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의 산

순창 훈몽재 선비길, 산동리 남근석, 창덕리 남근석.

정헌의 티스토리 2021. 12. 30. 18:46

■ 순창 훈몽재 선비길

 

하서 김인후 선생은 1510년 장성 대맥동(황룡면 맥호리)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나이 45세때 중중이 승하(1544년)하며, 인종이 즉위 8(9)개월 만에 승하하고 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난다.(1545년). 이에 선생은 고향 장성으로 퇴향하게 되고 후학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념한다. 선생이 처향인 훈몽재에서 거주기간은 1548년부터 약 2년간이다.

순창군에서 당시 외형상으로는 볼 품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훈몽재와 자연당을 현대식 한옥으로 거창하게 복원하고, 훈몽재에서 가인 김병로선생 생가를 거쳐 역시 하서 선생의 후손이 건립한 낙덕정까지 하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다듬어 선비길이라 이름 붙였다. 추령천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도로 구간이 제법이어서 크게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훈몽재에서 1.7km 구간은 경관이 좋다.

귀가 길 팔덕면 산동리와 창덕리에 위치한 남근석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잡아본다.

 

 

▷ 가는 길

 

아래 지도에서 소백산을 휘감아 돌아가는 강변을 따라 난 길이다.

지도를 확대하면 소백산 남쪽 강변에 낙덕정이 있고, 동북쪽 강변에 훈몽재가 있다.

 

 

▷탐방코스

 

낙덕정 - 가인 김병로 선생 생가 - 도로, 둑방길 - 사과정 - 데크길 - 훈몽재 - 낙덕정.

(편도 6km, 왕복 12km, 낙덕정에서 훈몽재까지 약 1시간 30분, 훈몽재 20분, 훈몽재-사과정 1시간 10분 합계 천천히 3시간  /  2021. 12. 29. ) 

귀가길 순창 팔덕면 산동리 남근석, 창덕리 남근석 둘러봄.

 

 

   

▷ 탐방안내도

 

 

낙덕정 ~ 훈몽재  6km,  산들길 2시간 30분 (실제로는 1시간 30분이면 충분함)

교통편 : 정읍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농어촌버스 《쌍치 - 쌍치(방산. 정읍)  정읍 - 쌍치(방산, 운암, 용전, 오봉, 내동》탑승, →중안 하차, 도보 15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이곳 선비길은 편도 6km로 1시간 10분~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므로 왕복하면 된다.)

 

 

 

 

▷ 탐방후에 

 

 ▣ 늘 식당

 

 

일반적으로 훈몽재 선비길은 훈몽재에서 낙덕정까지이다.

차량으로 정읍쪽에서 진입한다면 훈몽재가 가깝고, 순창 쪽에서 진입하면 낙덕정이 가깝다.

 

이곳은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 삼거리에  <늘>이란 상호의 식당이다.

이웃해 커피숍이 있다.

 

 

 

 

 

 

지금 시간이 12시,

아침을 늦게 먹어 별 배고픈 줄은 모르겠는데, 선비길 중간에는 식당이 없고 탐방을 마치고 나면 점심시간이 너무 늦어 이 집에 들렀다.

 

 

 

 

 

 

주소는 메뉴 우측 하단에 있고, 

내부도 깨끗한 편이고 반찬 수도 20여 가지로 많다. 두부 전골을 시켰지만 옆 테이블의 나물밥 그릇이 특이하게 담겨 나온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는데 배고픈 상태가 아니어서, 아~주 맛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정갈한 찬과 갓한 밥으로 많은 분들이 찾는 집이다.

 

 

 

 

▣ 낙덕정과 훈몽재 선비의 길

 

 

낙덕정

 

오늘 출발지를 낙덕정에서 하기로 한다.

