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장릉, 새참 중식(박가네 2호점), 청령포, 한반도지형 전망대
영화 왕과사는 남자의 영향으로 갑자기 영월지역이 여행 인기순위 상위에 올랐습니다.
산청에서는 영월까지 거리가 멀어 참여자의 연령 등을 감안하여 단종과 직접 관련이 있는 장릉과 청령포와 한반도지형 전망대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잡아봅니다.
산청향교 유림들과 함께한 영월 문화탐방이었습니다.
▷일정
영월 장릉 - 새참(박가네 2호점) 중식 - 청령포 - 한반도지형 전망대 - 귀가 / 2026. 5. 13.
▷탐방후에
◐장릉

일정상 장릉을 먼저 둘러보기로 합니다.
앞쪽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주차료는 없습니다. 장릉 입장료는 성인 2,000원으로 만65세 이상은 무료입장입니다.

맨 처음 만나는 건물이 낙촌 비각입니다.

이 비각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낙촌 박충원의 충심을 기리기 위해 1973년에 세웠습니다. 박충원은 중종 36년(1541)에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제문을 지어 치제(임금이 제문과 제물을 보내어 지내주는 제사 또는 그런 일)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부임할 당시에 영월의 관리들이 갑자기 죽는 요사스러운 일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노산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충원이 노산의 묘에서 제사를 지냈더니 그 뒤로는 탈이 없었고 요사스런 말도 사라져서 사람들이 박충원을 칭송하였다.라는 일화가 전합니다.

낙촌비각

文景公駱村密陽朴氏忠元先生紀跡碑 (문경공낙촌밀양박씨충원선생기적비)

유물관과 낙촌비각 사이로 난 능선길을 따라 장릉으로 갑니다.
초반 조금 급하게 계단을 오르면 이내 완만해 집니다.





정령송(精靈松) / 1999. 4. 9. 남양주문화원
사릉(思陵, 단종의 왕후인 정순왕후 송씨가 뭍혀 있는 릉)에서 이전 식수하였습니다.

저만큼 장릉이 있습니다.


장릉능침
장릉은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이다. 봉분 하나에 왕 한 분을 모신 단릉 양식으로, 일반적으로는 능상과 정자각, 향어로, 홍살문이 한 줄로 배치되지만, 장릉은 능상 오른쪽 아래 서남향으로 정자각이 있고, 향어로가 ㄱ자로 꺽여있다. 능은 후릉의 양식을 따라 석물은 왜소하고 간단한 편이고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침 공간에 핵심인 봉분의 양옆과 뒤쪽 삼면에는 나지막한 담을 두르고 봉분을 지키는 두쌍의 석호 석양을 세웠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장명등을 세우고 봉분 양쪽에는 망주석 두 기를 세웠다. 그 아래 단에는 문석인 두 기와 석마 한 쌍을 세우고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사각지붕 무양의 장명등은 정릉에서 첫선을 보인 양식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왕릉앞에 좌측 문인석, 가운데 혼유석과 장명등, 우측 망주석, 석마를 세웠습니다.



장릉의 유래
장릉은 조선 6대 임금인 단종(端宗 1441~1457)의 능이다.
단종의 이름은 홍위(弘暐)이며, 문종의 아들로 세종 23년(1441) 7월 23일 탄생하였다. 세종 30년(1448)에 왕세손, 그리고 1450년 7월 20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부왕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1452년 5월 18일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종 원년인 1453년 숙부인 수양 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국권을 장악하고 단종을 위협하자 단종 3년(1455)에 상왕으로 물러났다. 세조2년(1456)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재 영월 청령포로 유배 되었다.
1457년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유(瑜/아름다울 유)가 단종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세조는 1457년 10월 24일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니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때 영월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둥을지산(冬乙旨山)인 이곳에 몰래 매장하였다. 그 후 숙종 7년(1681)에 대군으로 추봉되고, 숙종 24년(1678)에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능을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장릉은 간소한 후능석물(厚陵石物)양식이며 다른 왕릉과는 달리 단종대왕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의 위판을 배향한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충신단(忠臣壇),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현지 碑의 내용입니다>

장판옥(藏版屋)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신하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정조 15년(1791)에 세웠습니다.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벼슬 환)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배식단(配食壇)
배식단은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이다. 정단과 별단으로 구분하였으며, 별단은 공로와 신분에 따라 셋으로 나누었다. 단종이 복위된 뒤 정조 15년(1971)에 처음으로 정단의 제위 32인과 별단의 제위 198인을 지정하였다.
이 배식자의 수는 순조가 왕위에 있던 시기에 추가되어 168위가 되었다. 제사는 한식 때 지내며, 그 축문을 정조가 직접 지은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제를 지낼때 배식단 위에 위패를 모시고 절을 앞쪽에서 한다는 뜻인가? 배식단의 앞쪽은 어느쪽인가?



