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를 고치려면
◎ 安東의 權進士 ◎
경상도 안동에는 본시 김씨와 권씨가 대성이요, 출중한 인물도 많았다.
어느 때 권진사라 하는 양반이 있었는데, 인물도 출중하고 수단이 놀라운 외에 집안을 다스리는 법이 엄하여 가족이고 하인이고 잘못을 범하면 용서하는 법이 없어, 모두 벌벌 기었고, 이웃에 까지도 좋은 경계가 되었다.
다만 늦게까지 일점 혈육이 없다가 나이 사십이나 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 또한 인물이 깨끗하여 읍내의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귀한 아들이라 일찌기 손을 보려고 몸 튼튼한 며느리를 얻었더니 이게 전 딱정떼라 남자 몇 몫을 할 여자였다.
하루는 그집 아들이 이웃마을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막집 추녀에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지나가는 비라 잠깐 그치려니 하였더니 점점 세차게 퍼부어 위에서 오는 비 보다도 튀는 흙탕물에 견딜 수가 없다.
그러는 데 주막주인이 와 굽신하여 말을 건넨다.
『아래서 튀는 물이 더 합니다. 잠깐 안으로 들어서서 비를 피하십시오』
헛간에는 사인교가 놓여 있고 좋은 말도 한필 매어 있는 수가 어느 양반댁 행차가 든 모양인데, 내행도 있고 한데 들어갈 맛이 없어 몇 번 사양하자니까,
안 마루께서 자기또래나 되었을까 한 선비가 들어오라고 손짓해 부르며 일변 신발을 찾는다.
그냥 있으면 기어이 쫓아 나와 맞아들일 판이다.
마지못해 따라 들어갔다.
마루에는 깨끗한 등메를 깔았고 내행들은 딴 방에 들었는지 선비와 단둘이 마주 대해 앉게 되었다.
그러더니
『우리 이렇게 비를 피하는 동안 심심하니 얘기나 하시면서..................』
하더니 찬합을 끌어당겨 여는데 음식이 모두 정갈하고 사기병에서 따르는 술 또한 향기 높고 준수하였다.
권커니 자커니 두어 순배나 먹었을까 그 뒤론 전혀 기억이 없다.
혼미한 중에도 목이 타는 듯 말라 고개를 쳐들며 손을 내밀어 머리맡을 더듬으니 그릇이 와 닿는다.
일변 눈을 비비며 받아 마시니 시원하고 정신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서 보기 드문 제호탕(醍호湯) 식힌 것이니 그렇지않겠는가? 정신이 들고 보니 이거 내 집이 아니다.
머리맡에는 생전 보지 못한 어여쁜 여인이 촛불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이상도하다. 내 어느 선비하고 술을 먹은 것 같은 데)
그러는 데 옆에 앉았던 여인이 입을 연다.
『서방님께서는 무얼 그리 찾으십니까? 찾으셔도 허사일 겁니다.
거기는 깊은 사연이 있으니 좀 들어 보십시오』
자기는 죽어도 본색을 낼 수 없는 서울 모 대신의 딸인데, 혼인을 정해 놓고 신랑이 죽어 망문과(望門寡)의 신세가 되어, 까닭에 없는 수절을 한다고 청춘을 늙히는 것이 가여워, 어제 만나신 분이 제 오라버닌데, 그가 한 꾀를
내었다는 것이다.
집에서는 신세를 한탄해 자살을 한 양으로 꾸며 헛 장사를 지내 외면치례하고, 자기는 단 두 남매 팔도강산 유람을 나섰다는 것이다.
가마꾼이며 마부는 그때그때 바꿔서 고용한 사람이니까 자기네 행색을 알리도 없고, 이렇게 방랑해 다니다가 어디서고 자기동생 고생이나 안 시킬만한 청년을 만나면, 어제 그 술은 집에서부터 준비해온 것인데 그것을 먹여
떨궈 놓고, 누이를 그 방에 쳐 넣고 선 밤새 말을 달려 도망해 버리기로 그렇게 미리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오라버니가 타신 말은 천리준총이라 그 때부터 달렸으면 지금쯤 죽령을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젠 이 하늘과 이 땅 사이에 당신 밖에 믿을 데 없는 신세올시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저 먹을 것은 제가 가지고 왔으니 글랑 염려 마십시오 』
묵직해 보이는 피동(皮동) 한 바리를 가리켜 보인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큰일이다.
