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천 인현왕후길과 청암사
증산면은 김천인가? 성주인가.
경북 성주를 관통하는 대가천 상류에 위치한 증산면은 남쪽으로 수도산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고산준령과 북쪽으로도 특별히 이름있는 명산은 아니지만 높은 산지로 둘러쌓여 있어 지형상으로 성주인가? 싶다.
수도산에서 발원하는 옥동천과 단지봉 자락에서 발원하는 대가천이 증산면 소재지 남쪽 인근에서 만나 성주를 거쳐 고령으로 흘러들어 성주와 가까운 것도 그러한 이유중의 하나인가 보다.이 곳 증산면에는 수도산과 한강 정구선생의 무이구곡중 6경 옥류동에서 9경 용추폭포까지 4경이 있고, 사찰로는 청암사, 백련암, 수도암이 있으며, 걷기좋은 길과 숲으로 수도녹색숲모티길과 국립김천치유의숲, 인현왕후길이 있다. 비교적 근년에 지리산에서 방사된 반달곰이 이곳까지 흘러와 곳곳에 곰출현 주의를 알리는 현수막도 걸려있다.오늘은 인현왕후 길을 걸어보고, 남는 시간에 청암사를 둘러본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용추교 - 용추폭포 - 수도마을 - 인현왕후길 - 용추교. (거리 8.1km, 안내도엔 2시간 20분, 본인 점심시간 약 30분 제외 천천히 2시간 50분, / 2020. 4. 14.)
정암사 탐방
▷ 탐방안내도
▷ 탐방후에
▣ 수도리 가는 길 / 무흘구곡 전시관, 칠송쉼터, 만월대, 한강 무흘쉼터,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청암사 또는 수도리에로의 갈림길이 있는 마을이다,
청암사 갈림길을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 바로 무흘구곡 전시관과 증산 수도공원 테마파크가 있다, 크지않은 공원에 야영시설도 되어있는 것 같다. 다리건너 장평마을엔 김천옛날 솜씨마을 등이 있다.
평촌리 장평마을을 지나면 이내 칠송쉼터 이정표가 있다.
과거 만월담 이정표가 있었던 곳인데 새로 정비했나 보다.
칠송쉼터는 도로변에서 약 50m 떨어져 있으며 진입로는 2015년 찾을때만 해도 비포장 농로였는데, 지금은 깨끗하게 포장도 되고 주변 화장실, 주차장, 팔각정을 세워 쉼터로 만들었다.
주변 노송이 7그루여서 칠송쉼터인가? 소나무를 세어 보긴 했는데 ..... 몇 그루인지 기억에 없다.
칠송쉼터를 이정표를 지나 도로를 따라 조금더 오르면 만월담이 있다.
만월담은 한강 정구선생의 무흘구곡중 제7곡으로,
도로변과 인접하여 이곳 역시 비교적 근년에 소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에서 바라보는 만월담은 수수하다 못해 이름을 붙이기에 민망하다.
만월담으로 내려서는 길은 화초류 울타리 너머로 궁금한 이들이 만들어 낸 소로가 있다.
제대로 된 길이 아니고 나무가지를 잡고 급한 언덕을 조심스레 내려서면 하천에 보가 설치되어 있다.
보의 상부,
굳이 요즘 시각으로 본다면 이곳을 만월담이라 해야 할 듯,
보 하류쪽이다.
보의 설치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하천의 형태가 달라져 정확히 이곳이다라고 주장하기는 어렵겠다.
만월담 이정표에서 도로를 따라 100m쯤,
한강무흘강도지 이정표가 있다.
한강 정구선생의 무흘구곡은 본 블로그에서 2015년 상세하게 다룬바가 있어 오늘은 대충대충이다,
도로변의 입구가 넓어 이곳에 주차하면 되겠다.
다리 건너 저만큼,
굳이 진입하고자 한다면 차량으로도 가능하겠다.
저곳엔 한강 선생의 강도지가 있는데,
5년전 이곳을 찾았을때 건물이 낡고 허물어져 전설의 고향에나 나옴직한 폐건물이었는데,
지금도 지붕을 천막으로 덮어 둔 것을 보면 보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나 보다.
한강무흘강도지를 지나 조금 오르면 제8곡 와룡암이 있다.
무흘구곡 제 8곡 와룡담.
