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지역 둘러보기 2 /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전구형왕릉, 산청박물관 개관
지역학R&D두번째 나들이다,
산청군 금서면 서하지역과 생초박물관과 고분군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금서면 일원은 왕산, 왕등재, 전구형왕릉, 수정궁터 등 왕과 관련된 전설이 다수 있는 곳이다,
산청박물관 또한 경상대박물관과 공동으로 발굴에서 전시까지란 제목하에 산청의 고대사를 재 탐색해 보는 세미나와 개관식이 있어 깉이 둘러본다,
▷ 탐방코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 전 구형왕릉 - 중식(지리황식당) - 산청박물관 (2018. 12. 8.)
▷ 둘러보기
▣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지리산 둘레길 동강 - 수철구간중 함양땅에서 산청땅으로 들어서면 첫동네에 추모공원이 있다.
6.25전쟁의 발발에서 사건의 발생까지,
산청함양사건 유족회 민수호 이사를 모시고 잠시 사건의 내용을 듣는다,
현 진해근대문화유산보전회 고문으로 계시는 전점석님은
산청문학. 2018년 간 '산청,함양사건 민간인 학살을 폭포하지 않은 국회의원 이병홍'이란 제목하의 기고문 말미에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정사(정사)에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 후세 사람들의 책임이다, 우리들은 불행한 사건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잊지않고 기억해야 한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전시관에 산청, 함양, 거창사건 주범으로 오익경 대령, 한동석 소령, 김종원 대령 등 세명의 전신을 부조한 조각상을 설치해놓아서 마치 벽에 이들 세명을 가두어 놓은 것 같다, 역사적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세명은 주범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사건이 축소, 왜곡되어 이 세명으로 재판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람은 더 있다. 9사단장 최덕신, 국방부장관 신성모,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사단장에게 양민학살임을 보고해야한다고 주장한 부사단장 김익렬과 요령껏 자기선에서 한명이라도 더 구해 볼려고 노력한 무명의 병사들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으며, 어디에 진실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 전 구형왕릉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전 구형왕릉을 둘러보러 왔다,
이곳은 벌써 여러번 와 본 곳이다,
삼국유사 귄 제2 가락국기편에 구형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구형왕(仇衡王) 김씨이다. 정광(正光)2년(서기521)에 왕위에 올라, 42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서기 562) 9월에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의 수는 많고 아군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형제인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게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모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開皇錄(개황록)』에서는 "양(梁)나라 대통(大通) 4년 임자(서기532)에 신라에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논평하여 말한다,
"『삼국사(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이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4년 임자(서기 532)에 신라에 국토를 바치고 항복했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18년 임인(서기 42)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년(서기532)까지 490년이 된다. 만일 다른 기록으로 고증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위(魏)나라 보정 2년 임오(서기 562)이니, 30년을 더하여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놓는다,"
이곳 구형왕릉 앞에 붙은 '전'자가 어느해 부터인가 사라졌다,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아 전해온다는 의미의 전자를 붙였었다,
일부 학계에선 왕릉이라기 보다는 제단이나 탑으로 보기도 하여 정확하게 왕릉인지 아닌지 모르는 곳이다.
이게 제단이라면,
김해김씨 종중에선 헛 제향을 올리는 것일 것이다,
하긴 종이나 나무에 쓴 지위나 돌무더기나 그 대상으로서의 상징으로 인식한다면 그게 그것 일런지도 모르겠다,
이 석물은 후대에 세운 것이다,
오랜 세월의 때가 묻은것 같아 초행이라면 아주 오래된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맞은편 암벽의 석실에선 갑옷등 유물이 나왔다 전하나,
정작 본 사람도 유물도 보이지 않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다,
엣 가야의 마지막 왕이
이웃하여 상대적으로 넓은 땅 두고,
하필이면 이 좁은 산골짜기에 왕궁을 짓고, 마지막 안식처로 잡았을까 ?
가락국
구형왕릉?
저곳에 음각된 글자는 오늘 처음 본다,
삼국유사 권 제2, 가락국기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라 제 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서기661) 3월 어느날 왕이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세손 구형왕(仇衡王)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 아마도 奴宗노종 인 듯 하다)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 졸지공卒支公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의 아들 서운(庶云)잡간의 딸 문명황후께서 짐을 낳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시조 수로왕께서는 과인에게 있어서 15대 시조가 된다, 그 분이 다스렸던 나라는 이미 없어 졌지만 그 분을 장사지낸 사당(묘)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종묘와 합하여 계속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 그리고 관리를 옛터에 보내 사당에 가까운 상상전(上上田) 30경(頃)을 주어 제사 지내는 비용으로 사용토록 하고 이를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래의 토지에 붙여주었다(본토에 귀속 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인 갱세(賡世)급간이 조정의 뜻을 밧들어 그 제전(祭田)을 관리하며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과 밥, 차와 과일 등 여러 가지 제물을 잦추어서 제사를 지냈으니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사일도 거등왕(居登王) 이 정한 5일을(연중 다섯날을) 그대로 지켜 정성어린 제사가 지금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서기199)에 별실(便房, 임시로 제사 지내는 방을 말한다)을 설치한 이후로 구형왕 말까지 330년 동안 종묘의 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약 원년 신유년(661년)까지의 60년(구형왕 항복부터 문무왕 즉위년까지는 120년 차이가 있으니, 아마도 시기가 잘못된 듯하다) 동안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거르기도 했다, 아름답도다, 문무왕(문무왕, 법민왕의 시호이다)이여! 선조를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효로써 이어 다시 지내게 되다니............
▣ 산청박물관 재개관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이곳 산청박물관 주변에 고분군이 있다,
생초국제조각공원과 함께 봄철 꽃잔디로 인해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다,
경북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이나 경남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처럼 발굴되지 못하고 방치 폐허가 되어
일반인들은 이곳에 고분군이 있는지는 이 박물관을 들어와 보지 않고는 알기 어렵다,
발굴에서 전시까지.
유물의 여정이란 제목하에 산청박물관과 경상대박물관의 공동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산청의 선사유적,
산청의 가야고분과 정치화,
산청의 고성 등에 대한 세미나 발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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