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창덕궁, 후원.
서울 고궁은 크게 다섯군데로 나눠볼 수 있다, 조선 최초의 궁궐인 경복궁, 동궁으로 불리는 청덕궁과 창경궁, 선조때
궁궐로 쓰이기 시작한 덕수궁, 광해군때 건립한 서궁으로 불리는 경희궁이 그곳이다. 그 외 고종의 잠저 (국왕이 즉위
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도 그 이름으로 낯익은 곳이고, 창덕궁 앞쪽에 종묘가 있다,
이 중 창덕궁은 크게 3구역으로 나누어 관람하게 되며 각 구역마다 별도의 입장권을 구입하여야 한다,
일반적인 창덕궁은 인정전,희정당, 대조전 등을 중심으로한 구역이고. 다음은 과거 비원으로 많이 알려진 후원이 있다.
세번째로 창덕궁과 인접하여 있는 창경궁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보통 매시 정각 후원 입구에서 인솔자(관광해설사)와 함께 단체로 관람하게 되며 개인 입장은 불가하고
인원 제한(매회 100명)이 있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예약을 할 필요가 있겠다.
오늘 친구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간이 부족하여 창경궁은 둘러보지 못했다.
▷ 가는 길
▷ 탐방후에 (2019. 3. 16.)
돈화문에서 시작한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12)에 건립된 창덕궁의 정문이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한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대문 가운데 가장 크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
문으로 드나들었다 한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쳐 시간을 알렸다하며, 임진왜란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다.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철을 이용할 경우 안국역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되는 위치에 있다,
돈화물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수백년 노거수 몇 그루 줄지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인정전, 또는 후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보이는 저곳에서 90도 우측으로 꺾어서 들어가야 한다.
정면 좌측에서 나오는 한무리 인파는 후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분들이다,
즉, 후원은 관람객들의 입구와 출구가 별도로 되어있다,
세계유산 창덕궁
1405년(태종5년) 경복궁의 이궁(離宮, 궁성 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동궐이다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임금들이 거처
했던 궁궐이며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으로 들어선다,
금천교(錦川橋)는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조선 태종때 건설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앞쪽에 보이는 문은 진선문(進善門)이다,
진선문으로 들어서기 직전 좌측으로 궐내 각사와 그 뒷편으로 구 선원전이 있다,
각사는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궁궐 내에 세운 관청으로,
비교적 근년에 이곳 창덕궁을 둘러본 적이 있고 오늘의 주 관람처는 후원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친다,
진선문을 지나 저만큼 숙장문이 마주 보이는 곳 좌측 건물이 인정문이다,
인정문으로 들어선다,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조선 초에는 8명의 왕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한다,
1908년 인정전 내부를 고치면서 커튼, 전등 설치 등 서양식 실내장식이 도입되었다,
개략적인 구조는 사찰의 대웅전과 비슷하다,
인정전 앞쪽으로 품계석이 나열되어 있다,
되돌아 나와 숙장문 (肅章門)을 들어서면,
넓은 광장? 정원이다,
청색 기와지붕은 선정전이고, 우측에 희정당이 있다,
이 건물들은 지나온 인정전 바로 옆에 있다,
선정문으로 들어선다,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便殿 :사무공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
렸다. 주변의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다
선정전은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 선정문까지 복도각 건물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옆에 있는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가면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때의 흔적이라 한다,
선정전 좌측 뒷편으로 돌아.
대조전과 희정당으로 간다,
그래서 희정당은 밖에서만,
대조전을 둘러본다,
대조전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큰 행사도 자주 열렸다 한다,
이곳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으로 안대청을 사이에 두고 왕과 왕비의 온돌방이 설치되었다, 원래의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이며, 행각과 복도로 여러 부속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왕비였던 순정효황후의 거처로 해방 후까지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유한 장식과 벽과 문살 등이 잘 남아
있다, 뒷편에 4단의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후원으로 삼았고, 누마루를 뒤편으로 돌출시켜 이를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
했다한다,
사방으로 연결된 건물이다,
역시 대조전,
저 문을 지나.
