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김해 신산서원, 정경부인남평조씨묘, 합천 뇌룡정, 용연서원, 남명선생생가지, 남명선생 선조 묘지

정헌의 티스토리 2024. 11. 4. 17:35

 

■김해 신산서원과 증정경부인남평조씨묘, 합천 뇌룡정, 용암서원,남명선생생가지,  선조 묘지

 

조식(1501(연산군7) ~1572(선조5)

본관은 창녕, 호는 남명으로 생원 안습의 증손으로, 승문원 판교 언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아다.

선생의 생애를 보면 크게  4곳의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한양거주시대: 26세 이전, 기초학문 학습 및 과거 준비 시기. 삼가 토동 외가에서 태어나 6~6세까지 그기서 보내다가 부친이 과거에 급제해 한양으로 이사하여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다.

26세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에서 3년상을 치런뒤 서울로 가지않고 의령 자굴산 명경대 밑의 암자에 들어가 1년 남짓 글을 읽었다.

②산해정시대 : 30세~45세, 성리학에 침잠하던 시기, 45세 되던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삼가에서 삼년상을 치런후 김해로 가지않고 삼가에 정착하였다.

③뇌룡정시대 :48세~61세, 성리학을 자기화 하던 시기

④산천재시대 : 61세~72세, 남명학을 완성하던 시기

오늘은 산청선비대학 선진지 견학으로 산해정과 뇌룡정을 찾아 남명선생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탐방코스 (2024. 10. 29.)

김해(신산서원, 증 정경부인남평조시 묘지) - 합천 삼가 (뇌룡정, 용암서원, 남명선생 생가지) - 조언형 묘소

 

▷탐방후에

 

▣김해 신산서원

 

신산서원(산해정)에 왔다.

넓진 않지만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진덕문(進德門)

 

 

 

 

 

입구에 남명선생 시비가 있다.

산해정에 대를 심으며,(種竹山海亭)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

바람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 

싱상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신산서원은 여느 서원의 건물 배치가 같다.

진덕문을 들어서면 본 건물인 신산서원(산해정)과 동재인 환성재, 서재인 유위대가 있고. 서원 뒷편 지숙문을 통과하면 사당인 숭도사가 있다.

 

 

 

 

 

김해 산해정은 조선 전기 유학자인 남명 조식이 30세부터 45세까지 처가인 김해에 살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고 제자를 길렀던 곳이다.

남명 조식의 경(敬)에 바탕을 둔 정신 수양과 의(義)를 기반으로 한 실천 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산해정(山海亭)의 산해는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생각과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광해군1년(1609)에 강당과 사당을 갖춘 신산서원이 이곳에 창건되었으나, 고종8년(1871)에 서원 철폐 정책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890년에 산해정이 다시 세워졌고, 1999년에는 사당인 숭도사가 복원되었다. 숭도사에는 남명 조식의 위패와 더불어 그와 교류했던 송계 신계성의 위패도 모시고 있다.

산해정은 동부 경남의 유적 중 남명 조식과 관련한 유일한 유적이며, 그의 학문과 사상이 정립되던 시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1530년(중종25)남명 조식 선생께서 김해 대동면 주동리 원동헤 강학소로서 산해정을 세우다,

1578년(섡ㅎ12) 신산서원을 산해정 동쪽에 부사 하진보와 향인이 건원(建院)하다.

1608년(선조41)임진왜란 때 소실된 신산서원을 황세열, 허경윤 등이 산해정 옛터에  중건하다.

1609년(광해1) 신산서원이 사액되다

1616년 송계 신계성 선생이 신산서원 병향(幷享)아 윤허되어 병향하다.

1871년 (고종8) 신산서원 및 산해정이 훼철되다.

1890년 산해정을 중건하고 남명 선생의 채의(菜儀)를 봉행하다.

1921년 1946, 1971  산해정을 중수하다.

1992년 신산서원 복원 추진위원회, 산해정, 김해향고, 유도회 심해지부에서 복원을 동동 추진하기로 하다.

1999년 신산서원을 복원하고 남명조식선생, 송계 신계성 선생을 병향하다.

 

 

 

 

신산서원기

 

남명 조식(1501~1572)

조선 중종 때 성리학자,  호는 남명, 창녕인, 증 영의정,

이황, 이준경, 성수침, 성혼 등과 교류, 이황과는 동년배로서 서신 왕래를 하였다.