八曲披襟眼益開 팔곡피금만익개 팔곡이라 가슴 헤치니 시야 더욱 트이는데 헤칠 피. 옷깃 금,
川流如去復如廻 천류여거복여회 시냇물은 흐르는 듯 다시 돌아오는 듯 돌회.
燃雲花鳥渾成趣 연운화조혼성취 안개와 구름속의 꽃과 새들 다 정취 이루니, 흐릴흔, 뒤섞일 흔
不管遊人來不來 불관유인래불래 노니는 사람들 오든 말든 상관치 않네.
와룡암?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쬐끔만 와(? 臥)자를 살려둘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첫 글자가 반쯤 가려져 무슨 글자인지 알지못하겠다.
와룡암은 암반으로 되어있고, 면적도 제법 넓어
수도마을로 오르는 계곡중 여름철에 가장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곳이다.
▣ 인현왕후 길
용추교 앞의 안내도이다.
안내도상 현위치 8번 용추교에서 9번 용추소공원까지는 옥동천 수변을 따르는 탐방로이고,
1번 수도암 갈림길 까지는 차도이며, 7번 까지는 임도, 이후 8번으로 내려서는 길은 등산로 수준으로 보면 된다.
현 위치 용추교,
인현왕후길을 어디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이곳 용추교는 인현왕후길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윗쪽 용추폭포까지는 약 1km 거리이며, 단점은 주변에 주차장이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비해 수도마을로 가는 길을 많이 넓어지고 정비된 것 같다.
하지만 이곳 용추교 앞에서 도로폭이 살짝 좁아진 것은 그대로다.
오늘은 평일이기도 하고, 코로나 19로 인해 외출을 자제하는 분들이 많아 교통에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이곳 도로변에 주차를 한다.
이곳 용추교에서 수도마을 방향으로 약 1km 지점인 용추폭포 아래쪽 100m쯤 지점에 제법 넓은 주차장을 신설했다.
그곳에 주차후 용추폭포 또는 출렁다리를 출발지로 해도 되겠다,
이곳에서 출발해도 되지만 나중 이곳 용추교로 하산하였을때 수도마을까지 약 2.5km, 1시간 정도 은근히 올라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용추교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용추교에서 어느쪽으로 오르든지 초반은 오르막이요, 나중 내려올때 내리막이 끝나기 때문이다.
주변 쉼터인지 전망대인지.
용추교를 건너는 것으로 인현왕후 길을 시작한다,
이곳을 흐르는 하천을 인터넷 다음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옥동천이다.
보이는 곳은 출렁다리 상류쪽이고,
이곳은 하류쪽이다.
2015년에 이곳을 찾았을때 한창 탐방로 공사가 진행중어었다.
이곳 용추교에서 윗쪽 용추폭포 또는 상부 출렁다리까지 약 1km 거리이다.
옥동천을 우측에 두고 오른다.
완만한 오르막에 걷기 좋은 길이 계속된다.
수도마을로 가는 도로변, 새로 개설한 주차장이 건너다 보인다.
용추폭포에서 아랫쪽으로 100m쯤 되겠다.
용추폭포쪽으로 살짝 내려서는 데크길이 보인다.
용추폭포,
폭포상단 바위위에 구폭(臼瀑)이란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때 구자는 절구 臼자이다.
폭포 상부에 출렁다리를 놓았다.
출렁다리를 건넌다.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상류쪽,
하류쪽이자 용추폭포 상부이다.
아래 출발지 용추교에서 용추 출렁다리까지 약 25분여 소요되었다.
출렁다리 주변에도 소공원으로 꾸몄다.
화장실과 몇대의 주차공간도 확보했다.
이후 수도마을까지는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좌측 하천 건너로 용추민박과 뒤로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도로변에도 데크로드를 만들어 차량으로 부터의 위험도 없앴다.
중간,
두어군데 하천변으로 내려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첫번째 이곳
경관은 좋은 듯, 습한 듯,
윗쪽 두번째 하천변으로 내려설 수 있는 곳,
잠시 쉬어간다면 상부쪽에서 하천으로 내려서는게 더 좋아보인다.
이곳이 아랫쪽 보다는 넓은 반석이 있어 쉬기 좋아보인다.
좌측 수도산 농원쪽 경관이다.