경훈각(景薰閣) 주변을 거쳐,
대조전 뒷편은 유심히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대조전이 왕비의 생활공간이므로 뒷편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하나 저곳인지 모르겠다,
희정당 쪽으로 나가는 문,
이 건물이 희정당인가 싶다,
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주변을 둘러보고 나오면 이웃하여 성정각이 있다,
가운데 한복을 입은 관광객을 기준으로 좌측이 희정당, 우측이 성정각일 거다,
성정각 정문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후원 입장 동향을 보기위해 후원 입구쪽으로 이동한다,
저만큼 후원 입구,
성정각의 동쪽문인 자시문(資始門)이다,
여기서 '자시'란 '만물이 건원(乾元)에 의뢰하여 시작한다'는 의미로 주역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매화나무(Chinese apricot)
장미과에 속하며 사군자의 첫머리에 들어가는 매화는 옛 선비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나무였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은 매화 사랑이 얼마나 각별하였던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에도 매화 물주기를 걱정할
정도였다 한다, 매화는 가장 일찍 꽃 피는 봄의 전령사이며 매실은 약제로도 유명하다,
꽃이 필 때는 매화나무, 열매가 달릴때는 매실나무라고 할 뿐 같은 나무이다,
< 앞쪽 안내문에서>
동쪽 문으로 들어가 성정각을 둘러본다,
이곳은 세자가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라 한다,
희우루(喜雨樓)는 성정루 부속의 누각이다,
낙선재쪽으로 간다,
낙선재는 후원 입구를 기준으로 볼 때 위치상으로 동쪽에 있는 창경궁과 가깝다,
본래 창경궁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창덕궁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고 또한 창덕궁 입장권 구역이다,
들머리 소나무 몇 그루가 층을 지어 자리하고 있다.
우측으로 보이는 육각정 누각은 상량정으로 남산타워와 도심야겅을 즐길수 있다 하나
문이 닫혀있어 일반인 출입은 안되는 것 같다,
낙선재는 앞쪽 뒷쪽 옆으로 샛문이 몇 군데 있다,
정문은 장락당(長樂堂)으로
낙선재 남행각(南行閣) 12칸중 한칸에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익공(翼工)집이다,
이 건물은 헌종 12년(1846)에 건립한 것으로 본 건물에 접속된 석복헌, 수강재 등 3개의 건물을 총칭하여 낙선재로
부른다,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진 뒤 덕혜옹주와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가 거처하는 등 주로
왕실 여성의 거주 공간이 되어왔다한다,
수강재,
낙선재 뒤쪽 언덕위로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 등이 있으나 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낙선재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온다,
낙선재 앞 정원의 정자.
뒤로 보이는 담은 창경궁과 경계이다,
창경궁과의 경계지역에서 바라본 낙선재.
낙선재 앞쪽에 몇그루 매화나무가 있다,
꽃의 색깔로 보아 청매화인 것 같다,
후원 입구로 왔다,
후원입구는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에 있다,
사진상 좌측은 후원으로 가는 길, 우측 함양문을 통과하면 창경궁으로 연결된다,
관람료는 창경궁 3,000원, 후원 5,000원, 창경궁1,000원으로, 후원과 창경궁은 이곳에서 매표해도 된다,
후원 관람은 예약제,
현 우리말 해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매 정시에 이곳에서 출발하며 1시간 30분쯤 소요된다,
언어권(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별로 정해진 회차에 관람 인원을 100명으로 제한하므로 성수기때는 예약해야 할 듯,
오늘은 평일이고 관광객이 정원을 넘지않아 예약하지 않아도 되었다,
12시 정각,
후원으로 탐방을 시작한다,
창덕궁 후원은 태종 대 창덕궁 창건당시 조성되었으며, 창덕궁은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에 다른 궁궐보다 왕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고, 1623년 인조 때부터 개수.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이곳 후원은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는데 네개의 골짜기에 부용지, 애
련지, 관람지, 옥류천 등 정원이 있다. 4곳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 갈 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차 변화하며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정원이
었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론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왕이 참
관한 가운데 군사 훈련도 행해졌고,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기도 했다한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의 규모로 넓다.