그는 주자학 뿐 아니라 성리학을 널리 배웠으며 천문, 지리, 병가, 의방 등과 노장학 까지 두루 배워 호방한 학풍을 이루었다.

1552년 전생서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중종, 명종, 선조의 삼조에서 잇달아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지냈다. 1556년 임금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와 만년에는 두류산 덕산동에서 학문과 강학에 힘썼다.

그는 경과 의를 평생의 큰 가르침으로 여겼으며, 실천궁행을 역설하였다, 커다란 학단을 이끈 유학자로 칭송받았다.

산청에 그의 서재 산천재가 보존되어 있으며, 산청 덕천서원, 김해에 신산서원, 삼가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저서에 남명집, 남명학기, 유편, 파한잡기, 심명사명, 혁대명, 계복당명, 패인명이 있다.

<현지 안내 팜플릿에서>

 

 

 

 

 

산해정중수상량문

 

신계성(1499~1562)

조선 선조 때 유학자, 호는 송계, 평산인, 조식 등과 교류하였다.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뜻을 두었고 평생을 은거하며 학문과 수양만으로 자냈으며, 중년에는 석계정사를 짓고 엄숙한 위의(威儀)로 인근의 추앙을 받았다.

敬으로 存心의 요체를 삼고 誠으로 근본을 삼았다. 신산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산해정 중수기

 

 

 

 

 

남명이 김해를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때는 1545년이다 님명은 어머니가 이 해에 돌아가시자 관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의 묘소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시묘살이를 했다. 그러니까 남명의 김해살이, 곧 산해정 시대는 어머니의 봉양을 위한 것이었다. 님명이 부모 봉양의 소임을 다하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남명은 이후 토동 뇌룡정과 덕산 산천재에서 강학을 이어갔다.

경남 김해는 남명의 30대와 40대 중반까지의 삶이 오롯이 배여 있는 곳이다. 산해정이란 이름의 뜻은 일반적으로 '산처럼 높게, 바다처럼 깊게'로 풀이한다, 방의 이름인 '계명실'은 주역이 이괘(離卦) 상(象)에  '밝음이 두 번 함에 이괘를 만드니, 대인이 이로써 밝음을 이어서(계명.繼明) 사방을 비춘다'라고 한 구절에서 따왔다. 해와 달의 밝음이 천하를 변화시키고 이루어낸다는 뜻이다.

현재 산해정과 신산서원의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에는 편액을 제외하고도 산해정과 관련된 현판이 9개나 있고, 신산서원과 관련된 현판도 3개나 된다. 남겨진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시기의 현판은 이장희(1900~1929)가 1924년 9월에 쓴 산해정중수기이다. ....이하 생략........

<현지답사 자료집에서>

산해정 시대를 어머니의 봉양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에 의문이 든다. 남명선생의 고향땅에도 형제간도, 전답도 있었을 것인데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살이를 한 것이 맞나? 모르겠다.

 

 

 

 

동재,

 

 

 

 

 

동재엔 환성재 편액을 달았고,

 

 

 

 

 

서재엔

 

 

 

 

 

유위재 편액을 달고 있다.

 

 

 

 

 

 

 

 

 

 

 

신산서원복원헌성비

헌성한 분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지숙문(祗肅門/토지의신 지,엄숙할 숙)

 

 

 

 

 

숭도사(崇道祠)

 

 

 

 

 

숭도사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신산서원 앞쪽,

 

 

 

 

 

신산서원은 저~기 희미하게 보아는 건물 윗쪽 어디쯤 평평한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산천재는 현재의 자리에 있었고, 신산서원은 저기 어디쯤에 있었는데 후에 산천재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김해 증정경부인남평조씨묘지

 

정경부인의 묘소는 초행이라면 찾아가기 쉽지 않다.

산해정에서 대동면 방향으로 나오면서 중앙고속도로 지선(김해에서 대동JC) 아래를 지나 조금 내려온 지점에서 급하게 주중리 방향으로 튼다. 노폭이 좁아 대형버스의 진입은 곤란하다.

원동길을 따라 하천(주중천)을 건너자 이내 만나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한다.

 

 

 

 

 

농로같은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저만큼 어느 집안의 제각같은 건물이 보인다.

