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주 경천애인 징검다리길, 불명산 화암사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공원이이나 탐방로 등에 반려견 동반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하여 전북에는 6곳의 탐방로에 아예 반려견 동반을 공개적으로 허용하여 차별화 하고 있다.
김제시 진봉면사무소에서 만경강을 거슬러 올라 만경읍 화포리 만경낙조전망대까지 새만금광역탐방로, 임실군 오수의견관광지, 진안군의 진안고원길 9구간인 운일암 반일암 숲길, 순창군의 예향천리마실길, 남원시의 요천생태습지공원, 완주군 경천면 생활체육공원에서 원용복마을까지구룡천 둑방길을 따라난 경천애인 징검다리 길 등 눈치보지 말고 개를 동반하라고 눈치보지마시개길 이름을 붙였다.
멀리 외지에서 이 길을 걷고자 이곳을 찾기에는 좀 민망하다. 그래도 이 길을 찾은 것은 나머지 시간에 화암사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화암사로 오르는 계곡길은 말할 것도 없지만 화암사로 오르는 도로를 따라봄도 괜찮을 것 같아서이다.
▷ 가는 길
완주군 경천면 경천애인생활체육공원 주차장
▷ 탐방코스 ( 2022. 2. 13.)
◐ 경천애인 징검다리 길 (경천생활체육공원 ~ 원용복마을 왕복 / 왕복 약 6.0km, 편도 각각 천천히 45분, 원용복마을내 10분 합계 1시간 40분)
◐ 화암사(화암사 주차장 - 화암사 - 임도를 따라 화암사 주차장 / 탐방로 0.8km(25분), 임도 약 2.1km (천천히33분), 화암사 30분 조금더 포함 1시간 30분)
▷ 탐방후에
▣ 경천애인 징검다리 길 (눈치보지마시개 길)
경천 생활체육공원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경천면에는 걷기 좋은 길로 경천애인 징검다리길과 천북천리길 완주노선으로 운문골 마실길이 있다.
운문골 마실길은 경천 생활체육공원에서 고산면 소향교(또는 완주전통문화체험관)까지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가는 편도 약 6km구간으로 중간 경천편백숲을 둘러본다면 이보다 조금더 거리를 잡으면 되겠다.
오늘은 경천애인 징검다리길을 걷고 중식후 오후에는 화암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는다.
다리목에 경천애인 징검다리길 표지판이 있다.
다리를 건넌다.
다리에서 바라본 상부,
하부,
경천애인 징검다리 길은 다리 건너편에서 구룡천 상부 원용복마을까지 둑방길을 따라난 길이다.
구태여 생활체육공원이 아니라 이곳 주차장을 이용해도 되겠다.
도로변에 위치하여 아래의 농어촌인성학교와도 구별되어 있다.
경천애인권역활성화센타
이곳의 행정구역 명칭이 경천면이므로 경천의 한자 글자는 다르지만 경천애인에 갖다붙였다.
경천애인농촌학교 등 복잡 다양한 이름이 있으나 인터넷에서 <경천애인 농어촌 인성학교>로 검색해야 홈페이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펜션형 숙박, 농가체험 등 농촌관련 다양한 체험과 숙박을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몇 야영데크도 있고, 여름철엔 수영장도 운영하나 보다.
두군데 이런 징검다리를 놓았다.
초반은 주변 벛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4월이면 싱싱한 벛꽃을 볼 수 있겠다.
조금 상부로 오르면 가로수는 없다.
어디가나 있는 것이지만 농업관련 쓰레길들이 더러 보인다.
오목교.
건너면 이내 경천면사무소로 연결된다.
강변 둑방길을 따른다.
별 특징이 있는 길은 아니다.
그늘이 없어 여름에는 좀 곤란하겠다.
하상엔 갈대 뻭빽하다.
직진을 해도 좌측으로 원용복 마을로 가는 길이 있지만 좌측 소로를 따라간다.
금년 겨울 가뭄이 심해 하천의 수량도 적다.
용복교.
