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구례 운흥정,하연선생 유적비, 반야원&플라타너스, 지리산역사문화관,

정헌의 티스토리 2025. 4. 10. 23:50

 

■구례 운흥정,하황비, 반야원&플라타너스, 지리산역사문화관, 

 

벚꽃 허드러지게 핀 날 그동안 구례 일원 중 그동안 가보지 않을 곳을 찾아 하루 일정을 잡아봅니다.

도로변 만개한 벚꽃은 덤이 되었습니다.

 

 

▷일정

구례 운흥정, 하연선생 유적비(하황비) - 반야원& 카페 플라타너스 - 지리산역사문화관 - 지리산식당 중식

- [천개의 향나무 숲 - 문수사 - 곡전재 - 섬진강 대나무 숲길과 라플라타 카페 - (구례 농업기술센터 -구례 향교 외관)]

/  2025. 4. 6.

 

 

▷탐방후에

 

◐구례 운흥정, 하연선생 유적비

 

운흥정 옆에도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만 농로수준의 길을 조금 따라야 하므로, 차라리 건너편 하연선생 유적비(하황비)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차도변과 가까워 조금 편할 수 있습니다.

주차대수는 승용차 몇 대의 소형 주차장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아니기에 자리는 여유가 있습니다.

 

 

 

 

 

운흥정(雲興亭)

 

운흥정은 1926년 지역의 선비들이 문학 단체인 시사계(詩社契/모일사)를 조직하여 지역의 미풍양속과 시의 기풍을 발전시키기 위해 산동면 시상리와 외산리의 경계 지점인 운흥 용소(용건지) 위에 만든 정자이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정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운흥정 맞은 편에는 세종4년(1442) 하연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꿈에 용을 보았다는 일화를 새겨 둔 <하연비>가 있다.

내부에는 운흥정이 세원진 때를 알 수 있는 상량문과 이를 기록한 글인 기문과 시사계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제영문 등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앞쪽 용소쪽으로 여유 마당이 협소하여 가까이서 현판만 촬영하였습니다.

 

 

 

 

 

건물자체의 건축 연대는 오래되어 보이지 않지만 현판을 비롯한 여러 편액들이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히 걸려있습니다.

 

 

 

 

 

운흥정 옆엔 건너편 하연비로 연결되는 보행교를 놓았습니다.

 

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 안내표지판이 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조선의 운명을 새롭게 바꾸고 7년 朝.日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 장군은 410여년 전 1597년 4월1일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백의종군길을 나서 천안, 공주, 논산,익산, 함례, 임실, 남원, 구례, 순천을 거쳐 4월 27알 긴박하고 고단한 여정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로 도원수가 있는 순천부에 당도하였다.

27일간의 백의종군길 중 구례현 백의종군길은 이순신 장군의 호남에 대한 인식이 깊에 나타나 있다. 구례에서 남원으로 간 권율의 이동을 살피고 이원익 체찰사를 만나 국난극복의 길을 모색하였다. 또한 구례백성과 현감의 따뜻한 배려는 그에게 재기의 신념을 심어 주었고, 다시 한 번 애민의 마음으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확실한 신념을 다지게 하는 길이였다.

더불어 17일간 묵었던 순천부 백의종군길은 이순신이 처음으로 도원수와 교감한 장소이며, 남해안 일대의 정찰 및 지휘부와의 교신을 통해 전략을 재구성한 길이였다.

백의종군길이라는 역사의 현장에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백의종군 :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흰 옷 입고 군에 근무하는 것"이지만 관리가 벌을 받아 관직과 보직이 삭탈당한 상태로 충군(充軍)하는 것임.

<현지 안내문에서>

 

 

 

뒷편 공터에는 운흥정 시사원 방명비가 있고,

 

 

 

 

 

옆에 싱싱한 벚나무 한 그루 눈이 부십니다.

 

 

 

 

 

 

 

 

 

 

 

 

 

 

 

 

 

보행교 건너편에 보이는 하연선생 유적비로 갑니다.

 

 

 

 

 

운흥정 앞에 용소가 있습니다.

 

 

 

 

 

아랫쪽,

아직 농번기가 아닌데 물빛이 탁합니다.

 

 

 

 

 

다리를 건너면 경재 하연선생 비각이 있습니다.

 

 

 

 

 

경재 하연선생 비석

 

 

 

 

 

경재비각 편액을 달고있습니다.

 

 

 

 

 

구례 외산리 하연 유적비

 

이 비는 조선 순조11년(1811) '경재 하상공 석애시 이각비 敬齋 河相公 石崖詩 移刻碑'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비석이다.

하연 유적비가 있는 용소 계곡은 구례군 산동면 만복대를 중심으로 남서쪽에 펼쳐진 분지의 협곡에 있다. '용소'로 불리는 이 지역은 서시천 상류인 '산동분지'의 물목이 되는 곳이다.