 

 

 

 

 

위 제각?에서 우회전하여 제각앞을 지난다.

 

 

 

 

 

담 너머로 제각을 본다. 현판이 잘 보이지 않아 무슨 건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주소는 김해면 대동면 주중리 501-4 (대동면 주중길 60-40) 

혹 이 묘소를 찾아 갈려면 위 주소로 입력하면 된다.

 

 

 

 

 

이내 우측으로 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별다른 이정표가 없다.

 

 

 

 

이 길을 따라 오른다.  살짝 오르막 길이다. 

 

 

 

 

 

조금 오르면 일련의 묘지군이 나타난다.

 

 

 

 

 

아랫쪽 묘지는 창녕조씨네 묘역이다.

 

 

 

 

 

맨 윗쪽에 쌍봉의 묘지가 있다.

 

 

 

 

 

증 정부인 남평조씨 지 묘

 

좌측의 묘가 남명선생의 부인 묘이고, 우측의 묘는 딸의 묘라고 한다. 근데 왜 두 묘를 나란히 썼는지 의문스럽다.

남명선생의 첫재부인 남평조씨(1500~1568)는 김해의 재지사족인 충순위 조수(曺琇/옥돌수)의 딸로 23세(1522)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조차산)은 어려서(9살) 죽었다.모친 사망으로 삼년상을 처른 남명선생이 김해에서 토동으로 거철를 옮길 때도 김해에 홀로 지나다가 69세(1568년)로 세상을 떠났다.

현지 해설사의 말로는 남편조씨 집안은 소금 장사로 상당한 부자였다고 한다. 남명이 토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에도 상당한 생활비를 부담한 것으로 전한다. 

남명선생은 51세(1551) 때 토동에서 합천의 선비 송린의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이듬해 송씨부인에게서 아들 차석을 얻었다. 송씨부인은 열여덟 살에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고, 60세(1610)에 세상을 떠났다.

남명선생과 송씨부인의 묘소는 산청군 시천면 산천재 뒷편에 있다.

 

 

 

 

 

묘지앞에서 바라본 대동면 방향

과게에는 이 일대가 낙동강 하구의 바다였다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의 기상은 모르겠지만 조망이 좋아 그럴듯 하다.

 

 

 

▣미성 코다리 식당 중식

 

카카오 지도로 미성코다리를 검색하자 군산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강서구 대저동 인근일 것이다.

 

 

 

 

 

코다리찜으로 식사를 했다.

 

 

 

 

 

중식후 이웃한 이 집에서 커피도 한잔 했다.

 

 

 

 

 

▣합천 삼가 뇌룡정, 용암서원, 용암사, 남명선생 생가지,  선조 묘소

 

합천 삼가면 외토리 토동마을에 있는 뇌룡정, 용연서원에 왔다.

남명교육관이 신축되어 있다.

 

 

 

 

◐뇌룡정

 

먼저 뇌룡정으로 간다.

 

 

 

 

 

뇌룡정은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서울 및 김해에서 생활하다가 외토리로 돌아온 48세 무렵부터 61세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남명선생의 산해정 시대를 45세까지로 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가 지동마울에서 삼년상을 치렀으므로  47세까지는 어머님 시묘살이를 한 기간이 아닐까? 추측해 봄)

당시 세웠던 뇌룡사(雷龒舍)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며, 그 뒤 용암서원의 부속건물로 이건되었다가 용암서원이 훼철된 뒤 1883년에 허유, 정재규 등에 의해 원래 자리에 다시 중건된 것이다.(정확히 원래자리는 아니라 한다. 이곳 주변이 지금의 경지 정리된 농지 가운데와는 달리 강변으로 당시에는 소나무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뇌룡이라는 말은 장자에 보이는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 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이란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형태이다. 정면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대청 좌우편에 방 셋을 두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문은 닫혀 있고 협문은 개방되어 있으나 문의 폭이 좁다.

 

 

 

 

 

뇌룡정

정자의 축담과 협문 주변의 작은 구멍은 신명사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뇌룡정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 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

 

 

 

 

 

 

 

 

 

 

 

뇌룡정에서 바라본 외삼문.

현지의 안내도에 외삼문으로 표시하고 있으나, 이런 경우도 외삼문이라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문은 닫혀있다.

 

 

 

◐용암서원

 

용암서원으로 이동했다.