따라서 조그만 언덕을 넘어 그 경관은 골짜기마다 숨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직접 걸어서 골짜기의 연못과 정자들을 찾아다녀야 후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후원은 크게 4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중심지로 부용지를 가운데 두고 부용정, 주합루, 영화당, 서향각이 있는 구역으로, 휴식 뿐 만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障却)과 서향각 (書香閣) 등은 왕
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映花堂)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
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
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
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 이상 안내문에서>
가운데 부용지를 두고 2층 건물의 주합루가 있고,
앞쪽 마주보고 있는 곳에 부용정이 있다,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바라본 부용정,
보물 1673호로 지정된 부용정은 아(亞)자 모양의 정자가 반쯤은 연못 위로 떠 있는 듯 축조되어 있으며
주변에 괴석도 보인다,
부용지 들머리쪽 모퉁이의 솟아있는 축대에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있다,
덧붙인게 아니라서 만드는데 상당한 공이 들었겠다,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의 우주사상에 따라 조성된 연못이라 한다,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초목을 심었다.
2층 건물의 주합루, 좌측 아래 서향각, 남문인 어수문,
보물 1769호로 지정된 주합루는 부용지 북쪽 언덕위에 위치한 2층의 누각으로,
주합(宙合)이란 우주의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이치에 따라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담고있다 한다,
부용지 동쪽편의 영화당.
영화당은 후원 구역에서 신발을 벗고 올라설 수 있도록 허용된 유일한 건물이다,
광해군때 처음 지어졌다 하며, 지금의 건물은 숙종 18년(1692)에 재건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
팔작지붕 형태로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조선시대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장으로도 사용되었던 건물이라 한다,
영화당 쪽에서 바라본 부용지,
주합루 앞쪽으로 다가가 본다,
주합루는 1776년 (정조1)에 지은 건물로 1층은 규장각, 2층을 주합루라 칭하고 어필로 편액을 달았다,
이 제도는 송나라의 용도각, 전장각에서 어서를 보관했던 제도을 본 뜬 것이라고 한다,
원래 규장각은 숙종이 종친의 업무를 관장하는 종부시(宗簿시)를 세운 것으로 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던 곳이다,
정조는 규장각의 이름을 계승하고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 되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
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에는 세칭 사검서(四檢書)로 불렸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도 근무하였다,
어수문(魚水門)과 취병(翠屛)
주합루 주변은 계단식(花階)에 정원을 꾸몄으며, 화계 첫 계단에 어수문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있다
고도 하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
로 정조의 민복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주기도 한단다. 어수문으로 임금이. 그 옆 작은 협문으로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어수문 좌우로 보이는 대나무 울타리인 취병은 조신시대 독특한 조경 기법의 하나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길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주합루의 취병은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 국보제249-1호>의 그림을 토대로
하여 '임원십육지관병법'에 기록되어 있는 제작기법대로 대나무 틀을 짜고 신우대를 심어 재현한 것이다,
< 취병 안내문에서 >
부용지 서북쪽 모퉁이 인근에 우물이 있고,
비각? 사당?