현재,
수도마을 2~300m 아랫쪽까지 데크로드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수도마을로 들어선다.
아래 용추폭포 출렁다리에서 약 35분, 출발지 용추교에서 1시간여 소요되었다.
수도리 주차장,
국림 김천 치유의 숲 주차장 화살표시가 순간 당혹스럽지만.
이내 이곳이 주차장인 것은 안다.
국립김천치유의 숲은 이곳에서 수도녹색숲모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야하나 그곳에 주차시설이 없어 이곳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주차장 주변의 수도산 등산안내도,
이곳에서 수도암을 거쳐 수도산 정상에 오른 후 청암사로 내려가도 되겠고, 아님 자작나무 숲이 있는 국립김천 치유의 숲이나, 단지봉까지 진행한 후수도녹색숲 모티길 임도로 내려서 모티길 내지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 수도마을로 되돌아 올 수도 있다. 이 길은 몇년전 걸어본 적이 있으며, 모티길 전 코스는 아직 걷어보지 못해 어느 가을날 찾아볼까 한다.
주차장 주변을 둘러보고,
인현왕후 길을 따른다.
모티길, 수도암 가는 길 모두 수도마을 상부까지는 같이 간다.
마을 안길을 따라.
굴 굴뚝에 돌담을 입혔을까?
수도마을로의 길은 많이 정비되어 있지만,
마을 내에 반듯하게 잘 지어진 집은 별로 안보인다.
"오르막이 가파르구나,
거북이처럼 쉬엄쉬엄 가자꾸나,"
갈림길이 있다.
좌측 수도녹색숲 모티길과 우측 수도암, 인현왕후길 갈림길이다.
모티길 방향으로 국립김천치유의숲 400m 표시가 있다,
제법의 면적에 자작나무 등 치유의 숲을 조성하고 탐방로를 낸 공원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수도암 방향으로 100m쯤 올라서면 이내 급커브을 이루는 곳에 인현황후길 들머리가 있다.
수도마을에서 10분여 거리이자,
출발지 용추교에서 1시간 10분여 소요되었다.
이곳에서 주변을 본다.
우측 약간 보이는 길이 모티길 들머리인 셈이다,
아랫쪽 수도마을.
이곳에서 부터 임도를 따라 약 3.9km,
인현왕후길 스토리존 구간으로, 약 1시간쯤 소요된다.
인현왕후 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계비(繼妃)로서 본관은 여흥 민씨이다.
장희빈과 숙종 사이에서 사랑과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왕후였으며, 유교적 이념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 국모로서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과 백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물 이기도 하다, 장희빈의 계략으로 폐서인이 되었을 때, 이곳 수도산 청암사에서 3년간 머물며 복위를 간절히 기원 하던 중 숙종의 교지를 받고 환궁하였다.
그 후 인현왕후는 청암사에 서찰과 선물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조선시대 말에는 궁녀들의 시주로 불사를 일으켰으며 현재 승가람마(僧伽藍摩)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김천시에서는 인현왕후의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인현왕후길을 조성하였다. 이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8월의 걷기여행길'에 선정되었다. 이 길을 걷다보면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인현왕후의 따스한 인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이하 스토리존의 내용은 현지의 안내문이다.>
비포장 임도로 보면 되겠다.
오르내림이 그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저만큼 이정표가 보인다.
운명의 연(緣)이 시작되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봄날, 궁에서는 왕후를 맞이하기 위하 가례(嘉禮)가 한창이었다.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肅宗, 1661~1720)은 여흥 민씨 민유중(1630~1687)의 차녀를 왕후로 맞이하였다.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인현왕후(1667~1701)를 계비로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숙종은 가례 전부터 나인(內人) 장옥정(張玉貞, 1659~1701)에게 깊이 총애를 쏟고 있었던 터였으나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明聖王后, 1642~1683)는 장옥정이 간사하고 악독하다 하여 그녀를 궁궐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임금의 총애를 입은 궁인을 오랫동안 물리칠 수는 없다며 명성대비에게 장옥정의 재입궁을 간청하였으나 완강히 거부당했다.
명성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궁궐로 복귀 시킬수 있도록 숙종에게 간청하여 입궁시켰다. 이때부터 인현왕후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불러들인 장옥정으로 인해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던 것이었다.
