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오괴정, 만취정, 계림군 김균 사당, 노동환가옥, 광제정, 세심자연휴양림, 송림사와 학정리 마애불.
임실은 남원에서 전주로 오가는 도로를 간혹 이용하며, 오수면 일원, 임실치즈테마파크, 사선대, 옥정호붕어섬 테마파크 등 일부 잘 알려진 관광지는 다녀온적이 있지만 삼계면소재지는 생소한 곳입니다. 카카오지도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삼계면에 둘러볼 만한 몇 곳이 보입니다.
오늘의 주 목적지는 삼계면 일원이지만 점심 먹을 곳이 마땅찮아 오전 일정을 오수일원에서 보내고 중식후 삼계면의 오괴정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일정
오수 오괴정 - 만취정 - 계림군 김균 사당, 노동환가옥 - 광제정 - 세심자연휴양림 - 송림사와 학정리 석불.
/ 2025. 4. 20.
▷탐방후에
◐오괴정
전북 임실군 삼계면 삼은 2길 22-31.
차도변에서 카카오내비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오르면 이내 갈림길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직진을 하여 오르면 30~40m전방에 오괴정이 있는데(소형 주차장 있음) 어느 길인지 몰라 좌측길로 올랐더니 윗쪽에 2~3가구의 주택이 있는 조그만 마을로 안내합니다. 가옥은 많이 묵어 폐가반, 거주지 반으로 이곳에 살던 노인네들은 돌아가시고 후손들이 가끔씩 찾는 곳 같은 느낌입니다. 노폭이 좁아 차량 교행은 어려울 정도이며 마을 내 갈림길에서 겨우 회차 정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을로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오괴정이 내려오면서 보니 바로 옆에 있습니다.
주변 노거수 몇 그루가 있습니다.
오괴정 /전북특별자지도 문화유산자료
오괴정은 1545년 해주오씨 오양손이 지은 정자입니다.
1856년에 헐고 다시 지었으며 1922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괴는 정자 주변에 심은 다섯 그루의 괴목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오양손은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참봉을 지낸 인물입니다.
기묘사화(조선 중종14년(1519)) 당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는 모습을 보고, 남원 목기촌으로 은거하였다가 1521년에 삼은리로 들어왔습니다. 이후 이곳에 오괴정을 짓고 시와 술을 벗하였으며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누정에는 사제당 안처순의 글과 정자 건축에 대한 기록 등은 담은 8개의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오괴정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측면 주차장쪽에서 바라본 오괴정입니다.
◐만취정
삼계면 산수리 234번지.
오괴정에서 산수마을(만취정 입구의 마을)을 거쳐 후천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일반 2차선 도로로 시골의 농로길은 아닙니다.(만취정 진입로 등 일부 제외)
산수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내비의 안내를 따라 오르면 오괴정이 있습니다. 별도의 주차장은 없으며 오괴정 앞까지 승용차로 오를 수는 있지만 회자가 어려워 조금 아랫쪽 갈림길에 주차하고 조금 오르는 것이 편할 수 도 있습니다.
만취정(晩翠亭, 저물 만, 물총새 취 / 전북도 유형문화유산
만취정은 김위(金偉/훌륭할 위, 1532~1595)가 선조 5년(1572)경에 세운 정자입니다.
만취란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초목의 푸른빛을 뜻합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진 만취정의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입니다. 방과 마루, 툇마루가 있는 누정에는 정철, 기대승, 임제 등과 더불어 주고받았던 시문을 적은 나무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김위는 조선 개국공신 김균(다음 목적지인 후천마을에 계림군 김균 사당 있음)의 7대손으로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예조정랑에 오른 후 1562년 합천군수 등 아홉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1580년에 명나라 사신 서계신의 영위사(迎慰使, 조선시대에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임시 벼슬)로 활동하였는데 그때 서계신에게서 만취정이라는 글을 받아 걸었다고 합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문이 잠겨있어 우측으로 왔습니다.
지형상 연못이 있을 곳은 아니다 싶지만 방지가 있습니다.
만취정 중수기 비석과 옆에 만취정 중수헌성비석이 나란히 있습니다.
정문도 잠겨있고, 우측의 측문도 잠겨있습니다.