훈몽재보다는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구태여 훈몽재에서 출발할 이유가 없다 싶어서이다. 탐방코스가 길거나 하여 오르막이나 내리막을 계산할 필요도 없다. 이 길은 평지여서 경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주변엔 주차장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마을 입구이기도 하고 많은 차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어서 도로변에 적의 주차한다.

이웃하여 <본가참치> 음식점 마당이 넓찍하다.

입구, 강변을 따라 인근 낙덕저수지로 연결하는 데크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저수지와 연계하면 걷기좋은 곳이 될 듯 하다.

 

 

   

 

 

낙덕정은 마을 입구 아담한 동산 위에 위치한다.

 

 

 

 

 

 

동산에 오르면 육각의 낙덕정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경치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으로 조성한 건축물이다. 우리나라 정자 건축의 역사는 궁궐 조성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대체로 정원 또는 연못을 조성하면서 정자를 지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궁궐. 절. 향교. 서원. 일반 주텍에 부속된 건물 또는 독립된 단일 건물로 정자를 건축하였고 정자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문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

 

낙덕정은 김노수가 조상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1900년에 낙덕암 위에 지은 정자로 팔각단층의 건축양식을 보여 준다. 김인후는 조선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자 뛰어난 학자로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 (처가?) 순창으로 내려와 훈몽재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던 그는 물과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이곳을 매우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덕정 앞쪽에 절벽이 있어 이곳에서 내려다 본 추령천,

 

 

 

 

 

 

역시 낙덕정 앞에서 바라본 낙덕저수지 방향.

낙덕정 입구에서 추령천을 따라 저만큼 위치한 낙덕저수지로 데크 공사가 그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현 낙덕저수지 둘레길은 조성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10분여 낙덕정을 둘러보고 내려와 선비의 길 탐방을 시작한다.

뒷쪽에 보이는 큼직한 간판의 <본가참치>는 음식점일 텐데 웬 이런 시골에 ?

마당이 넓어 저 집 앞에 주차를 할까 망설이다 음식점 이용도 하지 않으면서 주차하기가 미안해 그냥 도로변에 주차했다.

 

 

 

 

 

 

도로를 따라 간다.

이 길은 마을길로 차량들이 그의 다니지 않아 별 위험은 없다.

 

 

 

 

 

 

둑방길과 마을길 갈림길에서 마을길로 선비길을 안내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가인 김병로선생 생가와 연결시키기 위함이지 싶다. 

사실 둑방길로 가도 되지만 단조로운 둑방길 보다는 김병로 선생 생가도 보고, 사람 사는 구경도 할 수 있는 마을길이 더 정겨울 수 있다. 둑방길에 비해 거리는 마을길이 조금 가깝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겠다.

 

 

 

 

 

 

마을마다 고유의 동네명을 가지고 있는데 도로명 주소가 생김으로 인해 동네 이름이 없어졌다.

 

귀가 후 이 마을 이름을 찾으니 순창군 복흥면 하리길 OO번지로 나온다.

크게 보면 마을이 두 곳 있는데  일련의 마을 이름이 하리 아님 중리, 사창 마을이다.

 

 

 

 

 

 

낙덕재에서 1.0km, 약 11분,

훈몽재 방향으로 내려가는 입장에서 볼 때 마을 첫 집(엄밀히는 아님)이 김병로선생 생가이다.

 

 

 

 

 

 

도로변에 위치하여 금새 알 수 있는 건물로 초가의 형태에 사립문이 정겹다.

 

 

 

 

 

 

안채와 아랫채인 창고,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가인(거리 가, 사람 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분이다.   

조선 중기의 도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대손인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지냈으며, 변호사 시절에는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료 변론활동과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내신 분이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가로서 우리나라 사법부 역사상 법조 3성(성/성인 성)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법조인들로부터 가장 추앙받고 있다.   