임도를 이어간다.
스토리 존은 지능선을 돌아가는 곳에 주로 설치했다.
이곳에서 30분여 점심시간을 갖는다.
비련의 짙은 구름 드리우다.
인현왕후는 단하하고 현숙한 국모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현모 인현황후보다 경국지색의 나인 장옥정에게 마음을 빼았겨 관심과 애정을 쏟으며 총애하였다. 그러던 1688년 장옥정이 왕자를 출산하게 되자 숙종은 인현왕후에 대해서는 더욱 무관심해졌으며, 한낱 나인이었던 여인은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숙종의 무관심과 장옥정의 득세로 인현왕후는 자신의 처지를 불안해했다.
그 불안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이듬해 1월 숙종은 장옥정에게서 태어난 왕자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고, 세자의 어머니인 장옥정 또한 희빈(熙嬪)으로 책봉했다,
한편 남인(南人)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장희빈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경계한 서인(西人)들은, 송시열 (宋時烈1607~1689)을 중심으로 '전하와 왕후마마가 아직 젊으니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나이다'며 원자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고,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조정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숙종은 이를 계기로 서인들을 대거 숙청하게 되면서 기사환국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서인들의 지지를 받이 있던 인현왕후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었다.
또 한곳의 스토리가 있는 구간이다.
수도산 자락, 품에 안기다.
인현왕후는 명성대비의 3년상까지 숙종과 함께 지내온 왕후임에도 불구하고 기사환국으로 인해 대거 숙청된 서인들과 함께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된 비련의 왕후가 되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남겨진 물건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명하고, 또한 인현왕후를 구하여는 자 모두를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하였다.
조선시대 야사를 기록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숙종은 "후비가 투기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나 오늘같이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 행동으로는 하루도 국모 노릇을 할 수 없겠으므로 폐출하라고 명하는 바이다" 라며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이유에 대햐 기술하고 있다.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받아온 인현왕후가 폐출되면서, 백성들 또한 인현왕후의 이러한 처지를 슬퍼하였다. 이 시기에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아라는 민요가 불리어졌다고 전해질 만큼, 만인지상의 왕후였던 인현왕후와 일개 궁녀였던 희빈장씨와의 운명은 한 순간에 바뀌게 되었다.
궁에서 쫓겨난 인현왕후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남인의 해코지도 두려울뿐더러. '인현왕후를 구하려는 자 모두 역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숙종의 선언으로 인해 선듯 도우려 나서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인현왕후는 어머니인 은진 송씨 집안인 외가와 인연이 닿은 수도산 청암사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머물게 되었다.
정성이 지극하여 하늘도 감동하였던가 !
비록 서인의 신분이었지만 국모였던 인현왕후를 예우하고 모시기 위해 청암사에서는 새로 한옥을 지어 모셨는데, 지금의 극락전이다. 청암사 극락전은 여느 사찰 건물과 달리 사대부가의 집처럼 단청이 없는 운치있는 건물로 지어졌다. 그리고 경내에는 42수관세음보살을모신 보광전을 지어 인현왕후의 복위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김천과 인현왕후의 외가가 위치한 상주는 한 생활권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서도 외가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할 수가 있었다. 인현왕후는 외가에서 보내준 시녀와 함께 수도산 자락, 지금 이길을 따라 수도암과 청암사를 거닐며 기도와 시문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궁에서 폐출된지 여러해가 지나 죄인처럼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인현왕후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게 느껴졌다. 마침내 인현왕후는 이렇게 괴로운 삶을 끝내리라 자결할 생각으로 독약을 앞에 놓고 서럽게 울다 '지아비인 왕을 꿈에서라도 만나보고 죽으리라'며 살풋 잠이 들었다. 그 꿈 속에서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천축산 불영사에 속한 중입니다. 괴로우시더라도 3일만 더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꿈에서 깬 인현왕후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마음을 고쳐 3일을 더 기다렸다고 한다.
수도마을 뒷편 수도암 갈림길에서 이곳 정자 (청암사 갈림길) 까지의 임도는 약간의 오르내림은 있으나. 그의 평지나 다름 없다. 마지막 약간의 구간은 완만한 내리막이다.
수도사 갈림길, 즉 스토리존 임도길은 중간 점심시간 30분여를 포함하여 1시간 30분쯤 소요되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다.