영화당 앞으로 왔다,
이 인근에 후원 유일의 공중화장실이 있고 이곳 주변에서 한동안 쉬었다 간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라 한다,
영화당 앞쪽 마당을 춘당대라고 하는가 보다,
춘향전에 이몽룡의 과거 시험에 등장하는 시체 "춘당대 춘색이 고금동이라"에서 춘당대가 이곳이라 한다,
후원은 왕과 왕실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석하는 군사훈련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으며, 대비를 모시는 잔치나,
종친 또는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도 베풀었다 한다,
후원 두번째 구역이라 할 수 있는 애련지와 의두함쪽으로 간다,
영화당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구역은 기오헌, 기두각, 의두합의 건물과 애련지, 애련정이 있는 곳으로,
이웃해 있는 연경당까지 포함한다,
의두합과 길을 사이에 두고 동쪽편에 있는 영춘문,
이 문은 창경궁과 연결되나 닫혀있다,
의두합으로 들어서는 금마문,
금마문 안쪽에 기두각, 의두합 등의 건물이 있다,
애련지 앞쪽,
좌측 불로문과 애련지가 있다,
직진으로 보이는 길을 따르면 취규정쪽으로 오르게 되는데, 우리 일행의 탐방코스는 아니다,
앞쪽 애련지와 애련정,
불로문,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것으로, 늙지않는 문이라는 그 이름처럼 무병장수를 축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한다,
그래서 우리 일행도 이 문을 통과한다,
애련지와 의두합 사이의 공간이다,
이곳에는 숙종대에 건립한 애련정이 있었고, 효명세자(정조의 손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던 의두합(기오헌 현판을 달고 있음)은 단청을 하
지않아 단촐하고 소박하며, 궁궐내 유일한 북향 건물이다,
효명세자(1809~1830)는 조선 23대 왕 순조의 맏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이다, 순조 12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왕이 되지 못하고 세자 시절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효명세자로 불리운다.
정조(효명세자 할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순조(효명세자 아버지)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장인 김조순을 비롯 외척 가문을 중심으로 몇몇 가문이 권력을 차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세도정치가 나타난다, 세도
정치 때문에 정치가 점점 부패하였고, 뇌물로 벼슬을 사고 파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왕은 세도가의 눈치를 보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순조가 건강이 악회되어 효명세자는 18세에(1827~1830) 순조를 대리하여
정치를 지휘(대리청정)하게 된다,
효명세자는 당시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였던 시기였으나 새로운 개혁시도, 고른 인재등용, 실학파와의 교류 (박규수 :
박지원(열하일기 저자)의 손자), 서얼출신 과거 응시 자격 부여, 궁중무용 창작 등 업적을 남겼으나,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개혁정치는 무산된다,
애련지의 애련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한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方池)로 사방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애련정은 숙종18년(1692) 정면1칸, 측면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네개의 기둥중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위에 세워저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절경이라 하는데 우리는 정자만 본다,
연못 주변에는 괴석으로 치장했다,
애련지로 물이 들어오는 곳의 설계도 독특하다,
도랑 물을 모아 폭포수 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의두합, 애련지를 뒤로하고,
애련지 서쪽방향,
나중 옥류천 주변까지 다 둘러보고 난 뒤, 저곳이 나가는 쪽이 된다,
애련지 서쪽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도 조그만 연못이 있고, 그 뒤로 연경당이 있다,
연경당의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선다,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에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한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했다,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듯을 가진 의미로 지금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때 새로 지은 것으로 보물 177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행랑채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가마보관 장소, 마굿간과 화장실 등이 있다,
궁궐의 화장실은 대체로 보기 어려운데 이곳 화장실은 옛 사대부 집안의 형식과 같으며,
일을 볼 수 있는 곳이 칸막이 없이 나란히 두 곳 있다,
장락문에 이어 중문이라 할수 있는 장양문을 들어서면 연경당을 만나게 된다,
안채와 사랑채을 따로 둔 사대부 집처럼 지은 연경당은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하지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한다,
연경당 현판은 사랑채인 이 건물에 걸려있다,
친족이나 신하들이 찾아오면 맞이하는 사랑채는 고종황제 시절엔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정치적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축담 앞에 보이는노두돌은 하마석이라 하는데 말을 타고 이곳까지 들어왔나 보다,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수인문(修仁門).
이 문턱은 치마입은 여성들이 다니기 쉽도록 바닥이 평평한 것이 특징이라 한다,
근데 첫 대문인 장락문 역시 평평하다.
중간 대문인 장양문은 약간의 턱이 있으나 현 나무로 덧대어 다니기 편하도록 하였다,
안채.