이 비에는 조선시대 초기의 역사와 인물, 그리고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세종3년(1421)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경재 하연(敬齋 河演)이 남원부 중방현사에서 잠을 자는 사이 꿈에 나타난 노인과 잉어, 용에 관한 내용이다. 원래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 시를 비석에 옮겨 새기면서 그 내력과 원운시, 차운시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기록의 내용이 신이하며, 경관이 뛰어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교류 활동이 설화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 독특하다,

하연 유적비가 있는 곳은 경관과 인문 활동이 어우러진 문화경관 지구이다. 이 비는 조선 초기의 실존 인물과 관련된 기록이 후대로 이어진다는 점, 설화의 형태가 역사 기록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원운시와 차운시를 통해서 문학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학술적 가치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건너편 바위에  '용~   '글자가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 듯도 합니다.

 

문효공 경재 하연 선생 유적비

 

유설(遺說)

선생께서 전라감사로 계신던 1422년(세종1년) 가을에 이곳 산동에서 주무시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내 손자 다섯이 영감의 반찬거리로 잡혀와 명이 경각에 달렸으니 부디 살려 보내달라고 간청하기에 꿈을 깨에 아랫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정말로 잉어 다섯 마리를 잡아다 놓았다 함으로 즉시 풀어주라고 하명을 하셨든바 3일 후 밤 꿈에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면서 무슨 소망이 있느냐고 묻기에 용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드니 날이 새거든 못가로 나오라고 말하고는 그 노인이 사라졌다. 이튿날 못가에 나가셨드니 정말로 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으며 저 앞 암벽에 새겨진 용견죽하(龍見竹下)라는 글씨는 선생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이 옆의 비각은 서기 1811년에 南原松洞長?浦門中이신 13대손 하세흥, 하세탁?과 선생의 학덕을 숭모하는 분들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며, 믈 건너 운흥정도 이 고장 유림들과 선비들이 선행의 고사와 유적을 추앙하여 세운 것이다. 아래의 시구는 당시 선생께서 지으신 것으로 이 유설과 함께 용성지(현 남원시)에 수록되어 있다.

 

山洞之石落落   黃花白酒湛樂       ( 湛 즐길 담, 괼 담, 잠길 침,맑을 잠...)

山洞之水淵淵  正値九月風烟        ( 淵 못연,  値 값치, 烟 연기연?

 

有人風流磊落  吾於爾何獨樂        ( 磊 돌무더기 뢰(뇌),

有龍歡躍于淵  寒山迢處祥洇        ( 迢 멀 초, 洇잠길 인)

 

<현지 안내표지석의 내용이다.>

 

 

 

 

비각 쪽에서 바라본 운흥정

 

현지 안내표시판에 구례 외산리 하연 유적비로 표시된 이곳은 카카오 지도상에는 나타나지 않고, 이곳에서 200~300m쯤 떨어진 곳에 하황비로 표시된 곳이 있습니다. 주소는 산동면 외산라 23-3,

하황비가 하연선생 유적비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다른 곳인가 싶어 화항비 위치를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근데 인터넷 상에서 '화황비'를 검색해 보면 속시원히 검색되는 것이 없습니다.

  

 

 

 

 

카카오지도상  <하황비>를 찾아왔습니다.

 

 

 

 

 

하늘안터

하헌공 가족묘지가 있고,

 

 

 

 

 

카카오맵상 하황비 위치에는 이런 가족묘지가 있습니다.

 

 

 

 

 

운흥정으로 되돌아 갑니다.

 

 

 

 

 

 

 

 

 

 

 

약 30분여 운흥정과 하연선생 유적비, 하늘 안터 등을 둘러보고 반야원으로 이동합니다.

 

오늘 주 일정에 벚꽃구경은 주로 차창으로만 보게됩니다. 산동면 구만제와 지리산 치즈랜드 주변으로 엄청난 차량이 주차되어 있습니다.

차도변 벚꽃은 만개상태입니다. 

 

 

 

 

◐구례 반야원

 

구례 광의면에 위치한 반야원에 왔습니다.

화엄사 입구에서 가까운 곳으로 아름다운 정원과 플라타너스란 이름의 카페가 있는 곳입니다.

 

 

 

 

 

전남 제 21호 민간정원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반야원은 주차료나 입장료는 없으며, 억지로 카페를 거치도록 입구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주차장에서 반야원으로 들어서면 이내 플라타너스 카페가 있습니다.

 

 

 

 

 

앞쪽에 작은 연못에 많은 정성을 들였고 주변이 정원의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카페 이용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먼저 정원을 둘러 봅니다.

 

 

 

 

 

카페와 연못 주변이 잘 어울립니다.

 

 

 

 

 

 

 

 

 

 

 

연못가에 상당한 크기의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주변이 서울로 치면 명동거리인 셈입니다.