향로와 어로

수복방
수복방은 능을 관리하는 수복(묘나 능을 돌보고 청소하던 사람)들이 근무하고 쉬는 곳으로, 숙종 25년(1699)에 정자각과 함께 세웠다.
<현지 안내문에서>

단종 비각
비각은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이다. 단종비각은 단종대왕 표석과 함께 영조 9년(1733)에 세웠다. 표석의 앞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단정할 단, 장중할 장)이라는 이름을 ,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를 새겼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지붕 위에서 보면 정(丁)자 모양이어서 정자각이라고 한다.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정청(正廳)과 정청 앞 월대 부분인 배위청(拜位廳)으로 이루어지며, 숙종 25년(1699)에 지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곳은?


수라간(水刺間 / 찌를 자, 찌를 척)
수라간은 제향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월중도(영월 일대의 단종 유적을 그린 조선 시대의 그림첩)에 나온 수라간을 근거로 발굴, 조사하여 2014년에 복원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영천

장릉 서쪽에 있는 이 우물은 정조15년(1791)에 왕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지어서 한식때 제정(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m정도이며 아래쪽은 화강석 담으로 둥글게 쌓여 있고 위쪽은 정사각형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깊이가 깊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보호수




엄흥도 정려각으로 왔습니다.

이 비각은 영월 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웠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벼슬이나 지위가 낮아짐)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는데, 이때 엄흥도가 찾아가 통곡을 하고 관을 마련하여 장사를 지낸 것으로 전한다, 엄흥도는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줌)되었고, 뒤에 다시 공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굳셀 의)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선충신 영월부 호장 증 자헌대부 공조판서 무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엄흥도지 문

재실

재실은 능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부속 건물로, 제수 장만, 제기 보관, 제관의 휴식 등에 사용한다. 평상시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며 능역 전체를 관리했다. 이 재실은 숙종 25년(1699)에 세웠고, 1932년에 고쳐 지었다.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단종 역사관


왕세자 책봉
단종은 조선 제5대왕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외아들로, 휘(諱, 이름)는 홍위(弘暐/햋빛 위)이다. 1441년 (세종23) 7월 23일 태어났으며, 1448년(세종30) 왕세손에 봉해졌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그해 7월 20일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정순황후 금보
정순황후 책봉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인 1454년(단종2) 1월 15세인 송현수의 따님과 혼례를 올렸다. 이때 성삼문은 예법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였으나 왕실 내부를 장악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단종선위(端宗 禪位)
단종은 자신을 보호하던 금성대군 한남군등 마저 수양대군에 의해 유배 보내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처치에 처해졌다. 결국 경회루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어보를 건네고는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은 근정전에서 조선 제7댜왕으로 즉위하였다.

사육신과 단종 복위운동
1456년(세조2) 6월 1알 상왕(단종)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려 하였다. 이를 기회로 백팽년,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세조를 처단하고 상왕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고 극형을 받았다.

사육신과 생육신
1456년(세조2) 숙부인 세조에게 억울하게 왕위를 빠앗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거나 자결로 충절을 지킨 신하들을 사육신이라 하고 세조 즉위 후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 단종을 위하여 절의을 지킨 신하를 생육신아라고 한다,

단종유배
사육신 등의 단종복위운동과 함께 명나라에서는 현 황제가 폐위되고 상황 영종이 복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세조는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이 단종복위를 도모했다고 꾸며, 1457년(세조3) 3월 21일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는 한편 문종비 현덕왕후를 서인(庶人}으로 삼고 그 능인 소릉(昭陵)을 파헤쳐 관곽을 내다 버렸다.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운동
경상도 순흥에 유배가 있던 금성대군은 1457년(세조3) 7월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영월에 있는 노산군(단종)을 복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지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 했다고 전해지니 이때 단종 나이 17세였다.

청령포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은 절벽으로 막혀있어 천혜의 유배지인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2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큰 홍수로 인하여 읍내 관풍헌으로 옮겼다.

정순왕후 생애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본관은 여산이다. 15세인 1454년(단종2)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1455년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에 봉해졌다. 이후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지에서 승하랄 때,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어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외롭게 살다 1521년(중종16) 82세로 승하하였다. 1698년(숙종 24) 단종 복위 시 정순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순황후 사릉
정순황후가 승하하자 단종의 친누나인 경혜공주가 출가한 정미수의 해주 정씨 선산 묘역에 일반 묘 형식으로 조성되었으나, 단종 복위와 함께 묘 역시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왕릉으로 승격되면서 주변의 일반 무덤은 옮기는 곳이 원칙이나 태조 비 신덕왕후 정릉(貞陵)의 예를 들어 분묘의 일부 석물만 매몰하고 묘는 그대로 두었다.
사릉에 조성된 석물은 장릉과 함께 후릉과 경릉의 예를 따라 간소하게 조성되었다.


