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못할 양반
하루종일 걷기만 한 정수동은 다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좀 편하게 가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소를 몰고 가는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달려가 청년에게 말을 붙였다.
『젊은이, 내가 다리가 몹시 아파서 그러니 그 소를 좀 타고 갑시다. 어디든지 갈림길에서 내릴 테니
그 곳까지만 태워 주구려』
정수동이 이렇게 청을 하자 청년은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저는 서울 쪽으로 갑니다』
『오, 그런가? 잘 됐군. 나도 서울 쪽으로 가네 그려』
정수동은 소에 올라 타 자리를 잡았다.
『아이고, 고맙소.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먼』
그 뒤 얼마 동안 정수동은 청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 마을입구를 지나가고 있는데 웬 남자
하나가 길을 가로막으며 말을 걸었다.
『잠시만 멈추시오. 보아하니 소 위에 앉은 분은 글을 많이 읽은 분 같아서 무엇 좀 물어 보아야겠소』
남자는 정수동과 엇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내가 길을 가다가 목이 컬컬해서 술 한 잔을 사 먹으려고 이 동네로 들어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동네
에는 여자들만 있고 남자들을 찾을 수가 없었소. 차마 여자들한테는 물어 볼 수가 없어서 남자들을 기다
리고 있었는데 마침 나타나신 게요』
정수동이 보니 이 남자는 고지식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여자한테 술집을 물어 보는 것이 뭐 어떻다고........」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학문을 한 분 같아서 내 정중히 물어 보는데, 이 동네에 주가(酒家)가 어디쯤 있을 것 같소?』
정수동은 참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술집이 어디쯤 있느냐고 물어 보면 될 것을 굳이 문자를 써가면서 장황하게 사설을 늘어놓고 있었
으니, 이런 것은 정수동의 입맛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수동은 은근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심심하던 차에 좀 놀려먹어야겠다」
우선 정수동은 남자가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알기로 이 마을에 주가(朱哥)는 없는 것 같소. 다만 박가나 이가, 최가는 있는 것 같소이다』
이런 대답을 들은 남자는 당황하며 얼굴색이 변했다.
『아니, 나는 주가라는 성씨를 물어 본 것이 아니라 술 주자를 쓴 주가를 물어 본 것이오. 술집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었소』
정수동은 한 번 더 골려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한자 쓰기를 꽤 좋아하시는 모양이구려. 진작 그렇게 물어 보실 것이지.
술집이라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소?』
『가까운 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이오?』
『당신 코 밑에 있는 것이 술집 아니오?』
술이 들어가는 입이 술집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놀림을 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이 양반이.... 점잖게 보여서 말을 붙였더니 사람을 놀려먹고 있군 그래』
그래서 이번에는 남자가 정수동을 놀려 줄 생각으로 물었다.
『당신이 쓴 것은 뭐요?』
정수동은 미리 짐작하고 받아 쳤다.
『뭐요? 쓴 것? 내가 쓴 것은 씀바귀요』
『그것이 아니라 당신 대가리 위에 쓴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오』
『대가리 위가 쓴 것은 여름날의 오이대가리가 쓰지』
정수동의 말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남자는 도저히 감당을 못 하겠는지 돌아서서 가면서 푸념조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에잇! 그 양반, 말 못할 양반이군 그래』
그러나 정수동은 끝내 이 말까지 되받아 쳤다.
『허어, 말을 못 탔기에 이렇게 소를 타고 있지 않소? 당신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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