만취정을 앞에서 바라봤을때 좌측에 관리사인 듯한 건물이 있습니다.
입구 개 한마리가 심하게 짓어대고 있어 주인이 살고 있는 집인가 했는데 ....
이 건물은 과거 만취정 관리사로 이용되었을 듯 싶고, 옆에 사람이 거주하는 듯한 건물이 또 있습니다.
첨모재(瞻慕齋 / 볼 첨자인것 같은데 현판의 '첨'자와는 조금다르다. 현판의 글자는 인터넷 자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문짝이 아주 낡은 걸 보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은 듯 싶습니다.
첨모재 옆에 만취정 좌측의 측문이 있습니다.
다행히 문을 열쇠로 잠궈두지는 않았습니다.
만취정,
양지바른 곳이나 개인적으로 위치는 썩~ 좋다 싶은 생각은 들지않습니다.
옆의 관리사와는 달리 만취정 자체는 상당한 경사면을 평탄히 하여 터를 잡았습니다.
만취정을 둘러보고 후천리로 갑니다.
후천마을에는 계림군 김균사당과 노동환 가옥이 있습니다.
◐계림군 김균 사당
후천리에 왔습니다.
이곳엔 조선개국공신 계림군 김균(김균의 7대손이 만취정을 지은 김위입니다.)의 사당과 노동환 가옥이 있습니다.
.
먼저 계림군 김균의 사당을 둘러봅니다.
조선개국공신계림부원군재숙김공 부조묘정비(朝鮮開國功臣鷄林府院君齋肅金公不祧廟庭碑) / 庭碑의 庭자가 정원정자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강당.
경주김씨 계림군파는 신라 김알지를 시조로 삼고, 조선 개국공신 계림군 김균을 파조로 하는 경주 김씨의 한 분파입니다. 계림군파 최초의 족보인 1772년 임진보에 의하면 상계는 고려조 장군 김순옹으로, 파조 김균은 그의 후손으로 조선 개국공신 보국승록좌찬성에 이르고 계림군에 봉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사후 제숙공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슬하에 김맹성, 김중성, 김계성 3형제를 두었습니다. 묘는 경기도광주시 능평동에 있습니다.
계림군 부조묘는 임실군 삼계면 후천로 43에 있습니다. 계림군 김균의 8대손 취수당 김성진이 임실 삼계(당시 남원 아산방)에 입향마면서 이곳에 옮겨졌으나, 사당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1660년경 참판공 김시진이 전라감사 재임시절에 사당을 창건하였고, 1824년 중건하였습니다. 그리고 1996년 김진억 임실군수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위치백과에서 발췌>
취수당(醉睡堂)
우, 사우정문중건공적비
계림군사우
어느 자료를 보니 김균(1341~1398)은 고려 공민왕때 전법 판서를 지냈고, 조선 개국공신으로 중추원부사, 계림군에 봉해졌으며, 김득령은 김균의 4대손으로 한성판윤을 지냈다고 합니다
◐노동환 가옥
후천마을 맨 윗쪽(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노동환가옥이 있습니다.
집 입구의 윗쪽 바위에 화석(花石)이란 글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앞쪽 건물은 사랑채, 좌측 건물은 사당입니다.
노동환 가옥 盧東煥 家屋 /전북 문화유산자료
노동환 가옥은 조선 효종 1년(1650)에 오류처사 노엽(五柳處士 盧 燁)이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지방 양반가의 일반적인 가옥입니다.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에는 정양사(靜養舍), 북계정사(北溪靜舍)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이 가옥이 자리 잡은 터는 제비가 알을 품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맞은 편에 있는 원산(遠山)의 사두혈(뱀머리 혈)로 부터 제비집을 지키기 위해 원산 위에 강정(江亭)을 지어 혈을 누르고, 뱀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방앗공이가 뱀의 이빨을 찣도록 하였다는 말이 전합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근데 인터넷 상의 자료를 보면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위 안내문의 내용과 같이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의 옆면입니다.
담을 기준으로 담 밖으로 건물이 나와 앉았습니다.
겨울을 나기위해 비닐로 문을 막아두었습니다만 보기에 조금 흉해보입니다.