 

 

 

 

 

남명조식선생상

여전주부윤서(與全州府尹書)는 남명선생이 1554년(명종9)에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 하판리 옛집에 살면서 당시 종2품 전주부윤에 재직하고 있던 이윤경에게 쓴 편지(서)로 남명의 안빈낙도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남명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변화와 개혁을 실천하고 청렴결백  및 강직함과 함께 왜 실사구시와 문무겸전. 민본이 남명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지 표지석에서>

 

 

 

 

전주부윤에게 

식(植)도 이 세상에 머문 지 오래돼 쇠병이 매우 심합니다. 몇 년 전에 외 아들을 잃어 상심이 매우 컸는데, 늦게 차자를 얻었습니다. 지금은 삼가현에 있는 선친의 옛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지만, 살림이 빈한하여 매일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허물이 적고 걱정거리가 별로 없으니, 내 입장에서 공의 처지를 보면 오히려 내가 더 낫습니다.   ......(중략) ..... 띳집이 시냇가에 있어 부엌에서 일하는 아이가 때때로 송사리를 잡아오는데 다만 그물이 없어 못가에서 땀만 흘릴 뿐입니다. 명주실이 있어야 그물을 짜 고기를 잡지요, 잡곡밥도 제대로 못먹는데 오히려 고기 먹을 생각을 했으니, 분수에 넘치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현지 표지석에서>

 

 

 

 

을묘년(1555)에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을 한문과 한자로 병기하여 기록하였다.

 

 

 

 

 

외삼문으로 들어선다.

집의문(集義門) 편액을 달고있다.

 

 

 

 

 

합천 용암서원은 합천 삼가 인근의 유림이 남명 조식 선생을 존모하여 향사하면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남명 선생은 경과 의를 학문의 핵심으로 생각하고, 힘써 익혀 아는 것은 반드시 실천하기를 강조하였으며, 현실 정치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날카롭개 비판하는 눈을 가졌으며, 출처를 선비의 가장 큰 절개라고 생각하였던,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었다. 이 서원의 전신은 1576년에 노흠, 홍희창 등이 의논하여 삼가현의 서쪽 회현 아래 가회면 장대리에 세운 회산서원이다. 이 서원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에 향강 즉 황강 주변으로 옮겨 향천서원으로 복원되어 1605년 8월에 남명선생의 위판이 봉안되었다. 이 서원이 1609년에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2000년에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2007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다.  서원의 건물로는사당 숭도사(崇道祠)와 전사청(典祀廳), 강당 거경당(居敬堂), 동재 한사재(閑邪齋/간사할 사), 서재 존성재(存誠齋) 및 내외의 삼문으로 지숙문(紙肅門)과 집의문(集義門)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동재 한사재

 

 

 

 

 

서재 존성재

 

 

 

 

 

합천 용암서원 묘정비

 

 

 

 

 

이 비석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1812년에 그를 향사하던 용암서원의 묘정에 세워졌던 것이다. 1987년 합천댐 건설로 용암서원이 수몰되자 용주면 죽죽리 산26번지로 이전되었다가 용암서원이 복원됨으로 해서 201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용암서원의 전신은 1576년에 세워진 회산서원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에 향천서원이 세워졌더, 이 서원이 1609년에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 묘정비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명 선생의 신도비명 가운데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 부분을 제외한 본문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삼가 현감 오철상이 쓴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뒷편의 사당문은 닫혀있다.

 

 

 

 

 

 

 

 

 

 

 

 

 

 

 

 

 

 

 

 

 

 

 

거경당(居敬堂)

경이 기거하는 집으로 보면 되겠다.

 

 

 

 

 

용암서원을 둘러보고 강둑길을 따라 용연사로 간다.

 

 

 

 

◐용연사

 

용암서원 뒷쪽 들판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용연사,

 

 

 

 

 

강궤평 비석이 나란히 있다.

강궤평(降櫃坪/ 함궤)은 금궤가 내려온 들판이란 뜻이다.