그렇다고 자청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와서 거절했다간 생사람 죽일 판이고(에잉 사내자식의 일이다. 저지르고 볼 수 밖에)
그리하여 여인의 손을 잡아 백년해로의 가약을 맺었을 것은 물론이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생각하니 수습할 길이 막연하다.
곧 주인을 불러 아씨를 잘 보호할 것을 단단히 부탁하고 주막을 나섰다.
곧장 집으로 안 오고, 동접 친구에 꾀가 제갈량 같다는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실정을 말끔히 얘기하였더니 그도 난감한 모양이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한다.
『일이 대단히 어려운 만큼 잠깐 시일이 필요하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게. 그러면 내 편지 할 것이니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놀러 오게, 동접 몇이서 모여 시회(詩會)를 한다고................ 그러면 무슨 도리가 있을 듯 하이』
그리하여 집에 들어와서는 비에 막혀 하룻밤 드새고 왔습니다고 여쭙고,제 방에 돌아와 친구의 편지 오기만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있자니 사랑에서 부르신다.
『옛다. 아무개한테서 편지 왔다. 갸가 황진사 막내아들이지? 이놈아 남의 자식 글 솜씨 좀 봐라. 너는 언제나 그 만큼 쓰게 되니? 내 나귀 타고 갔다가 늦지 않게 돌아오너라. 그리고 오늘 지은 것도 한벌 베껴 오고.. 』
(아이구! 호랑이 굴을 벗어난 것 같다.)
친구집에 당도하니 벌써 몇 몇이 모였다가 반겨 맞는다.
술이고 밥이고 도무지 맛이 안 나는 것을 그런 대로 종일 놀다가 헤어지는데 친구가 이른다.
『오늘 지은 시들은 써 가지고 갈게 아니라 모두 외워서 여쭙게.
그래야 신용도 늘지! 그리고 집에서도 하루 놀고 싶어들 하는데, 아버님 무서워 엄두들을 못 낸다고 슬쩍 불지르게. 그래 자네네서 만나게들 되면 무슨 도리가 있느니』
집에 돌아와 뵈니 글 지은 것들을 보여 달란다.
그래 십여명이 지은 것을 줄줄 외우며 설명하니 진사님 입이 헤 벌어진다.
제자식 똑똑하게 노는데 좋아 안 할 사람이 있으랴?
그래 한창 기분이 좋았는데 정작 얘기를 꺼낸다.
『모두들 저희집 누마루가 시원하다고들 하면서 가서 매실주라도 대접 받을 래도 아버님께서 하 무서우셔서 입이 안 열린다고들 그럽니다』
『무섭긴 내가 사람 잡아먹는다 든? 내일이라도 모두들 부르려므나!』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실 거야? 』
『날 무섭다고들 하니 무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지』
이튿날 통기를 받고 깎은 새서방님들이 모여 드는데, 모두 읍내의 명사들 자제다.
권진사는 일일이 절 받고 안부를 물은 뒤에 천천히 입을 연다.
『날 무섭다고 한 녀석이 누구냐? 늙은이가 싫으면 싫지 공연히 조명들을 지어 가지고..................』
『아니올시다. 어른들께서 젊은 아이들을 그렇게 보시지 저희야 뭐랍니까?
모시고 있어야 듣고 배울 것도 있고 한 것을...............』
『그럼 너희들 오늘은 나도 놀이에 끼워 주련? 어른 애 구별없이 타파하고 말이다』
모두들 대답대신 박수를 쳐서 환영하였다.
진사님은 먼저 일어나 웃옷과 관을 벗어 걸고 모두 타파하기를 권하였다.
음식상이 나와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까 꾀장이 청년이 일어나 발론을 하였다.
『우리 이렇게 진사님까지 모신 자리에 흥겹게 놀지 않는 사람은 벌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이것은 벌주 잔이고............ 』
모두들 보니 주발이다. 이건 사뭇 위협이다.