카페 이름도 이 나무에서 따왔나 봅니다.

 

 

 

 

 

반야원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상상하며 조성한 꿈이 있는 정원입니다.

만든이 박용하 김재왕

 

부부일것  같은데 성함으로 보면 아닌 듯도 싶고...........

 

 

 

 

 

카페앞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한바퀴 돌아보고, 그 다음에 안쪽 소로를 따라 이곳저곳 빠짐없이 둘러보기로 합니다.

 

 

 

 

 

 

 

 

 

 

 

 

 

 

 

 

 

카페 앞쪽에 이어 아랫쪽에 또 다른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윗쪽 연못,

 

 

 

 

 

두 연못 사이를 지나 중심부를 둘러봅니다.

 

 

 

 

 

이곳 플라타너스 아랫쪽이 야외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 될 듯 싶습니다.

연못가 쉴 수 있는 의자와 탁자가 많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원을 둘러보고 카페 내부로 들어갑니다.

 

 

 

 

 

 

 

 

 

 

 

이만한 정원에서 이정도 차값은 저렴한 편으로 생각해야 겠습니다.

 

 

 

 

 

한켠엔 특산물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카페 안쪽에서 별관의 미술관이 연결됩니다.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약 30분 소요하였습니다.

현 시간이 12시 45분, 점심시간 입니다.

 

 

 

 

◐지리산역사문화관

 

구례 광의면이  천은사, 노고단 입구라면 마산면은 화엄사의 입구라 할 수 있습니다.

화엄사입구 음식점 등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황전리에 지리산역사문화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주차료는 없으며 입장료는 어른 2,000원으로 경로는 무료입니다.

 

 

 

 

 

앞쪽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잔디광장을 가운데 두고 떨어진 ㄷ자형으로 3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진행하는 방향에서 볼 때 좌측의 건물 부터 둘러보도록 안내합니다.

3동의 건물이니만큼 크게 보아 3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1관의 주제는 강따라 입니다.

 

 

 

 

 

라떼의 풍경들

 

잘 살고 싶었다.

부지런히 살면 됬다.

아이들 키우고 러른들 모시느라

그저 열심히 살았던 이야기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라

앞집도 옆집도 그러했던 때

마을 전체가 사는 모습이 비슷했던  때

그래서 서로 이해가시 쉽고

나누기도 쉬웠던 때

말로만 들었던 '라떼'의 풍경

 

섬진강 나루터 뱃길 

 

 

 

 

 

 

 

 

 

 

 

 

 

 

 

 

 

 

 

 

 

 

 

 

 

 

 

 

 

 

 

 

 

 

 

2관으로 이동합니다.

 

 

 

 

 

지리산,

구례 역사길

 

 

 

 

 

임진왜란과 한말 호남의병,  동학농민운동과 구례 등등

 

 

 

 

 

지리산의 불교문화 유산

 

화엄사 : 각황전, 각황전 앞 석등, 사사자 삼층석탑, 화엄석경, 대웅전, 동 오층석탑, 서 오층석탑

천은사 : 금동불감,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및 대세지보살좌상,괘불탱,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 일주문 현판

연곡사 : 동 승탑, 북 승탑, 삼층석탑, 현각선사탑비

실상사 : 백장암 삼층석탑, 백장암 석등, 실상사 수철화상탑 및 탑비

칠불사 : 칠불사 아자방지, 사적비

벽송사 : 삼층석탑, 목장승

영원사 : 부도군, 목조보살좌상

대원사 : 다층석탑, 대원산 신중도

내원사(덕산사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 삼층석탑

볍계사 : 삼층석탑

쌍계사 : 진감선사탑비, 팔상전영산회상도, 육정정상탑전, 국사암아미타후불탱

 

 

 

 

 

삼국(대한민국, 중국, 일본)

 

우리나라의 이름난 5개 산을 뜻하는 오악(五岳/큰산 악)은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북한산)을 일컫는다. 예부터 명산에는 나라의 수호신이 거처한다고 믿어 성산(聖山)으로 여겨왔다. 통일신라 때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부악(현 팔공산)을 오악으로 삼사 제사를 지냈고, 고려 때에는 덕적산, 백악, 목멱산(현 남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백두산은 일찍부터 한민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온 종주산으로서 조선 영조 때 망덕산에 백두산단을 만들어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현지 내용입니다,>

 

 

 

 

남악과 노고할매

 

산신 신앙의 중심지, 지리산

지리산은 고대로부터 산악을 신성하게 생각하여 믿음을 바치는 산신 신앙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아 왔다. 통일신라 때는 삼산오악신 중 남악에 해당하여 나라에서 제사하며 국가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계속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삼각산, 송악산, 비백산과 함께 사악신으로 정해져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

 

노고단(길상봉)은 해발 1,507m로서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과 더불어 지리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이며, 옛날에 지리산 신령의 산신할머니 노고를 모시는 곳(단)이라 하여 노고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여졌다.