 

 

 

 

 

합천 용연사는 고려말 중현대부 전의감정을 지낸 영모재 이온(? ~1379)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선조 13년(1580)에 지은 사당이다. 이온은 고려 출렬왕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이작신의 손자이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10년에 용호정을 지어 제사를 다시 지내기 시작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중정일(음력 3월에 정(丁)자가 들어가 있는 날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날짜)에 추모제를 지낸다. 용연사 입구에 강궤평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하늘이 이온의 효성에 감도아형 이곳 들판에 쌀이 나오는 금궤를 내려 준 것을 기리가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문이 닫혀 있어 담 너머로 본다.

 

 

 

 

 

감로문(感露門?)

 

용연사가 이온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건물이라면 이 건물은 이온의 조부 이작신(고려 충렬왕 때 문하시중을 지냄)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공민왕의 국구(國舅/시아비 구)이기도 한 이작신은 신돈(辛旽)의 문란함을 간하다가 함천 삼가현에 유배되었고, 이후 그 자손들이 대대로 삼가 토동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이작신을 입향조로 하는 인천이씨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세거지이다.

 

 

 

 

추원정

 

고려 문하시중 휘 작신(作臣)공은 인천이씨 시조의 8세손으로 충렬왕때 대과에 급제, 공민왕조에서는 관직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따님은 공민왕비가 되었다. 공께서 많은 치적에도 불구하고 반대파의 술수와 모략에 의해 이곳 지양(현 삼가)땅에 유배중 세상을 떠났다.장구한 세월이 지나면서 건물이 노후되어  추원정을 중건하였다.

 

 

 

 

◐남명조식선생 생가지

 

마을 안길을 따라 오른다.

입구에 남명조식선생생가지 이정표가 있어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을 안길을 따라 오르면 주자장이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 한 켠의 우물

 

 

 

 

 

남명선생 생가지로 가는 이정표가 있어 이 길을 따르면 된다.

 

 

 

 

 

이곳 토동마을은 남명 조식이 태어나 유아기를 보내고 40대 후반에 다시 돌아와서 30대에 산청 덕산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강학과 학문 수양에 힘썼던 곳이다. 이곳에는 남명의 생가지와 외가 관련 유적, 강학과 수양 공간인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鷄伏堂) 터, 그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한 용암서원 등이 있다.

원래 합천 삼가 판현(현 삼가면 하판리 지동)에서 태어나 성장한 남명의 아버지 조언형(조언형 1469~1526)은 10여리 떨어진 토동의 인천이씨 충순위 이국(李菊 1451~1519)의 딸과 결혼하였다, 남명은 1501년(연산군 7) 6월 26일 토동 외가에서 7남 4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다섯 살 까지 살다가, 과거시험에 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 후 23년간의 파란만장한 관직 생활을 뒤로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남명의 어머니는 한양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남명은 28세(1528)되던 해 6월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의령 자굴산에 들어가 2년간 공부하고, 이후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으로 거처를 옮겨 신어산 아래 산해정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545년(45세) 11월 어머니가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남명은 아버지 묘소 동쪽에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삼년상이 끝난 이듬해 다시 토동으로 돌아와 10여년을 보내게 된다.

 

 

 

 

 

남명선생의 외가댁을 근년에 복원했다.

 

48새(1548)에 이러러 남명은 토동마을에 계부당과 뇌룡사를 짓고 배우러 오는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때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수학한 인물로는 이광우, 이광곤, 문익성, 오건(吳健 1521~2574), 강익(姜翼 1523

~1567), 박제현, 박제인, 하응도, 하락, 하항, 조종도(조종도 1537~1597)등이 있다.

 

 

 

 

 

 

 

 

 

 

 

대문으로 들어선다.

 

이 건물은 남명선생의 외가댁으로 이곳에서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남명선생이 48세 되는 해에 김해에서 이곳 토동으로 와 뇌룡사를 짓고 생활한 곳은 이곳 외가댁이 아니라 마을 입구의 현재 절이 있는 인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간채의 두 헛간엔 지게와 새끼줄 등으로 연출했다.

 

 

 

 

 

사랑채

 

 

 

 

 

안채로 통하는 문

 

 

 

 

 

안채

 

 

 

 

 

안채

 

 

 

 

 

사랑채 옆의 저 건물은?

 

 

 

 

 

안채 우측 뒷편의 사당쪽으로 가본다.

 

 

 

 

 

사당

 

 

 

 

 

 

 

 

 

 

 

안채의 뒷편인 셈이다.

 

 

 

 

 

안채 서쪽편에 협문이 있고,

 

 

 

 

 

장독대?