들머리로 잡은 생활체육공원에서 천천히 45분쯤,(경천애인 농어촌 인성학교 둘러보는 시간 포함)
용복마을을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경천추어탕
오늘은 휴업이다.
농협 건너편의 이 건물은?
정승댁
여차하면 이집을 점심장소로 찜해 둔다.
정승댁 건너편
며칠 후 개업한단다.
원용복 마을엔 우선 눈에 띄는 식당이 추어탕집, 횟집, 정승집 그리고 곧 개업할 이 집이 있다.
원용복마을 이곳 저곳 10분여 둘러보고, 도로변을 따라 되돌아간다.
터널 좌측편에 구 도로가 있다.
원가천교 인근,
차도를 따라 경천면소재지로 되돌아 가는 길엔 인도가 없다,
원가천교를 건너,
원가천마을로 향한다.
차도로 난 길을 따르기도 뭐하고, 지나온 둑방길이 단조로워 원가천 마을을 이곳 저곳 둘러보고 가천면으로 이어가는 도로를 따르기 위함이다.
가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가천초등학교(유치원) 운동장
원가천 마을길을 지나 가천면소재지로 간다.
오복교,
다리 건너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가천면사무소이다.
둑방길을 따라
생활체육공원이 저만큼,
생활체육공원에서 원용복마을까지 천천히 45분여, 원용복 마을 이곳 저곳 약 10분, 원용복 마을에서 원가천마을을 지나 생활체육공원으로 되돌아 오는데 약 45분 합계 약 1시간 40분여 소요되었다.
▣ 중식 / 정승댁
원용복 마을에 위치한 정승댁이란 식당이다.
건물은 신축한지 세월이 흘러 아주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순두부백반을 시겼다.
찬의 수는 단촐하지만 맛이 있다.
이곳 경천면에서 생산된 콩으로 만들었다 한다.
요리쪽 메뉴도 맛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불명산 화암사
원용복 마을에서 화암사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예전에 비해 많이 확장되었으나 군데 군데 중앙선없는 1차로로 확장되지 못한 곳이 있어 교행에 양보가 필요하다.
물론 대형 버스의 진입도 가능하다.
화암사 들머리
사진상 보이는 우측의 탐방로를 따라 화암사에 오른 후, 나중 좌측에 보이는 도로를 따라 내려올 것이다.
화암사는 금차 3번째 찾는 곳이다.
입구에 전에 보지못한 안내표지판이 있어 읽어보고 간다.
화암사 창건 설화는 눈 곳에서 피는 꽃, 노랑 연꽃 복수초와 관련이 깊다. 창건 설화에 나오는 꽃이 연꽃이라는 일부 학자의 주장도 있지만 생태학적으로 보면 복수초가 맞는 듯하다. 북쪽 지방에서는 눈 사이에 피어난 꽃이라 하여 얼음새꽃, 눈새기꽃이라고도 부르며, 중국에서는 눈속에 피어 있는 연꽃이라 하여 설연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암사의 창건 설화에 등장한 복수초와 연화공주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불치병에 걸린 연화공주가 있었다. 공주의 병을 낫게하려 방방곡곡의 명의와 신비한 약재를 다 썼지만 병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불공을 드리고 돌아온 왕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날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하여 연화공주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이노라" 하며 조그마한 연꽃잎 하나를 던져주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왕은 산하들에게 연꽃을 찾아보라 명했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연꽃이 있을리 만무했다.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연꽃을 찾았다는 전갈이 왔다. 그 꽃은 다름 아닌 불명산 깊고 험한 바위 틈 사이에 핀 복수초였다. 왕은 이는 분명히 하늘이 내려준 '은혜의 꽃'이라고 생각하고 몇몇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게 했다. 며칠이 걸려 연꽃이 핀 산으로 올라간 신하들은 꽃을 꺾으려다 말고 누가 이 꽃을 키우는지 바위 뒤에 숨어 지켜보기로 했다. 이때 산 밑 연못 속에서 용 한마리가 나타나 연꽃에 물을 뿌려주고 다시 연못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이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모두 뒷걸음을 치자 신하 중 담력이 강한 사람이 꽃을 꺾어 궁으로 가져갔다. 꽃을 다려 먹은 연화공주는 말끔하게 병이 나았다. 왕은 부처님의 은덕을 깨닫고 연꽃이 있던 곳에 커다란 절을 짓고 절 이름을 '화암사'라
지었다. '화암사'란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는 뜻이다.