『이제 차례로 돌아가며 노래가 되든 춤이든 재담이든 재주껏 좌석의 흥을 돋구는데, 만약에 거르는 분은 아까 얘기대로 이걸로 벌주를 석잔 잡수셔야 합니다. 그럼 제가 서 있는 것을 표준으로 하여 옷깃 여민 대로 오른편에서부터 차례로 부탁 드리겠습니다 』
이리하여 여흥으로 접어들어 흥겹게 들 노는데, 진사님도 시조 한 장을 제법 불러 갈채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사회하는 청년 차례가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담(古談)을 한마디 하겠습니다』
『허허허허, 젊은애가 고담을 해? 암 좋지 늙었더라도 새로운 건 배워야 하니까』
청년이 꺼낸 얘기는 이 집 아들이 겪은 그대로의 줄거리라 진사님은 연신무릎을 치며 감탄을 마지 않는다.
『그러면 끝으로 사태가 이쯤 되었을 때 여러분이 직접 당하신 일이라면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우선 진사님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그야 당연히 데려와야지. 암, 사내자식이라면...................』
『꼭 그러시겠습니까? 또 그래야 합니까?』
『아암, 그렀고 말고, 여부가 있나?』
『예 그렇습니까? 이것은 다름 아닌 댁의 자제가 지금 문틈에 손 낀 듯이 당해 있는 딱한 처지 올시다. 그러면 저희는 말씀드릴 거 끝났으니 물러들 가겠습니다』
모두들 일어나 도포랑 중치막을 떼어 입는데 진사님의 불호령이 연거푸 떨어진다.
『에잉, 고얀놈들 같으니, 냉큼들 물러가거라.
여봐라! 마당쇠야, 갸들 모두 다 모이라고 해라』
서방님 짜리를 잡아 내려 멍석에 말아 놓고 수죄(數罪)를 한다.
『네 이놈, 늙은 부모님 모신 몸으로 승낙없이 작첩을 해?
네놈 남겨 두나 않으나 내 집은 망했어. 차라리 네 놈을 내 손으로 죽여서 내 뒤끝을 보고 죽겠다. 여봐라, 그놈을 작두에 넣고 밟아라』
그러기로 누가 감히 집행하겠는가?
하인이라도 지각있는 늙은이 마당쇠가 눈물을 흘리며 간한다.
『나으리 마님 진노하시는 건 당연하십니다마는 이 댁의 후사를 끊으시렵니까? 제발 덕분에 그 말씀 거두어 주십사』
『에에잉, 듣기 싫다. 썩 넣고 밟지 못할까?』
마누라가 좇아 나와 매달리며 말린다.
『아유 영감 이게 웬일이요? 어쩌자고 외아들을! 조상 향화는 누구더러 받들라고?』
『에잉 이놈의 할멈 잡아내라. 제 자식 귀한 줄만 알고..................』
그러는 데 며느리가 체수는 커다란 게 거적을 끌고 나와 뜰 아래 엎드려 대죄를 한다.
『그저 아버님 하해같은 은덕으로 제 낯을 보아 용서해 주십시오』
『에이 이년 듣기 싫다. 서방없으면 못 살겠더냐? 그놈 썩 밟지 못할까?』
『아이구 아버님 그 분부가 웬 말씀입니까? 저 죽고 남편 살면 이 댁후사 이으련만, 남편 죽고 저만 살아 그 죄를 어이하리까?
아버님, 너무하신 말씀이십니다. 저 죽을 것이니 남편일랑 살리셔서 이댁 향화 잇게 하여 주십시오』
무서운 여자다.
기어들어 댓돌을 들이받으니 이마가 터져 피가 철철 흐른다.
또 들이받으려는 것을 하인들이 붙잡고 실랑이를 한다.
『음!? 네 뜻이 정 그리 굳다면 다짐을 두겠느냐? 』
『목숨마저 바치려는 몸, 다짐 아닌 더한 거라도 두오리다』
『오냐, 지필묵 내어 주어라』
다짐받아 간직하고 다시 목청을 가다듬어 훈시한다.
『네놈 듣거라. 네놈 저지른 죄를 봐서는 너 죽여 마땅하되, 네 아내 정성이 저리 갸륵하기로 특히 목숨만은 살려 두는 것이니 가도를 엄히 세워 편벽됨이 없이 할 것이요, 며느리 너는 하늘을 두고 맹서한 것을 평생에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걔들 몇 데리고 사인교 가지고 아무데 주막에가서 아씨 모셔 오도록 해라. 그리고 주막 주인도 함께 불러오면 내 행하(行下)도 후히 태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