단종 역사관을 끝으로 정릉 탐방을 마칩니다.

장릉에서 영월읍내로 이동 중, 우측 차장으로 보이는 공원입니다.
◐새참 / 호텔 어라연 중식

호텔 어라연입니다.

호텔 객실쪽이고요,

옆에 새참이란 상호의 음식점입니다.
호텔에 속한 레스토랑쯤으로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이곳은 박가네의 2호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수리 나물밥 단품입니다.

아수라 더덕 정식 금액은 1인분에 18,000원
어수리 나물밥에 밑반찬과 더덕구이, 제육볶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청령포

청령포에 왔습니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
경로는 1,000원, 경로 단체일 경우 800원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청령포는 세조3년(1457)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의 유배지로, 유배되던 해 여름 홍수가 염려되어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 전까지 단종이 머물던 곳이다. 서쪽은 험준한 맘벽이 솟아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은 곳으로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다.
영조2년 (1763)에는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와 비각을 세웠다. 2000년 4월에는 단종이 머물던 곳에 앞면 5칸, 옆면 2칸 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하였고, 부속 건물로 초가집을 세웠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있는 크고 오래된 소나무 숲이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다.
<현지 안내문에서>





구간 구간간의 거리가 가까운 곳이므로 대충 감 잡을 수 있습니다.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전망대 - 노산대- 금표비 순서로 돌아보시면 됩니다.










마당가운데 비각이 있습니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원레 이곳에는 단종이 머불던 어소가 있었으나 없어지고, 영조 39년(1763)에 이 비를 세워 어소의 위치를 전하고 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오석으로 된 몸돌을 세우고 비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단종이 영월부에 있을 때의 옛터' 뒷면에는 '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문체경서영원영수석 지명 청령포"라고 새겼다. 이로 보아 청령호라는 지명은 유래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抆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 닦을 문, 눈물 체, 하여금 영. 더벅머리 수,
영조 39년 가을 눈물을 닦고 어명을 받들어 원주감영에서 비석을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다.
<현지 안내문에서?



관음송으로 갑니다.


관음송


전망대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전망대로 오르는 중간 밍향탑이 있습니다.
청령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돌탑이다. 어린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이곳에 올라 한양 땅을 그리며 쌓았다는 탑으로 그 당시 애절했던 단종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전망대에서의 조망입니다.


노산대(魯山臺, 노둔할 노)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해 질 무렵이면 이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합니다.

노산대에서의 조망은 별로 없습니다.

내려오는 중간 이곳도 썩 조망이 좋지는 않습니다.


오른쪽 저곳은 관음송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금표비(禁標碑)가 있습니다.
금표비란 다른 사람의 접근을 금지하개 위해 세운 비석을 말하며, 이곳에 있는 금표비는 단종 사후 269년이 지난 영조2년(1726) 단종 유배지에 민간인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웠다. 앞면에는 '청령포 금표,淸泠浦 禁標 ', 뒷면에는 '東西 三百尺, 南北 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 측면에는 '崇禎九十九年'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이 금표비 덕분에 청령호의 우수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약 1시간여 청령포 탐방을 마무리 합니다.
◐한반도지형 전망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5호로 지정된 한반도 지형을 둘러보기 위해 왔습니다.

이곳 주차장에서 한반도지형 전망대까지는 0.8km로, 가는데 15분~20분 정도 소요됩니다.
초반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라야 합니다.

이내 탐방로는 완만 내지는 큰 고도차 없이 오르내림으로 보시면 됩니다.











주차장(서강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정표에 1.1km, 지나온 길보다는 약 0.3km 더 멉니다.(물론 시간도 25분 정도로 조금더 소요됩니다)











희양목 군락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저 나무가 다간형 소나무인가 봅니다.
언듯 보면 별것 아닙니다.


이 코스에는 돌리네 지형과 화석의 나무같은 바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차장 쉼터 쪽으로 길은 이어집니다.

가고 오는데 왕복 약 40분, 전망대에서 휴식 20분여 합하여 1시간쯤 소요되었습니다.
◐청주본가

이곳은 귀가시 저녁식사를 한 곳입니다.
왕갈비탕 전문집으로 일반 갈비탕은 14,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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