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百年
조선 말엽에 명신(名臣)에 양파(陽波)라는 호를 가진 정태화(鄭太和)라는 재상이 있었다.
오백년 동안 제일가는 팔자라고 하는 그에게 얽힌 이런 얘기가 있다.
젊어서(지금으로 치면 어려서라고 할 나이겠지만) 과거공부를 하러 삼각산 한 절간에 갔는데, 중이
지정하여 준 방에는 이미 한 젊은이가 와 앉아 글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읽고 있는지 말을 붙여 볼 엄두도 못 내고 자기 역시 행장을 풀고 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였다.
둘이 다 하도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한 방에서 나란히 앉아 지내건만 서로 통성명도 못한 채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둘이 같이 책 읽기를 마쳐 비로소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서로 성명과 거주를 통하고 나서 같은 또래고 하여 나이를 물으니 동갑이다.
다시 생일을 물으니 한달 한날이다. 난 시(時)를 물으니 시도 같다.
청년은 아무 말도 않고 돌아 앉아 행구를 수습한다.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물으니 대답이 이러하다.
자기집은 도저히 자기를 절에 보내어 공부를 시킬 계제가 못 되는데, 용하다는 이에게 사주를 풀어
보니 과거하고 벼슬하여 정계에 나아가, 오래오래 재상지위에 있어 부귀를 겸전할 것이라고 하여,
사뭇 온 집안이 힘을 모아 자기를 후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걸 지금 당신을 만나 둘의 사주를 대어 보니 완전히 일치가 돼.
그렇다면 누대 계속되어온 재상가 자제인 당신한테 차례가 가지, 내게 웬 차례가 오겠소? 그래 일
찌감치 다른 방도를 차리느니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알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시오. 나와 일치된 사주라면 부귀와 공명이 가득할 것은 정한 이치 아니겠소?
자, 그러면 기회 있으면 또 만납시다.』
청년은 훌훌히 소매를 떨치고 떠나 버렸다.
과연 청년의 말대로 정태화의 앞길은 막힌 적이 없었다.
아주 순탄하게 과거하고 벼슬길에 올라 20년이나 재상자리에 있어 나라의 복수(福手)로 뽑히기도 여
러 차례, 수(壽) 팔십에 이제는 집에 누워서 한가하게 여생을 즐기는 팔자가 되었다.
조용한 시간을 얻어 지나간 일생을 돌이켜 보니 남 보기엔 호사스러웠을지 모르나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제 할일 다했으니 죽을 날이나 기다릴 밖에. 그런데 참 그 때 그 청년, 나하고 사주팔자가 똑같은
그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그의 사주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도 남부럽지 않은 업적을 남겼으련만)
그러는 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러이러한 분이 뵙겠다고 청지기가 거래를 드린다.
(오, 그 때 그 청년이다)
『어서 듭시라고 여쭈어라』
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니 홍안백발의 호풍체라,
서로 반겨 손을 잡으며, 그 동안 지낸 내력을 물었다.
『대감 동정은 제가 익히 들어 아는 바 옵고, 저의 지난 이야기나 대충 해 올리죠. 앞길이 총총해서』
이미 사주가 좋은데 자신을 갖고 공부하다가, 같은 사주의 권문세가가 나타나는 바람에 학업을 집어
치운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일번 강원도의 두메를 답사 하였다.
새로 개간할만한 넓은 터전을 눈 여겨 본 그는 돌아와 광고를 내었다.
『과부, 소박데기, 혼기를 놓친 처녀, 혼자 지낼 수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여라!』
그리하여 수백명 여인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간 그는 우선 재목을 베어 의지할 데를 만들고, 논밭을
일구어 식량의 자급책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오늘은 이집, 내일은 저집 이렇게 묵으며 돌아다니니,
이듬해에는 이 집에서「응애」저 집에서「응애」때로는 같은 날 두 집에서 응애, 응애」아들 딸들이
쏟아져 났다.
저 먹을 것은 저마다 타고 나지만, 재주 좋은 놈은 글 가르치고, 힘 좋은 놈은 상일 가르쳐, 수백천명
의 아들딸은 모두 저 나름으로 들 성취(成娶) 하였다.
이른 데서는 증손자, 현손자까지 났는데, 모두 서울서 파주 사이로 이사를 시켜 제각기 살게 해 주고,
이제 앞길도 얼마 안 남은 몸이라, 죽기 전에 자식ㆍ손자ㆍ증손ㆍ현손들 한 번씩 대면이나 하자고
나선 길에, 이렇게 육십 여년 만에 대감을 만나러 온 것이라는 게 그의 대강 얘기였다.
앞길이 총총하다면서 일어나는 그를 전송하고, 영리한 하인을 뒤쫓아 보냈다.
『너, 저 영감 가는 대로 따라가며 어떻게 하나 잘 보고 오라』
솟을대문 밖에 나서니 보교가 하나 놓였는데, 가마꾼들이 다가서며
『할아버지 이제 나오세요?』
너 댓 발짝 갔을까 어른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며,
『외할아버지 오신다. 증조할아버지 오신다』아우성들이다.
잠깐 가마에서 내려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나온 모양인데, 다시 가마에 올라 앉으니 이번엔 여남은 발짝,
어디서는 사뭇 십여 채 집이 연이어 있어 가마는 저만치 기다리게 해 놓고 집집을 뒤진다.
(이 놈을 딸려 보낸 지 여러 날이 되는데, 왜 이리 안 돌아 오노?)
십여일 만에 다른 하인을 시켜 중간보고가 들어왔다.
『지금 녹번리서 연서역(연신내) 근처를 더듬고 있는데, 아직도 계속 중입니다』
다시 한 달만에 또 중간보고다.
『지금 공릉 장터 근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석 달 만에야 먼저 하인이 돌아왔다.
『아이구 말도 마십쇼. 엊그제까지 사이에 파주.문산을 마저 더듬고 넓은여을 자기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양파대감은 눈을 지긋이 감고 듣다가 번쩍 뜨며, 침통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흠! 내가 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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