안채와 사랑채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다니기 편하게 되어있다 한다,
언듯 보면 별개의 건물같다,
정료대,
안채의 아궁이.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과 다른 점은 부엌으로 이곳엔 부엌이 없다,
안채 뒷편,
담으로 구분되어 있는 반빗간은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이라 한다,
선향재(善香齋)
사랑채 동쪽에 위치한 선향재는 우리나라 궁궐에서 유일하게 청나라에서 들여온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건물로,
잎쪽 달아낸 건물의 지붕은 동판을 씌웠다 한다,
서재로 사용된 이 건물은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차양막을 올리고 내리는 도르래를 설치하여,
실내로의 빛의 양을 쉽게 조절 할 수 있게 하였다,
뒷편에서 본 사랑채.
사랑채 뒷마당에서 안채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우신문(佑申門)
농수정,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에 농수정있다.
짙은 빛을 수놓는다는 뜻을 가진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농수정 앞 뒷문을 통하여 존덕정쪽으로 간다,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 존덕정이 있다,
세번째 만나는 구역으로 펌우사. 승재정, 관덕덩, 존덕정등이 있는 지역으로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莻게 조성된 지역이라 한다,
맞배 지붕의 펌우사 (펌우사)
어리석은 사람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친다는 뜻이 있는 펌우사는 부속채가 딸려 있는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단촐한 모습으로,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던 공간이었다 한다,
펌우사 앞쪽에 승재정이 있다,
사모지붕을 한 승재정은 비교적 근래인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정자로,
'빼어난 경치가 있다'는 뜻.
승재정 주변의 연지는 본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연못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 시대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한다,
관도지 한켠에 관람정이 부채살 모양을 하고 있다,
6개의 기둥으로 두개는 관도지에 담겨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하나 밖에 없는 부채꼴 모양의 정자로 현판도
부채꼴로 되어있다,
존덕정 앞쪽에서 바라본 관도지와 관람정,
관람정의 람(纜, 닻줄 람)자는 닻줄을 의미하고 있오 연못에서 뱃놀이 하면서 구경하는 정자라는 뜻이 담겨있다 한다,
존덕정.
존덕정 뒷편에도 조그만 연못이 있다,
존덕정 뒷편의 은행나무,
둘레 약 5m, 높이 22.4m, 나이 약 250년,
궁궐에서 가장 크오 오래된 은행나무로 정조가 존덕정을 정비하면서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인 행단(杏壇)의
예에 따라 은행나무를 심어 학문을 받들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지붕의 처마가 두겹으로 되어있는 존덕정은 인조 22년(1644)에 세워졌으며 이 주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지어질 당시에는 육면정이라 불렀다 하는데 정자를 짓고 처마를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붕이 두개이며. 바깥
지붕을 떠 받치는 기둥은 가는 기둥 세개를 세웠는데 겹기둥에 겹지붕, 겹난간에 육각형의 정자이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이 그려저 있고, 존덕정 안 북쪽벽에 '萬川明月主人翁自序 (만천명월
주인옹자서)'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라 한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
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 "만 갈래 강과 밝은 달의 늙은 주인萬川明月主人翁이 말
한다, 나는 태극.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각자 생김대로 써야 한다는 이치도 터득하였다." (홍재
전서 10권 萬川明月主人翁自序, 1798) 우주의 섭리와 용인(用人)의 이치를 터득한, 만천과 명월의 늙은 주인이라
자칭하는 이 사람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다.
정조는 '종이 한장에 열 줄 받아 적으면 여백이 없을 만큼(1779년11월12일 정조실록)말이 많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많은 군주였다 한다.