숙종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뒤 곧바로 후회하였지만, 왕으로서 내린 처분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숙종은 1694년 마음을 바꾸어 인현왕후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을 내리고, 이후 서궁으로 입거한 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인현왕후는 복위 후 청암사에 '큰 스님 기도의 영험으로 북권되었다.'라는 서찰과 함께 수도산 일대를 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왕후의 자리까지 올랐었던 장씨는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이 지녔던 옥쇄는 부수어졌으며, 장희빈의 부모에게 작호까지 내렸던 교지는 불 속으로 던져저 없던 일이 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운명은 다시금 바뀌게 되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1681년 숙종을 지아비로 섬기게 되었던 그 봄날처럼, 인현왕후는 마침내 따스한 봄바람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 이상 현지의 안내문에서 >
이곳 정자가 있는 능선상 도착하면 인현왕후길 스토리존 구간은 끝이나고, 임도는 고개너머로 이어간다.
이 임도를 따르면 청암사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인현왕후 길로의 잘못 진입을 방지하고자 하는 건지, 아니면 출입을 통제하는 구간인지 모르지만 진입금지로 표시되어 있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이어서인지 임도 상태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조그만 봉우리를 살짝 넘어가는 곳에 포토존이 있다.
포토존 앞
푸를 靑(청)자 같은데 무슨 표시인가?
위 조그만 봉우리를 넘어가면.
이내 주 능선을 우측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어,
제법 급하게 작은 지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급경사는 한동안 계속된다,
지능선을 따르다 지능선은 흐지브지 되고 계곡쪽으로 내려선다.
계곡을 건너,
우측 능선을 돌아,
넘어 간다.
이쪽 골짜기는 작다.
노거수 왕버드나무?
철계단을 내려선다.
저만큼 용추교,
위 능선상의 청암사 갈림길에서 이곳 용추교까지 30분여 소요되었다.
중간은 제법 급경사의 능선길이다.
10시 50분경 이곳을 출발하여 지금 시간이 오후 2시 10을 지나고 있다.
점심시간 30분 포함 쉬엄쉬엄 3시간 20분 소요되어 인현왕후길을 마무리 한다.
▣ 청암사.
청암사 주차장으로 왔다.
청암사 경내까지 차량으로 진입해도 되겠으나,
이곳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거쳐 들어가는 길이 좋고, 거리도 가까워 걷는 것도 좋다,
청암사경계표지석 ?
나무아미타불.
지나가는 길목의 바위이다.
최송설당.
이분은 청암사를 중건하는데 많은 불사를 하신분이란다,
청암사로 향하는 길은 호젓하다.
계곡은 나름 운치가 있으나 탁족을 즐기거나 할 정도는 아니다.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도 없다.
이내 일주문이다.
불영산 청암사 편액을 달고 있다.
불영산은 수도산의 다른 이름이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앞쪽,
비각인데 안내문이 있었으면 좋겠다.
천왕문,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벽화로 대신한다.
우비천.
우비천 주변의 바위에는 여러 이름 등이 각자되어 있다.
협곡도 운치가 있다.
청암사로 오르는 계단길,
계단을 오르면 찻집이 있다,
문은 닫혀있다.
청암사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께서 창건하셨으며,
이조 인조 25년(1647)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허정화상, 환우대사 등이 12차에 걸쳐 중창하였다.
그후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에 있던 쌍계사의 산내 암자로 있다가 서기 1904년 당시 주지로 있던 대운스님이 3~4년에 걸쳐 현재의 일부 건물을 완성하였다. 이때 현재의 김천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이 많은 사재를 시주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화재로 말미암아 자세한 사적은 알 수 없으나 사적비, 회당비, 대운당비 등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조 영조때의 대선사이며 대강백(講伯)이신 화암 정혜(1685~1741)께서 주석하고 강의를 하셨으며, 근대에는 강고봉스님, 우룡스님 등 강백스님들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현재까지 강원(講院)으로 맥을 이어오고있다.
현재 청암사는 주지이자 학장이신 지형(志炯)스님의 도제 양성을 위한 원력으로 1987. 3. 25일 청암사 승가대학을 설립하여 8년여에 걸쳐 진영각, 육화료를 보수하고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부속건물인 중현당과 선열당을 신축한 가운데 백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청정도량이다.