 

 

 

 

 

협문밖의 풍경이다.

 

 

 

 

 

남명선생 생가지를 둘러보고 나니 시간적 여유가 있다.

 

 

 

 

▣조언형 및 숙부인 이씨 묘소

 

저만큼 하판리 지동마을 입구가 살짝 보인다.

좌측편으로 사진상 보이진 않지만 제법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 조금 못미쳐 이정표가 있다.

남명선생의 본가가 있는 이 동네엔 남명선생 부모를 비롯한 선조의 묘가 있다.

내비엔 지동마을경노회관으로 검색하면 될 듯.

참고로 앞뒤 이정표에 형(亨), 이(李)자를 잘 못 썼다.   (享: 누릴 향)

 

 

 

 

 

남명선생 부 조언형 묘소 가는 길

 

 

 

 

 

이내(도로변에서 1분여 거리) 병산재 앞을 지난다.

남명선생 집안과 관련있는 사당인 듯 싶다.

 

 

 

 

재실 본 건물

 

 

 

 

 

농로를 따라 오른다.

 

 

 

 

 

 

 

 

 

 

 

저만큼 우측 산 7~8부 능선에 묘지가 보인다.

 

 

 

 

 

들머리 도로변에서 8분여,  병산재에서 7분여 오르면 소형차량 회차지가 있다.

소형차량은 이곳까지 진입이 가능하다.

 

 

 

 

 

도로변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450m, 이곳에서 묘소까지는 150m,  합계는 도로변에서 600m 거리가 되는 셈이다.

근데 이곳 이정표에 남명선생 부친인 조언형 묘와 숙부인 이씨 묘소가 같은 방향이다.

후에 인솔자는 남명선생 어머니 인천이씨 묘소는 채실인 병산재에서 약 300m정도 거리에서 계곡 건너편에 있다고 한다.

병산재에서 약 300m 거리면 이 인근 어디쯤일 것 같다.

 

 

 

 

 

이후부터 차츰 약간의 경사길을 따라 오르게 되지만 심하지는 않다.

 

 

 

 

 

 

 

 

 

 

 

들머리 도로변에서 약 15분(600m),  아래 소형추차장에서 7~8분여 오르면 묘지에 도착한다.

 

 

 

 

 

남명선생 부친과 모친의묘소만 있는 줄 알았는데  6기 정도 있다.

 

 

 

 

 

맨 아랫쪽이 남명선생 부친 조언형(1469~1526)의 묘소이다.

 

남명선생이 쓴 부친의 묘갈명 <선고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묘갈명>에서 "아아! 여기가 내 선고(先考)의 묘이다. 삼대가 같은 산에 있는데, 고조부와 증조부에 대해서는 비갈(碑碣/비갈)에 기록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위 기록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인터넷 상에 또도는 온갖 기록에는 맨 아래 부친 조언형의 묘소를 기점으로 그 위에 '조부 - 증조부' 또는 '증조부 - 고조부'의 묘소라 잘못 전달하고 있다.

 

 

 

 

 

비석이 특이하다.

(어머니 인천이씨 부인의 묘소는 재실인 병산재에서 300m정도 올라가면 계곡 건너편에 있다.아래 소형 주차장에서 바로 계곡 건너편으로 추정해 본다)

 

 

 

 

옆의 다른 비에는 판교창산조공지묘(判校昌山曺公之墓)로 새겨져 있다.

 

합천 조언형 묘갈

묘갈은 죽은 사람의 이름, 가문의 내력, 행적, 출생, 사망 등을 돌에 새겨 그 업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이다. 합천 조언형  묘갈은 남명 조식의 아버지 조언형의 묘비이며 조선 중종 23년(1528) 10월에 세웠다. 조언형은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여 22년 동안 벼슬을 하였는데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를 지냈다.

이 비석은 만들어진 지 오래되었고 당시의 다른 비석에 비해 그 형태가 특이하다. 비석의 머리 부분과 비석의 몸 부분을 하나의 돌로 깎아 만들었고, 양쪽 옆면에 돌기둥을 대어 바람과 빗물로부터 비석을 보호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묘갈명은 남명 조식의 그의 아버지를 위해 직접 지은 것이다. 묘갈명의 친필은 한국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남명의 위상이 높음에도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친필은 소수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어 현제 '조언형 묘갈명 조식 친필'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아래에서 두번째 윗쪽의 묘소이다.