존덕정과 존덕지를 뒤로하고,
옥류천으로 간다,
조그만 능선으로 오른다,
오늘 중에서는 가장 큰 능선이다,
능선으로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애련지앞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출입금지 반대쪽으로 간다,
옥류천으로 가는 능선 중간에 취규정이 있다,
취규정(聚奎亭)은 1640년에 세운 정자로
'별들이 규성으로 모여든다', '인재가 모여든다'는 의미가 있다하며 사방으로 개방된 형태이다,
옥류천은 취규정이 있는 능선의 북쪽 골짜기에 있다,
골이 깊지 않아 살짝 내려간다,
네번재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옥류천 일원으로 왔다,
이곳 옥류천 주변에 5개의 조그만 정자가 있다,
처음 만나는 취한정(翠寒亭)과 농산정(籠山亭)이 있고 소요암 주변에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조금 윗쪽의 조그만 논에 청의정(淸漪亭)이 있다,
창취능한(蒼翠凌寒),
푸른 소나무들이 추위을 업신여긴다는 뜻에서 따왔다는 취한정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소나무가 많아서 여름에도 시원했다고 한다, 지금 소나무는 별로 없지만 푸른 숲에 둘러쌓여
시원하다고 느끼면 될 듯. 이곳 역시 사방으로 틔여있다,
옥류천 주변의 가장 규모가 큰 정자로 임금이 개인적인 일이나 주연을 베풀때 신하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단다,
취한정에서 바라본 옥류천쪽,
사진상 우측 상단 나무속 건물이 성균관대학교쪽이다,
소요암 주변
앞쪽에서 부터 소요정, 소요암, 청의정 등이 보인다,
소요정,
소요암,
소요정 뒷편의 큼직한 바위를 소요암이라 한다,
바위가 거대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으나 특이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御井)으로 부터 계류가 이곳으로 흐르게
되어있으나 수량은 아주 적다,
옥류천은 후원의 북쪽 길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말하며,
1636년,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였고,
이 물길을 아래로 내려뜨려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이 폭포가 떨어진 곳에서 옥류천은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윗쪽 바위에 올류천과 오언절구의 시가 음각되어 있고,
가운데 평평한 곳에 U자형 홈을 파서 물이 아래로 떨어지게해 이를 폭포라 하였다.
이곳 소요암 하단에 음각된 玉流川 (옥류천)은 인조의 친필이라 하고,
보이는 오언절구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이 지은 詩라 한다,
詩의 내용이 아래와 같다면 숙종의 과장법은 심해도 아주 심하다,
삼백 척 높이에서 날아 흐르니,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이를 보노라니 흰 무지개 일고 / 바라 볼 땐 흰무지개 일어나더니
그 소리 천둥 번개 치듯 온 골짜기에 퍼지네 / 갑자기 온 골짜기 우레 소리 이루었네
소요암 바위 위에 U자형 홈을 파고 이 물길을 따라 아래 폭포로 떨어지게 하였다,
이 곡선형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上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는데
바위의 면적은 수 십 명이 앉을수 있는 넓은 면적은 아니다,
유상곡수연은 수로를 굴곡지게 만들어 그 안에 물을 흘러보내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그 술잔이 자기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놀이를 말한다,
어정(御井),
수량이 아주 작다,
청의정(淸漪亭)
청의는 맑은 잔물결이란 뜻으로 윗쪽의 조그만 논에 있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궁궐 유일의 초가집이다,
작은 면적이지만 실제로 벼농사를 지은 흔적이 있어 농업에 대한 상징적 정자인가 싶다,
태극정,
인조때 세운 정자로 처음에는 운영정이었으나 이후 태극정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농산정 쪽에서 바라본 태극정과 청의정,
농산정,
보통 정자와는 모양이 좀 다르다,
농산정은 왕이 이곳에 행차할 때 휴식하던 곳이라 한다,
옥류천 일원을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취규정 갈림길에서
올라온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따라 내려간다.
연경당 옆 담을 끼고 내려간다,
저만큼은 의두합, 애련지, 애련정쪽,
나가는 곳은 이곳으로,
살짝 고개를 넘어간다,
창덕궁으로 진입하는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그러면 이 개울은 금천인가 보다,
창덕궁 향나무,
이 향나무는 수령 약 75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5.6m, 뿌리부분 돌레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향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하며,
1830년 무렵에 그려진 창덕궁 그림(동궐도)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 볼 수 있다한다,
조금 내려가면 돈화문 안쪽이다.
오랫만에 찾아본 창경궁과 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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