사랑채엔 장양사의 편액과.
북계정사(北溪靜舍)편액이 걸려있습니다.
대문이 닫혀있습니다만 살짝 밀어보니 문이 열립니다.
안채의 모습입니다.
세탁물이 널려있고,
주인 아주머님께 집을 좀 둘러봐도 좋으냐고 양해를 구하였더니, 집을 깨끗이 치우지 못한 민망함 때문인지 썩 내켜하지 않은 듯한 인상입니다.
안채 좌측 뒷편의 사당입니다.
앞 마당 뜰도 소박하고,
아담합니다.
노동환이 어떤 분이냐고 여쭈었더니 아저씨라고 합니다. 현 이집에 살고있는 분이 노동환씨 입니다.
그러니까 오류처사님이 지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일반적인 가옥으로 전북도유형문화재로 관리되고 있지, 노동환 선생 자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인 아닌듯 합니다.
노동환씨가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아 집만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 광제정
임실군 삼계면 세심리 252-1.
광제정에 왔습니다.
카카오 내비라면 강건너편 도로변 상에서 살짝 틀리게 안내를 종료하지만, 광제정의 위치는 알 수 있습니다.
광제정
오괴정이나 만취정에 비해 주변에 작은 강이 흘러서인지 분위기는 그중 제일 낫다 싶습니다.
광제정 (光齊亭) / 전북도 문화유산자료
광제정은 매동 양돈(梅堂 楊墩)이 지은 누정으로, 처음에는 삼계면 후천리에 건립하였으나 1871년 이곳 세심리로 옮겨서 지었습니다. 양돈은 1477년에 진사를 뽑는 시험에 함격했지만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자 남원부 아산방 봉현에 은거하였습니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당시 유림들의 사표가 되었던 그가 죽자 후대 사람들은 아계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며 그를 추모하였습니다.
광제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정자 한가운데에 환도실(環堵室/ 담 도, 사방에 마루를 놓고 그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을 두었습니다. 정자 안쪽에는 매당(梅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옆으로 김인후의 글과 기정진의 '광제정 중건기'가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광제정과 매당
마루
뒷편 툇마루,
광제정은 세심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세심자연휴양림
세심자연휴양림에 왔습니다.
세심자연휴양림은 죽계저수지 상부의 마을로 잇는 도로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곳 입구의 주차장에 주차후 1단지, 휴양관, 죽계저수지, 2단지, 임도 산책로를 따라 되돌아 오는 길을 염두에 둡니다,.
관리사무소
입장료를 받지는 않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산막을 이용하는 분들 관리 및 안내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계곡을 따라 난 도로를 따릅니다.
노폭은 중앙선 없는 일차선입니다만, 조금 상부의 다리를 건너면 2차선 도로로 넓어집니다.
칠신대와 그 옆으로 정자가 보입니다.
어떤 7분들의 상호간 신의를 표현한 것 같은데 내역을 안내하여 주었으면 더 좋을것 같습니다.
중간 계곡을 건너 1산막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보입니다.
나중에 저 길을 따라 내려올려고 마음 두었습니다만 임도산책로를 따르는 바람에 저곳으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보입니다.
좌측 건너편에 산막 1단지가 있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직진하면 안내도상 휴양관이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 도로를 따라 오르면 저수지 못미쳐 좌측편에 2단지가 있습니다.
직진을 하여 휴양관으로 이어갑니다.
죽계 저수지 둑이 상당히 높아보입니다.
안내도상 이곳이 휴양관인데.....
2단지에 있는 건물이 더 휴양관 같아 보입니다.
휴양관을 지나 돌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저수지 아랫쪽 도로상 2단지로의 갈림길이 있는 곳으로 연결됩니다.
먼저 죽계저수지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처음엔 전망대인가 했는데 배수와 관련된 곳인가 봅니다.
이곳으로의 진입은 할 수 없습니다.
되돌아 나와,
저수지 둑도 출입금지 안내표시가 있습니다만 살짝 건너 봅니다.
저수지가 아주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합니다.
저수지를 둘러보고 산막 2단지로 갑니다.
지초봉, 원통산 등산로 입구 표시가 있습니다. 저수지 둑이 있는 곳에서 올라도 될 것 같습니다.