가인 생가는 당초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이루어졌으나 6.25때 소실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순창군에서 후손들의 고증을 거쳐 안채와 문간채를 2014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법조삼성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니 전북 법원, 검찰청 부지와 건물을 활용한 법조삼현 로파크 건립에 대한 전북출신 법조3성 기사가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대법원장으로 사법 기초가 되는 법률 마련과 사법부의 독립과 위상을 확립한 가인 김병로 선생, 청렴. 강직한 대쪽검사로 불리면서 한국 검찰의 위상을 높인 화강 최대교 선생, 죄수들에게 헌신적 사랑을 보여주며 법복을 입은 성직자로 불린 사도 법관 김홍섭 선생을 전북인 법조3성으로 불리는가 보다.

우리나라의 법조 3성은 계신가? 안계신가?

                                                                                                                                                                                                                                                                                                                                                           

 

 

 

 

 

 

 

 

 

 

아랫채

 

 

 

 

 

 

가인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고 마을길을 따른다.

 

꿈꾸는 나무,

정상용 작가의 작품으로 나무 아래에 앉아 미래를 꿈꾸는 가인 김병로 선생의 어린시절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한다.

 

 

 

 

 

 

신의 저울

박승만님의 작품으로 화강석과 스테인리스의 이질적이고 미니멀한 신의 저울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한다.

 

 

마을내 2013 마을미술프로젝트에 선정된 작품으로 이 외 몇 작품이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으나 세월이 지나며 보수가 되지않고 주변도 어수선해 방치된 느낌이다. 

 

 

 

 

 

 

사창마을 앞을 지난다.

 

낙덕정에서 1.6km 지점이다.

이후 한동안 둑방 아래로 난 도로를 따라 석보교까지 진행하게 된다.

이 길은 하리(중리. 사창마을)에서 석보리로 이어지는 도로로 이 지역 주민이 아니면 그의 다닐일이 없으므로 교통이 빈번하지 않은 한적한 길이다.

 

 

 

 

 

 

석보교 앞으로 왔다.

낙덕정에서 중리마을, 사장마을을 지나 이곳까지는 도로를 따라 왔다.

다리를 건너면 석보리이다.

 

 

 

 

 

 

석보교 앞의 이정표.

 

이곳 이정표를 있는 그대로 보면 않된다.

이정표가 세월이 지나면서 바람부는 대로 움직여 모두 한쪽 방향이다.

선비길, 가인 김병로 생가터는 지나온 방향이지만 훈몽재는 반대 방향이고 부엉바위 탐방로는 어딘지 모르겠다.

 

 

 

 

 

 

이후 석보교에서 하천을 우측에 두고 둑방길을 따라 내려간다.

 

참고로 석보교를 건너서 하천을 좌측에 두고 내려가는 길도 있다. 단지 훈몽재 앞이나 중간 하천을 가로지르는 보를 건너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여름이라면 신발을 벗고 건너면 되지만 겨울이면 곤란하다.

 

 

 

 

 

 

둑방을 따라 이팝나무를 식재하였으나 아직은 어려 그늘을 만들어 주기에는 부족하겠다.

 

 

 

 

 

 

좌측은 농지, 우측은 하천

조금 단조로운 길이다.

건너편, 성주봉 정상방향으로 이어오르는 암릉에 시선이 자주 간다.

 

 

 

 

 

 

저~쪽 끝.

우측으로 제법의 규모를 보이는 축사가 있는 들판의 하부지점이다.

 

 

 

 

 

 

좌측으로는 넓은 농지가 끝이나는 곳으로, 간이 화장실이 있다.

지나온 낙덕정 4.3km 지점으로 훈몽재 1.7km 남았을을 알린다.

사실 지나온 곳은 별 재미있는 곳은 아니다.

이후 훈몽재까지는 경관이 비교적 좋아 훈몽재에서 가볍게 산책하고자 한다면 이곳 까지만 왔다 되돌아 가도 되겠다.

 

 

 

 

 

 

내장산 또는 인근의 추령에서 발원하는 추령천이 추월산에서 발원하는 갈원천을 복흥면 소재지에서 합류하여 낙덕정, 훈몽재 앞을 지나 쌍치면 소재지, 정읍 구절초 공원 앞을 지나 옥정호(섬진강댐)으로 흘러든다.