청암사 승가대학은 4년제 과정으로서 사미과(沙彌科, 1학년), 사집과 (四集科, 2학년), 사교과(四敎科. 3학년). 대교과(大敎科, 4학년)로 편성되어져 부처님의 경전을 배우며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화합과 질서 참여의식 등을 익히며, 전통적 수행과 아울러 현대사회에 필요한 수행자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는 승가교육의 현장이다.
산내 암자로는 도선국사가 창건한 수도암과 유안 비구니 스님이 창건한 백련암이 있다.
< 이상 청앙사 안내문에서 >
청암사 대웅전,
이 건물은 신라 헌안왕 2(3)년 (858, 859) 도선국사가 처음 건립하였다.(연대가 안내문에 따라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조선 인조 25년(1647)에 화재로 소실되자 벽암 대사가 허정화상을 보내어 다시 건립하였다. 그후 정조 6년(1782) 화재로 소실되어 20여년후 환우대사가 다시 건립하였다. 고종 34년(1897) 폐사되었으나, 1900년대 초에 대운스님이 중건하였다. 대웅전의 기단은 2단 석축으로 조성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청기와를 얹고, 용마루 양끝을 장식용 기와로 장식했다. 건물의 외부는 금단청, 내부는 모로단청으로 채색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칸 뒤로 2개의 기둥을 세워 불벽을 치고 불단을 꾸몄다. 불벽 뒤에는 탱화가 걸려있다.
<청암사 안내문에서>
청암사 외벽은 나무 판자로 둘러져 있다.
청암사 다층석탑은 조선 후기의 탑으로 1912년 성주의 어느 논바닥에서 옯겨왔다고 전해진다. 지대석 위에 2층의 기단을 놓고 탑신을 올렸는데 원래는 5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륜부 장식이 일부 남아있다. 현재 높이는 4.21m이다.
기단부터 1층 몸돌까지는 하나의 돌로 만들고 1층 지붕돌부터는 몸돌과 지붕돌을 별도의 돌로 만들었다.
이중기단 중 아래층 기단에는 귀기둥과 안기둥이 없으나, 윗층 기단에는 귀기둥을 돋을 새김하고 각 면에 연꽃무늬를 하나씩 새겼다. 몸돌에는 귀기둥을 새기지 않았으며, 1층 몸돌의 각 면에 불좌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무겁고 큰 편이며 추녀 끝이 위로 들려져 있다.
아랫층 기단이 너무 높고 윗층 기단이 좁아 안정감이 없으며,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가 맞지않아 전체적으로 가냘프면 서도 불안정해 보인다,
< 경내 안내문에서>
육화료 앞의 자목련,
우아하면서도 고상하다.
청암사 경내를 둘러보고,
극락전 방향으로 간다.
극락전 가는 길,
평화의 불
해와 달이 다 하고
중생업이 다 해도
우리는 둘이 아닌
不二의 진리,
이 도량 밝게 비춘 평화의 불
남과 북이 하나 되길 서원하오며,
무명 번뇌 모두 태운 모든 중생들
평화, 열반 이루도록 발원하나이다.
극락전으로 왔다.
인현왕후께서 거처한 곳이기도 하다.
극락전 옆의 보광전,
42수관음보살을 모셨다.
백화당,
백화당 앞쪽에 인현왕후 경행길 이정표가 있다.
저 대문 뒤로하여 수도암 가는 길?
현재 길의 상태는 별로다.
아랫쪽 부도군도 둘러보고,
백련암으로 간다.
수도산 등산로 들머리,
5월 몇일까지 산불조심 출입금지구역 현수막이 걸려있고,
산불감시요원도 상주하고 있다.
백련암
지장전,
물맛을 보고 간다.
시원하다. 맛도 좋다.
백련암을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주차장으로 되돌아 가는 길.
이곳 저곳 청암사를 둘러 보는데 1시간 소요되었다.
'경북지역의 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위 화산 (0) | 2020.10.04 |
---|---|
무주 구천동 어사길 2 (0) | 2020.07.17 |
고령 개경포 너울길 (0) | 2020.04.12 |
영덕 해파랑길 21코스 (불루로드 B코스 푸른대게의 길) (0) | 2019.07.27 |
노근리평화공원 (0) | 2019.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