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에 퍼지는 봄빛
경상도 지방을 유람하던 김삿갓이 통영 지방을 지나고 있었다.
때는 화사한 봄날이라 온천지에 봄 기운이 완연하여 걸음걸이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통영의 당동이라는 곳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의 앞뜰에는 선비들이 학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아담한 초당을 지었는데 호상재라고 불렀다.
그 호상재에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고 있었는데 그 때 마침 김삿갓이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호상재 마당에서는 봄꽃으로 화전을 부치는 냄새가 가득했다.
잔뜩 허기진 채 걷고 있던 김삿갓이 그 냄새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김삿갓이 호상재 안을 기웃거리다가 들어서자 한 선비가 나무라듯
말했다.
『여기는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는 곳이네. 자네 같은 독동이 올 곳은 아니야』
그러니 어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름 냄새에 도취되어 버린 그가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
『나는 이미 혼인을 한 몸이고 아이까지 딸려 있으니 아이 동(童)자는 빼 주시구려』
김삿갓의 언변이 만만찮아 보였는지 말을 붙인 선비가 주춤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이오?』
『나는 그저 길 가던 나그네인데, 배가 몹시 고프던 차에 이 곳을 지나다가 화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해
염치불구하고 잠시 들른 것이오. 너무 탓하지 마시구려』
『알겠소. 하지만 이 곳에서는 글을 지어야만 화전을 맛볼 수 있소』
『아, 그렇소? 그럼 나는 글은 잘 모르니 그저 입으로만 시를 하나 낭송할 테니 받아 적어 보시구려』
작은 시냇가에 솥을 걸어 놓고
흰 가루 푸른 기름으로 두견을 익히는구나.
두 젓가락으로 집어 드니 향기가 입안에 가득하고
한 해의 봄빛이 뱃속에 퍼지누나.
김삿갓이 이렇게 시를 낭송하니 그것을 받아 적은 선비가 다시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오, 봄빛이 뱃속에 퍼진다는 표현은 가히 명문이 아닌가?』
호상재에 모인 선비들은 그 구절에서 모두 감탄을 자아냈다.
『저, 혹시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한 선비가 김삿갓의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대답 대신 삿갓을 가리키며 유유히 호상재 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미 술 몇 잔에 화전을 먹고 난 뒤였다.
술과 음식에 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요기를 면한 그것만으로도 김삿갓은 행복했다.
『아니, 그럼 저분이 바로 김삿갓 선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대접을 초라하게 해선 안 되지.
어서 선생을 다시 모셔 오세』
그러면서 모두들 허둥지둥 호상재 문밖으로 몰려 나갔으나 김삿갓의 자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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