 

 

 

 

 

 

건너편 성주봉쪽 지능선의 암릉,

간혹 성주봉 등산 들머리를 저곳으로 잡는 분들이 있으며, 선답자 얘기를 종합해 보면 지정된 등산로는 없으나 살살 다닐만 하단다.

 

 

 

 

 

 

이후 한동안 황토색 포장 농로를 따르게 된다.

 

 

 

 

 

 

약간의 숲을 형성하고 있으나 쉬며, 놀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로 좌측으로는 밭이다.

 

 

 

 

 

 

건너 암릉의 시작지점.

옆으로 사방댐의 둑이 보인다.

 

 

 

 

 

 

주변을 잔디나 마사로 토지를 단장하고 노거수 아래로 잡풀과 나무를 제거하여 소공원으로 꾸민다면?

 

지나온 쪽으로는 농로를 따라 이곳까지 승용차 진입은 가능하다.

훈몽재 쪽에서는 도로는 있으나 승용차 진입은 어렵고, 트럭은 다닐 수 있어 보였다.

 

 

 

 

 

 

저만큼 정자가 있고, 이후 데크길이 이어진다.

 

 

 

  

 

 

사과정 (사과정/ 사향노루 사, 지날 과, 정자 정)

 

사과춘산초자향(사과춘산초자향)은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니 풀이 절로 향기롭다"는 뜻으로 하서 김인후 선생이 지으신 백년초해(백년초해)에 나오는 시구절로 여기서 정자의 이름을 취하였다고 안내하고 있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사향노루가 지나 다닐듯 한 곳으로 은은한 향기가 피어나며, 유학의 산실인 훈몽재와 선비정신이 물씬 뭉기는 곳으로 옛적에 하서 김인후 선생이 거닐던 길에 이 정자를 지었다.

 

<현지 안내문>

 

 

 

 

 

 

이후 훈몽재까지는 이런 길의 연속이다.

 

 

 

 

 

 

데크 아래쪽으로 차량이 겨우, 천천히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다.

하체가 높은 트럭은 모르지만 승용차는 다니기가 곤란해 보인다.

 

 

 

 

 

 

사과정 주변,

 

 

 

 

 

 

 

 

 

 

 

 

 

 

 

데크 상부쪽 전망대겸 쉼터도 조성했다.

 

 

 

 

 

 

앞쪽에 고만고만한 바위가 6개쯤 있어 적당한 이름을 붙여도 될 듯하다.

6형제 또는 6남매 바위...........

 

 

 

 

 

 

 

 

 

 

 

 

 

 

 

훈몽재가 가까워 졌다.

낙덕정에서 훈몽재까지는 6km, 천천히 1시간 30분 소요되었다.

 

 

 

 

 

 

훈몽재를 둘러본다.

한옥의 건물이 대단하다.

보이는 건물은 자연당 현판을 달고 있으며, 언듯 보면 훈몽재 건물보다 커 보인다.

 

 

하서 김인후 선생이 당초 건립했던 훈몽재가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하였는데,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 하서 선생의 5대손인 김시서(1652~1707)선생이 원래의 훈몽재를 수축하고 그 옆에 초당을 짓고서 하서 선생의 '자연가'의 뜻을 취하여 '자연당'이라 이름하고서 선생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하서 선생이 은거하면서 자신의 자연 귀의 사상을 '자연가'라는 노래를 통해 표현하였는데, 김시서 선생이 '자연당'을 지어 이를 다시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당(김시서선생을 말함이지 싶다.)은 하서 선생의 후손으로 우암 송시열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기절이 높아 당시에 소하서(소하서)로 불리었다. 뒤에 '자연당'도 퇴락하여 사라졌으나, 김시서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순창군의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훈몽재의 부속건물로 중건되었으며,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유학, 학문. 예절 교육)과 학술회의 등의 교육관으로 활용된다. 