돌로 쌓은 경계 왼쪽에는 남면선생의 동생 조환(曺桓)의 손자 송재 조계명(曺繼明, 1568~1641)의 묘소가 있다.

 

 

 

 

남명선생 증조부 조안습(曺安習)의 묘소

 

 

 

 

 

처사 조군지묘(處士曺君之墓)

공휘안습..........

 

 

 

 

 

위 증조부 묘을 앞에서 바라봤을때 좌측편에 2개의 묘지가 있다.

그 중 오른쪽 묘이다.

 

 

 

 

 

松齋先生曺公之墓로 음각되어 있다.

남명선생의 동생  조환(曺桓/ 굳셀환)의 손자 송재 조계명(松齋  曺繼明 1568~1641)의 묘소이다.

 

 

 

 

 

맨 윗쪽의 묘소는 쌍봉으로 남명선생의 조부의 묘소이다.

조부의 묘가 증조부의 묘 윗쪽에 위치하여 역장으로 일컬어잔다.

 

 

 

 

 

 

 

 

 

 

 

남명선생의 조부 조영(曺永)의 묘소

조모는 지족당 조지서(知당堂 趙之瑞/상서로울 서)의 누이이다.

 

 

 

 

 

묘비는 남명의 숙부 조언경이 썼다고 한다.

00曺君孺人趙氏雙墓

 

 

 

 

 

 

 

 

 

 

맨 위쪽엔 비석이 있다.

昌寧曺公 左右衛保勝中郞將 (창녕조공 좌우위보승중랑장)

諱天吉諱殷父子遺德追慕碑  (휘천길휘은부자유덕추모비)

 

 

 

 

 

고려말에 포은(圃隱), 도은(陶隱) 두 선생께서 충절로 쓰러지는 나라를 버티셨고 조민수(曺敏修) 원사(元師)께서는 무력으로 이 태조를 견제하셨는데, 원사의 막하에서 넘어지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부자가 있었으니 나의 18대조 좌우위보승중랑장 휘 천길과 두 아드님 돈용교위 휘 은이 바로 그분들이다. 부귀와 영화를 취함이  한쪽 발을 드는 것보다 더 쉬었음에도 굳이 취하지 않고 목숨으로 나라에 보답한 것은 무장의 도리가 본디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충성의 의리는 문과 무가 다르지 않음에도 패장의 굴레로 후세의 외면을 당하는 것은 슬픈일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 나라와 운명을 함께한 무장들을 거억하지 못하게 한 것은 고려의 역사에서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태조께서 무덕으로 우리 선조 부자의 의기를 기리시고 그 자손을 음우하심에 손자 휘 안습께서 생원시에 올랐으며  문학유 가용의 따님을 취하여 장임랑 영을 낳으시고 영이 조집의 찬의 따님을 취하여 판교공 언형을낳으시니 문과 장원이시다. 판교공이 최정승 윤덕의 외종손인 이 충순위 국의 따님을 취하여 남명 노선생 형제를 낳으시고 문호가 국중에 크게 드러나니 이 모두 두분 선조께서 목숨바쳐 나라에 충성한  여음이 아니겠는가! 수백년동안 유덕을 드러내지 못한것은 시절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문 강성군 익점, 최 정열공 윤덕, 조 보덕 지서와 같은 명현들은 모두 선조 부자의 유덕을 기억하신 분들이다. 이에 명한다,

나라를 위해 죽음은 무장의 도리, 높은 의기는 천주에 드리웠고,

알아줌은 구하지 않았건만 신명은 어둠을 꿰뚫었네

끼치신 은택은 연면하여 백세의 종사를 예비했고

수만 후손이 절하며 우러르니 늠연한 충의의 기상 영원토록 전하리라.

 

 

 

 

 

좌청룡 우백호의 기상은 잘 모르겠는데 조망 하나는 멋지다.

한참 머므르다 되돌아 간다.

 

 

 

 

 

묘지에서 내려오는데 7~8분 

 

 

 

 

 

내려오는 데도 15분여 소요된다.

가고 오는데 약 30~40분 정도 소요된 셈이다.

 

 

 

지동마을은 둘러보지 못했다.

조상의 묘역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상당한 전답이 있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