노고단이란 지명은 지리산 산신에 대한 성대한 제사의식이 지속적으로 거행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현재도 지리산의 수호여신 지리산 성모는 노고할매, 천왕할매, 마고할매, 마야부인 등으로 불리며 마을이나 개인의 대소사가 있을 떼에 치성의 대상이 되과 있다.

 

지리산 남악제

지리산 남악제는 남악인 지리산 산신을 모시는 제의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지리산 천왕봉, 고려시대에는 노고단, 조선시대에는 노고단 남쪽 현제의 광의면 온당리에서 제를 지냈다. 광복 후에는 화엄사 일주문 앞에서 제를 올렸으며,  1969년  화엄사 경내인 현 위치에 남악사를 새로 건립하였다.

매년 4월 20일 곡우절에 지리산 남악제례를 거행하며, 나라의 안녕과 번성을 기원한다.

 

 

 

 

 

왕시루봉 유적지

1945년 해방 이후 미국, 영국, 호주 등 각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1961년 여름부터 노고단 휴양촌의 연장으로 왕시루봉 일대에 다양한 형태의 교회와 주택 12채를 건축했다.

 

 

 

 

 

여순사건과 구례

1948.10.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남 여수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가 제주 4.3사건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군인 2,000여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항명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군인 180여명, 경찰 74명, 행방불명자 825명, 국가공우뭔 피해 3,474명, 민간인 피해 11,131명이 희생되었다. 그 과정에서 구례는 지리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좌우 대립의 현장이 되었다.

 

구례의 피해 상황

2008년 <진실화래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따르면, 구례군 일대에서 165명이 위법하게 살해당했으며 그 외 이 사건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9명이다.

 

 

 

 

 

제2관에 별도로 '문화예술을 품은 산' 관이 있습니다.

 

 

 

 

 

동.서편제

 

 

 

 

 

차와 다도

 

 

 

 

 

이곳은 체험시설인데 고장수리중

행글라이드를 타고 가상체험을 하는 곳인 듯, 어린이들이 매우 선호할 듯 싶습니다.

 

 

 

 

 

제3관 길따라

매천 황현실과 카페, 어린이 놀이시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과거 그리고 낙향

황현은 29세에 특별과거시험인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시험관은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낮추어버렸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남은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3년 뒤인 1886년 황현은 가족과 함께 광양에서 구례 만수동으로 이주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상경해 생원시에 응시하였다. 1등으로 입격한 그는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타난 정치적 부패와 혼란에 염증을 느껴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구례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현지 내용입니다.>

 

 

 

 

구안실

 

만수동(현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은 1886년부터 황현이 16년동안 생활하며 여러 책을 집필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 서재로 사용한 구안실과 삿갓 모양의 정자 일립정 등 초옥 몇 칸을 지어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근처의 샘가에 매화를 심고 매천(梅泉)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매천야록, 오하기문과 같은 황현의 대표적인 저술이 이 시기에 시작되거나 완성되었다. 그는 평생동안 2,000여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 중 40여 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만수동에서 지었다고 한다.

<현지 내용입니다>

 

 

 

 

매천 황현을 기리다.

 

용모는 범용했으나 기개는 우뚝하였고 시력은 흐리었으나 마음은 환히 밝았네. 문사를 숭항하여 끝내는 윤곡과 한 무리가 되었도다. / 김택역

.............

 

 

 

 

 

황현의 가계도

 

황희(세종대왕의 명재상) - 황진(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 -왕위(병자호란 때의 의병장) ----조부 황직(후손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임) - 부 황시묵(1천여 권의 책 구비하여 황헌의 교육에 헌신), 풍천노씨 - 황현(/시인, 역사학자, 우국지사)

 

 

 

 

 

구례의 명창과 명인

 

 

 

 

 

구례의 독립운동가

 

 

 

 

 

3관 건물에는 까페가 있습니다.

 

 

 

 

 

옆엔 어린이 놀이터?

꼭 자녀들과 동행하지 않더라도 잠시 둘러보고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을것 같습니다.

 

 

 

 

◐ 지리산식당 중식

 

화엄사 입구의 상가촌입니다.

 

지리산 역사문화관에 근무하는 분의 안내로 찾은 집으로 와서보니 초행은 아닌 곳입니다.

일요일이자 벚꽃철이기도 해 인근 화엄사 탐방객등으로 식당은 만원입니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 느긋하게 음식 맛을 느끼기에는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인근 다른 몇 집도 만원이다.

중식 후에는 천개의 향나무 정원겸 카페, 문수사 등을 둘러 볼 것입니다. 시간적 여유가 나면 섬진강 대나무 숲과 카페 라플라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