<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화암사와 화암사에 얽힌 설화
국내 유일의 하앙식 구조인 극락전, 우화루(보물 662호), 우화루와 극락전, 불명당과 적묵당이 동서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입구(口)자형 구성,
동종(극락전 안에 있음, 지방유형문화제 40호), 중창비(지방유형문화재 94호)등 눈여겨 볼 것.
초반 화암사로 오르는 길은 원래 있던 이 길 외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한 곳 더 만들었다.
주차장 주변 연화공주 정원을 만들면서 새로 만든 길이다.
이 길은 조금 상부의 육교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불명사 가는 길
계곡 건너편의 소로는 이곳 육교를 건너면 서로 만나게 된다.
주 계곡 우측의 다른 계곡이 암반을 이룬다.
저곳 철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갈림길이 있다.
철계단길.
오늘은 옛길을 따라 오른다.
위험하여 각별히 조심하란다.
철 계단 상부에서 서로 만난다.
화암사로 오르는 이 길이 좋아서 사진을 많이 올렸다.
입구 이정표에 주차장에서 화암사까지 약 15분 소요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천천히 오르다 보니 25분쯤 소요되었다.
불명산 들머리.
몇 년 전 이곳을 들머리로 하여 불명산에 오른적이 있다.
우화루.
이 건물은 극락전의 정문화 같은 성격의 누문형식인데 정면만을 누문형식으로 하고, 후면은 단층 건물로 한 반루각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워진 것으로 그 후에도 여러차례 수리 되었으나 크게 변형되지는 않은 것 같다. 정면 지층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3출목형식의 다포집 양식이며, 공포부재의 조각 솜씨 등으로 보아 조선초기 양식이 가미된 느낌이 든다. 내부는 남쪽 중앙에 고주 2개를 세워 대들보를 그 위에 얹고 한쪽으로 이어진 퇴량은 평주 위 공포에 얹게 하였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며 대들보와 고주 위에서는 화반 형식의 포작을 짜서 동자기둥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본전은 극락전이다.
화암사, 내사랑
안도현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음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화암사 극락전
화암사 극락전은 고려 충렬왕 23년(1297)에서 충렬왕 복위 9냔(1307)사이에 새롭게 지어졌다.
극락전은 죽의 이를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그 영혼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다. 화암사 극락전은 조선 세종7년(1425)에서 세종 22년(1440)사이에 고쳐 짓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선조 38년 (1605)에 다시 지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고쳐 짓기를 반복했으며, 2004년에도 해체.보수 작업을 진행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하앙식 구조로 된 건물이다. 하앙은 지붕의 하중을 분산하고자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서까래를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고 일반 지붕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늘여 뺀 건축 방식을 말한다. 이 구조는 중국 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목조 건축 연구에 귀종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건물의 편액은 각각의 글자를 나누어 걸었는데, 하앙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목재로 인해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설도있고, 편액 위에 그려진 불화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전각 안에는 불단을 화려하게 만들어 부처의 상을 모셨다. 불단 위에는 지붕 모형의 닫집(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 있고 나한도와 화조도 등의 벽화와 단청이 화사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아미타 삼존 불상을 중심으로 아미타후불도, 신중도, 현왕도 등이 그려져 있으며 화암사 동종아 놓여있다.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극락전 내부.
마주보면 우측 한켠에 동종이 있다.
조선 시대에 만든 것으로 전체 높이는 107cm, 밑지름은 70cm으로 조그만 종이다.
