연 휴일로 간주되어 당일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

  

 

 

 

 

박물관 주변

 

 

 

 

 

 

 

 

 

 

 

 

 

 

 

 

 

 

 

불국사로 왔습니다.

 

 

 

 

 

아랫층 칸이 청운교, 윗층의 층계가 백운교인 셈입니다.

 

 

 

 

 

측면에서 보면 청운교, 백운교 구분이 쉽습니다.

 

 

 

 

 

목어

 

 

 

 

 

자하문

 

이 건물은 석가모니부을 모신 대웅전 구역의 정문이다. 백운교와 청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대웅전이 보인다. 자하문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에서 발산되는 상서로운 자금색 광채가 서려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문은 불국사를 처음 지을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임진왜란 때 붙타 없어졌다. 현재의 문은 1781년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다시세운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자하문에서 내려다 본 바깥세상

 

 

 

 

 



 

 

 

 

 

 

 

 

 

 

 

 

탑구는 뭘 말하는 거지?

 

국립경주박물관 모형 석가탑앞 자료에 따르면 석가탑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곳으로 탑구(塔區)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탑구의 네 모서리와 각 변의 중앙에는 각기 모양이 다른 연꽃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모두 합개  8개의 연꽃이 있어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여기에 새겨진 연꽃은 석가모니가 설법할 때 그 둘레에 앉았던 다른 불국토에서 오신 부처님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탑구는 탑의 가장 아래에 놓이는 바닥돌(지대석) 주변으로  다시 돌을 깔거나 둘러서 구획한 공간으로, 사진상 하단의 탑 둘레에 사각형으로 띠를 두른 석재부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탑만 보고 바닥돌은 보지 못했습니다.

 

 

 

 

 

 

 

 

 

 

 

 

 

대웅전

 

 

 

 

 

 

 

 

 

 

 

 

무설전

 

 

 

 

 

 

무설전 내부에 들어가 보실 수 있습니다.

사리와 이국에서 오신 부처님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설전 우측 뒷편 급경사 계단을 오르면 관음전이 있습니다.

 

 

 

 

 

관음전

 

 

 

 

 

관음전 측문으로 내려가면 비로전이 있습니다.

 

 

 

 

비로전 마당 옆 보물

 

 

 

 

 

 

 

 

 

 

 

 

비로전 측면에는 나한전이 있습니다.

 

 

 

 

 

극락전 앞 안양문에 왔습니다.

 

안양문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 구역의 정문입니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입니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 이 문을 지나면 극락전이 있습니다. 이 문은 8세기 중엽  불국사가 처음 세워질 때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어려 차례 고쳐 세운 것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강릉 임영관 삼문인 객사문(국보)을 본떠 1962년에 신축한 것입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안양문에서 내려다 본 바깥세상

 

 

 

 

 

화장실 부자재인가 봅니다.

 

 

 

 

 

미술관과 기념품 매장

 

 

 

 

 

 

 

 

 

 

 

 

안양문

 

 

 

 

 

당간지주

 

 

 

 

 

불국사를 둘러보고 후문의 나갑니다.

 

 

 

 

 

후문으로 내려서 불국사 탐방을 마무리합니다.

 

 

 

 

◐진주냉면 용이

 

귀가길 진주 금산면에 위치한 진주냉면 용이 집에 왔습니다.

 

 

 

 

 

 

 

 

 

 

 

 

값도 비교적 저렴하고 맛도 있습니다.

 

 

 

 

 

지역 맛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