 

자연당 선생의 기절이 잘 표현된 연경에 가는 사신에게 준 시 (증부연경사시 / 줄 증, 다다를 부, 갈 부)-

 

두대명천좌해방   / 명나라를 숭배하며 바닷가에 앉아서    (일(이다, 들다, 받들다) 대, 곁 방)

생평한불이호장   / 오랑캐 창자 밟지 못함을 평생토록 한하였네   (밟을 리(이), 신 리(이))

송군두우춘삼월   / 두견새 우는 춘삼월에 그대를 보내면서

재배시성발진창   / 재배하고 시 지으니 머리털이 다 희었네

 

 <현지 안내문에서>

 

 

 

 

 

훈몽재

(하서 김인후 선생 약력)

 

1510년(중종5) 장성 대맥동(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서 출생, 어려서 부터 총명.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임

1528년 성균관 수학

1531년 사미시 합격

1540년(중종35) 선생 나이 31세, 별시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543년 세자(후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설서를 지냈음.

1544년 (중종39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인종 임

1545년 인종이 왕위 8개월? (9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을사사화가 일어남.

             이후 하서 선생은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조정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씀

 548년(명종3년)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훈몽재를 열고 약 2년간 머뭄, 점암촌은 부인 여흥윤씨의 고향임.

 1560년 향년 51세로 사망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숙종 6년(1680) 무렵에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가 다시 짓고 자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에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모셨으나 이마져도 고종 4년(1867)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훈몽재는 일제강점기에 한번 더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소실되었다.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속건물이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 등과 함께 2009년 복원한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양정관

 

 

 

 

 

 

훈몽재 양정관 앞에 지석묘가 있다.

 

우리나리 지석묘는 남방식, 북방식, 개석식, 위석식 4가지 형태가 있다.

남방식은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방식이고,

북방식은 4개의 받침돌 위헤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방식이다.

개석식은 지하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린 방식이고,

위석식은 무덤방이 노출되어 있으면서 판석이 덮개돌 가장자리를 따라 세워진 방식이다.

훈몽재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남방식으로 남북방향으로 놓여져 있으며,길이가 4.9m, 폭이 2.43m, 높이가 1.4m로 규모가 큰 편이어서 권력을 가진 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삼연정

안내문은 교체예정이라 한다.

 

 

 

 

 

 

훈몽재에서의 선비길 들머리

 

 

 

 

 

 

포토 존

 

 

 

 

 

 

강가에 바위 하나가 있다.

 

대학암이라 한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의 친필 '대학암.아 암각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하서 선생이 정철에게 대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소년 시절에 훈몽재에서 공부하였다고 하며, 인근 석보 앞을 앞 들에 '정철배미(현재는 '천정배미'로 불림) 라고 불리는 논이 있는데, 이는 정철의 공부답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뒷날 단암 민진원이 도백으로서 필마로 자연당 김시서 선생을 찾아와 대학암시를 지었다.

 

 

상국(상국)께서 수학한 바윗돌을 매만지니 (마수상국추의석  / 문지를 마, 만질 사, 출(위로 끌어올림) 구)

두 노옹이 남긴 향기 영원히 흠앙되네.      (이노유방백세흠 / 남길 유, 꽃다울 방, 공경할 흠)

 

 

 

 

 

 

입구에서 바라본 훈몽재

 

 

 

 

 

 

훈몽재 앞의 보.

이 보(추령천)를 건너 내려올 때의 건너편 길을 따라 되돌아 갈려고 했는데, 물이 보를 넘고 있어 겨울에는 건너기 어렵다.

하부의 다리(둔전 마을앞 둔전교) 까지 카카오 지도로 검색하니 1.5km가 나온다.

 

 

 

 

 

 

 

온 길을 따라 되돌아 간다.