종 머리에는 용모양의 고리가 있고, 종 어깨위 가장자리에는 꽃잎무늬 장식이 줄지어 있다. 그 밑으로는 폭이 8cm인 간소한 꽃무늬를 둘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만들었는데 밤이면 저절로 종이 울려 스님과 신도를 깨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무기로 쓸 쇠붙이를 얻으려고 일본 헌병대가 몰려오자 종이 스스로 울려 스님들에게 미리 위험을 알렸고, 스님들이 종을 땅에 묻었다가 광북 후에 꺼냈기에 이 종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철영재
숭록대부 판중추원사 성달생(1376~1445)은 사육신 성삼문의 조부로서 세종때 전라관찰사를 거쳐간 후, 훗날 톼락해 가는 화암사를 중창 불사하였다.
이에 후대 화암사에서는 성달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철영재 뒷편의 매화나무와 아담한 부도?
화암사 우화루
화암사 우화르는 화암사의 정문에 해당하며, 극락전의 맞은 편에 위치한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타 광해군 3년(1611)에 다시 지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였다.
우화루는 높낮이가 다른 땅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앞에 기둥을 나란히 세워 대청마루를 놓았다. 땅의 높낮이가 달라 절 입구에서는 2층 누각으로 보이나 극락전 앞마당에서는 단층으로 보인다. 아래층에서는 축대 계단에 올라서야 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누각 바깥의 중앙에는 '불명산화암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누각 안쪽의 중앙에는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누각의 남쪽은 나무판자 사이로 창문이 나 있으나, 북쪽은 문이 없이 개방된 독특한 구조이다. 동쪽과 서쪽에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벽화인 한산습득도와 금강역사도가 그려져 있다. 누각의 마루는 마당과 비슷한 높이로 만들어졌으며, 누각의 북쪽이 마당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천년 사는 물고기
불명산 자락
화암사에 가면
우화루 연못 속에
천년을 살고 있는
물고기 한마리 있습니다.
세월에 눈알도 잃어버리고
비늘도 번뇌처럼 벗어 던져
가슴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지만
부처가 되겠다는 원(원) 하나 세우고
하루도 빠짐없이
대웅전 앞 마당을 쓸고 다녀서
지느러미조차 닳아 없어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속세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옷을 걸치고
대웅전 기둥 뒤에 숨어서 쳐다보던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물고기 뱃속으로 숨고 말았습니다.
박 용 현
시집, <천년 사는 물고기> 중에서
적묵당.
명부전.
화암사는 조그만 절이라 외형만 본다면 금새 둘러본 수 있다.
화장실이다.
고소 공포증이 있으면 볼 일을 못볼 수도 있다.
화암사 중창비
이 비석은 조선 세종 때 다시 세운 와암사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선조 5년(1572)에 세웠다.
이 절은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머문 곳이기도 하여 절터 동쪽에는 원효가 도를 닦은 원암대(원암대)가, 남쪽에는 의상이 도를 닦은 의상암(의상암)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비문에는 조선 초기에 관리로 있덙 성달생이 절을 세우고자 터를 찾다가, 백제시대에 화암사가 있던 이 자리가 산 좋고 물이 맑아 적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세종 7년(1425) 이곳에 다시 와암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현지 안내문에서>
중창비 뒷쪽의 바위에 오르면 화암사 입구쪽 첩첩산중이 조망된다.
역시 중창비 뒷쪽 봉우리에서 내려다 본 화암사.
화암사 이곳저곳 30분여 머물다 임도를 따라 주차장으로 간다.
초반 몇 백미터는 살짝 오르막을 따라 올라야 한다.
화암사에서 0.33km지점에 불명산 등산로가 있다.
불명산 까지는 1.32km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 길을 다니는 분은 별로 많지않기 때문에 길의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는다.
이후 고개를 넘어간다.
내려가는 길.
화암사에서 이곳 주차장까지 카카오 내비로 계산해 보니 2.1km거리이다.
화암사 들머리.
주차장 주변 연화공주 정원을 만들면서 신설한 탐방로로 입구 이정표에 화암사 0.8km로 표시되어 있다.
화암사 들머리쪽 연화공주 정원,
주변에 꽃무릇이지 싶다,
이곳 주차장에서 화암사로 오르는 길 0.8km, 천천히 25분, 화암사에서 약 30분 조금더, 임도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오는데 2.1km, 약 33분, 합하여 약 1시간 30분쯤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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