이곳 원통산은 과거 언젠가 한번 올라봐야지 하면서도 원점회귀가 어려워 뒤로 미루다 보니 여지껏 올라보지 못했습니다.
2산막쪽으로 갑니다.
저수지 아래 도로변에서 2단지까지는 가까운 거리이고 심한 오르막길은 아닙니다.
산막으로 오르는 길
저곳 사진상 우측의 2층 건물이 차라리 휴양관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산막 2단지 앞에서 임도를 따라난 산책로를 걷기로 합니다.
계속 임도를 따르다 갈림길이 있으면 좌측으로, 좌측으로, 좌측으로 3번 진행하면 세심자연휴양림 입구로 내려서게 됩니다.
정자가 차라리 임도변에 있다면 더 좋을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중간 살짝 지그재그 오름길을 오르면 고개를 넘게 됩니다.
지그재그길 거리가 짧으므로 이곳만 제외하면 내내 편안한 길입니다.
차단봉이 있는 곳에 첫번째 갈림길이 있습니다.
이곳 첫번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직진으로는 원통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이정표가 있습니다.
두번째 갈림길에서도 좌측으로,
세번째 갈림길에서도 좌측으로 내려갑니다.
세심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지나온 길을 봅니다.
이 임도 탐방로는 크게 볼 것은 없지만 새로운 느낌으로 가볍게 걷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곳 세심자연휴양림 입구에서 휴양관, 죽계저수지, 산막 2단지를 거쳐 임도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1시간 5분여 소요되었습니다.
◐성림사와 학림리 석불
성림사에 왔습니다.
세심자연휴양림과 광제정 중간 어디쯤에서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성림사가 있는 학정리 마을은 산속에 오목하니 숨겨져 있는 마을로 아늑하니 은거하기에는 더럾이 좋은 곳 같습니다.
절은 대웅보전과 삼성각만 덩그러니 있어 여느 절과는 달리 조금은 휑한 느낌입니다.
대웅보전
내부
대웅보전 좌측 뒷편의 삼성각
성림사 앞쪽? 옆쪽?에 석불이 있습니다.
학정리석불 /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 87호
학정리석불은 고려시대의 석불로 석불의 크기는 높이 245cm, 너비 98.8cm, 두께 35.4cm이다. 당초 석불은 성문안마을 밭 가운에 하반신이 땅에 뭍혀있는 상태였으며, 대좌와 광배가 따로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좌기 있었던 학정리 55-2번지에 있는 경주김씨 묘역을 이장하고 주변 일대를 발굴한 후 성문사에 임시 봉안되어 있던 석불을 옮겨 세웠습니다.
석불의 법의는 두 어깨를 덮고 내려 가슴 부분에서 완만한 U자형을 이루는 통견의(通肩衣)이고, 의습(衣褶/주름 습)은 선이 희미하여 형식화된 듯합니다, 머리에는 큼직한 육발(肉髮)이 있고, 두 귀는 도톰한 양 볼 아래까지 쳐져 있으며 턱은 두텁게 생겼습니다. 가느다란 두 눈은 양쪽 끝이 약간 치켜올라갔으며, 입은 작은 편이나 미소를 띠었습니다. 왼손은 배 중앙을 가로 질러 오른손 관절부분에서 희미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둔중하고 풍만한 생김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풍만한 체구이지만 세련미 보다는 둔중한 느낌을 표현하고 있어서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을 보여 줍니다.
어느날 풀을 먹다가 달아난 소를 발견하고 화가 난 농부가 소에게 돌을 던졌으나, 잘못하여 석불의 코를 맞혀 석불의 코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농부는 그날부터 병을 앓다가 죽었는데, 주민들은 농부의 죽음을 석불이 내린 벌이라 생각하고, 석불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합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좌대 일부와 광배를 새로 만들었는데 확연히 차이가 있어 고풍스런 맛은 부족해졌습니다.
학정리 석불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합니다.
귀가길 여유가 있어 남원에서 국도를 따라 운봉으로 이동하여 서림공원을 둘러보고, 인월 시장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고 귀가하였습니다.
서림공원은 전날 답사한 지리산허브랜드 편에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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