 

 

 

 

 

 

저만큼 보가 있는 곳이 사과정.

 

 

 

 

 

 

 

 

 

 

 

 

 

 

훈몽재에서 1.7km 이정표가 있는 곳이다.

 

간이 화장실이 있고, 

산기슭과 농지 사이로 농로가 있다.

이 농로를 따르면 둑방길 보다는 쬐끔 가까울 것 같다.

 

 

 

 

 

 

농로를 따라 올라왔다.

뽕나무 같은데 겨울이라 잎이 다 떨어져 확실히 모르겠다. 뽕나무라면 왜 이렇게 키 크게 키우는 지도 의문이다.

오디 채취에도 힘들 것이다.

 

 

 

 

 

 

가인 선생 생가 담벽에 능소화 나무인것 같다.

꽃이 피면 예쁠것 같다.

 

 

 

 

 

 

훈몽재에서 되돌아 오는 시간은 1시간 10분쯤 소요되었다.

이곳 낙덕정에서 훈몽재 까지는 초행이라 가인선생 생가를 비롯하여 이곳저곳 눈요기 해가며 걷다보니 1시간 30분쯤 소요되었고,  훈몽재 주변에서 20분쯤 소요하였으니 총 3시간 소요된 셈이다. 

    

 

 

 

 

▣순창 산동리 남근석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순창군 팔덕면 팔왕길 77)

 

귀가길, 팔덕면 소재지에 산동리와 창덕리 남근석 이정표가 있다.

여러해 전 이들 남근석을 찾았으나 찾지 못한 기억도 나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 둘러보러 간다.

내비에 '산동리 남근석' 으로 검색하면 된다.

군데 군데 이정표가 있지만 시골길이라 내비로 찾는게 편하며, 팔덕면에서는 산동리 남근석이 가깝고, 상대적으로 창안리 남근석이 조금 더 멀다.

 

 

 

 

 

 

마을 어귀에 있는 이 남근석은 주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아주 여러해 전 이곳 남근석을 찾을려 했으나 당시에는 내비도 없고 하여 못찾은 기억이 난다.

 

 

 

 

 

 

산동리 남근석 (전북 민속문화재 제 14호)

 

남근석은 자손이 귀하거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성들이 제를 올리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 남근석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에 청상과부로 지내던 한 여인이 두 개의 남근석을 치마에 싸 가지고 오다가 너무도 무거워서, 한 개는 창덕리에 두고 다른 한 개는 이곳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매우 정교하면서도 시실적으로 묘사한 이 남근석은, 아래 부분에 연꽃 무늬를 새긴 점이 특이하다. 예로부터 매년 정월 보름이면,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과 또 아들을 갖기 원하는 임산부들이 이 곳에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딱히 똑 같이 생겼다는 생각은 덜하지만 그럴 듯 하다.

크기는 키가 큰 남성만 하거나 좀더 클 듯,

 

 

 

 

▣ 창덕리 남근석

 

 

 

창덕리 남근석은 전북 민속문화제 15호

산동리 남근석이 마을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면, 이곳 남근석 주변에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농로변 양지바른 산 비탈에 홀로 서있다.

이곳도 내비에 <창덕리 남근석>으로 입력하면 된다.

 

 

 

 

 

 

이 남근석은 지금으로 부터 500여년 전에 대촌마을에 살던 한 걸인이 결혼을 할 수 없음을 비관하여 설움을 달래고자 세웠다는 전설과, 청상과부로 지내던 한 여인이 세웠다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화강암으로 정교하고도 대담하게 조각한 이 남근석은 언듯 육안으로 보기에 산동리와는 그의 비슷한 듯,  역시 아랫 분분에 새긴 연꽃도 산동리와 비슷한 듯, 다른 듯 독특하다.

 

 

 

 

 

 

크기는 산동리 남근석보다 살짝 작은 것 같다.

창덕리 남근석을 둘러보고 귀가를 서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